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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궤

by 훈훈

고가구를 집에 들여놓았다. 우연히 얻게 된 돈궤와 조그만 화초장, 동그란 거울이다. 사람 세 명과 강아지 두 마리가 살기에 다소 비좁다고 느끼는 31평 아파트에, 게다가 베리 화이트 인테리어인 우리 집에 물건을 또 들여놓은 것이다. 걱정이 되었지만 계획대로 강행한 이유는 이대로 살다가는 우리 집이 이케아 쇼룸이 될 것 같은 염려 때문이었다. 세월을 들여놓고 싶었다. 나이가 든 물건도 있고 젊디젊은 새 물건도 있는 조화로움과 여유가 있는 집이었으면 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고가구의 출처는 예전 팀장님의 어머님 댁이다. 지난 봄에 향년 92세로 돌아가셨는데 혼자 사시던 집을 자식들이 정리하면서 지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가라고 한 것이다. 나는 원래 의자 두 개를 가져오려고 했다가 어머님 댁의 옷방에 있던 저 궤랑 눈이 맞아 버렸다. 짙은 고동색 나무에 꽤 정성스럽게 달린 까만 무쇠 장식이 마음에 들었다. 팀장님의 어머님은 그 안에 옷감들을 보관하셨다. 여름 이불에 쓰일듯한 마와 목화솜 이불 겉을 장식할 비단, 실용적인 면 등 다양한 천이 구김하나 없이 깨끗하게 둥근 형태로 말아져 있었다. 성격이 깔끔하신 분이었다. 궤의 사이즈는 가로 1미터 안팎, 아담하고 야무진 모양새였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니까 팀장님은 가져가라고 하셨다. 용기를 내서 차에 싣고 집에 돌아왔다. 그 후 인터넷을 통해 이런 모양의 가구를 궤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 중에서도 모양이 돈궤에 가깝다는 것까지 공부가 되었다. 정확히는 돈궤라고 하면 윗 부분에 지폐를 넣는 길쭉한 틈이 있어야하는데 아마도 이 궤는 만들던 시점부터 물건 보관용으로 쓰기 위해 생략한 것 같았다. 오래되었지만 간수를 잘 한, 반들반들한 궤로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미네랄 오일을 몇 차례에 걸쳐 발랐다. 기름을 먹일 수록 색이 진해지고 나이테 무늬가 도드라지면서 중후함이 살아났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젊었을 때 구입하셨다면 적어도 70년은 족히 되었으리라. 화이트 인테리어에 너무 튀지 않도록, 궤 옆에 나이가 비슷한 조그만 화초장을 두고 자개장 사진이 실린 탁상달력을 그 위에 놓았다. 빨간색 열매가 달린 말린 꽃을 화병에 꽂아 옆에 놓으니 그럭저럭 볼썽사납지는 않은 풍경이 되었다. 아니 내가 애정하는 집의 한구석이 되었다. 궤가 하나 들어오면서 생각이 이어지고 눈길 손길이 자꾸 가게 됐다. 마음이 가다보니 궤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음 집이 아파트가 아니라 천정이 높고 기다란 복도가 있는 집이라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마 그 복도의 막다른 곳이 저 궤의 자리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궤의 주인이셨던 고인의 장례식장은 환하고 따뜻했다.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누가 봐도 모자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뚜렷한 유전자의 흔적이 있었고 잔잔하게 어머님을 회고하는 유족들을 볼 때 고인은 사랑과 복이 많은 분이셨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분의 행복한 인생 한 구석에 있었던 궤를 물려받음으로 내게도 따뜻한 온기가 닿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세월이란 개인의 역사로 이루어진 따뜻한 무게이자 온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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