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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정복자 펠레>

영화 <정복자 펠레> 1987년

by 노용헌

덴마크가 자랑하는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자전적 소설『정복자 펠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하여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도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휩쓸었던 유럽영화의 걸작 〈정복자 펠레〉의 원작소설이다. 꿈을 찾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그린 이 대하소설은 개인과 사회, 삶과 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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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공포로 마비되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도대체 저 밖의 햇빛 속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막연히 궁금했다. 내가 과연 햇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펠레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비로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얼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펠레는 바지가 발까지 내려지고 셔츠가 조끼 속으로 말려 올라간 채 반나체 상태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견습감독이 한쪽에서 서서 손에 든 채찍으로 소년의 벗은 몸을 가볍게 때리며 명령조로 “뛰어!”하고 소리쳤다.

공포와 혼란으로 눈이 뒤집힌 펠레는 뜰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밖에는 하녀들이 서 있었다. 하녀들은 깔깔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소년은 다시 차고 안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채찍을 만났고, 어쩔 수 없이 캥거루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또 다시 햇빛 속으로 뛰어나가야 했다. 또 한바탕 웃음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년은 하녀들의 입에서 나온 온갖 상스러운 말들의 세례 속에 그저 속절없이 울면서 서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채찍은 보이지 않았고 펠레는 몸을 감추려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듯 흐느끼더니 갑자기 돌로 포장된 길 위로 맥없이 쓰러졌다.

(...)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들었을 때 라세는 망치를 집어 들고 견습감독을 죽이겠다고 나섰다. 노인의 눈빛이 워낙 단호해서 아무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견습감독은 이럴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라세는 분노의 분출구를 찾지 못하자 미친 듯 부들부들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짜로 몸이 아파져서 사람들이 그를 다시 소생시키느라 술을 한 입 가득 마시게 해야 했다.

그러자 즉시 효과가 나타나서 라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겁에 질려 흐느끼는 펠레에게 위로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괜찮다. 아가야! 괜찮아. 누구도 그런 짓을 하고 무사히 넘어가지 못하는 법이다. 이 아비가 그 악마의 긴 다리를 분질러 놓고 코뼈가 튀어나오도록 만들어 줄 테니 내 말을 믿어.”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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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외양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물 주는 긴 통로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견습감독이었다. 펠레는 그 지긋지긋한 발자국 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리고 한껏 흥분되기 시작했다. 이제 저놈은 사람을 한 손으로 들고 꾸짖을 수 있는, 농장감독보다 훨씬 더 힘센 아버지의 아들에게 아무 짓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펠레는 일어나 앉아서 간절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라세!” 탁자 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자극에 불쾌해진 라세는 무뚝뚝하게 투덜거릴 뿐 일어서지 않았다.

“라세!”

잠시 후 조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명령조의 목소리였다.

“여기 있어요.”

라세가 천천히 일어나 나가면서 말했다.

“불렀는데 대답도 못하나, 이 천한 스웨덴 영감탱이? 늙어서 귀라도 먹었어?”

“물론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지요.”

라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견습감독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난 아버지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란 게...”

“영감이 산모 가호사래도 난 상관없어. 하지만 영감은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해. 안 그러면 농장감독에게 혼내 주라고 할 테니까, 내 말 알아들어?”

“그럼요, 그럼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제가 못 들었습니다.”

(...)

펠레는 울음을 터뜨리며 누비이불 속으로 깊숙이 기어 들어갔다.

라세는 한동안 투덜거리며 서성이다가, 마침내 다가와서 아들의 머리에서 누비이불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펠레는 침구 속에 얼굴을 묻었다. 아들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렸을 때, 라세는 절망적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과 마주쳤다. 그 눈빛은 라세를 잠 못 이루게 하고 방안을 서성이게 했다.

(...)

그는 자신의 이마가 아이의 이마에 닿을 때까지 몸을 숙이고 무력하게 말했다.

“그래, 라세는 한심한 작자야. 늙고 가난하지.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될 만해. 더 이상 화를 내지도 못하고 주먹에 힘도 없으니, 움켜쥐어 봐야 무슨 소용일까! 그 한심한 작자는 모든 걸 참아야 하고 이리저리 치이며 살지. 게다가 고맙다는 말까지 한다고. 늙은 라세는 그렇게 되었어. 하지만 네가 기억할 게 있다. 내가 놀림감이 되는 건 순전히 너를 위해서야. 너만 아니라면 내 비록 늙었지만 당장 가방을 짊어지고 떠나 버릴 거다. 하지만 네 아버지가 녹슬어 가는 곳에서 넌 자라날 수 있단다. 그러니 이제 울음을 그쳐야 해!”

라세는 누비이불로 소년의 젖은 눈을 닦아 주었다.

(...)

보통 때 같으면 라세는 자리에 눕자마자 나무토막처럼 잠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이제 자신의 인생도 저물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는 이 섬에서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는 고된 노동과 걱정거리와 문제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라세는 늙었다!”

라세는 크게 한 번 말하고 잠이 들 때까지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라세는 늙고 한심한 작자다. 지칠 대로 지친 늙은이야.” (P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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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목초지 위쪽 끝에 서서 집으로 가는 방향에서 떠돌고 있는 가축 떼를 불러 모았다. 가축을 불러들이는 일이 끝나자 펠레는 소를 몰며 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소들은 종종 머리를 쭉 빼고 특유의 걸음걸이로 달렸다. 풀들의 그림자가 지면을 따라 길고 가느다란 줄을 그렸고, 소들의 그림자는 끝이 없었다. 이따금 송아지가 음매 하며 갑자기 돌진했다. 녀석들은 집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펠레도 집이 그리웠다.

온 마음이 벌써 집으로 들어가 있었다. 펠레는 아버지를 향한 거의 고통에 가까운 그리움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소 떼를 몰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언저리가 빨간 눈으로 행복하게 미소 짓고 서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우리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소년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면서 아버지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무슨 일이냐, 아들아? 무슨 일이야?”

노인은 목소리에 걱정을 가득 담고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누가 너에게 고약하게 굴었니? 아니야? 그럼 다행이구나! 사람들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행복한 아이들은 하느님이 직접 돌보시니까. 만일 그랬다가는, 이 라세가 가만 두지 않을 거다. 그럼 이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있다니 기쁘구나. 그렇다면 라세는 행복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제 가서 저녁을 먹자꾸나. 이제 그만 울어라.”

아버지는 거칠고 굽은 손가락으로 아이의 코를 닦아 주고, 천천히 식당 쪽으로 데려갔다. (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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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에게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서 어떤 질문도 있을 수 없고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대상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버지 라세였다. 아버지는 단순히 거기에 있었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 뒤에 든든한 벽처럼 서 있었다. 아버지는 진정한 신의 섭리였으며, 선과 악에 있어서 마지막 은신처였다. 아버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버지 라세는 전지전능했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펠레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고,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존재했다. 모든 것은 펠레가 함께 놀기 위해, 펠레가 몸서리치기 위해, 펠레가 찬란한 미래를 위해 간수해 두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뿐이었다. 심지어 펠레의 손이 미친 적 없는 풍경 속 저 멀리에 있는 나무와 말과 바위도 호의적이건 적대적이건 펠레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새로운 것이 시야에 등장할 때마다 펠레는 그것과 자신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펠레의 세계는 작았다. 이 소년은 이제 막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사방으로 팔을 벌려 닿는 범위에는 단단한 육지가 있었지만 그것을 벗어나면 가공되지 않은 혼돈의 바다였다. 그러나 펠레는 이미 자신의 세계가 거대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세계를 무한하게 만들고 싶었다.

펠레는 만족을 모르는 욕구로 모든 것을 공략했고, 빠른 인지력으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착했다. 펠레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가장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도 늘 기대하는 태도를 품었다. 그 익숙한 것들이 어떤 놀라움을 가져다줄지 누가 알겠는가!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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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펠레를 괴롭히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일하고 투쟁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따금씩 엿보게 되는 인간성의 심연이었다. 그 앞에 서면 아직 어린 펠레의 두뇌는 무력해졌다.

어째서 안주인은 그토록 슬피 울고 몰래 술을 마시는 걸까? 저택 창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펠레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조그만 머리가 어지러울 때마다 모든 창문 유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엄습했고, 가끔은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태양은 하늘 높이 걸려 있었고, 백야 때문에 밤은 환했다. 어둠은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어서 힘이 없었다. 다행히 펠레에게는 아이답게 모든 것을 빨리, 그리고 깨끗이 망각하는 재능이 있었다. (P98)

펠레는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아이여서 쉼 없이 돌진하며 늘 뭐든 앞지르려 했다. 다른 경쟁 상대가 없을 때는 시간 자체가 그 대상이 되었다. 이제 호밀을 모두 거둬들여서 호밀밭에는 마지막 낟가리도 사라졌고, 그림자가 날마다 조금씩 길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백야가 끝나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어둠이 몰려왔다. 이것이 펠레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펠레는 더 이상 시간을 재촉하지 않았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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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자신이 승리했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었다. 펠레는 자기보다 크고 힘센 소년과 맞붙어 싸웠고, 난생 처음으로 물불 안 가리고 덤빈 끝에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싸우고 싶다면 가장 아픈 곳을 걷어차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리고 싸움의 이유가 정당하기만 하다면, 누구와도 싸울 수 있었다. 비록 상대가 농장주의 아들이라 해도, 이 두 가지는 현재로서는 그 무엇도 찬물을 끼얹을 수 없는 만족스러운 발견이었다. 그리고 펠레는 아버지를 지켜 냈다. 그것은 펠레의 인생에 있어서 새롭고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P107)


펠레는 자신의 얼굴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입이 아니라 얼굴이었다. 일전에 매질을 피하려고 악의 없는 거짓말을 했을 때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오늘의 불행은 펠레의 얼굴 탓이었다. 행복을 느낄 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 펠레는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고, 펠레의 작은 신체는 중요한 부위를 덮을 두꺼운 각질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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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에게는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었다. 한 가지에서 좌절하더라도 두 가지에서 용기를 회복했다. 펠레는 굴복을 모르는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답게 용서의 능력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라세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을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실망한 것만은 분명했다.

남들에게 들은 얘기를 토대로 아이다운 주체할 수 없는 상상력을 키워 온 소년과 한때 이곳에 와보았던 노인 중 누가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펠레는 자신의 삶을 흥미로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매사에 열심히 몰두했기 때문에 실망을 느끼기가 무섭게 지나가 버렸다. 펠레의 세계는 초감각적이서 몇 분 만에 작은 씨앗이 쑥쑥 자라서 모든 것들 위에 그늘을 만드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그곳에서 원인은 결코 결과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 세계는 다른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 어려운 상황들이 좌절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펠레를 지탱해 주었다.

아무리 힘든 현실이 펠레를 압박해도, 펠레는 항상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어떤 식으로든 더 여유로워졌다. 그리고 아버지 라세가 뒤에서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한 어떤 위험도 위협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라세는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번 펠레를 실망시켰고, 아버지를 앞세워 누군가를 위협하려 할 때마다 라세는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노인의 전지전능함은 점점 심해지는 노쇠함과 공존할 수 없었다. 소년의 눈앞에서 그런 전지전능함은 하루가 다르게 맥없이 무너져 갔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펠레는 이제 자신의 신을 보내고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찾아야 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펠레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불신을 알게 된 지 오래였고, 이제 소심함까지 생겼다. 펠레는 날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꿰뚫어 보려고 어설픈 시도를 했다.

모든 것의 뒤에는 항상 다른 뭔가가 있었다. 그런 시도는 종종 혼돈을 일으켰지만, 가끔은 결과가 좋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가 수그러들면 매질을 피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어떤 매질에 대해서는 최대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 매질을 멈추었다. 하지만 농장감독은 엉엉 우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이를 악물고 강하게 행동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을 꾸며댐으로써 대부분의 매질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거짓말의 의도가 좋고 표정 관리를 잘한다면 말이다.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즉시 회초리를 들 것이다.

(...)

라세와 펠레는 평생 동안 손을 잡고 걸어 왔지만 이제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라세도 그것을 느꼈다.

“우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그리고 서로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질 때면 라세는 의기소침해져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펠레는 뜨는 해지!”

(...)

그는 이제 늙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발견은 점점 더 사실로 입증되었고, 그것이 라세를 더욱 나약하게 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앗아 갔다.

무엇보다 심한 충격은 자신이 더 이상 여자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며, 여자들이 자신을 전혀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때였다. 라세의 세계에서 ‘남자’라는 말만큼 무게를 지닌 단어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남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여자들이었다. 라세는 남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더 이상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한 남자의 초라한 잔재이며, 지나간 영광의 우스꽝스러운 자취에 불과했다. 라세가 관심을 보이면 여자들은 비웃었다.

여자들의 비웃음은 그를 뭉개 놓았다. 라세는 의기소침하게 노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세계에 맞게 적응했다. 라세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유일한 것은 아들을 향한 관심뿐이었다. 그는 아들의 신이라는 위치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고, 그래서 매사에 허풍을 떨었다. 혹시 아들에게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전보다 더 크게 세상을 향한 위협의 말을 내뱉었다. 그 역시 아들이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마지막 남은 한 가닥 위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펠레는 아버지의 공상에 박자를 맞춰 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펠레는 빠르게 성장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했다.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방패막이로 뒤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펠레는 마치 빈터에 옮겨 심어져서 주위 환경의 본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작은 식물과도 같았다. 땅 속으로 길을 더듬어 내려가는 모든 뿌리 조직마다 연약한 잎사귀 하나가 땅에 떨어지고 강한 잎사귀 두 개가 밀고 나오는 것처럼, 아이로서의 무력감은 점차 사라지며 한 인간으로서의 보다 강인한 감정에 자리를 내주었다.

소년은 보이지 않는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주위 사람들에 대하여 특정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지는 않았다. (...)

펠레는 모든 것을 놀이로 만드는 아이 같았다. 펠레는 많은 심각한 삶의 현상들을 아무 의심 없이 놀이 속으로 끌어 와서 그런 현상들을 가지고 흥겹게 희롱거리며 놀았다. 또한 몸을 단련하면서 소심한 마음 또한 단련했다. 소년은 교묘하게 어떤 상황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방법을 배웠고 일과 장난과 잔꾀를 흉내 냈으며, 주위 사람들이 약하게 나오면 우쭐대며 못되게 굴고, 그들이 세게 나오면 거의 눈에 띄지 않도록 겸손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펠레는 팔방미인이 되기 위해 훈련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펠레의 허를 찌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 소년은 뭔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마자 대체로 그 일을 솜씨 좋게 해냈고, 고양이처럼 불시에 습격하기가 어려웠다. (P15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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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꺼져, 이 황소 자식아!”

소년들이 펠레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 당시 맥주병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물이 고였지만 펠레는 굴하지 않고 부두 주위를 얼쩡거렸다.

“썩 꺼지라니까!”

소년들이 다시 한 번 말하며, 위협하려고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다른 시골뜨기들한테 가버려!”

소년들이 올라와서 펠레를 때렸다.

“뭐 때문에 여기 서서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아마 넌 어지러워서 고꾸라지고 말걸! 다른 촌뜨기들에게 썩 가버리라니까, 이 맥주병아!”

펠레는 머릿속에 끓어오르는 강렬한 결심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너희도 맥주병이긴 마찬가지지! 왜 물 속으로 뛰어들 배짱도 없냐?”

“저 녀석 말하는 것 좀 들어 봐! 저 애는 네가 한겨울에 그저 재미로 다리에 쥐까지 나면서 물속으로 뛰어든다고 생각하나 봐.”

펠레는 그들의 의기양양한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방파제에서 몸을 날렸다. 물에 두껍게 낀 얼음이 펠레의 머리 위를 가로막았다. 조금 후에 펠레의 정수리가 다시 나타났지만, 그는 팔로 두세 번 개헤엄을 치다가 가라앉았다.

소년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그중 한 명이 배를 잡아당기는 갈고리 장대를 잡았다. 그때 헨리 보드케르가 뛰어와서 단숨에 머리부터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사라졌다. 헨리의 이마에 부딪친 얼음 조각이 물수제비를 뜨며 요동쳤다. 숨을 쉬기 위해 헨리의 머리가 얼음 낀 물 위로 두어 번 올라왔고, 마침내 펠레와 함께 올라왔다. 소년들은 펠레를 방파제 위로 끌어올렸고, 헨리는 정신이 번쩍 나도록 펠레를 세게 때렸다.

펠레는 의식을 잃었지만 헨리가 때린 덕분에 제정신이 들었다. 펠레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서 도요새처럼 뛰어서 달아났다.

“집으로 뛰어가!” 소년들이 펠레의 뒤에서 소리쳤다.

“최대한 빨리 뛰어. 안 그러면 병이 날 테니까! 그리고 아버지한테는 그냥 물에 빠졌다고만 말해!”

펠레는 뛰었다. 그에게 조언 따위는 필요 없었다. 스톤 농장에 도착했을 때, 옷은 뻣뻣하게 얼어 있어서 바지를 벗어도 바지 혼자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몸은 토스트처럼 따끈따끈했다. (P1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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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1파운드가 12외레라면, 석탄 반 쿼터는 얼마예요?”

프리스 선생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얼굴로 펠레를 쳐다보았다. 펠레가 버릇없이 굴면 다른 아이들이 그럴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이 소년에게는 특별한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는 씁쓸하게 말하면서 두꺼운 회초리를 손에 들고 천천히 펠레에게 다가왔다.

“조심해!”

아이들이 선생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할 준비를 하며 속삭였다.

하지만 펠레는 매를 피하는 대신 앞으로 걸어 나가서 손바닥을 댔다. 펠레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프리스 선생은 놀란 눈으로 펠레를 보았다. 정말이지 그 아이를 때리고 싶지 않았다. 펠레의 눈빛은 항상 그를 기쁘게 했다. 프리스 선생은 아이들을 아이들로 대하진 못했지만, 인간을 보는 눈만은 정확했다. 펠레의 눈에는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잘못일 것이다. (P287)


그는 가만히 서서 저 멀리 반짝이는 물 위에 떠 있는 스웨덴의 푸르른 해안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고향땅을 보니 왠지 마음이 약해지고 늙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벵타의 무덤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그렇다.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라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녀의 곁에서 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순간 라세는 다 늙어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것을 후회했다. 지금쯤 고향땅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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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은 건강함으로 빛이 났고, 세상이 전부 자기 것인 양 마냥 행복하게 활보하고 다녔다.

소년이 성장하여 모든 물건들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속도는 무서울 정도였다. 이제 옷 속에 그 아이를 붙들어 두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입은 모든 옷에서 팔과 다리가 쑥쑥 삐져나왔고, 라세가 조달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물건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다. 펠레를 위해 새 옷을 마련하곤 하지만, 뒤를 돌아서기도 전에 그 옷에서도 팔과 다리가 삐져나왔다. 펠레는 참나무처럼 튼튼해서 뭔가를 들어 올리는 일이나 인내를 요구하는 일을 제외하곤 라세가 당해낼 수 없었다.

소년은 독립심도 생겨서 노인이 아버지의 권위를 주장하기가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졌다. 하지만 라세가 자기 집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테이블 앞에 앉을 순간이 오게 되면 즉시 그 권위를 되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란 말인가? (P354-355)


아버지와 떨어져 사는 건 힘들겠지만 펠레는 가야 한다고 느꼈다. 어서 떠나! 봄이 그의 귀에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돌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 그리고 나뭇가지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제 펠레의 푸른 눈과 긴 귀를 채워 주고 마음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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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손을 내밀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그동안 베푸신 모든 친절에 감사드려요!”

소년이 점잖게 말했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

라세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라세는 펠레와 함께 바깥채까지 걸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었고, 펠레는 자루를 등에 메고 둑길을 따라 큰길 쪽으로 올라갔다. 펠레는 두세 번 뒤돌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세는 무기력하게 서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늙어 보인 적은 없었다.

(...)

이제 라세는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쓸쓸해 보이던지! 펠레는 자루를 집어던지고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에게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충동은 곧 상쾌한 아침 바람 속에 사라졌다. 펠레의 발은 곧게 뻗은 길을 따라 펠레를 멀리, 더 멀리 이끌었다.

(...)

아침 햇살에 농장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흰색 집 하며, 길게 늘어선 헛간들, 그리고 바깥채들...... 저 아래에 보이는 모든 곳이 그에게 너무도 친숙하게 빛났다. 그동안 겪었던 역경들은 모두 잊혔거나, 아니면 더 큰 안도감으로 인해 좋았던 것들을 돋보이게 했다.

펠레의 어린 시절은 이 모든 것들 덕분에 행복했다. 그것은 울음이 섞인 노래였다. 슬픔은 기쁨과 마찬가지로 노랫가락이 되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가 되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밝은 하늘을 통해 그를 비추는 것은 하나같이 즐거운 추억들뿐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래 왔다.

펠레는 역경과 불행을 겪을 만큼 겪었지만, 모든 것에서 잘 벗어났다. 어떤 것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펠레는 아이다운 왕성한 식욕으로 그 모든 것에서 자양분을 찾았다. 이제 펠레는 건장한 모습으로 여기에 섰다. 선지자와 판관들과 열두 제자와 십계명, 그리고 120곡의 찬송가로 단단히 무장하고서! 그리고 이제 땀이 흐르는 넓은 승자의 이마를 세상을 향해 돌리고 있다.

그의 앞에 남쪽으로 기울어진 바다와 접한 땅이 놓여 있다. 한참 아래에 바다를 배경으로 두 개의 검은 굴뚝이 서 있었고, 더 남쪽으로는 도시가 있었다! 그 너머로 바다를 통해 스웨덴과 코펜하겐으로 가는 항로가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었다. 거대하고 넓은 세상!

큰 세상을 보자 정신없이 허기가 몰려왔다. 펠레가 처음 한 일은 앞과 뒤의 전망을 모두 볼 수 있는 언덕마루에 앉아서 카르나가 싸준 하루치 도시락을 모두 먹어 치운 것이었다. 이제 펠레의 뱃속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펠레는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서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뛰어 내려갔다.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맑은 공기 속에 목청껏 노래를 쏟아 내면서...... (P424-427)


정복자 펠레 4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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