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작품설명
사라짐은 결말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적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공간과 신체, 형식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탐구한다.
이 단편은 사찰의 작은 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존재를 점, 선, 색, 프레임의 문제로 다시 사유하는 화자의 서술을 따른다.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지각과 공간 관계를 변화시키는 조건으로 다루어진다. 텍스트는 심리적 설명과 인물 중심 전개를 최소화하고, 신체가 안정적인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관찰한다. 밤마다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형상은 유령이나 기억이 아니라, 형식이 붕괴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로 제시된다. 질량은 선으로, 선은 점으로 환원되며 서사는 점차 볼륨과 일관성을 내려놓는다. 이 작품은 해소나 정서적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공간 점유가 무너진 이후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다. 감정보다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 단편은, 사라짐 자체를 탐구의 방법으로 삼는 동시대 실험소설의 한 사례로 위치할 수 있다.
본문 발췌
장례 이후, 격자 앞에서
백 년도 채 살지 못했던 내 어머니의 장례식은 너무나도 단출하게 끝나버렸다. 곡도 없이, 길동무도 없이, 변변한 수의 한 벌도 없이. 곧이어 그녀의 딸이었던 나도 그녀를 따라 떠났고, 나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의 얼굴은 너무나도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낮의 미몽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분명한 현실이며, 자신들의 생명은 매일매일 살아 움직이는 명분 있는 유기체라 믿고 살았다. 하지만, 200년도 흐르지 않아 그들도 자신들이 존재했던 공간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이었는지를 깨닫고 죽었다.
수미사(須彌寺) 동쪽 골방의 전등을 켜고 들어서자, 이상한 색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문턱을 넘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색으로 치자면 빨강, 노랑, 파랑이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대웅전의 단청이나 탱화 속에서도 현란하게 그 색을 드러내는 삼원색이니 이상할 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익히 보아왔던, 골방의 격자문 문살 배열과 색깔이 달라져 있는 것은 분명 이물감이었다. 화상(畵商)이었던 내 어머니가 갑작스레 삶을 접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2주 전에 죽었다.
43칸의 격자 중 4칸에만 채색이 되어 있었다. 300년을 넘게 드나들었던 수미사의 구석구석을 난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변화는 이내 눈에 뜨였다.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한 4칸은 한지와는 질감이 전혀 다른 종이였다. 누군가의 장난질임이 분명했다. 산사와 인접한 민가를 사들여 신도들의 숙소로 쓰는 곳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왼쪽 상단의 노란색 직사각, 오른쪽 하단의 붉은색 정사각과 그 밑 끝단의 붉은 직사각, 그리고 왼쪽 하단의 파란 막대. 장난질이라 해도 난 그것 때문에 좀 흥분했으며 잠시 내 어머니의 죽음을 잊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죽었으니까.
상하좌우로 뼈대가 모두 밀려나 버린 그는, 환한 빛만으로 내 시야로 날아왔다. 뼈대가 없어 그가 그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난, 분명 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수직 수평 뼈대들이 중앙을 비우며 좌우로 비껴 나가고, 위아래로 붙어버리는 순간을 마주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운데가 뻥 뚫린 그, 그는 이제 빛다발이 되어 열려진 격자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그것이 달빛이 아니고, 뼈대까지 다 잃어버린 그의 몸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는데, 나는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너무도 밝아서. 내 육신을 시시각각 마비시키는 그 빛 속에서 나는 천천히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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