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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41살 가을의 행복 - 책

활자 중독, 책읽기

2023.10.18 수술 다음날 저녁 병원 앞 공원에서 전자책 읽기 @ 아산병원

벌써 10년전, 2013년 여름에 늦깎이로 미국 유학을 가서 2년 동안 나름 생각보다 빡센 석사 과정을 하면서, 무엇보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읽고 싶은 책을 집중해서 읽을 시간이 너무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 학기 전에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 캐리어 무게 한도를 넘지 않을 정도의 책을 가득가득 캐리어에 채워갔고, 논문의 마지막 버전을 제출하자마자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듯 그 책들을 옆에 쌓아놓고 정신없이 읽었다.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난 정말 어린 시절부터 책을 꽤 좋아했고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책을 많이 좋아했다 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유별나게도 아직 캄캄한 새벽, 어둠 속에서 몰래 책을 읽다가 엄마에게 발견되는 순간을 즐겼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책을 읽는 자체를 좋아했던 건지, 엄마가 "아이고! 불켜놓고 읽어야지!!" 하면서 불을 켜주는 것을 즐겼던 건지 헷갈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다양한 형태의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오로지 와이파이로 전자책 다운로드만 가능한) 리디페이퍼와 종이책을 들고 글자와 문장을 최대한 천천히 씹으면서 읽는 것을 여전히 좋아한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무슨 책을 읽을까 이것저것 뒤져보는 것도 좋고, 믿고 듣는 팟캐스트의 작가님들이 추천해 주시는 책을 그냥 거의 정보없이 무조건 믿고 주문해서 읽어보는 그런 경험도 너무 좋다.

좀더 많이 어렸을 때는 독서가 일종의 성취 목적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었다. 무슨무슨 책을 나도 읽었고, 한 달 안에 몇 권의 책을 읽었고 얼마나 빨리 읽었고 등등 상대적인 기록 달성 같은 느낌으로 마구 책들을 읽어나갔던 것 같기도 하다. 참 2, 30대 때에는 뭘 그렇게 독서 같은 취미마저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에게 누군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본 적은 거의 없다. 그냥 나 혼자 아무도 시키지 않은 마음 속의 부담 비슷한 것으로 몰래 캐리했던 듯하다.) 만으로 해도 어쩔 수 없는 40대가 되면서 참 좋은 것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의 기준을 의식하지 않고 좀더 가능한 한 내가 원하는 속도와 기준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취미로 하는 운동이라든가, 어학공부, 독서 등에 있어서는 더더욱 성취 또는 속도에 대해서 나에게 무한정 너그러워지고 내가 원하는 속도대로 최대한 천천히 즐기면서 하기로 열심히 매순간 마음을 먹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특히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을 최대한 천천히 집중해서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하는데, 이렇게 독서를 하다 보면 책을 읽는 행위가 일종의 명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스트레스를 짧게 독서를 하는 시간만이라도 완전히 머릿속에서 비우고 책의 글자와 문장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면 명상을 할 때 머리를 맑게 비우는 느낌이 같이 채워지는 것이다. 

나에게 최근 몇 년 사이에 최대의 몰입을 이끌어낸 책이라고 한다면 아마 단연 '스토너'일 것이다. 한 단어 한 문장 천천히 짚으면서 읽어나가는 독서도 좋아하지만, 스토너는 처음의 약간 지루한 구간을 넘어서자마자 미친 듯한 몰입도로 빠져들어 읽어버렸었고,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않고 그냥 엉엉 울면서 끝낸 책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정말 완전 다른 공간에 다녀올 수 있었다. 최근에는 병원에서 입원해서 읽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좋았다. 최은영 작가는 (요즈음 인기가 많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꾸밈없고 담백한 문체로 묵직한 슬픔을 잘 그려내는 작가인데, 약간 이번의 책을 읽으면서는 '아 최은영 작가가 완전 정점에 다다랐구나'라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수술 직후에 병실에서 읽어서 더 무거웠나 하는 생각이 들어 퇴원 이후 집에서 다시 천천히 전체를 다시 읽었는데, 두 번째로 읽어도 역시 좋았다. 특히 수록된 단편들 중 '답신'은 정말 엄청났고, 다른 모든 단편들도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특히 여자도 알 수 없는 여자의 심리와 상대적인 남자의 양상들, 그리고 부조리들이 과장 없이 그렇지만 정말 자세하고 무겁게 묘사되어 있어 꽤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약간 가벼운 책은 가능한 한 종이책으로 읽으려고 하는 편이고, 좀 두껍고 무거운 책은 리디북스로 구입해서 리디페이퍼(전자책)로 읽는다. 종이책으로 구입해서 읽은 책은 좀 모아 뒀다가 열 권 정도가 넘으면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는데, 이렇게 책 나눔을 하면서 지인들과 각자의 책 취향도 간간이 나눌 수 있어 그것도 나름 삶의 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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