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제주도에 내려왔다. 초등학교 동창 친구 한명과 함께. 마감을 코 앞에 둔 친구라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밥을 함께 먹고 산책을 하는 방법으로 지내기로 했다. ‘따로 또 같이’ 여행인 셈이다. 첫째날, 친구가 2층으로 글을 쓰러 간 사이, 나는 숙소 거실에 앉아 제주의 돌담과 풀밭 풍경을 바라봤다. 멍하니 그리고 가만히. 주변에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음소거 혹은 mute의 세상에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어느 고도 이상 올라간 비행기에서 귀가 먹먹해졌던 경험처럼 낯선 정적에 처음엔 당황했다. 그러다가 귀를 열고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랬더니 조그맣게 바람이 부는 소리, 작은 새의 소리가 들렸다. 차츰 귀와 머리가 열리고 시원해졌다. 내 몸이 천천히 소파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움. 그때 이번 여행은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는 소음에 무방비로 노출된 삶을 살았다. 속도를 높인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앞의 차에게 무차별적으로 누르는 클락션 소리, 아파트 벽을 뚫고 들리는 엘리베이터의 상승과 하강 소리, 엘리베이터 안에서 크게 통화하는 소리,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길에서 싸우는 소리, 아파트 계단에서 우는 이웃집 아이의 울음소리, 곧이어 아이가 떼 쓰는 소리, 아파트 단지 안의 개가 짖으면 전체의 다른 개들이 따라 짖는 소리…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어떤 날에는 도드라지게 귀에 거슬려 참을 수가 없다. 내 잘못이 아닌데 뒷차가 클락션을 폭력적으로 울리면 내려서 따지고 싶은 날도 있고, 이웃집 아이가 울면 저 집 엄마는 왜 아이를 집 밖에서 울리나 흉보는 날도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무실에서 누군가 크게 통화를 하거나 타이핑 소리를 크게 내면 ‘블라인드’라는 직장인 익명 앱에 조용히 해달라는 글이 올라오는 경우도 봤다. 9층 창가쪽 앉으신 분, 하며 정확한 위치를 짚어주면서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놓으면 한시도 조용한 틈이 없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출연자들 말과 말 사이 흐르는 잠깐의 침묵을 두려워한다. 어느 개그맨은 ‘오디오가 비는 것’을 못 참아 ‘오디오를 채운다’고 표현하고 마가 뜨지 않게 적절히 말을 이어가는 것을 프로 방송인의 덕목으로 여긴다. 예전에는 시끄러워도 재미있는 수다쟁이 ‘무한도전’같은 예능을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여행 유튜브를 본다. 마가 뜨는 것을 초조해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보며 풍경을 즐긴다.
사는 건 늘 바쁘고 해야할 건 넘쳐난다. 집중력을 흐트려뜨리고 쉼을 방해하는 소음에 예민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구 천만의 도시에 사는데 소음을 없앨 수는 없겠지. 하지만 여행 첫날에 느낀 ‘음소거 세상’의 신선함을 기억하고 싶다. 눈이 피곤할 때 초록색을 쳐다보는 것처럼 마음이 급해질 때 셀프 음소거를 해봐야겠다. 당장 이사를 할 수도 없으니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다. 안의 데시빌과 밖의 데시빌이 부딪히는 것 보다는 내 안을 먼저 고요히 낯춰보는 것, 가라앉히는 것이다. 어려서도 간혹 집에 혼자 있을 때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엄마가 외출하시고 단독주택에 혼자 있으면 바람에 창문이 덜컹 거려서 무섭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지만 곧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에 적응해나갔다. 저 멀리 골목에서 나는 아득한 백색소음을 들으며 눈꺼풀을 내리고 혼자 잠들기도 했었다. 다시 나타난 그 고요의 순간을 붙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