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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홍 Sep 04. 2021

#영화치유 / 펭귄 블룸(2021) <상>

꽁꽁 감춰진 마음읽기 [1] : 깨져 버린 꿀병 같은

영화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다 [1]


내가 만약 그때 그 사람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면... 상상의 날개를 펼쳐 영화 속 인물이 되어본다.

동일시를 통해 심리 위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기에 영화와 전개 순서가 다를 수 있다.

글의 목적은 성찰치유이며,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임을 밝힌다.


왜 하필 나인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사고...

그것은 뉴스 속 세상에서나 벌어지는 '그들의 불행'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가장 행복한 순간, 썩은 난간에 기댈게 뭐람!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다고 했지 않은가. 나 역시 옥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난간이 거기 있으니까 평소처럼 기대었을 뿐인데...

그 잠깐의 무의식적인 행동 패턴이 내 인생을 20m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행복에 부풀어 가족과 떠난 태국 여행은 그렇게 곤두박질치며 끝났다.

매년 2천만 명이 여행한다는 태국. 어쩌면 그 4천만 개의 손이 만지고 기댔을지도 모르는 난간인데... 처음 난간이 세워진 이후 15년, 5475일 동안 멀쩡하던 난간이 왜 하필 그때 부러졌을까?

왜 하필 그게 나란 말인가? 왜 하필... 왜? 왜? 왜?

범해서 완벽했던 블룸 가족

간호사인 샘 블룸(나오미 왓츠)은 바다를 사랑했다. 어려서부터 바다는 샘의 놀이터였고, 서핑을 하며 파도를 즐겼다. 십 대 때 해변에서 남편 캠 블룸(앤드류 링컨)을 만나 10여 년의 결혼생활 동안 노아, 루번, 올리 세 아들을 낳았다. 샘의 놀이터였던 바다는 이제 5명의 블룸 가족이 건강하게 뛰노는 놀이터가 되었다.

평범했지만 행복했다. 그땐 몰랐다. 평범한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큰 아들 노아의 말처럼 '완벽한 블룸 가족'이었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것은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제발 꿈이라고 말해 줘!

옥상 추락사고 이후 샘은 브래지어 끈 위치에 해당되는 6번째 흉추(T6) 아래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혀의 미각도 잃었다. 길고 긴 병원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집에 돌아왔건만 샘에겐 모든 것이 낯설다.

그게 어떤 느낌이냐고?

하루 종일 끔찍한 통증과 씨름하며 간신히 잠들었는데, 악몽에 시달리다 통증 때문에 홀로 눈을 뜨는 새벽... 혼자서는 몸을 일으킬 수도, 휠체어 없인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신세가 한번 돼 보시라.

설마 꿈이겠지... 설마 거짓일 거야...

잠에서 깰 때마다 제발 꿈이기를! 평소 믿지도 않던 신께 간절히 기도해보지만 젠장! 온몸을 칼로 베는듯한 통증에 욕지거리가 먼저 터져 나온다. 그렇게 끔찍한 하루가 또 시작됐다.

그때 OO만 했더라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볼 것 못 볼 것 이미 다 본 사이라지만 밤새 소변줄로 새어 나온 오줌주머니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직 매력적인 여자이고 싶은데... 통나무처럼 감각이 죽어버린 두 다리에 남편이 바지를 입혀주는 걸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다. 고마움과 미안함보다 수치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남편의 짐 덩어리로 전락해버린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 없다.

바보같이 그때 한 번만 더 난간의 상태를 확인만 했어도... 하루에도 열두 번 그날로 돌아가 반복 재생한다.

- 그때 OO만 했더라면! 그때 OO만 안 했어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날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깊은 우울의 그림자가 가슴 밑바닥까지 점령해버린다.

내 속에 그 많던 웃음과 긍정 에너지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 엄마 맞니? 엄마가 뭐 이래...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세 아들을 깨워서 씻기고 밥 먹여 등교시킨다는 게 말처럼 간단치 않다. 한바탕 소동 끝에 책가방을 멘 어린 세 아들을 챙겨 바삐 출근하는 남편...

내가 한 일이라곤 차려 준 빵 접시 엎어버리기. 돕지는 못할 망정 깬다. 정말!

큰 아들 노아가 몸이 불편한 엄마 눈치를 살피며 점심은 밖에서 사 먹겠단다. 그렇잖아도 장남 콤플렉스에 속 깊은 아이라, 사고 이후 더욱 애어른이 돼버렸는데...

아이의 마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뒤늦게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아이를 태운 차는 떠나버리고... 또 다른 자책감에 휩싸인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런 말장난이 아니다

한밤중... 아이들이 낮에 먹은 생굴이 상했는지 배탈이 나 도움을 청했을 때, 그만 꾹꾹 억눌렀던 무언가가 폭발해버렸다.

"엄마! 도와줘요. 엄마!"

예전 같았으면 분명 이렇게 소리소리치며 나를 먼저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도 아는 거다. 그들이 목청껏 부른 건 불구의 몸이 된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

자식들이 아파도 달려갈 수 없는 엄마가 무슨 엄마란 말인가? 더 이상 엄마 노릇도 못 한다는 자괴감과 무기력감, 하루아침에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렸다는 무가치함으로 영혼이 무너져 내린다. 참았던 울음이 폭풍 오열로 터졌다.   

깨져버린 꿀병 같은...

아이들은 학교로 남편은 직장으로 떠나고 샘 홀로 남겨진 아침.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온다.

- 아침에 큰 파도가 해안가 바람을 만나 서핑하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휠체어 탄 몸으로 서핑이라니... 기상 캐스터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 마음이 비비 꼬인 샘은 공연히 식탁 위에 놓인 꿀병을 밀어서 떨어뜨린다. 달콤한 꿀이 가득 들어있던 꿀병은 바닥에 닿자마자 철퍼덕! 깨져버렸다.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린 꿀병... 한순간의 사고로 깨져 버린 샘의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꿀처럼 달콤하고 행복했던 가정도, 그날 추락과 함께 깨져버렸는지도...

어둠이여, 나를 삼켜버려라!

샘은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섬처럼 고립을 자처한다. 집 안에 커튼이란 커튼은 모두 늘어뜨려 빛을 가린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눈부신 햇살 이건만... 지금은 감추고 싶은 불구의 몸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못된 악당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을 덮어주고 지워주는 어둠이 편하다.

그렇게 나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가족, 사랑의 이름으로 가하는 폭력... 상처...

좋을 때는 물론이고, 힘들 때 가족만 한 의지처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허물없이 너무 가깝기에 가장 큰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생판 모르는 남에게서 상처 받을 일이 얼마나 있으랴?

끈끈한 핏줄로 연결되어 있기에 사랑의 이름으로! 자주, 지나치게 깊이 간섭하게 된다. 물론 이해한다. 남 같지 않으니까... 다 너 잘 되라는 그 마음... 뭐, 평소엔 나도 그러니까!

아플 땐... 별 뜻 없이 툭 던진 말도 날 선 칼처럼 날아든다.

은둔자처럼 커튼 뒤 어둠에 숨어 사는 샘에게 커튼을 열어젖히고,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한 사람은 역시나 친정 엄마다. 정기적으로 찾아와 집안 살림을 돌봐주고, 여동생을 데려와 억지로라도 샘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그래 인정! 친정 엄마의 그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덕분에 온 가족이 그 진득한 사랑에 빨대 꽂아 먹고사는 것인지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해변 공원 주차장이 꽉 차 버렸다. 늘 그렇지 뭐. 비어있는 공간이라고는...

갑자기 여동생이 장애인 확인증을 건네준다.

- 뭐야? 나더러 장애인 석에 주차하라고? 아냐! 아냐! 난 아직 장애인인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넌 병신이 아니야! 내 사촌 중에도 불구가 있었다..."

를 위한답시고 친정 엄마가 무심코 던진 마디... '병신'이란 단어가 친정엄마의 의도와 정반대의 파장으로 칼이 되어 가슴에 꽂힌다.

- 아,  어련하시겠어요! 꼭 그렇게 확인 사살하셔야 직성이 풀리시죠? 병신! 병신! (병신 × 100) 랩송 무한반복으로 양쪽 싸대기를 얻어터진 듯 정신이 번쩍 드네요!  

내 불행과 상관없이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브론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괜찮아?"라고 묻는다. 물론 보시다시피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라고 억지웃음으로 대답한다. 가장 친했던 친구였건만 이런 만남조차 불편해지다니...

오랜만에 바깥 소식을 전해준다. 삐딱해진 내 마음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내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은 삐그덕 거림 하나 없이 바쁘게 잘 돌아가고 있고, 나의 불행과 상관없이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온갖 행사와 축제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다는 것!

평소와 똑같이 다들 잘 살고 있다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인물이라고 세상이 멈추기라도 바랐던가... 오히려 내게 관심을 꺼준 것이 얼마나 편하고 고마운지... 그런데 왜 이리 서러울까?

굿 바이! 평범했던 나의 일상이여...

집에 돌아와 평소 애정 하던 벽에 걸린 사진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건강한 두 다리로 바닷가를 달리고, 서핑하던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추억의 사진들... 창 밖 저 멀리 보이는 언덕 위 등대에 오르는 걸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때 남편이 찍어 준 사진은 제일 아끼는 사진 중 하나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이 되어버렸다. 이 몸으로 저 높은 언덕을 오를 일은 불가능할 테니...

사진 속에서 건강한 다리를 뽐내며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들릴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저 여자가 정녕 나란 말인가? 낯설다! 사진 속의 내가 휠체어를 탄 나를 보고 행복하게... 비웃는다!!

저 여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갑자기 사진들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내 몸의 불구 됨을 빼도 박도 못하게 확인시켜주는 잔인한 증거물일 뿐!

 사진들을 미친 듯이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 안녕! 서핑을 즐기던 건강했던 나의 두 다리여... 안녕! 다시는 갈 수 없게 된 등대여... 안녕! 평범했던 나의 일상이여... 모두 모두 안녕!

그렇게 나의 과거와 굿바이 했다.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깨져서 엉망이 될 만큼 격렬한 이별 인사였다. 그리고... 이제 잘난 세상과 이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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