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틱 리버> 200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003년 작품. 숀 펜, 케빈 베이컨, 팀 로빈스, 로렌스 피쉬번 같은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 열연했다. 세 남자의 엇갈린 운명. 과거 범죄조직의 일원이었지만 현재는 그 생활을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는 지미는 그의 딸 케이티의 죽음으로 죄책감과 복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진하고, 데이브는 어린시절 겪은 성폭행 사건으로 그의 삶에 깊은 트라우마로 인한 내면적 갈등을 하는 인물로, 숀은 경찰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미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느끼는 한계 사이에서 법과 도덕적 갈등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1]
숀 디바인과 지미 마커스가 어렸을 때, 그들의 아버지들은 콜먼 사탕 공장에서 일했고 일을 마치면 늘 따끈한 초콜릿 향기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냄새는 그들의 옷과 침대, 그리고 자동차 시트의 비닐 등받이에까지 단단히 배어 버렸다. 숀의 집 주방에 선 퍼지시클 냄새가 났고, 욕실에선 콜먼 츄츄바 냄새가 났다. 그들은 열한 살이 되던 해부터 단것이라면 치를 떨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 후로 그들은 평생 커피는 블랙으로만 마셨고, 디저트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지미의 아버지는 토요일마다 디바인의 집에 들러 숀의 아버지와 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때마다 지미도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한 병이 여섯 병이 되고, 두어 잔의 스카치위스키까지 곁들여질 때면 지미와 숀은 뒷마당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가끔 여자 같은 작은 손과 흐릿한 눈을 가진 데이브 보일을 끼워 주기도 했다. (P13)
“당분간은 그렇게 지내도록 해. 그리고 숀?”
“네.”
“네 엄마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오늘 일 때문에 네가 지미와 어울려 노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그 앤 나쁘지 않아요. 그저......”
“그 애가 나쁘다는 얘긴 하지 않았어. 그냥 무모하게 날뛸 뿐이지. 그동안 네 엄마는 속 썩을 일이 너무 많았어.”
그가 ‘무모하게’라는 말을 했을 때 숀은 아버지의 얼굴에서 뭔가가 번뜩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빌리 디바인이 그의 눈에 아른거린 것이었다. 숙모와 삼촌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으며 어렴풋이 알게 된 남자. 그들은 그를 옛날 빌리라고 불렀다. 언젠가 콤 삼촌은 미소를 띠며 그를 ‘싸움꾼’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숀이 태어나기 전에 사라졌다는 빌리 디바인. 행방불명된 그의 빈자리는 이제 두껍고 민첩한 손가락으로 무수히 많은 새집을 만드는, 조용하고 사려 깊은 숀의 아버지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가 했던 얘기 명심해.” (P20-21)
지미의 예상은 빗나갔다.
데이브 보일은 실종된 지 4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순찰차 앞자리에 타고, 그를 데려온 두 경관은 그가 사이렌을 가지고 놀 수 있게 해 주었고, 계기반 밑에 붙어 있는 산탄총의 개머리를 만져 보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들은 데이브에게 명예 배지를 주었고, 레스터 가에 자리한 그의 어머니 집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 댔다. 유진 쿠비아키 경관이 데이브를 번쩍 안고 차에서 내려 인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데이브의 어머니는 흐느끼고, 낄낄거리고, 몸을 부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그날 레스터 가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P43)
지미는 바로 그런 풍경이 좋았다.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거나,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려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도 이런 분위기에 잠겨 있다 보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운으로 느껴졌다.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1년간 묵혀 두었던 고통과 불만을 훌훌 털어 낼 수 있었다. 갈라진 입술과 일자리 걱정, 그리고 원한까지도, 그리고 마치 그들 인생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순간을 즐겼다. 성 패트릭의 날이나 버킹엄의 날, 독립기념일, 그리고 9월까지 레드삭스가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지금처럼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이 동네는 맹렬한 흥분 상태에 종종 빠지곤 했다.
바로 그런 점은 곶과 달랐다. 곶에서도 블록 파티가 열리곤 했지만 항상 오랜 계획을 필요로 했고, 주민들로부터 허가도 받아야 했다. 그뿐 아니라, 주차된 차와 남의 집 잔디가 훼손되지 않도록 스스로 무척 주의를 기울였다. ‘조심해요,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P47)
지미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부모님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그녀는 항상 지미가 볼 수 없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그럴 때면 두 번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화를 내며 살았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언제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해 30분 전 자신을 웃게 만든 지미의 말을 트집 잡아 또 한 차례의 구타를 퍼붓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아무리 그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지미는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골고루 닮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긴 침묵과 아버지의 욱하는 성질. (P51)
데이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혹시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아해 했다(얼굴에 자신이 볼 수 없는 자국이라도 나 있진 않은 건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은 그를 몹시 괴롭혔다. 차에 타고 있던 그 남자들처럼, 왜 그들은 그를 찍었을까? 그들은 그가 순순히 차에 올라타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지미와 숀이라면 분명 저항을 심하게 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데이브에겐 오직 그런 의문들뿐이었다. 그 남자들은(그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기가 쉽지 않았다.) 숀과 지미가 보일 반응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숀은 비명을 지르며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을 것이었고, 지미는, 정신을 잃을 만큼 얻어맞고 나서야 순순히 차에 올랐을 것이다. 커다란 늑대도 차를 몰고 나간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을 때 이렇게 말했었다. (P55)
그날 밤, 일을 끝마친 후 지미 마커스는 처남, 케빈 새비지와 워런 탭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들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밖에서 길거리 하키를 하고 노는 아이들을 내다보았다.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어둠에 묻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워런 탭은 가축 사육장 지구의 샛길에 숨어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하키를 하며 놀기엔 최적의 공간이 되어 주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가로등이 들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밤 경기를 하기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케빈은 좋은 벗이 되어 주었다. 지미와 마찬가지로 말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바닥을 구르는 고무공과 나무 스틱 부딪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고무공이 자동차의 휠캡에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서른여섯 살이 된 지미 마커스는 토요일 밤을 조용히 보내길 좋아했다. 요란한 소음이나 발 딛을 틈 없이 꽉 찬 술집,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의 술주정은 질색이었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지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아내, 그리고 세 딸들과 살고 있었다. 미치광이처럼 살던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인생의 정연한 페이스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느긋하게 즐기는 맥주, 아침 산책,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야구 경기 중계. (P73)
사실 데이브 보일은 그날 밤에 외출을 계획하지 않았었다.
고달팠던 일주일을 마감하는 토요일 밤이었지만 그는 화요일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집에서 조용히 마시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최소한 리모컨만큼은 맘껏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데이브 보일의 인생을 흔들어 놓은 운명의 장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에게 주어지는 운도 대부분 불운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길잡이의 손길이라기보다 언짢은 이끌림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어딘가 구름에 걸터앉아 있는 운명에게 누군가가 말한다. ‘심심하니, 운명아?’ 운명은 이렇게 대꾸한다. ‘조금, 그냥 데이브 보일이나 괴롭혀 볼까?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뭘 해 볼까?’
그래서 데이브에겐 운명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그 토요일 밤, 운명은 생일을 자축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데이브의 사정을 조금 봐 주었던 것인지도. 운명은 그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약간의 울분을 방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운명이 말한다. ‘세상을 향해 힘껏 휘둘러 봐. 데이브. 이번엔 세상이 네게 반격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마치 루시가 군말 없이 찰리 브라운을 위해 풋볼 공을 잡아주듯.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계획되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데이브는 마치 배심원단에게 말하듯 텅 빈 주방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제발 내 말을 믿어 줘요. 이건 전혀 계획된 일이 아니었어요.” (P75-76)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데이브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로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그녀와 마주친 그가 몹시 당황해 했다. 그녀가 변기에서 일어서자 그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녀가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발이 문설주에 부딪쳤다.
“그냥 좀 베었어.”
“네?”
“좀 베었다고.”
“데이브, 맙소사.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가 셔츠를 걷어 올렸고, 셀레스테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당장 병원에 가 봐야겠어요.”
“아냐, 아냐.”
그가 말했다.
“별로 깊지 않아. 그냥 출혈이 좀 심했을 뿐이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다시 한 번 들여다보니 상처의 깊이는 0.3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의 길이는 꽤 길었다. 출혈도 심했고, 셔츠와 목을 흥건히 적신 피가 전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누가 이랬어요?”
“어떤 미친 깜둥이 녀석이 그랬어.”
그가 벗은 셔츠를 세면대 위로 던지며 말했다.
“여보. 큰일 났어.”
“네? 왜요?”
그가 눈이 휘둥그레진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가 먼저 내게 주먹을 날렸어. 그래서 나도 반격했지,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
“당신도 주먹을 휘둘렀나요, 데이브?”
그가 물을 틀고 머리를 세면대에 밀어 넣은 채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 너무 놀랐던 것 같아. 너무 당황했었다고. 그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어.”
“여보.......”
“난도질을 해 놓고 왔어. 셀레스테. 옆구리에 칼날이 느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흥분했지. 이해할 수 있겠어? 그를 밀쳐 내 바닥에 눕혀 놓고 그의 위에 올라탔어. 그리고 그냥 나도 모르게 마구 휘둘러 댔던 거야.”
“그럼 정당방위잖아요.”
그가 아마도 그럴 거라는 식의 제스처를 해 보였다.
“법정에선 그렇게 보지 않을 거야. 아마도.”
“이해가 안 돼요. 여보.”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들려줘요.” (P99-101)
숀 디바인의 일요일은(일주일간의 정직 후 일을 다시 시작한 첫날) 꿈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명종 소리에 이어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아기가 자궁을 쑥 빠져나오듯. 솔직히 정직 당한 후로 다시는 복귀 명령이 내려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꾼 꿈을 상세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 상관없는 몇몇의 자세한 토막의 기억이 전부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이야기 식의 흐름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의 거친 구성은 마치 면도날처럼 그의 뒤통수를 후벼 댔다. 덕분에 그는 오전 내내 들뜬 기분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그의 아내, 로렌도 그의 꿈속에 등장했었다. (P134)
두 명의 아이가 그녀의 차를 발견했다. 그들이 911에 신고했다. 전화로 신고한 아이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자신이 목격한 것을 와르르 쏟아 냈다.
“차 안에 피가 흥건해요. 아, 문은 열려 있고요. 그리고 아......”
911 신고 접수원이 끼어들며 말했다.
“차의 위치가 어디니?”
“평지예요.”
아이가 대답했다.
“펜 공원 근처요. 나랑 친구랑 발견했어요.”
“거기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시드니 가예요.”
아이가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차 안에 피가 묻었고, 문도 열려 있다고요.”
“얘야, 네 이름은 뭐니?”
“그녀의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
아이가 친구에게 말했다.
“날 ‘얘야’라고 불렀어.”
“얘야.”
신고 접수원이 말했다.
“네 이름을 물었잖아. 넌 이름이 뭐니?”
“우린 그냥 갈래요.”
아이가 말했다.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
아이가 전화를 끊었다. 신고 접수원의 모니터에 그것이 이스트 버킹엄 평지의 킬머와 나우셋 가 코너에 자리한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펜 공원의 시드니 가 쪽 입구로부터 약 80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그 정보를 지령실에게 전했고, 지령실은 경찰을 시드니 가로 보냈다. (P142-143)
숀이 운전석 문에 붙은 스피커에 묻은 혈흔을 들여다보았다. 검붉은 피는 이미 많이 응고된 상태였다. 그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살짝 틀었다. 핸들 윗부분에도 검은 혈흔이 보였다. 길고 넓은 세 번째 혈흔은 운전석 비닐 시트 어깨 부분에 나 있는 총알 구멍에 묻어 있었다. 숀이 다시 몸을 돌려 문 너머의 잡초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움직여 문의 바깥쪽 면을 들여다보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흠집이 보였다.
그가 화이티를 올려다보았고, 화이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범인은 아마 차의 밖에 서 있었을 거야. 마커스 양은, 만약 그녀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면, 문으로 그를 받은 거야. 그가 총을 쏘았고, 그녀가 맞은 거지. 어깨 부분에 말이야. 아니면 이두근 쪽에, 그녀는 차에서 내려 도망치기 시작했어.”
그가 누군가의 발에 밟혀 짓눌려진 잡초를 가리켰다.
“그들은 잡초를 밟으며 공원으로 들어갔을 거야. 그녀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던 것 같진 않아. 핏자국이 많지 않은 걸 보면.” (P149)
화이티가 숀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네가 그녀의 아버지를 안다고 했지? 젠장. 그 불쌍한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테지.”
숀이 고개를 돌려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협수로 쪽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살 한줄기가 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렸다. 새의 울음소리는 숀의 귀 안으로 스며들어 그의 뇌를 자극했다. 갑자기 열한 살 시절. 그들이 거의 차를 훔쳐 탈 수 있었던 때의 지미 마커스의 씁쓸한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25년의 세월이 마치 텔레비전 광고 흐르듯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기라도 한 듯. 숀은 지치고, 진저리나고, 속상해 하던 지미 마커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것을 떨쳐 내려 그는 재빨리 로렌을 떠올려 보았다. 긴 갈색 머리를 흔들어 보이며 오늘 아침 그의 꿈속을 수놓았던 로렌을, 그는 바다 냄새를 풍기던 로렌을 생각하며 당장이라도 그 꿈으로 이르는 터널 안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P151)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한 모금 빨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수백 차례에 걸쳐 연습한 대로 그녀에게 자신의 다짐을 들려주었다.
“앞으로 딸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거야. 알겠니? 그 애가 다시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할 거라고. 어머니도 많이 편찮으셔.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숨을 거두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들은 내 딸을 주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낼 거야. 디어 아일랜드처럼 쓰레기 같은 곳에 말이야. 난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아. 그게 다야. 피 속을 흐르든, 밖으로 뿜어져 나오든, 나는 더 이상 범죄엔 손을 대지 않을 거야.”
지미가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는 그녀의 시선을 주시했다. 그녀는 그의 해명에 무슨 결점이라도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혹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는 자신이 그녀의 눈에 떳떳하게 비쳤으면 하고 바랐다.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고대해 왔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들려준 말들도 꽤 많은 연습 기간을 거쳐 탄생된 것이었다. 그가 한 말은 대부분 진실이었다. 이제 그는 아나베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 밤, 미스틱 강 주변의 이미지를 외면하려 애썼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턱 밑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구걸하는 남자. 드릴처럼 그의 머리를 쑤시고 들어오는 이미지.
아나베스가 담배를 물었고, 그가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사실 옛날부터 오빠를 짝사랑해 왔어요. 그 사실, 알고 있었나요?” (P168-169)
지미는 그 잔인한 확신이 못이 되어 구두 밑창을 뚫고 들어와 그로 하여금 최대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도록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어붙은 듯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쌩하니 내달려 나가기 시작하는 밴을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대포로 쏘아 올려진 듯한 그 굵고, 차가운 못들은 이제 그의 가슴을 파고들어와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꺼풀도 이미 못으로 단단히 고정이 되어 있었다. 밴이 저만큼 멀어졌을 때 그것이 그동안 막아서고 있던 작은 차 한 대가 지미의 눈에 들어왔다. 많은 경관들이 우르르 모여 지문 채취를 하고, 사진을 찍고, 또 유심히 들여다보며 비닐봉지에 담긴 증거물을 서로에게 건네던 바로 그 차.
그것은 케이티의 차였다.
모델만 같은 차가 아니었다. 그냥 비슷해 보이는 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차였다. 오른쪽 범퍼에 옴폭 팬 자국부터 깨진 오른쪽 헤드라이트까지.
“맙소사, 지미, 지미? 지미! 날 좀 봐. 자네 괜찮나?” (P203)
“맞아, 그랬어. 경찰의 절반에 가까운 인력이 투입되었어. 지미. 주 경찰청과 보스턴 경찰서에서 말이야. 헬리콥터도 두 대나 띄웠고, 보트 두 대도 협수로를 샅샅이 뒤지고 있어. 반드시 네 딸을 찾아낼 거야. 하지만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알아듣겠어?”
지미가 연석에 서 있는 척을 돌아보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공원까지 이어진 잡초 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수부들이 왜 내 딸을 찾고 있지. 숀?”
“그냥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있을 뿐이야. 지미. 물속을 뒤지려면 어쩔 수 없잖아.”
“내 딸이 물속에 있어?”
“그냥 실종되었을 뿐이야. 지미. 그뿐이라고.”
지미가 잠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공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조깅 코스를 따라 걸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케이티를 보고 싶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공원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일이 시끄러워지길 원해?”
지미가 물었다.
“사랑하는 딸을 찾아보겠다는 나와 새비지 형제들을 모두를 굳이 그렇게 막아야 하겠어?” (P211-212)
몇 분 후, 그녀는 배수관 전체를 자신 앞, 주방 바닥에 일렬로 늘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머리와 셔츠는 이미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하지만 성공의 기쁨에 그녀는 힘든 줄도 몰랐다. 마치 거세게 반항하는 명백한 남자와 일 대 일로 당당히 겨루어 멋지게 때려눕히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쌓인 걸레 속에서 그녀는 마이클의 작아진 셔츠를 찾아냈다. 그것을 비틀어 파이프 안으로 쑤셔 넣어 내면을 닦아 냈다. 만족할 때까지 같은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한 후 셔츠를 작은 비닐봉지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파이프와 클로록스 표백제를 들고 뒤뜰 베란다로 나와 파이프를 문질러 닦았다. 사용한 표백제는 지난해 죽은 풀꽃이 여전히 꽂혀 있는 화분 속의 마르고 흐트러진 땅에 뿌려졌다. 어차피 버릴 것이었으니.
그녀가 파이프를 다시 끼웠다. 뺄 때보단 훨씬 수월했다. 트랩 마개도 원래대로 끼워 놓았다. 그녀가 데이브의 옷을 담아 둔 쓰레기 봉지를 꺼내 마이클의 누더기가 된 셔츠를 집어넣었다. 플라스틱 양동이의 내용물은 변기에 따라 부었고, 종이 타월로 깔끔히 뒷정리도 해 놓았다. 종이 타월 역시 쓰레기 봉지로 직행했다.
그게 전부였다. 증거.
적어도 그녀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증거는 그것뿐이었다. 만약 데이브가 거짓말을 했다면, 칼에 대해, 여기저기 남겨 두었을 지문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목격자에 대해,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벽히 끝마쳐 놓았다. 어젯밤 그가 집으로 돌아온 후로 자신에게 던져진 모든 난제의 처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P219-220)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계속 전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정규방송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셀레스테가 협수로를 몇 번 바꾸었다. 하지만 다른 방송국에선 아직 그 사건을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협수로를 다시 골프 경기 중계에 맞추고 볼륨을 높였다.
평지의 누군가가 실종되었다. 그녀의 차는 시드니 가에 버려졌다. 그리고 경찰은 이례적으로 대규모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주 경찰청과 시 경찰국의 차량들이 시드니 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여자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저렇게 난리법석을 피우다니, 그 차 안에 뭔가 심상치 않은 단서가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 그 기자가 뭐라고 했더라?
살인 사건을 짐작케 하는 단서들. 맞아, 바로 그거였다.
피,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피가 발견된 것이었다. 증거. 그녀가 비틀어진 채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비닐봉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데이브.’ (P223)
가끔 사건에서 가장 처참한 것이 피해자가 아닐 때도 있었다. 이미 그들은 숨져 있었으니까. 그보다 더 처참한 것은 그들이 남기고 간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엄청난 충격에 가슴이 찢어지고, 남은 삶 내내 크나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몸 안에 오직 피와 내장만을 담아 둔 채, 살다보면 이런 참혹한 일도 생길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만을 가슴에 품고.
바로 지미 마커스처럼. 숀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몰랐다. 네 딸은 죽었어. 지미, 누군가가 죽였다고. 지미, 넌 이미 아내를 잃었지. 젠장, 짐, 그거 알아? 하느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 우리 모두는 묘비를 하나씩 빚지고 있고, 때가 오면 차례로 그것을 돌려줘야 한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중에 또 보자고. (P230)
“그 앨 찾았어? 내 딸이 맞아?”
지미가 소리쳤다.
“맞느냐고?”
숀이 한동안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지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곧 지미의 눈초리에서 맹렬함이 사라졌다. 숀은 지미의 얼굴에서 그가 자신이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미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침이 마구 튀어나왔다. 또 다른 경관이 언덕을 내려와 지미를 붙들었고, 숀은 어렵게 몸을 돌렸다. 지미의 목쉰 비명 소리는 날카롭거나 음조가 높진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새어 나와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릴 뿐이었다. 숀은 지난 몇 년간 그와 비슷한 비명을 피해자의 부모들로부터 종종 들어왔었다. 그들의 비명에선 항상 애처로운 간청이 느껴졌다. 제발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해 주기를 신에게 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미의 비명에선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을 쫓고, 펜 협수로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 비명 속엔 오직 사랑과 분노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숀이 다시 들어가 케이티 마커스를 내려다보았다. 새로 들어온 코놀리가 그의 옆으로 올라와 말없이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지미 마커스의 목은 점점 더 쉬어가고 있었다. 마치 숨을 들이쉴 때마다 깨진 유리 조각을 한 주먹씩 빨아들이고 있는 듯. (P239)
“그러지 마, 내가 미쳤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지 말라고. 난 미치지 않았어. 쇼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알았어, 짐.”
“난 그저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알았어? 우리 인생 말이야. 하나가 잘못 되면 나머지 모든 것들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댈러스에 비가 내려 케네디가 컨버터블을 타지 못했다면? 스탈린이 계속 신학교에 머물러 있었다면? 너와 내가, 숀. 우리가 그때 데이브 보일과 함께 그 차에 올라탔었더라면?”
“뭐?”
화이티가 말했다.
“무슨 차 말이지?”
숀이 손을 들어 보이며 지미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정말? 만약 우리가 그 차에 올라탔더라면. 우리 인생은 많이 바뀌었을 거야. 내 첫 번째 아내, 마리타, 케이티의 어머니 있지?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어. 눈부셨다고. 왜 라틴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잖아. 정말 매혹적이었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어. 보통 배짱이 아니고선 그녀에게 접근도 할 수 없었어. 내겐 그만한 배짱이 있었지.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열여섯 살 때의 일이야. 거칠게 없었던 때 말이야. 배짱 좋게 그녀에게 다가가 같이 데이트나 하자고 했어. 그리고 1년 후, 맙소사. 난 겨우 열일곱 살이었는데. 아직 어린애였다고. 우린 결혼을 했고, 케이티를 낳았어.”
지미가 딸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내 말은 바로 이거야. 숀. 우리가 열한 살이었던 그때, 만약 그 차에 올라탔더라면, 어디로 끌려가서 나흘간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난 막 나가는 청춘이 되진 않았을 거야. 보나마나 무능력자가 되어 버렸겠지. 절대 마리타처럼 도도하고 눈부신 여자에게 말을 붙여 보지도 못했을 거라고. 그랬다면 케이티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겠지. 그리고 케이티가 이렇게 살해당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 딸은 여기 이렇게 죽어 있어. 우리가 그 차에 올라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P266-267)
어쩌면 그는 인생 자체를 피곤하게 느끼고 있는지 몰랐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는 데 소모되는 진정한 노력도 지겨웠고, 늘 같은 방법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물론 날씨와 식사 메뉴엔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죽은 한 여자에 대해 너무 많은 신경을 쓰기도 싫었다. 보나마나 그 이후에도 다른 피해자들이 속속 나올 테니까. 범인들을 감옥에 처넣는 것도 적절한 만족을 안겨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차피 집으로 향하게 될 테니까. 그들이 얼마나 아둔하고 우스꽝스러운 인생을 살아왔든, 그리고 죽은 사람이 다시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 강도를 당했거나 강간을 당했거나,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는 바로 이런 것이 임상적 우울증이 아닐까 궁금했다. 완전한 무기력함.
케이티 마커스는 죽었다. 물론 그것은 비극이다. 그는 지적으로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었다. 또 하나의 꺼진 빛. (P324)
[2]
셀레스테가 카운터에 놓인 텔레비전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6시 뉴스의 첫 소식은 바로 케이티의 살인 사건 보도였다. 헬리콥터에서 찍은 자동차 극장 주변에 모여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기자는 피해자의 이름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케이티는 아닐 거야. 아냐, 아냐, 아냐.
셀레스테는 테오에게 당장 아나베스에게로 가 보겠다고 말했다. 선잠을 자기 위해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잠깐 집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 그녀는 계속 아나베스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아직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아나베스와 나딘과 사라를 부둥켜안고 울었건만.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격한 감정을 5분간 쏟아내고, 어두컴컴한 케이티의 방에 서서 아이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지미의 모습을 지켜보았음에도. 그는 울거나, 혼잣말을 하거나,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냥 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서서 딸의 머리와 볼의 향기를 맡고 또 맡을 뿐이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 후에도 100퍼센트 실감은 나지 않았다. 왠지 당장이라도 케이티가 현관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올라와 접시에 놓인 베이컨을 슬쩍 집어먹을 것 같았다. 케이티는 죽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어쩌면 셀레스테의 뇌 속, 가장 멀리 나 있는 갈라진 틈에 단단히 꽂혀진 비논리적인 그 무엇, 뉴스에서 케이티의 차를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무엇인가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비논리적인 생각. ‘피=데이브.’
순간 그녀는 다시 거실에 앉아 있는 데이브가 걱정되었다. 묘한 고립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자신의 남편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신이 섰다. 비록 결점은 있지만 그의 선함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케이티의 차에서 발견된 핏자국은 토요일 밤, 데이브의 옷에 묻어 있던 피와 전혀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그런 이유로 케이티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외의 다른 모든 가능성은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P16-17)
언젠가 나올 거야.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저 쇼크 상태에 빠져 있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하지만 쇼크는 점점 몸을 빠져나가고 있다고. 그가 머릿속 음성에 대꾸했다. 테오가 짜증나게 굴었을 때부터.
쇼크가 전부 빠져나가면 그때 느낄 수 있을 거야.
뭔가 벌써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그건 슬픔이야.’ 음성이 말했다. ‘비탄이기도 하고.’
이건 슬픔이 아니야. 비탄도 아니라고. 이건 분노야.
‘물론 분노도 조금 느껴질 거야. 하지만 넌 잘 참아 낼 수 있을거야.’
난 참아내고 싶지 않아. (P28)
그런 방법으로 교묘히 질문을 던지다니. 그냥 당당하게 물을 것이지. 하지만 그는 그 질문을 묻기 위해 ‘거인’ 스탠리를 언급하며 데이브의 긴장을 풀어놓으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순간적으로 떠오른 질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데이브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데이브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다른 사건이 아닌, 케이티를 죽인 살인범으로. (P40)
가끔 데이브는 데이브 자신이 아닐 때가 있었다. 그는 소년이었다. 늑대들로부터 도망쳐 나온 소년.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늑대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훌쩍 커 버린 소년. 그리고 그것은 데이브 보일과는 아주 다른 존재였다.
늑대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훌쩍 커 버린 소년은 해질 무렵에 숲속을 어슬렁거리는 짐승이었다. 조용하고, 투명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절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것의 존재를 몰랐고, 또 그것이 세상에서 존재함을 원치 않았다. 우리의 것 옆에서 검은색 조류처럼 흐르는 세상, 귀뚜라미와 반딧불들의 세상, 오직 눈 한편에서 1마이크로 초 동안 깜빡였다 사라지는 불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세상, 그리고 눈을 돌렸을 땐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지는 세상.
데이브는 바로 그 세상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데이브가 아닌, 소년으로, 그리고 소년은 성인으로 잘 성장하지 못했다. 그의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갔고, 피해망상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그저 데이브의 꿈속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흉포한 모습으로 우거진 나무숲을 맹렬하게 헤쳐 나가며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섬광으로만 자신의 모습을 쳐다볼 수 있었다. 데이브의 꿈속, 숲에서만큼은 그는 무해했다.
어렸을 때부터 데이브는 지독한 불면증과 싸워 왔다. 수개월간 잘 자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파고들어 그를 고문해 댔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면 눈 한편에 이상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책상 밑 방바닥을 쌩하고 달려 나가는 쥐들이었다. 가끔 검은색 파리들이 우르르 다른 방으로 몰려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얼굴 앞에 떠 있던 공기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번쩍거리며 터졌다. 사람들은 고무처럼 변해 버리고. 소년은 한쪽 다리를 꿈속 숲의 입구로, 다른 쪽 다리를 깨어 있는 세상으로 걸쳐 올리게 된다. 데이브는 그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가끔 소년은 그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소년은 데이브에게 고함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부적절한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P44-45)
지미를 알고 지낸지 25년 동안 데이브는 자신을 보고 반가워했던 지미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었다. 가끔 자신이 있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기분은 들었지만, 지금처럼 툭 털어놓고 기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들이 절친한 사촌 사이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도 지미는 데이브를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여느 보통 친구들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데이브는 지미의 입장에서 그들 관계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친구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P49)
화이티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1시쯤 술집을 나왔다고 했어. 말도 안 돼. 그 자동차 열쇠 사건은 1시 10분 전에 벌어졌었다고. 캐서린 마커스는 12시 45분에 술집을 나왔고 말이야. 그건 확실해. 숀. 그의 알리바이엔 15분의 틈이 있어. 그가 몇 시에 집에 돌아왔는지 누가 알겠어? 그가 곧장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확실히 모르잖아.”
숀이 피식 웃었다.
“경사님, 그는 그저 술집에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라고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 마지막 장소 말이야. 숀, 자네도 그렇게 얘기했었잖아.”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고등학교 무도회 날 집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을 찾아봐야 한다고 했잖아.”
“전 그저......”
“그가 범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런 게 전혀 아니라고. 하지만 그에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어. 이 도시에 범죄의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느니, 그런 얘기도 했잖아. 그는 무척 진지해 보였어.”
숀이 빈 콜라 캔을 조리대에 내려놓았다.
“재활용해요?”
화이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캔 한 개에 5센트씩 준다고 해도요?”
“숀.”
숀이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데이브 보일 같은 사람이 자기 아내의 조카를 죽였을 것 같아요? 단지 고급 주택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요?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요.”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 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아내를 죽인 남자를 체포한 적이 있었어.” (P64-65)
“과학 수사 팀에서 확인해 줬어요. 그날 밤, 야경꾼이 피가 흥건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었어요. 그래서 밤새 쏟아졌던 폭우에도 그것이 보존될 수 있었던 거죠. 피해자가 누구였든, 그는 치명상을 입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를 덮친 범인도 상처를 입었을 거고요. 두 개의 다른 타입의 피가 발견되었거든요. 지금 병원과 택시 회사를 알아보고 있어요. 피해자가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피 묻은 모근과 피부 조각, 그리고 두개골 조각도 발견되었어요. 지금 여섯 곳의 응급실로부터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요. 나머지 것들은 음성 반응을 보였어요. 하지만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이른 아침에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한 채 응급실로 찾아온 피해자를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엔 숀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캐서린 마커스가 라스트 드롭을 나왔던 바로 그날 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고 지금 얘기하는 건가?”
소우자가 미소를 지었다.
“네.”
코놀 리가 배턴을 이어받았다.
“과학 수사 팀이 말라붙은 혈흔에서 A형과 B-형을 확인해 냈어요. B-형보다 A형 혈액이 훨씬 많았다는군요. 그래서 우린 피해자가 A형이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캐서린 마커스의 혈액형은 O형이야.”
화이티가 말했다.
코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근을 살펴본 결과 피해자는 남성이었어요.”
프리엘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이론을 말하고 싶은 건가?”
“아직 이론은 없습니다. 그저 캐서린 마커스가 피살되었던 날 밤,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렀던 술집의 주차장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봉변을 당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P73-74)
소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건에 명백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어쩌면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너무 수상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대체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이론이 뭐냐고?”
프리엘이 말했다.
소우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습니다. 분명 그것은 청부 살인이었고, 주차장의 남자는 피해자 마커스가 술집을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겁니다. 그녀가 나오자 그가 범인에게 전화를 걸었겠죠. 그리고 범인은 그때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고요.”
“그리고?”
숀이 물었다.
“무슨 또 ‘그리고’입니까? 그가 그녀를 죽인 거죠.,” (P75)
데이브는 지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비밀을 안고 살아갔다. 아무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잔잔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데이브와 8년 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그의 마음도 조금씩 열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데이브는 현실보단 자신만의 세상에 젖어 사는 시간이 많았다. 어쩌면 그 두 세계가 한데 어우러져. 데이브의 머릿속에서 어둠으로 변해 이스트 버킹엄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지도 몰랐다.
데이브가 케이티를 죽일 수 있었을까?
그는 그 애를 좋아했다. 아니었나?
그리고 데이브. 자신의 남편이 살인 따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인인가? 옛 친구의 딸을 어두운 공원 안으로까지 추격해 들어가 살려 달라는 비명과 애원에도 아랑곳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을까? 게다가 케이티의 뒤통수에 대고 총까지 쏠 수 있었을까?
왜? 범인이 누구이든 왜 그런 일을 벌였던 걸까? 만약 누군가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해도, 데이브를 지목하는 건 무모한 짓이 아니었을까?
맞아.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P95)
‘그를 죽이고 말 거야. 케이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찰보다 먼저 그를 찾아내고 그를 죽일 거야. 네가 곧 들어갈 구멍보다 훨씬 끔찍한 구멍에 그를 쑤셔 넣어 버리고야 말 거야. 그 모습 그대로. 마치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거야. 지금 자신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 무엇이라고 믿고 있든 간에. 그 모든 것이 그저 다른 이의 마음속을 지나쳐 가는 꿈인 양. 그를 잡아 아래층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를 없애 버릴 거야. 그의 식구들은 내 식구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거야. 케이티, 그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을 테니까. 아버지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보진 말아 줘.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넌 몰랐겠지만 아버지는 예전에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어. 필요한 일은 언제나 하고야 마는 성격이라고. 예전에도 그랬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야.’ (P128)
그가 말했다.
“헨리. 헨리와 조지 말이야. 셀레스테. 바로 그게 그들의 이름이었어. 안 웃겨? 그리고 조지는 무척 호기심 많은 친구였지. 하지만 헨리는 아주 잔인한 놈이었어.”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그가 환한 음성으로 말했다.
“헨리와 조지 말이야. 난 지금 헨리와 조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그들이 날 태우고 갔지. 나흘 동안 날 가둬뒀어. 그들은 날 지하에 가둬놓고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에서 지저분한 침낭만 깔고 자게 했어. 그리고 말이야. 셀레스테. 그들은 날 가지고 신나게 놀더군. 아무도 이 불쌍한 데이브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 데이브는 그냥 그 모든 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지. 머리를 둘로 가르기로 한 거야. 맞아, 데이브는 그렇게 했어. 데이브는 죽었어. 그 지하실을 빠져나온..... 아니, 난 그 애가 누군지 몰라. 물론 그도 나였지만, 어쨌든 그는 데이브가 아니야. 데이브는 죽었어.”
셀레스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8년간, 데이브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일에 대해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다. 그저 숀과 지미랑 놀던 중 유괴를 당했고, 가까스로 탈출해 나왔다는 말만을 들려줬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번도 유괴범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침낭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마치 꿈속 결혼생활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모든 합리적 사고, 절반의 거짓말, 보이지 않는 욕구,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숨겨진 선반과 당당하게 맞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서로에게 털어놓으리라 다짐해 왔던 진실은 그렇게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P174-175)
화이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데이브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미끄러졌어요. 손에 들고 있던 전기 가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철조망 울타리에 몸을 기대다가 베었죠.”
그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토닥거리며 말했다.
“바로 여기에 말이에요. 별로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를 많이 흘렸죠. 10분 후에 리틀 야구단 훈련 중이던 아들 녀석을 데리러 가야 했어요. 아마 그때까지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묻은 핏자국일 거예요.”
화이티가 말했다.
“그럼 앞좌석의 피가 당신 것이라는 얘긴가요?”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혈액형이 어떻게 되죠?”
“B-형이에요.”
화이티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신의 의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탁자 가장자리에 걸터않았다.
“재미있군요. 우리가 확인해 보니 앞좌석에 묻은 피도 B-형이었거든요.”
데이브가 두 손을 들어보였다.
“거봐요.”
화이티도 데이브를 흉내 내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트렁크에 묻은 핏자국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건 B-형이 아니던데요.”
“트렁크의 핏자국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화이티가 킥킥 웃었다.
“그 많은 피가 어떻게 당신 차 트렁크에 묻게 되었는지 몰라요?”
“몰라요.”
데이브가 대답했다.
화이티가 가까이 다가와 데이브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보일 씨. 점점 당신에게 불리해져 가고 있어요. 법정에 서서 자기 차 트렁크에 묻은 피가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별 문제 안 될 것 같은데요.” (P198-199)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데이브는 더 이상 소년을 탓할 수 없었다. 살인을 저지른 건 소년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그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언젠가 자신이 죽인 사람의 심장을 먹는 고대 문화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심장을 먹는 것으로 죽은 자를 몸 안에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 두 명의 힘, 두 개의 영혼. 데이브도 그걸 느꼈다. 물론 그 누구의 심장을 먹진 않았다. 그는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약탈자의 영광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인을 한 것이다. 그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속 괴물을 잠재울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의 손을 만져보고 싶어 안달했던 성적 도착자.
이제 그놈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데이브의 피해자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버렸다. 누군가를 죽이면서, 그는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까지 같이 죽였다. 그가 열한 살이었을 때부터 그의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던 괴물. 자신이 집에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파티가 레스터 가에서 열렸을 때 침실 창가에 서서 말없이 창밖을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 괴물. 파티가 벌어졌을 때 그는 너무 나약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 노출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왠지 사람들이 속으로 몰래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들은 거짓 미소를 뿌리고 다녔었다. 그는 그들의 얼굴 뒤로 감춰진 또 다른 얼굴을 꽤뚫어볼 수 있다. 모르긴 해도 분명 그를 딱하게 여기고, 두려워하고, 또 경멸했을 것이다. 더 이상 오줌 웅덩이에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싫어 그는 파티를 슬그머니 빠져나왔었다.
하지만 이제 또 하나의 증오가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에겐 옛날의 딱한 비밀이 아닌, 새로운 비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상당 부분 추측해 놓은 비밀. 그것은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리 와봐.’ 그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한텐 비밀이 한 가지 있어. 어서와. 귀에 대고 속삭여줄 테니까.’
‘난 누굴 죽였어.’
데이브가 거울 뒤에 서 있을 거구의 형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P206-207)
지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왼쪽 볼이 무릎에 닿았다. 그의 눈이 다시 감겨졌다.
“셀레스테.”
그가 속삭였다.
“네?”
“데이브가 케이티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셀레스테가 머뭇거렸다. 어젯밤. 먹은 것을 게워냈을 때 느꼈던 기분이 다시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누군가의 발이 그녀의 심장을 마구 짓밟는 것 같았다,
“네.”
그녀가 말했다.
순간 지미의 눈이 번쩍 띄어졌다.
셀레스테가 말했다.
“지미? 날 살려줘요.” (P245)
어쩌면 캐딜락 운전자가 찾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약간의 연민. 하지만 토요일 밤. 늑대들로부터 도망쳐 나온 소년은 빌어먹을 연민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는 손에 쥔 총으로 캐딜락 운전자를 연신 내리쳤다. 데이브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빨강머리 아이는 허둥지둥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캐딜락 운전자를 연신 내리찍는 데이브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운전자의 머리를 쥐고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순간 번뜩이는 칼날이 데이브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데이브의 셔츠와 살갗을 찢어놓았다. 잭나이프였다. 힘없이 휘둘렀지만, 데이브가 미처 무릎으로 그의 손목을 후려치기 전에 이미 그에게 상처를 입혀놓고야 말았다. 데이브가 그의 몸을 차에 단단히 고정시켜놓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고, 데이브는 그것을 차 밑으로 툭 차버렸다.
빨강머리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은근히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데이브는 이유 모를 분노에 휩싸인 채 총의 손잡이로 운전자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 바람에 핸들이 부러져버렸다. 그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데이브는 잽싸게 그의 등에 올라타 그 늑대, 그 괴물, 그 빌어먹을 아동학대범의 머리를 주차장 바닥에 연신 세차게 찍었다. 그렇게 그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헨리, 조지, 오, 맙소사. 이 데이브를, 이 데이브를.’
‘죽어라, 이 자식, 죽어, 죽어, 죽어.’ (P257)
데이브가 자신의 차를 캐딜락 옆에 세웠다. 그의 눈은 술집의 옆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동안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차와 캐딜락의 트렁크를 차례로 열었다. 그리고 남자의 시체를 자신의 것에서 캐딜락으로 옮겨 실었다. 두 트렁크를 닫고 잭나이프와 자신의 총을 플란넬 셔츠로 돌돌 말아 쥔 후 그것을 혼다의 앞좌석에 휙 던져놓았다. 그리고 쏜살같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셔츠와 칼과 총을 로즈클레어 가 다리 밑을 흐르는 펜 협수로에 던져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자신이 다리 위에서 증거를 던져버리고 있을 때 케이티 마커스는 아래의 공원에서 누군가에게 피살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곧 누군가가 캐딜락의 트렁크 안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P260-261)
그는 아내가 그리웠다.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도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로렌은 그를 배신했고, 그의 곁을 떠나기까지 했다. 아이도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숀, 내가 틀렸어요. 미안해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숀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이 있던가? 물론. 아내의 불륜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뻔했다. 마지막 순간에 주먹을 거두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었다. 하지만 로렌은 그의 얼굴에서 충동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기까지 했다. 맙소사. (P282)
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교도소에 있을 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행복은 순간마다 찾아오는 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까지 그 자취를 감춰버리지. 다음 순간이 오기까진 수년이 걸릴 수도 있어. 하지만 슬픔은.....’”
발이 살짝 윙크를 했다.
“‘슬픔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버리지.’”
그가 담배를 비벼 껐다.
“난 그가 마음에 들었어. 그는 항상 그런 멋진 말을 툭툭 내뱉곤 했다고. 난 한잔 더 할 건데, 넌?”
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P290-291)
“이 바닥의 법칙. 그때 난 스물두 살짜리 홀아비였어.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다고. 아내의 마지막 2년은 영영 잃게 되었지. 개자식 레이. 그는 제1법칙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어.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
데이브가 말했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미? 말해 봐.”
“레이를 죽였을 때, 난 내 자신이 아니었어. 그를 죽이고 강으로 밀어 넣었을 때 신이 날 내려다보는 기분이었지. 그리고 신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어. 물론 진노하신 건 아니었지. 놀랍다기보다 진저리나는 것이었어. 새로 산 강아지가 양탄자에 똥을 싸놓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되겠지. 난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에 서서 레이가 고꾸라지는 것을 지켜봤어. 머리가 가장 늦게 떨어지더군. 어렸을 때 어느 물이든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언젠간 바닥에 닿을 수 있고, 머리도 우주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 믿었어. 내가 생각하는 지구는 바로 이런 것이었지. 나도 지구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가면 검은 밤하늘과 쏟아지는 별들을 향해 뚝 떨어질 것 같았어. 우주로 뚝 떨어져 수백만 년 동안 둥둥 떠다닐 거라 믿었다고. 그 춥고 으스스한 공간에서, 그리고 레이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 난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는 한없이 깊은 물속을 내려가 우주로 휙 던져질 거라고. 그리고 그곳에서 수백만 년간 썩게 될 거라고.”
데이브가 말했다.
“넌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어. 지미,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넌 내가 케이티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지?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지미가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데이브.”
“아냐, 아냐, 아니라고.”
데이브가 말했다. 순간 발의 손에 쥐어진 권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난 케이티의 죽음과 전혀 무관해.” (P304-305)
“그래. 지미, 오늘 사건을 종결했어.”
지미가 위스키를 넘기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종결?”
“그래, 네 딸을 죽인 범인들을 잡았어.”
“범인 ‘들’? 복수형?”
지미가 말했다.
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 한 짓이야. 열세 살짜리들, 레이 해리스의 둘째 아들, 레이 주니어랑 그 애 친구. 쟈니 오셰이, 30분 전에 모든 걸 자백했어.”
지미는 순간적으로 칼날이 자신의 뇌를 후벼 파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칼날이.
“확실해?”
그가 물었다.
“확실해.”
숀이 대답했다.
“왜 그랬대?”
“왜냐고? 그들조차도 그걸 모르고 있어. 그냥 총을 가지고 놀다가 차가 한 대 다가오는 걸 보고 한 녀석이 골목 중앙으로 나가 막아 세웠대. 그렇게 차가 연석으로 올라오게 된 거였어. 오셰이가 총을 들고 차로 달려갔어. 그냥 케이티를 놀라게 해주려고 했다는군. 하지만 총을 잘못 다뤄서 한발이 발사 됐고, 케이티는 그를 차 문으로 후려친 거야. 그때 아이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던 거지. 자신들이 총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이를까봐 케이티를 쫓기 시작했다고 했어.”
“구타는?”
지미가 위스키를 다시 한 모금 넘기며 말했다.
“레이 주니어에게 하키 스틱이 있었어. 묻는 질문에 아무 말도 안 하더군. 벙어리거든. 그냥 멍하니 앉아 있어. 하지만 오셰이는 케이티가 공원으로 도망을 치는 것으로 자신들을 먼저 화나게 만들어서 그랬다고 했어.”
자신이 들어도 어이없는 진술 내용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서운 녀석들이야.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을까봐 케이티를 아예 죽이기로 한 거지.” (P333-334)
경야는 악몽이었다. 셀레스테는 조문객들로 꽉 찼던 밤 8시에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 그녀는 주먹으로 지미를 때리며 그를 살인자라고 불렀다.
“적어도 당신은 그 애의 시체라도 있죠!”
그녀가 말했었다.
“난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를 어디에 버렸죠. 지미? 어디에 있냐고요?”
브루스 리즈와 그의 아들들이 그녀를 뜯어말리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쫓겨나가면서도 셀레스테는 있는 힘껏 목청을 돋웠다.
“살인자! 그는 살인자예요! 그가 내 남편을 죽였어요! 살인자!”
살인자.
그리고 장례식. 지미는 묘지에 서서 구멍 안으로 서서히 내려지는 딸을 지켜보았다. 관 위로 흙이 덮어지고, 케이티는 그렇게 땅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애초부터 이 땅에 살아 숨쉰 적이 없었다는 듯. (P352-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