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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엄마를 라이딩합니다

도착지는 학원이 아니라 병원

by 훈훈

저녁 9시 이후 대치동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명동처럼 길이 막힌다. 귀국하는 사장님을 기다리며 공항에 도열한 직원들처럼 차들이 줄을 지어 대기한다. 핀셋처럼 자기 아이들을 콕콕 집어 픽업하는 엄마들. 늦은 밤 그들의 수고에 빵빵거릴 수가 없어 나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뿐이다. 오늘의 마지막 라이딩 스케줄일까? 염려와 오지랖의 중간 어디쯤 마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집으로 간다.


직장 맘이었던 나의 첫 라이딩은 축구 클럽에서 주최한 주말 대회로 아이를 실어 나르는 거였다. 미사리 경정 경기장의 한 구석에서 펼쳐진 축구대회는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선수들의 열기로 후끈했는데 비극은 내 아들이 몸싸움을 싫어하는 수비수였다는 것. 경기 내내 시원한 활약은커녕 전봇대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를 응원하고 소리치고 음료수를 챙겨주고 라이딩을 하는 내 역할에 심취해 있었다. 그 하루만큼은 라이딩 엄마클럽의 일원이라도 된 듯이. 평일에 가야 하는 학원들은 다른 이의 손을 빌렸다. 수영장에 보낼 때는 시터 할머니께 부탁드렸고, 수학은 아이의 친한 친구 엄마에게, 영어는 걸어서 갈 수 있는 프랜차이즈 학원에 보냈다. 다른 엄마들처럼 안정적인 라이딩을 못해줘서 미안했지만 크게 내색을 하진 않았고 아이도 큰 불평 없이 잘 커줬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자전거를 타거나 도보로 혼자 다녔고 그걸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운 좋은 엄마로 라이딩 시절을 마감했다.


그런 내가 요즘 라이딩을 다시 하고 있다. 팔순 노모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라이딩. 학원이 아니라 병원, 매일이 아니라 한 달에 세네 번. 차이점이라면 그것이다. 엄마가 여든이 넘으시고부터는 병원 다닐 일이 부쩍 많아졌다, 안과로, 정형외과로, 종합병원으로 엄마의 스케줄이 만만찮다. 늘 바빠서 ‘있어도 없던 것 같던’ 딸이 나타나 모시고 다니니 엄마는 좋아라 하신다. 젊어서 철의 여인 같았던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본인 말씀처럼 어리바리해지는 경향이 생겼는데 병원처럼 복잡한 곳에서는 더 그랬다. 병원에서 나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서 엄마를 수행한다 마치 똑 부러지는 비서처럼. 시간에 딱 맞춰 병원에 도착하고 건물 안내도를 순식간에 스캔해 오차 없이 검사실을 찾아낸다. 내시경을 하시는 엄마의 손을 잡아드려 안심시키고 엄마의 각종 소지품을 챙긴다. 친절한 간호사선생님을 파악해 치료 후 주의할 점을 한번 더 체크한다. 약국에서 약을 타서 차에 실으면 그날의 임무 완료. 엄마의 얼굴은 나에 대한 신뢰와 프라이드로 점점 빛이 났다.


처음에는 강한 프로페셔널리즘과 효녀정신으로 무장했었다. 그런데 조금만 방심하면 그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었다. 병원 주차장엔 자리가 없고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진을 뺐다. 의사 선생님은 질문을 잘 안 받는데 엄마는 부러진 팔목과 막힌 눈물샘, 소화가 안 되는 위장의 불편함을 하소연하셨다. 걱정하는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는 정녕 ‘슬기로운 의사생활’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건가. 이 모든 게 좁은 땅덩어리, 인구가 많은 탓인가. 그러다 내 짜증이 엄마를 향했다. “엄마, 요즘엔 젊은 사람도 아파요 팔순 넘은 엄마가 그 정도면 건강 롤모델이셔…” 못 참고 입 밖으로 냈다. 엄마의 말수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날 밤 후회의 이불킥을 예약했다.


이게 아닌데… 이대로 가면 효녀도 아닌 불효녀도 아닌 애매한 위치로 남게 된다. 위기감이 왔다. “우리 막내딸 안 낳았으면 어쨌어!” 의 막내 자리를 나는 굳건히 지켜내야 한다. 낡은 이불에서 삐져나온 오리털 한가닥처럼 가볍게 처신하면 안 된다고! 특히 엄마를 대할 때는 말이다.


아들과 보내는 일상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엄마인가. 아들에게 매일 카톡으로 하트를 보내는 나, 시험기간을 맞은 아들에게 나는 너의 편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들을 보내는 나. 피곤으로 몸이 녹아내릴지언정 아침 일찍 일어나 끓여내던 된장찌개, 그리고 아까운 줄 모르고 퍼붓는 교육비… 내가 아들에게 기울이는 온갖 정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 나는 어떤 딸이었나. 회사를 다닐 때는 바쁘다고 한 달에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십 년째 똑같은 액수의 용돈을 드리고 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드린 적은 언제였나. 생신 때마다 매번 돈 아끼자며 집에서 먹자는 엄마를 못 말리는 척 따르진 않았던가.


왜 나는 자식에게 후하고 부모에게 박한가. 내 시간의 조그만 조각을 할애하는 것인데도 부모에게 찬사를 듣는 이 상황은 뭔가 공평하지가 않다. 내리사랑이네 뭐 네하며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엄마에게 더 잘해야겠다. 병원 라이딩에 그치지 말고 봄이면 벚꽃라이딩, 겨울이면 눈꽃라이딩을 불사해야겠다. 오늘 가장 젊은 엄마를 차에 태우고 빠라바라 빠라밤, 라이딩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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