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간관계의 재개편

by 훈훈

퇴직을 하고나니 인간관계의 재개편이 이루어진다. 일을 하는 동안에야 수없이 명함을 주고 받아야 했고 기억하는 얼굴과 기억 못하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지금은 모든 관계가 선명해진다. 회사에서 맡았던 포지션때문에 맺었던 관계들이 제일 먼저 사라진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말하자면 ‘이해관계’ 혹은 ‘비지니스 관계’는 내가 특별히 챙기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듯 하다. 좋은 건 함께 있을 때 나를 특별히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어도 더이상 내 인생에 영향을 못 미친다는 점이다. 퇴직의 축복이다. 두번째, 회사에서 시작됐지만 좀 더 끈끈해진 선.후배로서의 관계는 대략 10%정도 지속되는 것 같다. 내가 각별하게 생각했다면 상대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쉬움에 서로 연락해서 가끔 밥을 먹고 회사 얘기와 개인의 근황을 꺼내놓는 수다로 발전한다. 혹은 커플모임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다. 함께 여행을 가거나 운동을 하면서 밥을 먹은 시간들이 쌓여 절친한 사이가 되어간다. 세번째,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친구들이다. 나의 퇴직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사람들. 수고했다고 꽃을 챙겨주고 이제 함께 놀자는 사람들. 만나면 한없이 편해진다. 동창회는 아니고 소그룹 모임인데 동성일수록 편하다. 네번째, 가족. 일할 땐 바빠서 못 뵙던 엄마를 자주 뵙는다. 정확히 말하면 병원에 모시고 간다. 입원을 하시거나 정기적으로 가시는 병원이 두 세곳이다보니 나의 퇴직후 여유시간이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분야다. 더 늦지 않게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을 다행이라 여긴다. 다섯번째, 계급장을 떼고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다. 전공을 문학으로 하고 싶었던 나는 퇴직 후에 여러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떤 강의는 30대 여자들이 가장 많았다. 나도 겪었던 그 나이의 바쁨과 힘듦에 짠한 마음이 여러번 들었었다. 또 시나리오를 배우는 수업은 대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이들은 나의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00님으로 부른다. 익명성에 묻혀서 가니 편하고 신기하다가도 불쑥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아주 즐겁다. 내 나이가 많다고해서 튀지 않으려 신경쓰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즐기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음소거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