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시즌이 돌아왔다
나는 벚꽃 헌터다. 봄이 되면 벚꽃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아니 떠돌고만 싶은 헌터. 겨울이 끝날 즈음이면 벚꽃 볼 생각에 어느새 달뜬 마음이 된다. 아파트 앞 개나리가 노란색 아우라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나는 벚꽃의 개화시기를 체크하고 만개 시점을 정조준한다. 개화시기는 해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그 환한 정점의 벚꽃을 포획해 내 눈앞에 놓으려면 실시간으로 개화시기를 추적해야한다.
내가 벚꽃 헌터가 된 시점은 대략 이십 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지리산 여행길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도로에 떨어진 벚꽃잎을 보았다. 마치 곰 사냥군이 길을 가다가 방금전까지 곰이 있었던 흔적을 발견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나뭇가지에는 초록초록한 새 잎들이 기세좋게 쑥쑥 올라오고 있었지만 눈을 길바닥에서 뗄 수가 없었다. 떨어진 벚꽃잎이 분홍 카펫처럼 펼쳐있었던 것. 걔중에는 밟힌 후에 형태가 뭉개져 분홍 진액으로 변하다시피한 것도 있었고 떨어진 지 얼마 안돼 온전한 모양을 갖춘 싱싱한 벚꽃도 있었다. 지난 주였을까, 가지 위에 만개하여 예쁜 자태를 뽐내던 벚꽃의 시간은. 나는 과거에 핀 벚꽃에 닿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 후부터 나는 그 해의 벚꽃을 놓치지 않는 벚꽃 헌터가 되었다.
헌터의 꿈을 부추겼던 영화도 있다. 러브레터를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 도쿄의 무사시 대학에 진학한 홋카이도 출신의 여자 주인공. 그녀가 고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선배를 따라 대학 시절을 보내는 이야기였는데 실은 벚꽃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걷는 거리, 그녀가 이사간 새집, 어디에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공중으로 흩뿌리는 벚꽃 비를 슬로우모션으로 맞는 그녀의 모습은 내게 겪고 싶은 낭만이었다.
벚꽃을 보러 됴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쩌나 우리 집은 벚꽃 명소로 불리는 양재천에 위치해 있는 것을. 주인공이 살짝 다를 뿐이지 벚꽃은 4월 이야기에 나오는 그 예쁜 벚꽃이었다. 나는 인파가 몰리는 낮 시간을 피해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에 오롯이 산책을 한다. 개장 전 놀이공원에 혼자 들어온 느낌이랄까. 주민의 특혜를 누리며 걷다 들어오면 집앞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소란스러워져도 ‘많이들 보세요’ 아량이 생긴다. 가진자의 여유가 생긴다.
그래도 벚꽃 욕심은 끝이 없다. 집앞은 집앞이고 다른 벚꽃도 보고 싶다. 일년에 한번, 절정의 일주일이 지나면 일년을 또 기다려야하니까. 벚꽃의 개별 꽃송이는 작고 색도 뚜렷하지 않다. 장미와 비교해 본다면 벚꽃은 개인기가 거의 없는 꽃이다. 그런데 모여있으면 인상이 달라진다. 환하고 은은한 분홍빛 덩어리가 구름처럼 나무 위에 얹혀있다. 벚꽃 나무 아래에 서면 환한 조명을 받을 수 있다.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뿌리는 꽃 비를 맞게 되면 또 어떤가.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이 들어서 황송한 마음까지 든다. 나는 점심시간도 놓치지 않고 활용했다. 회사에서 가까운 남산의 벚꽃을 보러 간다. 혼자 걷다가 이 좋은 걸 나혼자 보네, 싶으면 괜히 엄마에게,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여기 남산이야, 벚꽃이 많이 피었네, 어? 무슨 일? 없어~ 무슨일은…”하면서.
용인 호암미술관 주변도 벚꽃이 아름답다. 호수를 둘러싼 산책길에 벚꽃이 피어있다. 비교적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적하니 분위기가 좋다. 올라오는 길에 에버랜드가 있다. 지나갈 때면 들리는 유쾌한 소음이 언제나 즐거운 곳. 꿈과 희망의 에버랜드. 추락을 앞둔 고점의 롤러코스터에서 지르는 비명, 바이킹이 위로 아래로 움직일 때의 함성…에버랜드에도 벚꽃은 많이 피었겠지만 그 안에선 배경으로 기능할 것이다.
때로 벚꽃 헌팅에 실패도 따랐다. 부산 출장 길에 섬진강을 들러 벚꽃을 보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면서 드는 불길한 느낌.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길가에 늘어선 벚꽃 가로수에 꽃이 점점 줄어들었던 것이다. 남원, 화개..그 어디에도 벚꽃은 없었다. 섬진강에도 축제가 끝났음을 알리는 흔적만이 있었다. 간발의 차로 타이밍을 놓친 자의 허망함이란… 헛웃음이 났다. 우리 뭐 한거야? 일행과 서로를 바라봤다. 짧은 여행을 마지고 집에 돌아왔을때 아직 남아있는 양재천의 벚꽃을 발견했다. 나 뭐 한거야?
벚꽃 터널 아래 사람들이 꽃을 대하는 마음이 사랑스럽다. 모두가 벚꽃 헌터다. 평소엔 등산복을 입고 뉴스만 들으며 산책하던 무표정의 아저씨도 벚꽃 앞에서는 휴대폰을 연다. 조심스런 손길로 벚꽃에 포커스를 맞춘다. 똑 닮은 모녀는 웃으며 함께 셀카를 찍는다. 가장 열심인 건 연인들이다. 몸을 낮추고 카메라를 위로 향한다. 연사를 찍는다. 저 정도 정성이면 사진 속 여자친구의 비율은 걸그룹 센터 빰 칠 것이다. 양재천 다리를 건너다가 벚꽃을 발견한 사람은 한 가운데 멈춰 원경을 찍는다. 벚꽃과 하늘과 아파트 빌딩을 카메라에 모두 담는다. 저 사진은 포획한 사냥감처럼 그날의 페이스북에 올라갈 것이다.
한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꽃이, 그중에서도 벚꽃이 내게 온 것에 감사하다. 아름다운 것들에 예민한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 작은 감탄을 날마다 이어가며 살고 싶다. 그것이 벚꽃 헌터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