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치의 해방일지

by 글은늘

나는 음치+박치+가사치다. 3치라는 건 꽤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초등학생 때 여자아이들은 으레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선생님들의 분노를 유발했으며 바이올린 선생님께서는 보다 못해 그냥 멋대로 켜게 놔두셨다. 가사까지 못 외운다는 건 고등학생 때 알게 되었다. 전 국민을 노래하게 만들었던 TV 프로그램 '슈퍼스타 K'는 인기가 많았다. 그중 한 팀이 노래 '여우야'를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서정적인 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특히 후렴 부분에 꽂혀서 한동안 흥얼거리곤 했다. 한 번은 친구가 "너 웃기려고 그렇게 부르는 거야?" 하며 웃으며 물었다. '내가 노래하는 게 그렇게 웃긴가?'라는 생각에 시무룩했다. 알고 보니 가사가 틀렸다. 문제의 가사는 '이 밤 너에게 주고픈 노래 너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 부분이다. 나는 '이 밥 너에게 다 주고 싶어 너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인 줄 알았다. 노래 가사는 제목과 달리 여우가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으며 짝사랑을 밝고 가볍게 표현한 노래였다. '여우야'라는 제목 때문에 여우를 사랑하는 주인의 맘으로 열창했는데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이렇게 노래를 잘하지 못했지만 딱히 잘 부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노래를 정말 잘 부르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사귄 남자 친구는 친구도 많고 잘 노는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그를 따라 쾌활한 척 유쾌한 척하며 잘 노는 척을 했다. 밝고 명랑한 이미지로 무장하며 그의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어느 날은 함께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들으며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손사래를 치며 노래를 못한다고 했지만 빈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인지 이 기대를 묘하게 충족시키고 싶었고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서주경의 '당돌한 여자'가 떠올랐고 부르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이 노래 제목처럼 나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반주가 시작됐고 침을 꼴깍 삼켰다. 3,2,1! 화면 속 숫자가 사라지고 노래가 시작됐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첫 한마디를 통으로 날렸다. 어떻게 타이밍을 잡아 노래를 시작했지만 그 후의 상황은 암담했다. 나의 예상은 모조리 틀렸다. 후렴구 외에는 처음 보는 가사였으며 가창력에 기교를 더해 불러야 하는 곡임을 몰랐다. 당돌한 여자를 꽤나 당돌하지 못하게 불렀고 분위기는 싸해졌다. 줄곧 한음으로 염소 소리를 내며 불렀던 것 같다. 3분이 참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 번쯤은 살면서 노래를 부르는 때가 온다는 걸 그리고 그럴 때 아이유처럼 잘 부르지는 못해도 지금처럼 떨지는 말아야겠다는 걸.


그때부터 노래를 공부하듯이 연습했다. 두 귀에는 하얀색 이어폰을 꽂고 공책에 노란색 연필로 또박또박 가사를 옮겨 적었다. 휘황찬란한 조명은 없지만 푸른색 형광등을 밑에서 매일 방구석 노래방을 열었다. 듣다 못한 언니가 "너 데뷔하냐? 시끄러워!" 하며 비웃고 갔지만 꿋꿋이 분홍색 이불속에서 감정을 실어 불렀다. 그러다 나의 스승 J를 만났다. 같은 성당을 다니며 친해진 J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었다. 우리는 취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코인 노래방을 찾았다. 한동안은 탬버린을 손에 쥔 채 구경만 했다. 친구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리모컨을 들어 최신곡을 거침없이 예약했다. 노래방 18번 곡조차 없었기에 이런 모습마저 멋있어 보였다. 공부도 잘하고 잘 노는 이 친구는 내가 꿈꿨던 당돌한 여자였다. 어느 날 J가 부르는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렸다. 옆에서 소심하게 따라 부르니 너도 한번 불러보라며 친구가 마이크를 건넸다. 분명 작게 부를 때는 잘 부르는 것 같았는데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는 낯설고 이상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따라 흔들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 나갔다. 선생님을 꿈꾸는 친구라 그런지 음표를 화면에 띄우고 손뼉을 치며 음정과 박자를 맞춰주었다. 노래가 끝나고 형편없는 실력에 실망해서 풀이 죽었다. 그런데 친구가 이 곡은 내 목소리랑 잘 어울린다며 계속 부르라고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투입구에 넣었다. 옆에서 "하늘아 질러! 배에 힘줘!"라고 호통치는 호랑이 선생님 덕분에 목이 아닌 배로 노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칭찬은 삼치도 춤추게 한다 했던가 친구의 열띤 칭찬에 자신감이 붙었다. 이 노래만큼은 끝장내리라 결심했다. 바로 드라마 도깨비의 ost인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이다. 이 명곡을 부를 수 있게 도와준 친구 덕분에 노래방을 가는 게 설렌다.


가수가 되었다면 더 극적인 결말이겠지만 영어강사가 되었다. 서툴렀던 지난날이 있기에 영어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팝송을 가르칠 때 철판을 깔고 무슨 노래인지 알 수는 있도록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창피함도 견뎌야 했고 수련의 시간도 거쳐야 했다. 부끄럽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야 했다. 남들은 거리낌 없이 하는 일들을 나는 마음을 먹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속상했다. 물론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은 없다. 대신 누군가 나에게 마이크를 쥐여 줬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지 않을 수 있고, 노래방에 가서 탬버린을 만지작거리며 하품을 삼키는 대신 한 곡이라도 시원하게 부르고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을 땐 형체 없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물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면 그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은 전혀 다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삼치다. 그러나 바닷속을 거침없이 누비는 자유로운 삼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