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삼관> 2015년
<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2세기 아프리카 북부에서 씌어진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능할까?
나
야곱 알만스의 일개 백성도
장미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죽어갈 수 있을까?
나는 이 역시 평등에 관한 시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인 우리는 그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과 도리에 충실한 보통 사람인 동시에 장미의 아름다움,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 다식함과 인격을 흠모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다식함과 인격을 흠모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장미와 아리스토텔레스도 죽음의 순간에는 자신과 완전히 똑같았기를 바란다. 하이네는 ‘죽음은 상쾌한 저녁’이라며 죽음을 찬미했다. 그에게 ‘삶이란 고통의 한낮’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네 역시 죽음만이 유일한 평등임을 알았던 것이다.
평등에 대한 또 다른 추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외국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장미도 모르고(단지 꽃이라는 사실만 알 뿐),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며, 자기가 사는 작은 성 밖을 벗어나지 않아야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다른 이들처럼 그에게도 가정이 있고, 처와 아들이 있다. 역시나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들 앞에서는 다소 비굴해 보이지만, 자식과 마누라 앞에서는 자신만만해 집에서 늘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머리가 단순해서, 잠잘 때야 꿈을 꾸겠지만 몽상 따위에 젖어 살지는 않는다. 깨어 있을 때는 그도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야곱 알만스의 백성과 달리 절대로 죽음을 통해 평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생활이 그렇듯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P8-9)
허삼관은 성안의 생사(生絲) 공장에서 누에고치 대주는 일을 하는 노동자다. 그가 오늘 마을에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진 터라 허삼관이 바로 문 앞에 서 있는데도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그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대고 물었다.
“아들아, 네 얼굴이 어디 있는 거냐?”
“할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아니고 할아버지의 손자예요. 제 얼굴은 여기......”
허삼관은 할아버지의 손을 가져와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게 했다. 할아버지의 손은 마치 공장의 사포 같았다.
“네 아비는 왜 날 보러 오지 않는 게냐?”
“아버지는 이미 죽었잖아요.” (P14)
“피를 안 팔아본 사람은 모두 몸이 부실한가요?”
“그렇지, 너 방금 계화 엄마가 한 얘기 들었지? 이 마을에서는 피를 안 팔아본 남자는 여자를 얻을 수 없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무슨 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몸이 튼튼한 사람은 다 가서 피를 판단다. 한 번 피를 팔면 삼십오 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그렇게 많이는 못 벌지. 사람 몸속의 피는 우물의 물처럼 퍼내지 않으면 많아지지 않거든. 네가 매일 퍼내도 우물물은 아직도 그렇게 많이......”
“삼촌, 삼촌 말대로라면 피가 바로 돈줄이네요?”
“하지만 먼저 네 몸이 실한지 부실한지를 봐야지. 만약 몸뚱이가 부실하면, 피 팔러 갔다가 목숨까지 팔게 되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네가 병원에 피를 팔러 가면 우선 검사부터 하는데, 먼저 피를 조금 뽑아 몸이 실한지를 보고 나서 피를 팔든가.....”
“삼촌, 저도 피를 팔 수 있을까요?”
삼촌이 고개를 들어 지붕 위의 조카를 바라보니 허삼관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히죽대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그런 대로 살집이 붙어 있었다.
“네 몸 정도면 팔 수 있겠는데.”
허삼관은 지붕 위에서 한바탕 웃더니,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고개를 숙여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 궁금한 게 또 하나 있어요.”
“뭐냐?”
“병원에 가서 검사할 때 먼저 피를 뽑는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 피 값은 받나요?”
“아니, 그 피는 그냥 병원에 주는 거야.” (P18-19)
“어때 피를 팔았는데 어지럽지는 않은가?”
“어지럽지는 않은데, 힘이 없네요. 손발이 나른하고, 걸을 때는 떠다니는 것 같은 게....”
“힘을 팔았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 이제 알겠나? 자네 같은 성안 사람들이 말하는 피가 우리 촌사람들이 말하는 힘일세.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
“어떤 힘이 피에서 나오고, 어떤 힘이 살에서 나오는 건가요?”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우리 집에서 근룡이네 집까지 갈 때는 별로 힘이 들지 않지. 이런 게 바로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하지만 자네가 논밭 일을 하거나 백여 근쯤 되는 짐을 메고 성안으로 들어갈 땐 힘을 써야 한단 말씀이야. 이런 힘은 다 피에서 나오는 거라구.”
허삼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 힘이란 게 주머니 속의 돈이랑 똑같은 거군요. 쓰고 나서 다시 벌어들이는.....”
방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근룡이에게 말했다.
“성안 사람이라 역시 똑똑하군.” (P31)
허삼관은 늘 허옥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락이는 나를 닮고, 이락이는 당신을 닮았는데, 삼락이 저 녀석은 도대체 누굴 닮은 거지?”
허삼관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세 아들 가운데 일락이를 가장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열 받게도 일락이가 다른 놈의 자식으로 판명된 것이다. 그때부터 허삼관은 등나무 평상에 누워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있다가 가끔씩 상심에 찬 눈물을 흘렸다. 허삼관이 눈물을 흘릴 때면 삼락이가 다가와 자기도 따라 울었다. 삼락이는 아버지가 왜 우는지 몰랐고, 자기가 왜 우는지도 몰랐다. 단지 다른 사람이 재채기를 하면 자기도 따라서 재채기를 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상심이 그대로 전해졌던 것이다.
허삼관은 옆에서 자기보다 더 상심한 듯 울고 있는 삼락이를 보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삼락아, 저리 가.”
그러면 삼락이는 또 어쩔 수 없이 물러갔다. (P76)
“너희가 크면 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소용에게 꼭 복수하도록 해라. 너희들, 하소용한테 딸이 둘 있는 거 갈지? 안다구? 그 애들 이름 아니? 몰라?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어. 얼굴만 알아볼 수 있으면 돼. 꼭 기억해라. 너희가 다 크면 가서 하소용네 딸들을 강간 해버려라.”
허삼관은 텅 빈 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도저히 이렇게 지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 방씨가 가져간 물건들을 도로 찾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피를 파는 데 생각이 미쳤고, 이어서 십 년 전에 방씨랑 근룡이랑 같이 피를 팔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 집안은 그날 피를 팔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다시 피를 팔 이유가 생겼다. 피를 판 돈으로 탁자와 상자, 의자 등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정말이지 하소용을 너무 봐주는 것 같았다. 하소용을 대신해서 그의 아들을 구 년이나 키워줬는데, 또 그 아들 때문에 생긴 빚까지 갚아야 한다니. 이렇게 생각하니 일순간 마음이 푹 가라앉고,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허삼관은 이락이와 삼락이를 불러다 군자는 십 년을 기다려서라도 원수를 갚는 법이니 하소용의 두 딸을 십 년 후에 꼭 강간해버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P107)
허삼관이 돈을 갚자, 대장장이 방씨는 어제 짐을 날랐던 여섯 명 가운데 세 사람만 불러서 물건들을 가져왔다.
“사실 당신네 집 물건들은 수레 한 대하고 일꾼 세 사람이면 충분했는데, 어제는 괜히 수레 한 대하고 일꾼 세 사람을 더 썼다구.”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수레를 끌고, 나머지 두 사람은 양쪽에서 짐이 떨어지지 않게 받치며 허삼관의 집 앞에 이르러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제 돈을 갚았으면 괜한 헛수고는 안 했을 거 아니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허삼관은 수레에서 의자를 내리며 말했다.
“일이란 다 닥쳐야 하게 되는 거요. 사람이란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방법이 생기는 거란 말이외다. 그건 막다른 길에 이르기 전에는 행동을 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분명하기 때문이지. 만약에 병원에서 방씨네 아들한테 계속 약을 줬다면, 방씨가 당신들을 시켜서 내 집 물건을 들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요. 안 그렇소. 방씨? 말 좀 해보시오.” (P114)
허삼관이 소매를 내리면서 허옥란에게 소리쳤다.
“피를 팔았단 말이야. 이 허삼관이 피를 팔았다구, 하소용 대신 빚을 갚으려고 피를 팔아서 또 자라 대가리 노릇을 했단 말이야.”
“아이야.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피를 팔다니. 왜 한마디 말도 안 했어요? 집안 꼴이 정말 말이 아니군요. 식구가 피를 팔다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허삼관이 피를 팔았다고,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피를 팔았다고 말예요.”
“소리 낮춰, 당신이 소리만 안 지르면 아무도 모를 거야.”
허옥란은 여전히 큰소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피는 조상에게 물려 받은 거라, 사람이 꽈배기나 집, 전답을 팔수는 있지만 피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 몸뚱이는 팔아도 피는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된다고요. 몸은 자기 거지만, 피는 조상님 거라구요. 당신은 조상을 팔아 먹은 거나 다름없어요.”
“소리 좀 낮추라니까, 무슨 헛소리야?”
허옥란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피를 팔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다른 건 뭘 팔든 상관없는데, 왜 피를 파냔 말예요? 차라리 침대나 집을 팔지 하필이면 피를 파냐구요?”
“소리 낮추라니까. 왜 피를 팔았느냐구? 내가 피를 판 건 바로 내가 자라 대가리이기 때문이야.” (P117-118)
“두 사람이 피를 팔러 가는데, 왜 내 몸속의 피가 근질거리는지 모르겠네.”
“그건 피가 너무 많다는 뜻이지. 몸에 피가 너무 많으면 불편할뿐더러 몸도 붓는다구. 우리랑 같이 피 팔러 가지.”
허삼관은 잠시 생각해본 후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는 그때 임분방을 떠올렸다. 임분방은 그에게 정말 친절했다. 다리를 쓰다듬으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줬고, 사타구니를 애무하거나 벌떡 일어나 가슴을 꼭 쥐어도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며,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해줬다. 허삼관이 다친 다리를 아프게 했을 때도 그저 몇 번 끙끙거렸을 뿐이다. 허삼관은 속으로 뼈다귀 열 근하고 대두 다섯 근 정도는 꼭 사 보내기로 결심했다. 병원에서 뼈가 부러진 사람한테는 뼈다귀와 푹 곤 콩을 많이 먹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뼈다귀와 대두만으로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녹두도 몇 근 사 보내기로 했다. 녹두가 해열 작용을 한다고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임분방은 매일 침대에 누워 있는 데다가 날씨까지 더우니, 녹두를 먹으면 열이 좀 내릴 거라 생각했다. 녹두 이외에 국화도 한 근 보내기로 했다. 국화도 물에 담가 마시면 역시 열을 내리게 할 수 있다. 허삼관은 이렇게 방씨랑 근룡이랑 피를 팔아 번 돈으로 뼈다귀와 대두, 녹두와 국화를 사 보내는 걸로 임분방에게 보답의 뜻을 전하기로 했다.
허삼관은 피를 팔고 받을 삼십오 원 중에서 임분방에게 사 보낼 물건 값을 제외하면 삼십 원 정도가 남을 테니 그 돈은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쓰기로 했다. 예를 들어 자기가 몸보신을 하거나 이락이와 삼락이를 위해 써도 좋고 허옥란을 위해 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락이만은 제외하기로 했다. (P132-133)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올해는 1958년,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제강생산운동...... 또 뭐가 있지? 아, 우리 아버지 땅이랑 넷째 삼촌의 논밭이 다 회수됐지. 앞으로는 누구도 자기 논밭을 가질 수 없다구. 전부 국가에 귀속되는 거지. 즉 국가가 빌려준 논밭에 농사를 짓는 거라 이거야. 수확할 때도 당연히 국가에 공납을 해야 하고, 에, 결국은 국가가 이전의 지주가 되는 거지. 물론 국가가 지주는 아니고, 인민공사라고 불러야겠지...... 우리 생사 공장도 요즘 강철을 제련한다구 공장 안에 작은 고로(高爐)를 여덟 개나 만들었지. 나하고 네 사람이 고로 하나를 관리한단 말이야. 그러니 난 생사 공장에서 누에고치를 나르는 허삼관이 아니라 생사 공장의 제강공 허삼관이다 이거야. 다들 나를 허 연강(煉鋼, 제강공)이라고 불러, 그럼 왜 그렇게 많은 강철을 생산하는지 아나? 사람은 곧 철이고 밥은 곧 강이니, 이 강철은 바로 국가의 양식인 거야. 그러니까 국가의 쌀이자 보리이고, 생선이자 고기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 제련은 논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P148)
“눈이 침침하고 가슴이 뛰는 게 영 힘이 없어. 속이 메슥거리는 게 꼭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좀 누워야겠어. 서너 시간 지나고 안 일어나면 그냥 놔둬. 하지만 일고여덟 시간이나 잤는데도 안 일어나면 사람을 불러서 병원에 데려가야 해. 알았지?”
허삼관이 잠든 후 허옥란은 손에 삼십 원을 꼭 쥐고 문간에 앉아 텅 빈 골목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날렸다. 허옥란은 희뿌연 담벼락을 응시한 채 혼잣말을 되뇌었다.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 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흔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십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
허옥란은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잠시 후 돈을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먼저 손바닥으로 양 볼의 눈물을 훔친 다음 손가락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P170-171)
”일락아, 내가 평소에 언제 너를 홀대한 적 있니? 이락이, 삼락이가 먹는 거면 너도 같이 먹었잖니. 하지만 오늘 이 돈은 내가 피를 팔아 번 거라구. 쉽게 번 돈이 아니에요. 내 목숨하고 바꾼 돈이라구. 내가 만약 피를 팔아서 너한테 국수를 사 먹인다면, 그 천하의 죽일 놈 하소용을 너무 봐주는 거잖니.“ (P174)
일락아. 하소용이 이전에 우리한테 몹쓸 짓을 한 건 다 지난 일이다. 그걸 마음에 담아두면 안 된다. 지금은 하소용이 위독하다하니, 일단 목숨부터 구하고 보는 거다. 어쨌든 하소용도 사람이고, 사람 목숨은 다 소중한 거 아니겠느냐. 게다가 네 친아버지인것도 사실이니 네가 친아들 된 입장에서 지붕에 올라가 소리 몇 번 질러줘라.....
일락아, 하소용이 널 친아들로 받아들이려 한다는구나. 그 사람이 널 친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네 친아비 노릇을 할 수가 없단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일락아, 엄마 따라 가거라. 내 말 듣고 어서 가. 가서 하소용의 영혼을 불러라. 일락아, 어서 가라니까. (P204-205)
하소용의 부인이 또 끼어들었다.
“일락아, 더 해야 돼. 진 선생님이 한 시간은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하셨거든. 어서 소리쳐라.”
“됐어.”
허삼관은 하소용 부인의 말을 매몰차게 끊었다.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진 선생. 그 자식도 썩을 놈이긴 마찬가지야. 일락이가 소리를 쳤으니, 하소용은 죽을 거면 죽는 거고 살 거면 살겠지..... 일락아, 기다려라, 내 올라가서 내려줄 테니.”
허삼관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 일락이를 등에 업고 내려왔다. 지붕에서 내려온 허삼관이 일락이에게 일렀다.
“일락아,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이렇게 말한 뒤 허삼관은 하소용의 집으로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하소용의 집 대문 앞에 서서 식칼로 자기 얼굴과 팔을 그어 상처를 낸 후,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똑바로들 보시오. 이 피는 내가 칼로 그어서 나온 거요. 당신들.....”
허삼관은 하소용의 부인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들 중에 또 일락이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렇게 칼로 베어버릴 테요.”
말을 마친 뒤 허삼관은 칼을 내던지고 일락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락아, 우리 집에 가자.” (P213-214)
“...문화대혁명이 오늘날까지 왜 이렇게 떠들썩한지 이제야 좀 알겠어. 문화대혁명이 무엇이냐? 개인적인 원수를 갚을 때 말이지. 예전에 누가 당신을 못 살게 굴었다 치자구. 그러면 대자보를 한 장 써서 길거리에 붙이면 끝이야. 법망을 몰래 피한 지주라고 써도 되고, 반혁명분자라고 써도 좋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구. 요즘은 법원도 없고, 경찰도 없다구. 요즘에 가장 많은 건 바로 죄명이야. 아무거나 하나 끌어와 대자보에 써서 척 붙이면 당신은 손쓸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잡아다 작살을 낸다 이 말씀이야...... 요즘엔 나도 가만히 누워서 이리저리 생각을 해봐. 내가 원한을 품은 놈이 없나 하고 말이야. 그냥 대자보나 한 장 써서 원수를 갚으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도 없단 말이야. 딱 하나 하소용이 있긴 한데 그 개 같은 놈은 사 년 전에 트럭에 치여 뒈져버렸잖아. 이 허삼관은 수십 년을 하루같이 착하게만 살아왔으니 원수도 없고, 원한 산 사람도 없다 이 말씀이야. 그래서 누구 하나 내 이름을 대자보에 써 붙이지 않는 거라구......”
허삼관의 말투가 이렇듯 날아다닐 즈음 삼락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대자보가 붙었는데 엄마보고 화냥년이래요.....”
깜짝 놀란 허삼관과 허옥란이 곧바로 달려가 벽에 붙은 대자보를 읽어보니 삼락이 말 그대로였다. 수많은 대자보 가운데 허옥란에 대한 내용이 한 장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허옥란이 화냥년이고, 몰래 매춘을 해왔으며, 열다섯 살 때는 아예 하룻밤에 이 원씩 받고 영업을 하는 기녀였는데 그녀와 잔 남자가 트럭 열 대로도 모자랄 정도로 많다는 것이었다. (P216-217)
허삼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은 다 같은 거야.”
“아니에요. 당신하고 나하고는 달라요. 만약 나하고 하소용 사이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당신이 임분방의 다리를 만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허삼관이 허옥란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그렇긴 해, 하지만......”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결국은 당신과 똑같아.”
그 후에 모 주석의 말씀이 있었다. 모 주석께서는 매일 뭔가를 말씀하셨는데, “말과 글로 투쟁해야지 무기를 들고 투쟁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뒤로 사람들은 손에서 칼과 곤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 주석이 “학습을 재개하고 혁명을 지속하자”고 말씀하시자 일락, 이락, 삼락이가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 다시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또 모 주석께서 “혁명을 견지하며 생산을 촉진하자”고 말씀하시자 허삼관은 다시 공장에 출근을 했고, 허옥란은 매일 새벽 꽈배기를 튀기려 나갔다. 허옥란의 머리는 점점 자라 이제 귓불을 덮을 정도가 되었다.
세월이 좀 흐른 뒤 모 주석께서 천안문 성루에 모습을 보이셨는데, 오른손을 들어 서쪽을 향해 흔들며 수천 수백만의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지식 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빈농과 하층 중농에게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P237-238)
“아버지, 십 원만 가져갈게요.”
“전부 가져가거라. 이건 내가 방금 피를 판 돈이니 다 넣어둬라. 이 안에는 이락이 몫도 있다. 너하고는 그나마 가까이 있잖니. 이락이가 널 찾아가면 십 원이나 십오 원쯤 줘라. 이락이한테 돈 함부로 쓰지 말라 이르고, 아버지는 너희랑 멀리 떨어져 잇어서 평소에 너희를 돌볼 수 없으니 형제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지내야지.”
일락이가 돈을 받아 넣자 허삼관이 말을 이었다.
“이 돈은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아껴 써야 한다. 피곤해서 식욕이 없을 때 맛난 걸 사 먹고, 명절 때 담배 두 갑하고 술 한 병쯤 사서 너희 생산대장한테 갖다 줘라. 그래야 적당한 때 널 재배치해주지, 알겠니? 이 돈은 절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좋은 쇠는 칼날에 써야 제 몫을 하지 쓸데없는 곳에 쓰면.....”
배가 떠날 시간이 되어 허삼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락이를 개찰구까지 배웅하고, 배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뒤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일락아, 내 말 꼭 명심해라. 좋은 쇠는 칼날에 써야 한다는 거.”
일락이는 허삼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머리를 숙여 선실로 들어갔다. 허삼관은 한동안 개찰구에 서 있다가 배가 떠난 후에야 대기실을 나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P246)
“아니, 먼저는 힘을 싹 팔고 그 다음엔 온기를 싹 팔았다더니, 그럼 이제는 목숨만 겨우 남았을 텐데, 또 피를 팔면 그건 목숨을 팔아넘기는 거 아니요?”
“설령 목숨을 파는 거라 해도 전 피를 팔아야 합니다. 아들이 간염에 걸렸거든요. 지금 상하이의 병원에 있는데, 가능한 한 빨리 돈을 모아 가야지 몇 달을 더 기다렸다가는 아들이.....” (P291)
허삼관은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젊은 혈두의 말이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는 젊은 혈두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처럼 늙은이의 피는 살아 있는 피보다 죽은 피가 많아 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가구에나 칠해야 한다고..... 사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피를 팔지 못한 것이다.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했는데, 이제는 자기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니...... 집에 또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P324-325)
허옥란은 세 아들의 말을 듣고는 그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 양심은 개한테 갖다 줬냐?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다니. 너의 아버지는 피 팔아 번 돈을 전부 너희를 위해서 썼는데, 너희 삼형제는 아버지가 피를 팔아 키웠다 이 말이다. 생각들 좀 해봐라. 흉년 든 그해에 집에서 매일같이 옥수수죽만 먹었을 때, 너희들 얼굴에 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어서 아버지가 피를 팔아 국수를 사주셨잖니. 이젠 완전히 잊어버렸구나. 그리고 너 이락이, 네가 생산대에 갔을 때 너희 대장한테 너 좀 잘 부탁한다고 아버지가 피를 두 번이나 팔아서 밥 먹이고 선물까지 사주고 그랬는데, 너 아주 까맣게 잊었구나. 일락이 너도 그럴 줄은 몰랐다. 네가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말하다니, 참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너한테 아버지가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사실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너한테는 다른 어떤 아들한테보다 잘해주셨을 게다. 네가 상하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집안에 돈이 없어서 아버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피를 파셨지 않니. 한 번 팔면 석달은 쉬어야 하는데, 너 살리려고 자기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사흘 걸러 닷새 걸러 한 번씩 피를 파셨단 말이다. 쑹린에서는 돌아가실 뻔도 했는데, 일락이 네가 그 일을 잊어버리다니...... 이 자식들아, 너희들 양심은 개새끼가 물어갔다더냐. 이놈들...........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