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3),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필립 K. 딕의 SF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1982년에 처음 개봉하여 비평과 흥행에서 실패하였으나 이후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과 더불어 SF 영화의 역사적인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미래를 탁월한 비주얼로 묘사하였고, 이 영화 이후에 나온 수많은 SF 작품, 특히 사이버펑크 장르의 작품들이 이 영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93년 이 영화는 미국 의회도서관에 의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미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아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선정, 보존되었다. 원작이 되는 소설과 영화는 기본적인 설정과 등장인물의 이름 외에는 거의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으며, 원작은 SF임에도 형이상적, 종교적인 요소가 강해 영화와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사건 흐름도 다르며 일부 장면과 대사만이 비슷하다.
“나는 인간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는 방금 전보다 더 짜증이 솟구쳤다. 이제는 전적으로 적대감마저 들었다.
아이렌이 말했다.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그 불쌍한 앤디들만 죽였다 이거겠지.”
“그러는 당신도 그렇게 가져온 현상금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쓰잖아. 뭐든지 순간적으로 당신의 관심을 끄는 물건에 써버릴 때 말이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기분 조절 오르간의 조종 장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돈을 저축했더라면.” 그가 말했다. “그랬더라면 우리도 지금쯤은 진짜 양을 한 마리쯤 사서, 위에 있는 가짜 양을 대신할 수도 있었겠지. 기껏해야 전기 동물이라니,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벌 수 있는 돈은 모두 벌었는데도.” 조종 장치 앞에서 그는 (분노의 기분을 없애주는) 시상 억제물질에 다이얼을 맞출지, 아니면 (말다툼에서 이기기에 충분할 만큼 그를 집요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시상 자극물질에 다이얼을 맞출지 잠시 머뭇거렸다. (P14-15)
아내와의 대화 때문에 그는 이미 시간을 허비한 다음이었다. 그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가기 위해 옷을 갖춰 입었다. 에이잭스 모델 마운티뱅크 납 국부보호대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전기양이 풀을 뜯는, 지붕 달린 옥상 풀밭으로 올라갔다. 그 정교한 기계 장치는 모의(模擬, simulated)된 만족감을 드러내면서 풀을 뜯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이 건물의 다른 세입자들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고 있었다.
물론 이곳 세입자들이 소유한 동물 중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전기 회로로 만들어진 가짜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굳이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이웃들도 그가 소유한 양의 진짜 움직임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무례한 행동은 없었다. “당신의 양은 진짜인가요?”라고 묻는 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의 치아나 머리카락이나 내부 장기가 검사를 통해 진짜인지 확인받았느냐고 묻는 것보다도 더 무례한 행위였다. (P20-21)
그에게 정말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말을 한 마리 갖는 것이었다. 사실은 말이 아니라 다른 어떤 동물이라도 좋았다. 가짜 동물을 소유하고 기르는 일은 사람의 사기를 점차 저하시키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관점에서, 진짜 동물이 없을 경우에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런 상황을 계속해나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자신이 동물이 있느냐 없느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게다가 아이랜은 분명히 이 일에 신경을 썼다. 그것도 아주 많이. (P23)
아울러 오늘날은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혹시 거기에서 누가 이기거나 지거나 했다고 치면) 누가 이겼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표면 대부분을 오염시킨 낙진은 어떠한 나라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었고, 어느 누구도(심지어 전시의 적들조차도) 그런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이하게도 올빼미들이 죽어나갔다. 희고 토실토실하며 깃털이 수북한 새들이 마당이고 거리고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모습은 그 당시만 해도 심각해 보인다기보다는 우스워 보였다. 황혼이 되기 전에는 밖에 나오지 않는 올빼미들이다 보니 사람들도 딱히 그놈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중세의 흑사병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즉 수많은 쥐들이 죽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의 전염병은 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P33)
TV에서 요란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남북전쟁 이전의 남북 주들의 전성기를 그대로 복제했습니다! 개인 시종으로나, 지칠 줄 모르는 농장 일꾼으로나, 주문 제작식 인간형 로봇을, 여러분의 특별한 요구에 맞춰서, 여러분을, 오로지 여러분만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로봇을, 여러분의 도착과 동시에 완전 무료로, 여러분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 구체적으로 요청한 사항대로 완성하여, 여러분께 드립니다. 현대 역사에서 인간이 고안한 것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대담한 모험에 함께할 이 충성스럽고도 고장 없는 동반자는 여러분께--” 이런 식의 광고가 계속되었다. (P35-36)
넥서스-6 안드로이드 기종은 지능이라는 측면에서 몇 종류의 인간 특수인조차도 능가한다는 점을 릭은 상기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형 넥서스-6 두뇌 장치를 장착한 안드로이드는 (거칠고, 실용적이고도, 솔직담백한 관점에서)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지만 열등한) 일부 인간들을 능가하여 진화한 셈이었다. 좋든 싫든 이것은 사실이었다. 일부의 경우에 하인들이 오히려 그 주인보다도 더 영리했다. 하지만 이에 맞춰 새로운 성취의 척도(예를 들어 보이트 캠프 감정이입 검사)가 나타나 판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순수한 지적 역량이란 면에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안드로이드라 하더라도, 머서교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융합에서 비롯되는 감각만큼은 결코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런 경험으로 말하자면 릭이, 사실상 다른 모든 사람이, 심지어 정상 이하의 닭대가리들조차도 어려움 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P53-54)
그러니 인간형 로봇은 단독형 포식자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했다.
릭은 안드로이드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편을 즐겼다. 그러면 그의 일도 바람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앤디를 퇴역시키는(즉 죽이는) 일은 머서가 내놓은 생명의 법칙을 위배하는 일이 아니었다. 너희는 오로지 살해자만을 살해할지니라. 머서는 감정이입 장치들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바로 그해 그들에게 말했다. 머서교가 점차 완전한 신학으로 발전함에 따라 ‘살해자들’에 대한 개념 역시 은근히 자라나게 되었다. 머서교에서 절대 악이란 저 비틀거리며 위로 올라가는 노인의 누더기 망토를 뒤로 잡아당기는 존재였지만, 그 사악한 현존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는 결코 분명하지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머서교 추종자는 자기가 들어맞는다고 생각한 곳 어디에서나 ‘살해자’의 모호한 현존을 마음껏 찾아낼 수가 있었다. 릭 데카드의 입장에서는 도주한 인간형 로봇이 딱 그러했다. 그런 로봇은 주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장착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으며, 다른 생명체의 성공에 대한 감정이입의 기쁨이라든지 또는 패배에서 비롯된 감정이입의 슬픔을 느끼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살해자’의 전형이었다. (P55-56)
릭이 말했다. “인간형 로봇도 다른 여느 기계와 비슷합니다. 이익이 되는 것과 위험이 되는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거죠. 매우 빠른 속도로 말입니다. 이익의 경우였다면, 그게 우리에게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위험의 경우라면.” 레이철 로즌이 말했다. “그럴 때면 당신이 이리로 찾아오시는 거고요. 그런데, 사실인가요. 데카드 씨. 당신이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이야기가요?” (P68)
또 그는 진짜 동물을 구해야 하는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내면에서 자신의 전기양을 향한 진정한 증오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그가 반드시 돌보아주어야만 하고, 신경 써주어야만 하는 놈이었다. 사물의 압제로군. 그는 생각했다. 그놈은 내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안드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놈은 다른 누군가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기 동물과 앤디 간의 유사성이라니. 전기 동물은 앤디의 하위 기종, 즉 상당히 열등한 로봇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면, 바꾸어 말해서, 안드로이드는 모조 동물이 고도로 발달하고 진화한 형태라고도 간주할 수 있었다. 양쪽 모두의 관점에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 (P72)
“당신은 현상금 사냥꾼이잖아요.” 레이철이 말했다. “레이저 총을 다룰 수도 있고요. 실제로 당신은 지금도 그런 총을 하나 갖고 있죠. 만약 자기 몸 하나 보호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넥서스-6 앤디 여섯을 어떻게 퇴역시킬 작정이죠? 그들은 그로지 사의 구형 W-4보다 훨씬 더 똑똑한데.”
“그건 제가 그들을 사냥하는 거니까요.” 그가 말했다. (P94)
“키플되어 있다고요?” 그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키플이란 쓸모없는 물건을 말해요. 홍보용 우편물이라든가. 성냥을 다 쓰고 남겨진 종이 껍데기라든가, 아니면 껌 포장지라든가, 아니면 어제 날짜의 자가(自家) 출력 신문처럼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면 키플은 자체적으로 번식하죠. 예를 들어 당신이 집 안에 키플을 조금이라도 남겨두고 잠을 자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게 두 배로 늘어나 있는 거예요. 그건 항상 점점 더 많아지죠.”
“그렇군요.” 젊은 여자는 뭔가 잘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키플의 제1법칙이란 게 있어요.” 그가 말했다. “키플은 비(非) 키플을 몰아낸다. 이른바 악화(惡貨)에 관한 그레셤의 법칙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이 아파트에는 키플과 싸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이곳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거군요.” 여자가 대신 이야기를 끝내주었다. “이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P105-106)
“어느 누구도 키플과 싸워 이길 수는 없어요.” 그가 말했다. “단지 일시적으로. 한 장소에서만 이길 수 있을 뿐이죠. 제 집 같은 경우가 그래요. 저는 그곳에 키플과 비(非)키플의 압력 사이에 일종의 평형 상태를 만들어놓았죠. 한동안은 유지되도록 말이에요. 하지만 결국 저는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겠죠. 그러면 키플이 다시 한번 그곳을 점령할 거예요. 그건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보편적인 원칙이죠. 우주는 전체적이고도 절대적인 키플화라는 최종 상태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가 덧붙였다. “물론 윌버 머서의 ‘오르기’는 예외로 봐야겠지만요.”
여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전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는데요.”
“머서교라는 게 따지고 보면 결국 그거잖아요.” 그는 다시 한번 어리둥절해졌다. “혹시 당신은 융합에 참여하지 않는 건가요? 감정이입 장치를 갖고 있지 않은 건가요?”
잠시 적막이 흐르고 나서야 젊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원래 갖고 있던 건 여기 가져오지 않았어요. 여기서 새로 하나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P107)
왜 버스터 프렌들리는 항상 머서교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걸까? 그를 제외하면 누구도 이런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UN도 승인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비에트의 경찰은 머서교 덕분에 시민들이 이웃의 곤경에 관해 더욱 신경 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범죄가 감소되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UN 사무총장 타이터스 코닝도 인류에게는 더 많은 감정이입이 필요하다고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다. 어쩌면 버스터는 질투가 났는지도 몰라. 이지도어가 추측했다. 물론, 그게 이런 현상을 설명해줄 거야. 그와 윌버 머서는 경쟁 중인 거지. 하지만 무엇을 놓고 벌이는 경쟁일까?
우리의 정신이겠지. 이지도어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서로 우리의 영적 자아를 장악하려고 싸우는 거야. 한편에는 감정이입 장치가, 다른 한편에는 버스터의 너털웃음과 즉석 조소가 있는 거지. 해니발 슬로트에게 그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그는 결심했다. 그게 사실인지 해니발 씨에게 물어보는 거야. 그라면 알겠지. (P119-120)
“그러면 대신 네놈의 약해빠진 목을 부러트리면 되겠군.” 안드로이드가 갖고 있던 장비를 내던지더니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릭의 목을 움켜쥐었다.
안드로이드의 두 손이 목을 파고드는 순간, 릭은 어깨의 권총 집에 들어 있던 (현행법상으로는 규제 대상인) 구식 권총을 발사했다. 38구경 매그넘 총탄이 안드로이드의 머리에 맞고 두뇌 장치를 터트렸다. 안드로이드를 작동하던 넥서스-6 장치가 산산조각 나면서, 자동차 안에 거세고도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파편 일부가 방사능 낙진처럼 릭을 덮쳤다. 퇴역당한 안드로이드의 잔해가 뒤로 쓰러지면서 자동차 문에 부딪쳤고, 그 반동으로 다시 그의 몸 위로 육중하게 쓰러졌다. 그는 정신없이 몸부림치며 안드로이드의 꿈틀거리는 파편을 털어냈다.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카폰으로 손을 뻗어서 경찰서로 연락을 취했다. “보고 좀 할까 하는데요?” 그가 말했다. “해리 브라이언트 경위님께 전해주세요. 제가 폴로코프를 잡았다고요.” (P146-147)
오랫동안 유지된 건물인 구 오페라 극장의 내부는 강철과 깎아낸 석재로 만든 거대한 고래 배 속이나 다름없었다. 극장에서는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메아리치는 소리들은 요란했지만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들려오는 음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의 1막에서 마지막 장이었다. 무어인의 노예들(다시 말해 코러스)은 노래를 약간 빠르게 불렀고, 그로 인해 마술 종의 단순한 리듬이 오히려 무효로 돌아가버렸다.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는 <마술 피리>를 좋아했다. 그는 특별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편안하게 앉았다. 환상적인 깃털 옷을 걸친 파파게노가 파미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생각만 해도 릭의 눈에는 늘 눈물이 고였다.
용감한 사람 누구든
그 종을 찾기만 하면
그의 적은 누구라도
손쉽게 사라져버리리.
글쎄, 릭은 생각했다. 현실 생활에서는 적들을 손쉽게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 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모차르트가 <마술 피리>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과 30대에)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빈민 묘지에 비석도 없이 묻히고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 즉 자기가 짧은 생애를 이미 다써버렸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도 그런지 몰라. 릭은 리허설을 지켜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리허설은 끝날 것이고, 공연 역시 끝날 것이며, 가수들 역시 죽을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이 음악의 마지막 악보조차도 이런저런 식으로 파괴될 거야. 마지막으로 ‘모차르트’라는 이름도 사라질 것이고, 낙진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겠지, 만약 이 행성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또 다른 행성에서는 그럴 거야. 우리도 잠깐 동안은 이를 회피할 수 있었지. 마치 그 앤디들이 나를 회피하고, 유한하게나마 조금 더 존재할 수 있었듯이, 하지만 내가 그들을 잡거나 아니면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이 그들을 잡게 되겠지. 그는 문득 깨달았다. 어떤 면에서는 나 역시 엔트로피라는 항상 파괴 과정의 일부인 셈이야. 로즌 조합은 창조하고, 나는 파괴하지. 어쨌거나 그들이 보기에는 그럴 거야. (P152-154)
릭이 말했다. “저는 안드로이드가 아니에요.”
“당신이 저한테 하고 싶다는 검사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전의 상태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받아본 적이 있나요?”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요. 제가 경찰서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요.”
“어쩌면 그것도 가짜 기억일 수 있어요. 가짜 기억을 갖고 돌아다니는 안드로이드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릭이 말했다. “제 상관들이 그 검사에 관해 알고 있어요. 그건 의무 사항이니까요.”
“어쩌면 한때 당신처럼 생긴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거죠. 당신의 상관들도 그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P159)
두 사람이 올라타자 순찰차는 옥상에서 떠올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뭔가가 평소와 같지 않았다. 릭은 문득 깨달았다. 크램스 경관은 엉뚱한 방향으로 차를 몰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서 건물은,” 릭이 말했다. “북쪽인데요, 롬바드요.”
“그건 옛날 경찰서 건물이죠.” 크램스 경관이 말했다. “새로 지은 경찰서 건물은 미션 지구에 있어요. 옛날 건물은 무너져가고 있죠. 폐허라고요. 거긴 벌써 몇 년째 사용되지 않았어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입건되었던 게 그렇게 오래전인 겁니까?”
“나를 거기로 데려다줘요.” 릭이 말했다. “롬바드 가로요.”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안드로이드들이 협동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성취했는지를 말이다. 이렇게 차를 타고 갔다간 그도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끝장이었다. 데이브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아까 그 여자는 제법 매력적이더군요.” 크램스 경관이 말했다. “물론 저런 의상을 입고 있으면, 그 몸매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죽이게 괜찮아 보이더군요.”
릭이 말했다. “당신이 안드로이드라고 순순히 시인하지 그럽니까.”
“내가 왜요? 나는 안드로이드가 아니에요. 당신이 하는 일이 그겁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러면서 저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라고 중얼거리는 거요? 루프트 양은 겁에 질려 있더군요. 그 양반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으니 다행이었죠.”
“그럼 나를 롬바드에 있는 경찰서 건물로 데려가주든가요.” (P172-173)
릭은 경계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딱히 안 될 이유를 찾지 못하겠군요. 다만 우리 경찰서에는 현상금 사냥꾼이 벌써 두 명이나 있어요.” 이 사람에게 그 말을 해주어야만 해.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비윤리적이고도 잔인한 일이야. 레시 씨, 당신은 안드로이드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도와주었으니까. 이건 내가 당신에게 주는 보답이지. 당신은 우리 둘이 공통적으로 혐오하는 바로 그것이야. 우리가 파괴하기 위해 전념하는 바로 그것 자체라고.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필 레시가 말했다.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라고요. 무려 3년 동안이나 전 안드로이드들의 지시를 받으며 일한 거군요. 왜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왜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만큼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요?”
“어쩌면 이 일이 실제로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아주 최근에 와서야 안드로이드가 이 건물에 침투한 것일 수도 있죠.” (P195-196)
“루프트 양.” 릭이 말했다. “이쪽은 레시 씨입니다. 필 레시, 이쪽은 아주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루바 루프트 양이고요.” 루바에게 그가 말했다. “저를 체포한 그 제복 경찰관은 안드로이드였어요. 그의 상관도 마찬가지였고요. 혹시 갈랜드 경감이라고 아십니까? 아니, 알고 계셨습니까? 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들은 한 우주선에 같이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말이에요?”
“당신이 신고했던 경찰서.” 필 레시가 그녀에게 말했다. “미션 지구에 있는 곳 말이에요. 거기는 당신에 무리가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조직체 같더군요. 심지어 인간 현상금 사냥꾼을 직원으로 고용할 정도로 자신만만했고요. 분명히--”
“당신이었군?” 루바 루프트가 말했다. “당신도 인간은 아니지. 내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이야. 당신도 나처럼 안드로이드니까.” (P203-204)
양손 모두 무감각한 상태로, 그는 호버카를 몰고 하늘로 날아올라 자기 아파트와 아이랜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녀는 화를 내겠지. 그가 속으로 말했다. 그녀는 걱정을 할 거야. 책임 때문에 말이야. 이 녀석을 관리하는 건 대부분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그녀의 몫이 될 거야. 다시 한번 그는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아파트 옥상에 착륙하고 나서도 그는 한참을 차 안에 앉아서, 머릿속에서 그럴듯한 말이 잔뜩 들어 있는 이야기를 하나 엮어냈다. 이건 내 일 때문에 필요한 거야. 그가 생각했다. 최후의 핑계였다. 위신 때문이지. 우리도 더 이상 전기양으로 버틸 수는 없어. 그놈이 내 사기를 떨어트리기 때문이야. 그녀에게 이 정도로 말해주면 되겠지. 그는 결심했다.
차에서 내린 다음, 그는 뒷좌석에 놓여 있던 염소 우리를 꺼냈고, 씩씩거리면서 간신히 옥상에 내려놓았다. 이동하면서 줄곧 이리저리 흔들려서인지, 염소는 똑똑하게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면서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P258)
“그들은 우리의 기쁨을 갖게 될 거야.” 릭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잃어버리고 말겠지. 우리의 느낌을 그들의 느낌과 맞바꾸는 거야. 우리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 거라고.”
감정이입 장치의 화면에 형체가 없는 밝은 색깔의 빛줄기가 흘러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그의 아내는 두 개의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우리가 느끼는 것을 진짜로 잃어버리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그걸 마음속에 분명하게 간직하는 한에는 말이야. 당신은 융합의 요령을 제대로 숙달한 적이 없었지, 안 그래, 릭?” (P263)
“나는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을 만났어.” 릭이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 상당히 난폭한 사람이었는데, 앤디들을 파괴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와 함께 있었던 다음부터,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들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어. 무슨 말인가 하면, 내 나름대로이기는 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 사람이 하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이 이야기, 나중에 하면 안 돼?” 아이랜이 말했다.
릭이 말했다. “나는 검사를 받았어. 질문을 한 가지 했지. 그리고 확인했어. 내가 안드로이드와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했다는 걸.” (P264)
한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지치고 고통에 시달린 두 눈에는 서글픈 빛이 떠올라 있었다.
“머서.” 릭이 말했다.
“나는 자네의 친구라네.”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만 하지. 자네는 그걸 이해할 수 있나?” 노인이 양팔을 벌렸다.
“아뇨.” 릭이 말했다.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에겐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자네를 구원할 수 있겠나?” 노인이 말했다. “내가 나 자신조차도 구원할 수 없다면?” 그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모르겠나? 이 세상에 구원이라곤 없어.”
“그렇다면 이 일은 무엇을 위한 거죠?” 릭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계신 거죠?”
“자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지.” 윌버 머서가 말했다. “자네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기에 자네와 함께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네. 가서 자네의 임무를 행하게. 비록 그게 잘못이라는 걸 자네도 알기는 하겠지만 말이네.”
“왜죠?” 릭이 말했다. “왜 제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차라리 그 일을 그만두고 이민을 가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어디로 가든지 자네는 잘못을 행할 수밖에 없을 걸세. 그것이야말로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니까. 즉 자네는 자신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 그것은 궁극의 어둠이고, 창조의 패배지. 이것이야말로 저주의 작용이라네. 모든 생명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저주지. 우주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고.”
“해주실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인가요?” 릭이 말했다. (P270-271)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릭은 속으로 물었다. 그건 분명해. 그들이 때때로 주인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치는 이유도 그것이니까. 더 나은 삶, 노예 신세가 아니라. 루바 루프트처럼 말이야. 〈돈 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을 노래하는 거지. 황량하고 바위투성이인 지표면을 힘들게 오가는 것 대신에 말이야. 근본적으로 거주가 불가능한 식민 세계에 사는 것 대신에 말이야. (P278-279)
“사실 모르겠어요. 그걸 내가 알 도리는 전혀 없죠.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그건 그렇고 태어난다는 것은 또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는 태어나지 않아요. 자라지도 않죠. 병에 걸리거나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개미처럼 닳아서 망가지죠. 실제로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닌 키틴질반사 기계장치죠.” 그녀가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살아 있지 않아요!” (P292)
“나중에도 안드로이드랑 같이 침대에 누울 생각이 있나요?”
“상대방이 여자라면. 그리고 당신과 닮았다면.”
레이철이 말했다. “혹시 나 같은 인간형 로봇의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요? 내가 존재한 지는 2년째예요. 당신이 보기에는 내 수명이 얼마나 더 남았을 것 같아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가 대답했다. “대략 2년쯤 더 남았을까.”
“그들도 그 문제만큼은 해결하지 못했어요. 내 말은 전지 교체 말이에요. 영구적인, 또는 어느 정도 반영구적인 재사용 말이에요. 음, 세상일이 다 그렇죠.” 그녀는 열심히 몸을 말리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미안해요.” 릭이 말했다.
“빌어먹을.” 레이철이 말했다. “애초에 그 이야기를 꺼낸 내가 미안하죠. 어쨌거나 그것 때문에 인간은 안드로이드와 함께 내빼서 같이 살 엄두를 못 내는 거라고요.” (P296-297)
“앨 제리라고요.” 버스터 프렌들리가 말했다. 다시 화면에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런, 이런. 이 노인으로 말하자면, 그 전성기에조차도 본인이나 우리가 딱히 기억할 만한 수준의 업적을 내놓지는 못한 인물이군요. 앨 제리는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다 재미조차 없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무려 시리즈로 만들었습니다. 제작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에요. 그게 실제로 누군지는 오늘날까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머서교의 경험을 옹호하는 자들이 종종 하는 말에 따르면, 윌버 머서는 인간이 아니라고, 그는 사실 다른 별에서 온 원형적인 초월적 실체라고 합니다. 음, 어떤 면에서 이 주장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군요. 즉 윌버 머서는 인간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기어오르는 세계는 싸구려의, 할리우드의, 이미 오래전에 키플로 변해버린 흔한 방음 녹음실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거짓말을 태양계에 처음으로 퍼트린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건 영영 알 수 없을걸.” 이름가르트가 중얼거렸다.
버스트 프렌들리가 말했다. “그건 저희도 영영 알 수 없을 겁니다. 이 사기 행각의 배후에 놓인 특정한 목적 역시 헤아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기 행각입니다. 머서교는 사기 행각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로이 바티가 말했다. “그건 분명하잖아. 머서교가 존재하게 된 것은--”
“하지만 이걸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버스터 프렌들리가 계속 이야기했다. “머서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음, 만약 우리가 그 수많은 추종자들의 말을 믿는다면, 그 경험은--”
“그건 결국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이입인 거지.” 이름가르트가 말했다. (P314-315)
죽은 돌들. 낙진에 뒤덮인 채로 말라서 죽어가는 잡초들. 이런 것들은 그에 관해서나 그들 자신에 관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회고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첫 번째 돌이 날아와 그의 사타구니 근처에 맞았다. 고무나 물렁물렁한 스티로폼이 아니었다. 그 고통, 그 꾸밈없고 실제적인 형태로부터 절대적인 고립과 고통에 관한 최초의 인식이 그의 몸 전체로 전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뭔가에 떠밀려서(그를 떠민 가축 몰이용 막대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진짜여서 차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르기’를 재개했다. 위로 굴러 올라가는군. 그가 생각했다. 마치 돌멩이처럼. 나는 돌멩이가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내 의지라고는 없이. 아무것도 의미함이 없이.
“머서.”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앞에 그림자처럼 시커먼 형체가 꼼짝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윌버 머서! 당신인가요?” 이런, 세상에, 그는 깨달았다. 저건 내 그림자야. 여기서 벗어나야만 해. 언덕을 내려가야 해! (P346-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