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길]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고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끔 나는 길을 걷다가 멈춘다. 뭔가를 보았기도 하고, 지난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1초간의 생각들이 지나간다. 사진은 1초 안에 촬영된다. 1/500초로 카메라의 셔터는 눌러진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지나간 과거의 한 파편중의 하나다. 내가 광화문 광장을 사진을 찍게 된지도 1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10년이 지나면 뭐가 되도 되지 않겠나 막연한 감정이었다. 광화문광장을 출발선으로 마라톤 행렬들이 지나간다. 인생을 마라톤에도 비유하지만, 누군가에 그 길은 삶의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길이 되기도 하고, 그 길은 사진의 주제일 수도, 소재일 수도 있다. 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뛰어가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이 없이 걷기도 하고, 정처없이 걷기도 하고, 생각에 골똘해 하면서 걸어가기도 하고, 전화를 걸며 걸어가기도 하고, 가족들이 평화롭게 걸어가기도 하고, 외국인들이 마냥 신기해하며 걷기도 하면서 사진도 찍고,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공간, 누군가에게는 낯선 공간으로 길은 존재한다. 길에서 길이 이야기하는 것들. 도시 산책자이든, 도시 샐러리맨이든, 길은 없어지기도 하고, 새롭게 넓어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존재한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그 길의 종착지는 어디일지.
광화문광장을 주제로 찍게 되면서 나의 사진의 범위는 경복궁을 기준으로 남쪽의 세종대로 사거리에서부터 광화문 현판이 있는 곳까지이다. 여기는 처음에 찻길로 있었던 곳인데 2009년 8월 1일, 중앙분리대 가운데 부분을 광장으로 조성되어 양 옆으로 차들의 차선을 변경했다. 기존 왕복 차로수는 20차로로 큰 도로였지만, 광장이 조성되고 난 세종대로는 12차로로 축소되었다. 찻길 중앙에 섬처럼 있던 광장은 다시 2022년 8월 6일 새롭게 재조성되었고, 경복궁을 바라보고 오른편에 왕복 차로를 만들었다. 집회나 시위의 장으로서 서울광장이나, 서울역광장이 광화문광장이 시위의 중심이 되었던 것도 아마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촛불집회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 박근혜정부는 탄핵되었고, 태극기 집회라는 보수들의 집회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행사들이 광장에서 벌어졌다. 광장은 하루도 쉴 틈없이 많은 이슈들을 토해내는 공간이 되었다. 다양한 집회들, 정치적인 것들이 아니더라도 종교적인 행사, 경제적인 홍보행사, 스포츠 행사, 광신자들의 집회, 음악회, 일인 시위, 외국 관광객들, 별별 사람들이 모였다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했다고, 거대한 스피커들을 설치한 소음공해까지, 광장은 수없이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수많은 광장을 지나가다 보면 우연찮게 만나는 사람도 있고, 매일 지나다니다 보니 걸인이나, 이상한 사람도 얼굴이 낯이 익을 정도로 자주 본 사람도 있다. 매일 헤드폰을 끼고 사거리를 빙빙 도는 사람도 있고, 다리를 절며 광장을 남단에서 북단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고, 일인 시위로 사거리에서 매일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 등등을 만나게 된다. 하루는 어떤 집회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지나가고 있는데, 내게 왜 사진을 찍느냐면서 물었다. “어디서, 나오셨나요? 기자이신가요? 경찰이신가요?” “아니요, 단지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어디 소속된 사람이 아니고요, 길을 가다가 사진을 찍었는데요?” 사진을 찍는 행위와 사진에 찍히는 사람간에 간극은 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것이 있고, 이순신장군상이나 세종대왕상 같은 랜드마크인 곳에서 인증사진, 또는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특정, 익명의 대상인 사람들을 사진찍는 것에는 많은 문제들을 내포한다. 그것은 아마도 초상권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를 파파라치(paparazzi)처럼 찍는 것에 대한 질문들. 사진을 찍는 사진가에게 오랜 숙제 같은 질문들이다. 최민식 사진가는 부산 자갈치 시장을 오랫동안 찍어왔다. 그의 사진들은 거의 몰래 찍는 방식이다. 캔디드(candid) 포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망원렌즈로 멀리서 촬영하고 대상체인 그 인물이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니라,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솔직하고, 자연스럽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명백히 보면 도촬(도둑촬영)사진인 셈이다. 외국의 유명한 사진가들이나 사진기자의 사진 대부분은 연출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장면을 포착하려고 한다. 그것이 전쟁사진이나, 긴박한 사고 현장에서 찍는 사진과는 별개이다. 물론 일부러 연출아닌 듯 연출을 재연출하기도 한다. 어쨌든 찍히는 대상과의 관계는 사진가와의 관계에서 고민해야 될 숙제들을 안고 있다. 두 번째 방식은 어거스트 잔더(August sander)와 같은 정공법으로 포츄레이트를 찍는 것이다. 대상에게 어떤 의도로 촬영하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인물을 무표정에 증명사진처럼 촬영하는 것이다. 사진가의 주관적인 생각들을 철저하게 감추면서 대상의 감정을 최대한 잘 드러내려는 장점은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기념촬영과도 같아 보인다. 모든 사진에는 세 사람의 시선이 있다. 첫째,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시선, 둘째, 사진에 찍히는 대상의 시선, 셋째, 결과물인 사진을 바라보는 익명(관객)의 시선이다. 한 장면을 둘러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해석들을 내놓는다. 사진은 단지 사진일뿐인데, 사진을 해석하는 사람은 세 사람인 것이다.
경복궁 뒤로는 청와대가 있었고, 현재는 대통령이 근무하던 곳이 용산으로 이전하여 청와대는 관광지가 되었다. 암울했던 시대에 청와대 뒤로는 경비대들이 항시 상주하고 있었다. 1968년 1월 21일, 북악산을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했던 김신조 사건이 있은 뒤로, 인왕산과 북악산 인근에도 많은 군부대들이 있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청운 중학교나 경복 고등학교앞 도로에서 촬영하다 보면 어디서 나왔는지 갑자기 헌병인지 경찰인지 모를 사람들이 불신검문을 하였고, 촬영한 필름을 뺐기도 했다.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집 제목인 <촬영금지>처럼 사진 촬영금지는 현실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사람이 아니라도 장소 또한 촬영금지는 많다. 기업체의 건물이나, 핵발전소와 같은 국가산업단지들, 군부대, 우리나라엔 촬영금지 장소는 넘쳐난다. 인공위성에서 속속들이 보고 있고 어느 곳에서나 설치되어 있는 CCTV, 누군가의 드론과 같은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사진 촬영금지는 가능할까.
“야, 사진찍지마!”
이 말은 내가 시위현장에서 들은 말이다. 사진가로서, 사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었던 적도 없고, 그들을 대변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거나,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또 무엇인가.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진가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든지 카메라 뒤에 숨어버리는 존재. 데모 대열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뿔뿔이 흩어지고 막다른 골목으로 도망쳐 왔던 나약한 존재.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과연 나는 기록자로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거리에서 갈길 잃은 낙오자로서 통행 차단이라는 표지판을 만나 일방통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각자가 가는 길. <발터 벤야민의 도시산책자>에서 벤야민이 맞닥뜨렸던 일방통행로. 어쩌면 우리는 목표지점이 있다는 착각속에 끝없이 걷는 것인지 모른다. 벤야민의 길은 사유의 깨달음이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장 자크 루소는 길 위에서 지복의 깨달음이다.
어쨌든 그 길은 내가 걸어야 할 길이다. 사람은 길을 통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인생의 모든 길을 생각하게 되고, 길은 구도(求道)의 길이기도 하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길. 많은 소설과 영화속에 길을 소재로 다룬 것들이 많다. 비트 세대의 방향과 모색을 그린 잭 케루악은 <길 위에서>라는 소설을 3주동안 잠을 자지 않고 단숨에 집필했다고 한다. 초고가 타자 용지를 길게 이어 붙인 36미터짜리 두루마리였다고 한다. 소설의 분량이 길위에 펼치면 얼마만큼일까. 수없이 많은 영화에서도 길은 단골 소재이다. ‘길’의 서사성은 로드 무비의 전통이다.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 사진들 대부분이 길 위에서 촬영된 것들이다. 사진의 장르는 거리사진(street photography) 길거리 스냅촬영들이다. <가지 않은 길>에서의 로버트 프로스트의 “길”은 단절된 길이다. 프로스트에게는 길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삶), 즉 타인의 삶에 대한 연민과 평등주의적 관념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두 길은 서로 다른 길이다. 이에 비해 마르셀 프루스트의 “길”은 통합적 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인 나(마르셀 프루스트)는 그가 사랑하는 질베르트라는 여인에 의해 두 길이 하나임을 깨닫게 한다. 콩브레 저택으로 가는 이쪽, 저쪽으로 난 두 갈래의 길을 결국 스완 씨의 집으로 향한다.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집을 나갈 때면 결코 같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는 메제글리즈라비뇌즈였는데, 그 길로 가려면 스완 씨네 소유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스완네 집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길은 게르망트 쪽이었다.” 이처럼 길은 철로의 길과 같이 평행선을 달리기도 하고, 서로 엇비슷하게 만나기도 한다.
만약에 광화문 광장을 노자와 공자가 걸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는 '멀리 보려는 욕심이 지나쳐 까치발로 서면 신체의 중심이 무너져 안정된 자세로 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빨리 가려는 욕심이 지나쳐 보폭을 지나치게 크게 하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두 행동은 모두 남보다 더 잘나 보이고, 더 빨리 가려는 행동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을 노자(老子)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노자는 아마도 느긋하게 걸었을 것이다. 장자가 거닐었던 소요유처럼 말이다. 노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공자(孔子)의 일화중 하나다. 공자가 제자와 같이 길을 가다가 나무 뒤에서 몰래 똥누는 사람을 발견했다. 공자는 그 사람을 크게 꾸짖었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다시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길 한가운데에서 똥을 누는 남자를 보았다. 그러자 공자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의아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길 한가운데에서 똥을 누는 자가 더 나쁜데 왜 그냥 지나치십니까?”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숨어서 똥을 누는 사람은 그래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훈계를 하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길 한가운데에서 똥을 누는 자는 미친 인간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훈계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꾸중도 교육도 필요 없느니라. 그런 사람을 불러놓고 꾸짖거나 화내봤자되려 똥이 묻을 것이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이야기하는 공자에 “길”은 도적적인 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방 밖으로 나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거리 산보를 ‘거리 배회(street hunting)’라 불렀다. 1925년의 일기에서 울프는 “초여름 런던의 삶을 좋아”하며 “거리를 어슬렁 돌아다니고 스퀘어를 들락날락” 했으며, 1930년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걸으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을 때도 “혼자 런던을 걷는 게 최고의 휴식”이라고 했다. 소설 <세월>에서 울프는 주인공 페기의 1918년 폭격에 대한 기억을 빌려 “거리 모퉁이에 걸린 플래카드마다 죽음이 있었다. 아니 더 심하게, 독재, 야만, 고문, 문명의 몰락, 자유의 끝이 있었다”고 적었고, 1941년 2월의 일기에서는 산책을 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됐음을 한탄하며 “나에게 강렬한 기쁨을 주었던 그 문장들을 내가 다시 쓸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가 자살하기 한 달 전의 일이다. 페미니스트이자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도시의 산책자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걷는다.
보행의 역사를 통틀어 주요 인물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 실비아 플래스가 그 이유를 일기에 적은 것도 열아홉 살 때였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내 끔찍한 비극이다. 길에서 일하는 사람들, 선원들과 병사들, 술집 단골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데,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은데, 경청하고 싶은데, 기록하고 싶은데, 다 망했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수컷으로부터 습격당하거나 구타당할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라서. 모든 사람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천에서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서부로 여행을 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마음껏 걸어 다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P374-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은 <걷기 예찬>에서 “도시는 계속적으로 행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도시는 무수한 얼굴들의 숲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산책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변에서 타자들을 바라본다는 것, 그와 동시에 그들의 시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도시의 산책에서는 항상 다른 타자들을 만나게 되곤 한다. 알지 못하는 낯설음의 길이다. 그 낯설음은 걸으면서 많은 영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모젠 커닝햄(Imogen Cunningham)은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세계 3대 여류 사진작가로 손꼽히며 70년의 세월을 카메라 뒤에서 살아왔습니다.
대학생 때 장학금을 받기 위해 찍은 식물 사진을 시작으로 사진 예술에 매료된 그녀는 사진의 프레임을 그림의 캔버스처럼 상상하며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는데 그런 그녀에게 한 기자는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평생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아끼는 최고의 명작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그녀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마 내일 찍게 될 작품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