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전시회를 다녀오다
4월에 호암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라니, 전시도 전시지만 이맘 때면 장관을 이루는 미술관 앞 호수 벚꽃을 생각하면 전시회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리움 회원을 위한 멤버스 데이에 예약을 하고 이른 아침 용인으로 향했다. 차가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데…불길한 예감이 설레는 마음을 누르기 시작했다. 서울에도 핀 벚꽃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나리꽃 조차 보이지 않았다. 미술관 근처 나무들은 겨울인 양 시미치를 뚝 떼며 모노톤으로 서 있었다. 산 속이라 해도 4월 7일이었는데 … 아쉬움이 컸지만 본게임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서둘러 입장을 했다.
전시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부는 ‘진경에 거닐다’를 주제로 겸재 정선이 그렸던 금강산과 한양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들이, 2부는 ‘문인화가의 이상’이라는 주제로 겸재 정선의 여러가지 화풍과 활동, 정선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호암미술관, 리움미술관과 함께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의 작품들이 모여 총 140 종이라고 했다. 역대급 전시였다.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중국의 화풍을 답습하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감동적으로 표현했고 이것이 진경산수 화풍으로 발전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가 출신이지만 양반의 체통이나 명예보다 그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겨레의 상징과도 같았던 금강산과 화가 자신이 살았던 인왕산 근처, 한양을 주로 그렸다.
첫 전시실에 들어가자 양쪽으로 열리는 대문처럼 나란히 걸려있는 두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왼쪽에는 인왕제색도가, 오른쪽에는 금강전도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애피타이저 없이 끝내주는 메인 요리를 첫술부터 먹여주는 코스라니. 전시회의 자신감과 대담함이 느껴져서 더욱 흥미가 당겼다.
개인적으로 겸재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시점이었다. 드론이 당연히 없던 시대에 항공샷으로 내려다 본 듯한 금강산의 일만 이천개 봉우리들을 화가는 어떻게 그릴 수 있었을까. 잉카제국의 마추픽추가 고산지대에 섬세한 석조건축물들을 지은 수수께끼처럼, 하늘을 날 수 없었던 화가가 부감으로 어떻게 금강산의 전경을 담을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금강전도는 국보로 지정될 만큼 가치가 뛰어나다. 한눈에 들어오는 금강산의 전경은 장엄하고 단순한 듯 하지만 구조적으로 완성도가 높다. 지금의 눈으로 감상해도 세련미가 있다. 오른쪽에는 뽀죡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암석 봉우리들을 위치시키고 왼쪽에는 부드러운 터치의 검은 숲과 흙산을 배치시켰는데 전체는 하나의 원을 이루는 구도다. 좌우로 나뉘는 태극 문양이라고도 한다. 그림의 아래부분과 가운데, 위를 들여다보면 만폭동 너럭바위, 만폭동 계곡, 무지개 다리, 비로봉 등의 금강산 명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도 금강산을 힘들게 여행하는 것보다 겸재의 작품을 머리맡에 두고 감상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했으니 명작을 알아보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뛰어넘는다.
겸재는 피카소에 견줄만큼 장수를 한 화가다.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형편이 어려웠으나 점차 그림값이 나가는 화가로 인정을 받아 노년에는 풍족하게 살았다. 그림실력 뿐 아니라 인생살이도 피카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4세로 타계할때까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노년에 완성했다. 인왕제색도는 화가의 나이 76세에 그린 역작이다. 대가가 평생을 갈고 닦은 만큼 단순함과 원숙미가 돋보인다. 진경산수화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이 그림은 화가가 살던 근처인 인왕산 전경을 담았는데 붓질이 힘차고 대담하여 웅장하고 호쾌한 인상을 준다.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날씨가 막 개기 시작한 시점인데, 빗물에 젖은 암벽은 진한 먹으로, 안개는 산 아래 부분에 여백으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금강전도는 59세에 그린 그림인데 30대에 방문했던 금강산의 전경을 가슴에 품고 20여년이 지난 후에 기억과 감동을 되살려 그렸다고 한다. 예술가로서 천재적 기억력과 감동, 영감을 간직하는 방법이 감탄스럽다. 또한 59세에 그린 금강전도 후에 겸재다운 필치를 완성했다고 하니 끝까지 붓을 놓치 않은 대기만성형 천재 화가라고 볼 수도 있겠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화가 자신과 일행이 그림 한켠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인 이병연은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는데 겸재는 그와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시는 이병연, 그림은 겸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났던 두 예술가는 젊어서는 금강산 여행을 함께 했고 세상을 뜰 때까지 우정을 이어나갔다. 한번은 겸재가 65세에 양천현령(지금의 가양동)으로 발령이 나며 헤어져 지내게 되었다. 그때는 차가 없었으니 벗을 보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었을 터. 섭섭했던 이병연은 친구에게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제안을 한다. 이병연의 시가 겸재에게 도착하면 겸재는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친구에게 보냈다. 두사람의 시와 그림들은 나중에 경교명승첩이라는 화첩으로 만들어진다.
내 시와 자네 그림 바꿔봄세
경중을 어이 값 매기는 사이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이병연)
말이 통하고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친구가 쓴 시 한편을, 달리는 말을 통해 전하면 다른 친구가 그린 그림이 다시 친구를 향해 달려오는 것. 순수하고 아름답다. 예술적이면서 낭만적이다. 겸재조차 이 화첩을 얼마나 아꼈던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인장까지 남겼다고 한다. 이병연은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리던 해, 81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글을 쓰는 이순간에도 벗을 떠나보내며 겸재가 느꼈던 슬픔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조금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 전시를 보고 나는 우정과 대기만성이라는 키워드를 얻어 가고자 한다. 나와 뜻이 통하는 친구와 되도록 많은 시간을, 창의적으로 보낼 것. 그리고 아직 한창인 내 인생을 두고 느긋한 마음으로 정진해 나갈 것. 그리하여 65세에 벼슬을 하고 76세에 걸작을 그린 화가처럼 대기만성형 인간이 될 것. 호암미술관 앞의 벚꽃나무들에게 일주일 내로 다시 올 것을 예고하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