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평의 선택

by 이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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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작품 설명


왕은 선출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 소설은 기원 신화를 다시 쓰지 않는다. 대신 권력과 생존, 그리고 출산이 어떻게 하나의 정치가 되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알평의 선택—혁거세, 유리구슬을 품에 안다〉는 신화로 봉인되어 온 ‘왕의 탄생’을 인간의 공포와 계산,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침묵의 구조 속으로 끌어내린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왕은 하늘의 뜻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왕은 치수와 집어, 제의와 공포를 독점한 한 인물의 선택에 의해 준비되고,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그 선택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서사는 한 촌장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그는 알평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 밤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독무덤으로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 작품에서 권력은 폭력 그 자체라기보다, 말할 수 없음과 질문할 수 없음으로 작동한다. 철검과 철촉, 청동 거울과 방울, 저수지와 물고기라는 물질적 성취는 알평의 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공동체 전체를 침묵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소설의 긴장은 ‘누가 왕이 되는가’가 아니라, ‘누가 살아남는가’에서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왕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열리고, 제사는 진행되며, 사람들은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제의는 신을 부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제거하고 서열을 확정하는 정치적 절차로 기능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이 ‘혁거세’와 그가 품은 유리구슬은 신성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가장 불안한 질문이다. 그것은 알인가, 구슬인가, 기억인가. 독자는 끝내 그 정체를 확정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이 세계에서 신화는 믿음이 아니라 결과이며, 왕의 탄생은 기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침묵 위에 세워진다.

이 작품은 신화를 해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신화가 어떻게 정치가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 정치가 어떻게 인간의 몸과 기억을 점유하는지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신화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이 소설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언제, 어떤 선택 앞에서 침묵하며 살아남고 있는가.


본문 발췌


12부족 회의


회의가 시작되려면 꽤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나는 무엇에 쫓기듯 알평謁平의 명령에 좇아 제일 먼저 회의장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알평이 고개 들어—회의장 말석을 찾아 휘적휘적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낼 자신이 없어져버렸다. 그가 나의 목숨 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벗어날 길은 없다.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알평이, 12부족의 왕을 선출하자는 회의에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갔다.

벌써 5년 전이던가. 저수지 공사가 한참이던 해, 이미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은 알평이었건만, 나와의 동침을 원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승낙한다고 해도 자연사할 때까지 내 목숨이 보장된다고 볼 수도 없었다. 이래도 저래도 그에게 선택당한 이상, 빠져나갈 길은 거의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가 낳은 지타祗沱와 호진虎珍의 아버지가 사라진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아니 그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지타와 호진의 아버지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목숨과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부족장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 촌락민의 안위와 평화가, 나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나는 알평과 하룻밤을 보냈다. 그녀와의 잠자리 머리맡에 놓여 있었던, 둥글고도 푸른빛을 발하는, 번들번들한 그 무엇이 아직도 생생하다. 5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그것이 유리 구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존재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알평과 관련된 일체의 것을 입을 올리는 것 또한 나의 목숨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촌장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제사 준비를 마칠 때까지, 나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백호는 보이지 않는다. 지타와 호진이 내게 뭐라 한 마디씩 했지만 나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아, 저기 아직 살아 있다. 지백호가 지타와 호진의 뒤에서, 두 눈을 껌뻑이며 알평의 제사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동 거울이 햇빛에 반사되며 여기저기 비추고 요란한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제사는 시작되었다.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의 넋은 하늘로 올라가 버린 듯, 모든 것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촌장들과 알평을 돕는 몇몇 촌락민들조차 모두가 흐느적거리는 연기처럼 가물가물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방울 소리는 더욱더 요란스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촌장들이 그 소리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것이 보이자, 나는, 나도 춤을 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울을 미친 듯이 흔들어 대는 알평의 거대한 몸집은 그들과 함께 돌아갔고, 그의 목구멍에서는 또 한번 괴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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