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말]
“말 같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
“네 말이 맞다면, 확실하게 납득이 될 만하게 이야기를 해.”
“난 네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네 말의 진정성이 없다고 봐.”
“말로는 뭐라고 하든 입만 열면 거짓이야. 진실을 보여주는 건 행동이지.”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眞髓)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자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虛像)의 실상화(實像化)였다.”
-사르트르, 말-
사르트르 <말>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써놓은 이야기이다. 사르트르이니까, 이해하겠지만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피곤할 것이다. “허상의 실상화”이란 말이 도통 머릿속을 맴돈다. 뒤집어 말하면 “실상의 허상화”가 아닐까. 말이란 것이. 실상은 현실이고, 현실이 가지는 의미를 개념화한 것이 말과 글이니, 말과 글은 아마도 허상일 것이다. 사진은 실상을 찍는다. 허상을 찍을 수는 없다. 물론 만들어낸 것은 개념일 뿐이다. 여하튼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많은 논객들이 있다. 정치평론가, 예술비평가, 철학가, 지식인들, 개그맨(말을 희화화는 사람들), 음모론자, 그들은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온통 말은 돌고 돌아, TV에서 연일 말 잔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이 말, 저 말’. ‘장군, 멍군’. ‘내 말이 옳다, 네 말은 틀리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엔 괴물이 된다. 말의 진위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내뱉으면 그만인 것이다. 말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게 된다. 달콤한 말에 현혹되기도 하고, 기분 나쁜 말에 분노하기도 한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부장이 되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얼토당토 없는 이야기를 하질 않나, 무리하게 자기 주장대로 밀고 가려고 하질 않나, 아이디어를 가로채 자기가 생각해낸 것처럼 하질 않나, 편법은 난무하고, 권한은 누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없으니, 또는 인성(人性)이 좋지 않으니, 후배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만 할 것이다. 아랫사람들과 친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는 말만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사과는 말 뿐이다. 매일 글을 써대는 언론사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놓는다. 오랫동안 사진기자를 했지만, 여전히 사진기자의 위치는 그리 좋아졌다고 여기기 어렵다. 왜 그럴까. 구조적인 문제인가. 사진기자들 스스로의 문제인가. 사진 한 장이 주는 힘이 글이 주는 힘보다 못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찍어달라, 저렇게 찍어달라, 주문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글은 현장에 가질 않아도, 쓸 수 있다. 많은 사진과 영상들(CCTV, 차량 블랙박스 등)이 넘쳐난다. 그것을 보고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글의 부차적인 문제, 여전히 글의 자료수준정도에 불과할 것인가. 글의 논점을 미리 잡아놓고, 거기에 맞는 사진을 찍어야 되는 상황이다. 사진기자가 주제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가장한 글. 나는 혐오한다.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큰 소리로 전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를 통해 이름 없는 어떤 사건을 익숙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가까움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한 가까움은 함께 나누었던 경험의 양과 연관시키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서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밀함을 공유할 수 있다. 주고 받는 눈빛에 담긴 친밀함, 끄덕이는 고개, 미소,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에 담긴 친밀함. 몇 분 동안 노래 한 곡이 불리고, 거기에 함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가까움. 삶에 대한 어떤 합의. 아무런 조건도 없는 함의. 노래 주위에서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결론.”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P84-
존 버거(John Berger)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매일매일 발생하는 문제들, 채우지 못한 욕구와 좌절당한 욕망을 일컫는, 혹은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신조어뿐만 아니라, 말이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의성어나 의태어가 아니더라도 글은 사진처럼 묘사하려고 한다. 언어는 개념적이고 관념적이지만 시각적으로 묘사하려고 하고, 사진은 시각적인 것을 거꾸로 개념적이고 관념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진과 글(text), 요즈음 디카시(Dica詩)라는 것이 있다. 여러 지자체에서 공모전도 열리는 것을 보면 디지털 세대에게는 유행이 아닐 수 없다. 좋은 글은 이미지가 상상되어지고, 좋은 이미지는 글이 떠오른다. 어떤 글은 음악이 떠오르고, 한 장의 사진은 영화가 되기도 한다. 글과 사진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이 시너지를 내고, 그 경계를 넘어선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닮음이란 생김새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손가락 끝이 만나는 것같이 두 방향에서의 겨냥이 그림에 포착된 것이리라.”
-존 버거, 글로 쓴 사진, P38-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한 사진가(예술가?) 중에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가 있다. 그녀는 선전 포스터의 프로파간다적 속성을 차용한 사진과 텍스트 작업을 한다. 사진 속에 텍스트를 삽입함으로써 이미지와 텍스트의 교묘한 결합을 꾀한다. 초기 작업과는 달리 점차 그녀의 작업은 텍스트로만 이루어졌다. 텍스트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포그래피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몸은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다른 영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역사의 신화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배가 갑자기 혼수(coma)상태가 되었다. 응급실에 제 발로 걸어들어 갔다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후배는 간이식을 했고,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손가락에 힘이 없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배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여지껏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하느님이 이젠 말은 조금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으라고 하나 봐.”
사진은 침묵하는 언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