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라던가 바람이라던가 나는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 부자의 아들, 친일파 부모를 가진 지식인. 가슴에는 정의의 불이 타오르지만 이것도 할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어 한량같은 삶을 살며 매일 술을 마시는 지식인은 흠모하는 여자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가장 열심히 봤던 드라마에서 이 대사를 들었을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이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낭만어라고 생각했다. 연말이 될 수록 숫자에 둘러싸여서 숫자로 평가받는 회사원의 입장에선 무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혁명처럼 느껴졌으니까. 4차 산업혁명, 100세 시대, 경제성장률, 코스피지수. 총매출, 영업이익, 수능점수, 귤의 당도, 미세먼지 농도, 비올 확률 … 세상의 모든 것이 자와 저울에 의해 재어지고 비교되어 평가 되며, 그에 따라 값어치가 매겨지는 세상인데, 그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코피나게 경쟁하지 않고 그저 무용한 것을 나의 시각으로 사랑한다니 얼마나 고귀한 철학이 아니냐 말이다.
허나 실제의 나는 무용함보다 유용한 것들을 더 좋아한다. 나무로 치면 유실수에 열광한다. 한겨울에도 멋드러진 은회색을 띄는 자작나무도 죽을듯이 멋있지만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큼직한 홍시가 달린 감나무는 내게 치명적인 매력이다. 어느해인가 사과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과수원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사과가 너무 예뻤고 탐스러웠다. 나쁜 일인지 알지만 어린마음에 그 사과가 너무 갖고 싶었다. 아니 따고 싶었다가 정확한 표현일 거다. 결국 손을 뻗어 그 사과를 땄고 점퍼 안에 넣어들고 냅다 집으로 와버렸다. 사과를 따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세상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떨려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희한하게 그랬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가을 산을 배경으로 나즈막히 줄지어 늘어선 사과나무들. 큼직한 알의 표면은 고르게 빨갛거나 노랗게 익은 모습으로 성숙미를 뿜고 있었다. 온화한 공기와 청명한 가을하늘, 여기가 낙원인가 싶을 정도로…아 내가 사과를 따먹었지만 나는 맹세코 이브는 아니었다.
여름날 키 큰 플라타너스가 만든 터널로 차를 몰고 지나가는 걸 좋아하지만, 창문을 열고 바람 쐬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실 가을에 아들과 강아지와 함께 땅에 떨어진 밤을 줍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잘 익어 스스로 따가운 껍질로부터 벗어난 조그만 토종밤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주워 들 때의 뿌듯함. 조그만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도 더 줍고 싶어 다람쥐의 눈치를 보던 순간을 기억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냄비에 물을 채우고 팔팔 끓여서 밤을 삶던 것, 한 입 깨물면 입술이 데일듯이 터져나오는 뜨거운 물에도 웃었던 나였다. 열매는 나무의 결실이다. 희노애락과 같은 4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결국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빚어낸 결실이다. 그 결실이 내게 주는 좀 더 구체적인 혜택, 맛 혹은 저장의 기쁨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따온 열매는 시장에서 돈을 내고 살 때는 느낄 수 없던 원초적인 대자연의 살아있는 매력을 갖고 있다. 유실수를 좋아하는 것은 나의 본능이다. 그것을 나는 안다. 고로 나는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마당을 갖고 한켠에 감나무를, 한켠에 사과나무를, 한켠에 밤나무를 갖는 꿈을 꾼다. 여름날 텃밭에 토마토와 상치와 양배추까지 심어보겠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세상의 유용한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에 취하는 밤이다 . (2018.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