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꿈]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 이른 아침 6시정도 눈이 떠져 집 앞을 나와 골목길을 지나 숲길을 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한 가운데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들이 먼지처럼 날라 다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작은 초등학교 같은 건물이 보였고 담장너머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공 하나에 몰려다니고 나는 사진을 찍어 볼까하고 카메라를 눈에 가까이 대고, 이놈들 파인더 안에서 이리 와야지 저리 가면 어떡하냐하고 혼잣말을 해댔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은 점점 싸리눈에서 함박눈으로 크기가 커졌고, 뭔가 새 같은 물체가 공중에 내리는 눈 사이로 유영을 하고 있었다. 동공이 커지고 자세히 볼려고 애쓰고, 아니 새가 아니라 해마인데. 웬 해마가 물 속이 아니라, 눈 사이로 헤엄을 치듯 날라 다니네. 사진을 찍고, 망원으로 확대해서 찍어보기도 하고, 아 이 장면은 동영상으로 찍어야겠다하고 급히 동영상 모드로 바꿔 찍으려고 하니 그새 눈 앞에 날아다니던 해마가 없어졌다. 엥 초점이 나갔나. 초점을 맞추고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없었다. 아 이놈 어디로 갔지. 한참 찾으려고 뒤척이다 꿈에서 깼다.
사진을 그렇게 찍으면 어떡하니, 초점도 나가고, 노출도 틀렸고, 구도도 엉망이고. 수직수평도 못 맞추고, 사진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 프린트 된 사진을 박박 찢으면서 말한다. 이리 해 가지고 밥 먹고 살겠니, 다른 직업을 찾던지 해.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나는 제대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딱 한명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 좋고 감각 좋은 사람은 금방 터득하겠지만 둔한 나는 이리해보고 저리해보고 그래도 모르겠더라. 10년은 찍으면 좀 알까나. 그래도 모르면 하산해야겠지. 세상은 내가 볼려고 하는 것만 보인다. 보고 싶지 않은 장면도 보게 되지만, 내가 기억하고 의미를 두려고 했을 때 사진에 남는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만, 찍히는 것은 사물이 아닌 내 생각, 내 마음이다. 아무리 좋은(예쁜) 사진일지라도 그 사진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아무소용이 없다. 헛된 꿈일 것이다.
“잠 없는 밤. 벌써 사흘째나 이어지는 중이다. 잠이 쉽게 들지만, 한 시간 후쯤, 마치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갖다 뉜 것처럼 잠이 깨버린다. (...) 이제부터 대략 새벽 5시까지, 밤새도록, 비록 잠이 든다 해도 너무나 강력한 꿈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시에 의식이 개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형식적으로야 내 육신과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동안 꿈으로 나 자신을 쉴 새 없이 두들겨대야만 하는 것이다. 5시 무렵, 최후의 잠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꿈을 꿀 뿐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 나는 밤새도록, 건강한 사람이라면 잠들기 직전에 잠시 느끼는 그런 혼몽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꿈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꿈들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쓴다.”
-카프카의 일기, 1911.10.2.-
'누벨바그'(New Wave, 새로운 물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히는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1930~2022)의 영화 ‘국외자들’이 상영한다는 소식에 영화관을 찾았다. 개봉 60주년과 고다르 별세 2주기를 맞아 국내에서 상영하는 것이었다. 고다르(Jean Luc Godard)는 존엄사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난치성 질환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살만큼 살았다”명확한 의식으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했으며(wanted to die with dignity) 조력자살(assisted suicide)로 숨졌다. 고다르의 대표작 “네 멋대로 해라”의 원제는 “숨의 끝”(À Bout de Souffle)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정치화다"라고 부르짖었던 고다르는 마지막까지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고 자신의 영화처럼, 정치적으로 떠났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 헐리우드의 방식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사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영화가 왜 의미가 있는 건지?” ‘이해’를 하려고 집중을 하려 했지만, 이내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그냥 꿈을 꾸는 것처럼, 일단 본다. 어려운 책들의 문장들의 말들을 단지 단어로서 읽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해석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공허한 꿈이었다.
상상이 공상이 되고, 환상이 되고, 망상이되는 것에는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간극만큼이나 다르다. 꿈같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기준은 현실에 근거하는가이다. 예술가들의 상상력은 창조와 관련이 깊다. 상상력이 현실을 지나치게 벗어날 때 우리는 초현실주의자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사진으로 표현한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의 1973년 작(作), ‘사물은 기묘하다’의 연작사진에서, 액자 속의 그림을 보고 있는 나는 다시 책속으로, 그리고 액자 속으로 들어간다. 무한히 반복되는 꿈의 구조이다. 자기 자신에서 시작해 다른 이들에게 나아가지만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선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무한반복성을 이야기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 <바톤 핑크Barton Fink>에서도 음습한 호텔방의 사진액자 장면이 나온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처럼, 비현실적인 일을 상상만 하던 월터는 결국 현실로 되돌아온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상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상상이 된다. 정치인들의 막말 던지기는 도대체 언제 막을 내리는 것인가. 일단 던져보고 아니면 말고 식의 발언들. 음모론을 추종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들. 편집증(편집성 인격장애) 환자들은 넘쳐난다.
-미국의 달 착륙은 NASA가 영화 제작 스튜디오에서 연출한 가짜였다.
-세계 각국 정부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은폐한다.
-몇몇 유명인의 죽음 관련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 마틴 루터 킹, 모차르트, 존 레넌, 존 F. 케네디 등.(노무현, 노회찬, 박원순의 죽음)
-기후위기는 없다. 지구온난화 관련 과학은 이념적·금전적 이유로 만들어졌다.
-비밀결사 일루미나티(또는 프리메이슨, 유대인)가 전 세계를 주무르고 있다.
-코로나19는 애초에 중국(또는 미국)의 어느 실험실(우한시Wuhan City)에서 생물무기로 개발됐다.
계엄령에 대한 ‘한동훈 암살 제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김어준의 발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믿거나 말거나이다.
현실과 상상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혼합한 사진가로서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n)과 에릭 요한슨(Erik Johansson)이 있다. 두 사진가의 작업방식은 암실과, 포토샵으로 다르지만, 그 초현실주의적 느낌을 표현한다는 면에서는 닮아 있다. 단일 네거티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면들의 네거티브에서 추출하여 혼합하는 방식의 포토몽타주이다. 율스만의 작업은 포토샵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 놓는 것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시곗바늘이 시계를 향해 달려가는데도 어느 시계도 정각을 알리지 않습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사진을 찍을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찍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무엇도 찍을 수 있어야 한다.”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n)
“우리를 제한하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순간을 담는 것보다 아이디어를 캡처하는 것의 문제이다(It's more about capturing the idea than about capture the moment).”
-에릭 요한슨(Erik Johans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