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스 짜는 여자> 1977년
그녀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이든 곧장 이런 조화, 이런 통일을 이루었다. 그때 그녀는 구성과 세부가 그 모델을 마치 몸짓 속에 박아 넣은 것처럼 비치는 그런 풍속화 가운데 한 폭이 됨직했다. 이를테면, 틀어 올린 머리를 매만질 때 머리핀을 입으로 무는 그 자세! 그녀는 ‘속옷가지를 맡은 하녀’, ‘물 나르는 여인’ 또는 ‘레이스 뜨는 여자’였다. (P12)
뽐므와 그녀의 어머니는 또한 한결같은 기분을 유지하는 편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두 사람은 운명이 인색하게 나눠 주는 기쁨과 환멸을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 그리고 길가에 있는 그들의 작은 집은 존재의 우각호(牛角湖)를, 다른 존재들이 바삐 지나가는 수문(水門) 바로 곁의 창문으로 비치는 고요한 빛을 만들어 냈다. (P13)
그들은 그들을 건드리되 그들 위로 천천히 움직이다가 옆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바로 이 점이야말로 그들의 힘이다). 그들은 금간 벽에서만, 돌 틈에서만 자기에게 잘 맞는 흙을 찾아내는 조그만 떨기나무 같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식물성에서 오히려 활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의 존재들은 오랜 부주의 탓에 자꾸 튀어 오르며 그들의 삶이 만들어 내는 운명의 내리막길을 따른다. 그들은 타격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녕 사실이 아니리라. 그들은 식별되지 않는, 결코 저절로 멈추지 않는 고통 때문에 아파한다.
포대(砲臺)와도 같은 뽐므와 그 어머니의 온갖 진부한 재앙은 우연히 일제 사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말없이 고독하게, 마침내 매혹을 불러 일으키며 정처 없는 길을 무섭도록 끈질기게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 뽐므와 그녀의 어머니는 조잡한 궤변, 뒤이은 심리 묘사, 암시의 두께가 있는 소설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할 것이며, 아울러 그들을 무한히 능가하며 그들로서는 그 속의 깊이며 너비를 잴길 없는 저희의 기쁨이나 괴로움의 거죽을 뚫고 들어갈 줄도 모르게 되리라. 그들은 자기네 이야기를 하는 책의 종이 위에서 아주 작은 벌레 두 마리처럼, 움직이는 게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짧은 거리를 달아난다. 중요한 것은 종이다. 또는 싹 튼 감자, 도시에 있는 방, 마룻바닥의 가시들이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P20-21)
아침마다 그녀는 마치 포옹에 도취한 것처럼 악의 없는 잠에 취한 채 낮과 군중, 혼잡스러움조차 쓰러뜨리지 못한 어떤 향수(鄕愁)로 채워진 몸뚱이를 자신의 침대에서 끄집어냈다. 그녀는 밤새 내려 아직 아무도 밟고 지나가지 않은 눈을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켰다. 충만함을 나타내는 이 행복한 우수 속에는 타인에 얽힌 그 어떤 결핍도 존재하지 않았다. (P29)
그러나 동시에 뽐므는 그녀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녀 자신과 동일한 삶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수수께끼를 이해할 줄 몰랐으므로 그걸 제 손에 쥐고 싶어했다. 그녀가 보는 곳, 순수함이 있고 지하철의 군중 속에서 문득 샘물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곳, 바로 그곳에 마릴렌에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낯선 어떤 힘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다. (P34)
그러나 마릴렌과 그녀의 친구가 전화로 얘기했다는 자기 분신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뽐므는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뽐므’가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뜻밖의 세계가 그녀 앞에서 열린 것이었다. 겸허한 이 젊은 여성은 자기 이름이 그렇게 거듭 되풀이되면서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에 빠져들었다가 문득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위 사람들이 거울로 변하더니, 그녀를 바라보는 그녀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비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 즉 서로 신경 쓰고, 그렇게 해서 심지어 글 한 줄, 말 몇 마디로도 그들의 존재를 퍼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경이롭게 느껴졌다. (P52)
뽐므는 뒤죽박죽된 사건(초라한 운명을 타고난 그녀에게는 이런 사건밖에 달리 일어날 것이 없었다.) 속에서 길을 잃고 떠도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에 대해 문득 매혹을 느꼈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는, 조금은 비극적인 꽃가루로 비유한 이 인물을 포착하면서 작가는 이 인물에게 흠집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토록 가냘픈 존재에 어울릴 만큼 섬세하고 정밀한 글쓰기는 없으리라. ‘레이스 뜨는 여자’는 그녀가 짠 세공품의 투명함 자체 속에서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실 사이로 비치는 빛 속에서..... 그녀는 한없이 단순한 어떤 것인 자신의 영혼을 손가락 끝에 내려놓을 것이다. 한 방울의 이슬, 하나의 완전한 투명함보다 못한....
그런데 아이스트림 가게의 테라스에서 한 젊은 멋쟁이의 수작에 응하고 있는 뽐므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문체와 우연을 조잡하게 사용하지만, 그래도 뽐므는 여전히 아주 작고 가벼우며, 이 세상의 온갖 것 속에서 무력하기만 해서 비통하고,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P70-71)
에므리 드 벨리네는 적어도 한 가지는 뽐므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또한 그를 좀 이상하게 만드는 이방(異邦)에서 산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그를 고문서학교에 들어가게 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뽐므의 이방, 그것은 다른 그 어떤 영혼으로도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지성 또는 지력이라고 하는 그 비속하며 신중한 행동 영역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알지 못하는 그 영혼의 순진성이 하나하나 새로 드러날 때마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무한이었다.
뽐므의 이방(異邦), 그것은 다른 그 어떤 영혼으로도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지성 또는 지력이라고 하는 그 비속하며 신중한 행동 영역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알지 못하는 그 영혼의 순진성이 하나하나 새로 드러날 때마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무한이었다. (P72)
뽐므의 신비, 그는 그것을 자기의 잣대에, 자신에게 맞출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그가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녀는 그가 그렇다고 믿는 것이,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리라. 실제로, 그리고 빨리. 뽐므가 그로 하여금 그녀를 꿈꾸고 그녀에게 욕망을 품도록 하는 일종의 구실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어쩌면 여자들은 저희와 함께 사는 남자들보다 이런 식의 자기 신비화에 더 재능이 있을뿐더러, 때로는 저희의 온 생애를 남과 더불어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76)
그런데 뽐므를 움켜잡으려는,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대로 뽐므에게 색채와 광택을 입히려는 에므리의 노력은 예외 없이 같은 식의 실패를 거듭했다. 이 젊은 여성은 잡아 늘일 수 있되 거기에 생긴 자국은 곧 없어지는 특성이 있는 반죽과도 같았다. 그가 조금만 주의를 늦추어도 그녀는 건드린 자취라곤 찾을 길 없는 둥글둥글한 것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P87)
그런데 뽐므 그녀는 부엌 개수대의 거품 속에서 또는 미용실 타일 바닥 위에 널려 있는 머리카락 뭉치 속에서 완성되는 어떤 꿈이 아니었을까? 이 젊은 여성의 소박함은 예술의 가장 미묘한 효과들과 자연스럽게 공모하고 있었다. 또 그것은 사물들과도, 도구들과도 그렇게 공모하고 있었다. 아마도 양자는 서로 없어선 안 되는 존재들일 것이었다. 빨래를 한다거나 저녁 준비를 하는 등 일상의 일을 할 때 뽐므에게서 풍기는 갑작스럽고 즉각적인 아름다움,
레이스 뜨는 여자‘인 그녀가 취하는 동작에서 느껴지는 위풍당당함의 자취인 그 아름다움은 말러의 교향곡을 넘어서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고문서학교 학생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은 진부한 것과 추한 것이 군림하는 나머지 세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런 것끼리의 장소를 따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의 생각으로는, 뽐므는 그들이 음악을 들었던 세상 밖의 그 우월한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거나 동작을 취할 때에는 우아할 수가 없었다(그럴 권리를 더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도 뽐므가 그녀 자신과, 그녀가 만지는 사물들과 그처럼 꾸준히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그가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감탄하라고, 사랑하라고 그의 권위와 욕망에 요청하는 것은 너무나 가당찮아 보였다. 비록 밖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로 말미암아 뽐므에게 유감 비슷한 걸 품고 있었다. 사실상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기대하던 것과 너무나 가까웠지만, 그가 보고자 하는 것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바라는 일이 뽐므 그녀에게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녀의 동작 속에 전적으로 존재하듯이, 그녀는 전적으로 내부에 있는 그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무(無) 또는 거의 무 속에서 일종의 피안(彼岸), 일종의 무한을 그렇게 강력히 불러일으킨다. 아울러 그녀의 내부에 있는, 어쩌면 그녀 없이 그녀의 내부에 있는 사물들의 단순한 만남에서 그녀를 떼어 놓고자 할 때면, 그녀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정작 알려고 할 때면, 그녀는 마치 하나의 상상,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빠져 달아나고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녀는 에므리처럼 산책을 좋아한다. 그녀는 에므리처럼 바닷가를 싫어한다. 그녀는 에므리가 건네준 책을 읽는다. (P88-89)
그는 그녀가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선가는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확신하려고 더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봐, 그녀에게 집착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보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자기 습관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그의 삶에 침투해 들어와서 물이 파스티스51(아니스 향료를 넣은 독한 술인데 물을 타서 마심)에 섞이듯 그의 삶에 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언젠가는 그녀를 몹시 그리워할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줄여 놓아야만 했고, 아울러 그녀를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 놓아야만 했다. (P90-91)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원한다면’ 언제라도 괜찮다고 말했다. 에므리는 그렇게 간단한 대답을 듣자 마음이 놓이긴 했으나, 아울러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그 대목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부합하지 않았으며, 상황의 중대성에는 더구나 부합하지 않았다. 뽐므는 자기가 숫처녀라는 점을 이미 암시했다. 그는 그 사실을 믿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쉽게 내 말에 따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는 그걸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런 의문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이 설령 헤어진다 해도 이 젊은 여성이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P92-93)
그는 뽐므에 대한 욕망이 딱히 없었으며,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한동안 그녀와 함께 살게 될 터였다.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냥 그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에 무슨 규칙이 있기 때문일까. 그는 둘 가운데 어느 것인지 정확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시작을 했고, 결말이 필요했다. 그날 밤 에므리는 어떤 막연하고 부조리한 일을 한다는 기분과 함께 일종의 본의 아닌 복종심을 느끼며 뽐므를 따라 계단 위로 올라갔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여분의 것이 되리라. (P96)
그녀는 밤마다 그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바지의 주름을 잡아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 놓았다. 남자는 여자가 그런 식으로 침착하게 행동하는 걸 보고 퍽 놀랐다.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된, 뽐므의 육체를 찾는 그의 몸짓은 그녀의 너무나 단순한 무언의 침착함과 비교할 때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노력이자 분투였던 것처럼 그에게는 느껴졌다. (P96)
뽐므는 그를 완벽하게 지켜 냈다. 집안일을 하는 이 젊은 여자의 이처럼 상냥하고 세심한 부재(不在)에서는 경솔함 비슷한 무엇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때로 그녀가 자신을 좀 더 배려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뽐므가 돈을 버는 동안의 그 긴 고독의 낮들을 즐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녀의 부재가 다른 부재를 쫓아내면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다. (P103-104)
그의 곁에서 사는 그 침묵 속에는 어떤 비통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침묵은 영혼들이란 어차피 평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세계에 속해 있으며, 거기서는 포옹이나 가장 내밀한 융합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 진정한 만남에 대한 욕구만을 드러낼 뿐임을 인상적이며 거의 난폭할 정도로 솔직히 표현하는 것일까? 그때 청년에게는 그가 뽐므와 나누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깨진 약속처럼 보였다. 그는 실제로는 아무에게도 들려 준 바 없는 자기 속내 이야기를 그녀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뽐므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반면에 자기는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고, 또 자기야말로 그녀가 쓸줄 모르는 낱말들 저쪽에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므로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사는 것이라고, 그는 이따금 생각했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상대방을 위해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땅 속에 파묻혀 이제 그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작은 동상과 그걸 발굴해 내는 고고학자랑 조금 비슷하게. 뽐므의 아름다움은 이전에 존재했으나 수없이 많은 하찮은 삶들의 잔해 속에 묻혀 오랫동안 잊힌 존재의 그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러다가 더 무가치하지 않은 그 모든 세대의 비밀이 완벽하리만큼 소박한 그 육체와 영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순수한 소녀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뜻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또 고문서학교 학생이자 라틴어 학자이며 현학자 성향이 있는 한 젊은 남자가 찾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늘 불안해하고 현 세계를 거듭 거부하는 것은, 언젠가는 여러 아름다움 속에서 오직 하나의 아름다움을, 그러나 여느 아름다움과는 또 다르고, 부자연스럽지 않고, 바로 뽐므가 그런 것처럼 우연한 매력, 순수의 분출이라 할 만한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P104-105)
‘다른 것’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그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구태여 허리 굽혀 줍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한 싸구려 물건을 금덩이로 여긴 것일지도 몰랐다. 아울러 오직 저만 제대로 뽐므를 ‘보는’(이로써 뽐므는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특권이 어느 결에 바보스럽고 순진한 아가씨 앞에서 괜히 혼자 들뜨는 얼간이, 바보, 어수룩한 숫총각 노릇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하는 굴욕 섞인 의혹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며, 그래서 자기가 그녀에게 주고 싶은 것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며 뽐므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저녁 내내 그녀 앞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냉랭함에 마음이 흔들리는 통에 먼저 굴복하는 마는 것은 언제나 그였으며, 그런데도 뽐므는 불평을 하지도, 그에게 뭘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때마다 그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뽐므의 그런 참을성이었다. (P107)
뽐므는 아무 말 없이 겸손한 태도로 자신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가 그 대화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검사당하는 무슨 물건처럼 느껴졌다. 에므리라는 판매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라는 고객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공모자 사이에서는 사느냐 파느냐,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 그건 그저 웃기 위한 것이었다. 에므리의 어머니는 ‘이 아가씨는 착해 보이기는 하지만 멍청하구나.’하는 뜻의 눈짓을 아들에게 보내더니 역시 눈짓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넌 저 애가 하는 말을 못 들었니?’
그러자 아들이 침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저 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래도 그는 어머니의 엄격하고 명철한 판단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P113-114)
그 무엇이 뽐므가 지적(知的)인 여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든지, 그렇게 되는 것을 금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뭘 물어보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어떤 일에건 크게 놀라거나 의아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가 그녀의 이 닦는 소리를 듣는 걸 더 참을 수 없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 남자는 가려움증 같은 것을 아직 앓아 본 적이 없던 만큼 그 증세는 급진전했다. 그래서 그는 침대 속에서 그녀의 발이 와 닿는 걸 더 참지 못했다. 그는 밤에 그녀의 숨소리를 듣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뽐므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이제 남자 친구를 성가시게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차려야만 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욱 신중하고 부지런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에므리는 그가 항거하는 것을, 마음속으로나마 최소한의 비난을 퍼붓는 것을 금하는 그 끝없고 가벼운 겸허함의 포로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그를 은근히 화나게 했다. 이 견디기 어려운 순진성, 그것은 그에게 행사하여 그가 반항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그에게서 앗아 가는 폭력이었다. 뽐므의 하찮음은 무게가 엄청나게 나갔다.
그리고 고문서학교 학생인 이 애송이가 그 뒤로 너무나 겸허한 그 눈길을 받으며 살면서 느꼈고, 그 자신까지도 겸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어떤 수치심이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눈길이 언젠가 보았던 것은 어찌 보면 그가 아니었다. 뽐므는 사실상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그의 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이런 의혹이 그를 마음 아프게 했다.
게다가 에므리는 그가 애정이라고,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면 하나의 거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분명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하기야 그런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계약 내용의 일부일 성싶다. (P115-117)
그에게는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뽐므가 일을 마치고 와서 방으로 들어오면 만족감도, 기쁨도 사라져 버렸다. 막상 그녀가 앞에 있으면 그는 그녀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렸다. 번번이 마찬가지 실망감이, 유감이 고개를 들 뿐이었다. 그는 하루 내내 그녀와의 약속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녀와는 다른 어떤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는 뭘 기대했던 것일까?
저녁을 지어서 차려 내고 그의 뒤를 이어 먹기 시작하는 뽐므야말로 이 남자의 내면을 다룬 드라마에 필요하긴 하지만 딱히 어떤 역을 하지는 말아야 하는 바로 그 등장인물이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평범한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P118)
그는 잠을 자지 않는다. 그녀가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나서는 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딱 한 번 환하게 빛난다. 그녀는 내심의 미소로 반작인다. 그녀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무 꿈도 꾸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무(無)에게 웃음을 짓고, 마치 연인에게 자신을 내맡기듯 무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깨워서 그녀가 고독한 평온을 누리는 꼭대기에서 밀어뜨릴 뻔했으나, 자기가 그걸 질투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P119-120)
실제로 그들의 결별은 절차가 훨씬 더 간략했다. 그는 갑작스럽지 않게, 하지만 감각이 무디다고 여겼으므로 그 젊은 여자의 감수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는 판단하지 않은 채 이쯤에서 그만 헤어지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헤어지자고 하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오래도록 애써 상상하던 그는 마침내 그녀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젊은 여성은 아무 말썽도 부리지 않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터였다.
과연 그녀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 좋아요!”에 이어 “알고 있었어요.”라고만 말했다..... 그녀는 따지려 들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러자 에므리는 그가 기대한 대로 금세 마음이 가벼워지는 대신, 그가 짐승 비슷하게 여긴 이 젊은 여성에게 이미 느끼고 있던 거북함이 더해지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P121)
뽐므가 자신을 스스로 방어했더라면, 그녀가 가시 돋친 말을 몇 마디라도 하거나 비록 억제된 것일지라도 울음을 터뜨렸더라면, 아마도 에므리는 그녀에게 다른 결말을 안겨 줬을 터였다. 그는 그녀를 좀 더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그녀는 그와 좀 덜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의 이별을 중요한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뽐므는 격심한 고통이라는 거룩한 마음의 양식을 갈무리했을 것이다. 그녀가 가방에 짐을 싸는 동안 그는 그녀가 구시렁대고 자기에게 무슨 욕이라도 퍼부어 주기를 거듭 바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는 물건들을 넣으려고, 책을 들어낸, 판지로 된 그의 책 상자 하나를 자기에게 줄 수 있는지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판지 상자를 끈으로 묶은 다음 떠났다. (P122-123)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도 그녀 곁을, 그녀 바로 곁을 지나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런 신호도 하지 않지만 참을성 있게 심문해 봐야 하는, 눈길을 고정할 줄 알아야 하는 그런 영혼을 지닌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녀는 아주 흔해 빠진 여자 가운데 하나였다. 에므리에게도, 이 책의 저자에게도, 대부분 남자에게도 그런 여자들은 그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존재로서 우리가 그녀들에게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평온함이란 우리 스스로 자신을 위해 상상하던 아름다움과 평화가 아니므로, 우리가 발견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던 곳에 그런 아름다움과 평화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한순간, 다만 한순간 그런 여자들에게 애착을 느낀다. 평생에 두세 번 이런 죄를 저지르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P123-124)
뽐므는 어머니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머니는 그녀를 꾸짖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먼저, 마릴렌이 있었다. 그런데 마릴렌은 뽐므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음으로, 그 남학생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그 젊은이 또한 뽐므에게서 등을 돌렸다.
뽐므네 엄마, 그녀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네 잘못 없다고 딸에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뜻을 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유제품 판매인, 그녀는 딸이 힘들어 한다는 것을 잘 알았으며, 딸에게 고통을 더 주지 않으려고 자기 나름으로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자기가 말할 수도 있을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딸이 언젠가는 분명히 자기와 같은 세계에 속하는 남자를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둘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뽐므가 수수하니까 남자도 대학생이 아니라 수수한 젊은이일 것이다. 다른 뭘 꿈꾸지 말았어야 했다. (P126)
어머니와 딸은 처음으로 서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제대로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서로 흐느끼며 천천히 눈물을 섞고 싶었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뽐므는 도움(엄마가 자신에게 꼭 줘야만 하는)을 청하기보다는 어머니 앞에서 의젓한 태도를 보이며 수치심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녀는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증인이자 재판관인 어머니의 침묵을 해석하기가 두려웠다. (P129)
말할 나위 없이, 말할 것도 없이, 이 선량한 부인은 자기 딸이 병에 걸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딸애를 더 괴롭힐 이유가 뭐 있단 말인가? 유제품 판매인은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설사 뽐므가 죽으려 한다 할지라도(그녀의 딸이 바라는 게 결국 그것이 아니던가?) 딸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불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활한지 잘 알았으므로 뽐므의 의지를 끝까지 존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람에게 나중에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뭐! 그냥 손을 놓고 있었어요? 아이가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예요?”
아, 가슴 아픈 일이다! (P130-131)
뽐므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가 살게 될지 죽게 될지는 알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어쨌거나 그녀의 운명은 끝난 것이다. 그녀가 더 먹지 않기로, 자기에게 그렇게 조금밖에 주지 않은 세상에 아무것도 더 요구하지 않기로 한 날, 그녀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일이었다. (P133)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나 내가 캐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아무 일’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흘러간 그 모든 시간에, 더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그 육체가 철저히 고독하게 살았을 그 모든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그걸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니! 정말이지 달라진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나는 말을 하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느꼈고, 반면에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레이스 뜨는 여자’의 침묵은 깊어만 갔다. 그녀의 겉보기는 엄청나게 변했지만, ‘레이스 뜨는 여자’에 얽힌 추억이 의식의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나는 그녀가 변하지 않았다는 걸 더욱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앞에 부재했다. 이를테면, 그녀는 병원에 있는 게 슬퍼 보이지 않았다(예전에도 나는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이 병원이나 그녀의 ‘병’이 아니라 그녀가 계속해서 존재한 어느 먼 나라의 이방인이자 타인이자 죄수였다. 바로 이런 게 그녀의 광기인 걸까?
나는 그녀가 방금 내게 말했으며, 그런데도 내가 둘이 함께 겪은 것 같은 다른 일들로 채워 넣으려고 애썼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 같은 식으로, 즉 감정의 표출도, 명백한 회한도 없이 끝을 맺은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마침내 그날 ‘레이스 뜨는 여자’는 뭘 먹는 걸 그만두게 되었다. 마침내 그날 그녀는 보기 흉한, 말라비틀어진 젖가슴을 연상시키는 자신의 삶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모든 걸 체념한 상태에서 세상을 완전히 등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부주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거부로 변해버렸다. 육체가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다. (P147-148)
나는 여기 있는 것이 힘들고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옳을 터였다. 하지만 왜 그녀는 나를, 우리를 그렇게 잘 기억하는 것일까? 그녀는 예전에 우리가 함께한 산책들을 내게 상기시켰다. 그녀의 기억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예배당의 봉헌물들, 바다 저 멀리 지나가던 배들, 정복자 기욤에 관한 이야기.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늘 무관심하고 건성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중요했단 말인가?
마치 그녀의 광기와 수척함, 그녀의 감금 상태를 내가 만들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견디기 어려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P150)
“당신은 그리스라는 나라를 모르지요? 난 살로니카까지 가 봤어요. 알아요?”
그러자 어쩌면 내가 유일한 남자였으리라는 생각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이 누그러졌다. ‘레이스 뜨는 여자’는 마치 어머니처럼 애정 어린 웃음을 머금은 채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괴로워하는 걸 헤아리고 나를 가엾게 여기는 듯 보였다.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