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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28. 2024

사진-강의노트

[6화 숨]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지하의 술집은 질퍽한 맥주가 흘려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환기가 전혀 되지 않는 공기는 숨을 가쁘게 했다. ‘2차로 들리는 집은 꼭 이렇단 말이야.’ 현실은 숨 막히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공간들이다. 바닷가에 물이 목에 찰 정도 있는 곳에 서 있으면 파도가 밀려와 물에 잠겼을 때 느낌이다. 물에 잠겼을 때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숨을 내쉴 수가 없다. ‘숨을 내쉬면 물이 코로 들어와’, ‘숨을 참는 다는 것이 한계에 부딪히지.’ 자맥질을 하던 어린아이들은 누가 오래 물 속에서 참는지 내기를 한다. 1분, 2분.... 5분 얼마나 숨을 참고 있을 수 있을까. 인생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을 참고 버티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삶은 버티는 것이라고.’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숨을 참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숨을 쉬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면 흔들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두 가지 사진이 있을 것이다. 숨 막히게 하는 사진과 숨 쉬게 만드는 사진. 어떤 사진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긴박해 보이거나, 답답함을 토로하게 만드는 사진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진을 보면 가슴이 탁 터지면서 시원한 느낌을 주거나,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을 주는 사진이 있을 것이다. 숨을 불어주는 사진. 누군가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은 호흡이 멈춘 심장에 심폐소생술처럼 숨을 쉬게 만든다.     


고래는 폐가 있는 온혈동물이다. 고래는 피가 얼면 죽고 만다. 동물이 호흡을 하려면 산소가 필요한데 물고기들은 주로 아가미로 호흡하고, 육상동물은 폐로 호흡한다. 그런데 몇몇 동물의 경우 아가미와 폐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고래의 경우 줄곧 물속에서 생활하는데도 폐로 호흡을 한다. 고래는 물에서 숨을 쉴까? 고래가 바다 한 가운데에서 물을 힘차게 뿜어내는 것을 보면 고래가 숨을 쉬는 것 같아 보인다. 고래와 인간의 처절한 복수극은 소설 <모비딕(Moby-Dick)>에서 에이허브 선장으로부터 알 수 있다. <모비딕>의 이야기는 그가 다리 한 쪽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선원들을 이끌고 쫓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에이허브의 선장의 집착에 어린 광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연 고래는 악의 화신이고, 에이허브는 이 악을 쫓아가 죽여야 하는 정당성이 과연 있는 것인가. 선원중의 스타벅은 에이허브에게 조언을 한다. “모비 딕은 선장을 찾지 않습니다. 그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쪽은 선장님입니다!”라고 부르짖는다. 선장의 판단이 과연 악의(惡意)인지, 고래가 악의인지. 맹목적인 광기에 휩싸인 에이허브 선장의 선동에 우리는 가끔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모를 상황에 많이 접하곤 한다. 달콤한 악의에 쉽게 빠져 들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딕을 본 사람에게는 일 온스 짜리 금화를 주겠노라고 말하며 유혹을 한다. 우리는 결국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모를 돈의 노예가 되는 셈이다. 인간은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이기주의도 이타주의도 아닌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방관자이다.   

  

사진가는 과연 어느 편에 있을까? “우리는 왜 남을 도와주지 않는가?”와 “우리는 왜 남을 도와주는가?” 이 두 질문사이에, 사진가는 철저한 방관자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 편도 아닌, 에이허브 선장 쪽도, 고래 쪽도, 아닐 수 있다. 단지 일 온스 짜리 금화를 쫓는 자일수도.   

   

세계 곳곳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이타적 행동을 기꺼이 조작할 수 있는 사기꾼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앤디 돕슨  

   

나는 한 사진가를 알게 된 적이 있다. 그 사진가는 전쟁지역이나 분쟁이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는 보도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진들이 유명 잡지나 신문에 실렸고, 상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이 유명세를 갖고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은 정반대였다. 그가 받은 상금으로 그는 단란주점과 같은 유흥업소에서 돈을 쓴다. 그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팔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위 팔리는 사진을 했던 것이다. 그의 사생활을 뭐라 할 순 없지만, 그의 생각은 과연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표리부동(表裏不同])한 현실에 숨을 쉴 수 없다. 내가 쉬고 있는 이 숨조차도, 토악질이 난다. 그렇지만 사진은 정말 좋다. 사진만 좋으면 됐지, 뭐 인간성이야 거지같아도 말이지. 사람이 좋다고 사진까지 좋아야 하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영혼이 하는 진실한 얘기를 들어야 한다그것은 희미하지만 꾸준한 소리다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처음에는 어떤 극단이나 광기 쪽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으나 결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우리가 믿음으로 단호하게 대하면 오히려 그쪽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깨닫는다단 한 명의 건전한 인간이 듣는 작지만 확고한 반대 목소리가 마침내 인류의 주장과 관습을 이겨낼 수도 있다어떤 사람도 자기 영혼을 따라가다 길을 잃는 경우는 없다그 길을 따라가다 신체적으로 허약해질 수도 있으나그 누구도 그런 결과가 개탄스럽다고 할 수 없다그것은 더 높은 원칙에 부응하면서 소신 있게 살아간 삶이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월든-시민불복종, P286-

      

대부분의 사기꾼들은 장비(裝備)가 그럴 듯 해 보인다. 장비를 탓하고, 공정을 탓하며, 서로를 탓한다. 자신의 탓인데도, 변명과 이유를 내세운다. 장비 빨, 화장 빨, 조명 빨 이런저런 이유를 이야기해봐야, 결국 자신의 실수를 감추는데 있을 뿐이다.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핸드폰보다도 사진이 더 잘 안 나오다니, 이건 뭐 차라리 핸폰으로 찍지, 고급 카메라로 작동법도 서툴고 말이야. 아이폰이 훨씬 낫다. 조작의 달인들은 자신의 실수마저도 조작해줄 최고의 방법들을 터득하고 있다. 조작의 달인들은 정치든 뭐든 어느 곳에서도 존재한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이 언론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불리한 기사는 막고 유리한 기사는 확대 재생산해주는 ‘스핀닥터(spin doctor)’를 잘 활용한다. 이미지를 포장하는 정도가 섬뜩할 정도로 교묘하게 프레임을 짜 맞춰 준다. 여론 조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조작의 최대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거짓과 가면들에 쌓여 있다. AI는 수많은 조작을 가능하게 만든다. 제대로 숨을 쉰다고 보기 어렵다. 단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기계적인 작동에 의한, 그냥 쉬고 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고마움도, 공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감사도, 무감각하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반응일지도 모른다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바로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다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수잔 손택타인의 고통, P154-     


사진가는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참여하고 방관하고 있는가? 과연 그들의 고통을 이미지로 자본의 시장에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들의 고통을 얼마나 연민하고 있는가? 수많은 고통스러운 이미지, 폭력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무감각하던가? 끔찍함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니던가? 손택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이유와 영국의 소설가 울프를 좇아서 이렇게 말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2차 폭력을 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하기도 한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과 비참함을 더 이상 팔고 사지 말아야 한다. 죽어가는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 퓰리처상을 수상한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고뇌는 그가 자살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다는 오만은 철저히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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