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공(空)]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욕심을 버리고자 했다.
카메라라는 욕망기계는 무언가 내 자신의 욕망을 담으려고 했다. 사각형 프레임안에는 꾸역꾸역 욕망이 담겨져 있다. 욕망은 재생산된다. 욕망은 미디어에 넘쳐난다. 매일매일 쏟아낸다.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도 30년이 되었으니, 내가 쏟아냈던 수많은 사진들이 욕망의 찌꺼기처럼,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듯, 그저 끄적거린 낙서처럼 사진도 별 다를 게 없다. 누군가는 상을 받을만한 사진이지만, 내게는 그냥 그런 사진으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일주일만 배우면 누구나 사진을 전문가처럼 찍을 수 있다. 아니 전문가보다 더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사진학과를 나와서, 오랜 시간동안 사진 일을 하는 전문분야의 사람들이란 그리 쉽지 않다. 아마추어들의 보는 눈이 더 좋은 사진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비들로 안간힘을 다해 보지만, 철학은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버려야 했다. 그냥 내 만족의 크기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괜히 잘난척해봤자, 실력은 들통나기 십상이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 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 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밀어붙이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는 바로 그러했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여러 해에 걸친 시간 속에 흩어진 꿈처럼 어렴풋한 기억이다.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vanité)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 있음(vacuité)을 체험했으니 말이다.
나의 존재가 바로 이 순간부터 어떤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든가 훗날 내가 실제로 나 자신에 대하여 깨닫게 된 내용들은 모두 이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있을 만큼 어떤 유난스러운 순간을 나는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적부터 매우 여러 번이나 기묘한 상태들을 경험했다. 그 상태들 중 어떤 것도 미래에 대한 예감이라할 만한 것은 못 되었고 다만 계고(戒告)였을 뿐이다.
-장 그르니에, 공(空)의 매혹, P25-26-
헛된 욕망은 ‘채움’이 아닌 ‘비움’으로 바뀌어야 한다. 내가 프레임 안에 채울려는 것들도 공간이 비워질 때 팍팍한 삶의 굴레에서 숨을 쉴 수 있다. 늘 분주한 시간에 쫓기어, 무조건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 압박감도, 잠시의 여유를 가진 외로움, 고독감, 상실감 모든 정서들이 올라온 아침 식탁처럼, 나 자신의 그림자를 되돌아보는 시간의 자유를 준다. 안개 낀 날이나, 텅 빈 하늘을 찍을 때, 내가 느꼈던 기억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런 기억들을 되새기면서 조용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텅 빈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사진에 담으면서 나의 감각에 의존한다. 공간을 가득 채우며 살 필요는 없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 배경의 많은 정보들이 있게 되면 그 인물에 집중도는 떨어진다. 감상자의 눈에 너무 많은 정보들이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과 배경은 사진의 구성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주제로서의 형상은 배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배경이 없다면 형상 자체로서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마치 그릇이란 형상은 내용물을 담을 공간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배경은 형상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간이 된다. 우리 눈은 형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그 형상이 어떠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여백은 그러한 공간에 대한 고찰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집중할 것은 집중한다. 용어중에서 삼매(三昧, samadhi)라는 불교 교리가 있다.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을 말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저술하면서 삼매의 의미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원효에 의하면, 삼매는 곧 정사(正思)로서, 정(定)에 들었을 때 관계되는 경계인 소연경(所緣境)을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고 통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원효는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서 삼매를 이룬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올바른 관찰과 마음가짐을 통하여 일체가 되고, 마침내 그 세 가지에 대한 생각까지 잊어버린 경지에 들어간 것을 뜻한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마치 벼랑길에 서 있는 사람이 가지는 온갖 고뇌를 벗어버림은 가능할까?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번뇌를 하게 된다. ‘무(無)’, ‘비어 있음(vacuité)’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어 보인다. 모든 것들을 의심이 있든, 의심이 없든, 맛이 있든, 맛이 없든, 관조(觀照)하거나, 초월한 자, 수행을 하는 자들의 시선일 것이다. 정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것이냐, 저것이냐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있다.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다시 <무심>의 순간으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무심>의 순간 또한 <선택>이니, 이야말로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더 낫다고 여길까. 무엇이 더 쓸모 있다고 여길까. 내가 선택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일까? 사진가에게 있어서 선택은 중요한 문제이다. 심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사이에서,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 사이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서 아니, 기호와 상징으로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사진의 과정은 삼매와 같다. 사진을 하는 과정이 수도승이 수련을 하는 것처럼 자신이 선택한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고자 한다. 그 수련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는 과정에 있다. 그것이 ‘응념(凝念 dhāraņā)’이다. 그리고 두 번째 수련은 수행하는 사실도 모르게 물처럼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것 ‘정려(靜慮 dhyāna)’이다. 사진을 하는 행위는 ‘비어 있음’에 대한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진가는 앎이 곧 자신의 사진으로 발현된다. 앎을 구성하는 세 가지 구성요소는, 첫째 인식하는 주체(사진가)에 있고, 둘째 그 대상을 이해하는 인식에 있고, 셋째 사진에 찍히는 대상체에 있다. 이 세 과정을 통해서 사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