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 1999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왜 걸작인가? 또 셰익스피어는 어째서 위대한 작가인가? 스티븐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의 문장과 작품에 깃든 주제 의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지난 400여 년 동안 사랑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선언한다. 바로 셰익스피어가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얼마나 값지고 위대한지를, 즉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인본주의적 성취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 줬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시대가 움트던 시기에, 과거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도시 문명이 형성되던 시대에, 번듯한 배경도 없고 잘난 학위 하나 없이 ‘세계’와 맞서 싸웠다. 윌(Will) 셰익스피어는 인본주의가 꿈꾼 인간적 의지(will)의 현현이고, 그것이 일궈 낸 승리의 징표다. 이제 우리는 이 천재적 작가의 작품과 일생을 이해하기 위해 신격화, 즉 인간성을 초월한 불가해한 능력을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스티븐 그린블랫이 『세계를 향한 의지』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 바는,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것의 승리였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최악의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자주 회자된다. 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13개 부분에 후보로 올라, 작품상을 포함한 7개 부문의 상을 석권하였다. 다만 몇몇 분야에 논란이 많았다.
[1 원색 장면들]
어릴 적부터 단어들이 지닌 마술에 사로잡힌, 그래서 언어에 잔뜩 매료된 소년 셰익스피어를 한번 상상해 보자. 그의 초기 작품에는 이러한 집착을 뒷받침해 주는 강렬한 증거들이 널려 있으므로, 그가 일찌감치 언어에 매료되었으리라 보는 것은 비약이 아닌 안전한 추정일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귓가에 나지막이 동요를 불러 주던 그 첫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필리콕, 필리콕, 언덕 위에 앉았네,
떠나가지 않았다면 —여전히 앉아 있네.
(이 특정한 동요는 수년이 지난 후 <리어 왕>에서 광인 톰(poor Tom)이 “필리콕이 필리콕 언덕 위에 앉았다.”라고 외쳐 대는 장면(3,4,73) (P41)
나는 자기가 꾼 게 어떤 꿈이었는지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꿈을 꾸었네. 이 꿈을 설명하려고 하면 사람은 멍청한 당나귀가 되어 버려. 내 생각에 나는 —아니 이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생각에 나는, 내 생각에는 내가— 아니 내가 겪은 일을 말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바보 머저리일걸. 내 꿈이 어떤 꿈이었느냐면, 사람의 눈으로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의 귀로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손으로 맛볼 수도 없는, 그의 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심장으로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꿈이었다네.
(4.1.199-207)
이것은 성스러운 꿈을 대중적인 오락으로 교묘히 바꿔 놓은 작가, 곧 성과 속의 갈림길에서 단호히 세속의 길을 택한 극작가의 농담이었다. “피터 퀸스를 불러다가 이 꿈에 대한 노래를 쓰라고 해야겠어. ‘바텀의 꿈’이라고 불러야지. 왜냐하면 이 꿈은 너무 깊고 심오해서 밑천(bottom)이 드러날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막간 사이에 내가 그 노래를 부를 거야.”(4,1,207-10) 이 농담은 매우 광범위한 대상을 겨냥하고 있다. 엄숙한 설교자들, 셰익스피어가 어린 소년일 때 지방 순회 공연을 다니던 전문 극단들, 이러한 연극의 더 조잡한 형태를 공연하곤 하던 아마추어 배우들 그리고 아마도 어리숙하고 젊은 셰익스피어 자신을, 그의 혀로 미처 상상할 수 없는 환상으로 가득 차서 연극의 모든 역할들을 열정적으로 맡으려 하던 그 자신까지도 말이다. (P62-63)
<한여름 밤의 꿈>이, 갓 서른 살이 된 셰익스피어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깊이 끌어오면서 극작가로서의 자아를 성찰하는 작품이라면, 거기서 그는 연극 무대라는 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받아들였다. 마술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지닌 것으로서 상상력의 힘을 활용하여 현실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또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요소, 그가 장인들의 직업에서 연결 짓듯이 건물, 잘 짜인 무대, 의상, 악기 등과 같은 현실에서의 공연 행위에 필요한 물질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하는 측면이 있다. 이 물리적 구조들이 바로 마술적 상상력이 깃들 수 있는 공간과 이름을 부여한다. 그는 연극 공연이 이루어지는 극장이라면, 관객에게 이처럼 환상적인 일탈의 체험을 줄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아주 견고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토질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관객도 이를 이해하기 원했다.
그 현실의 건강한 토질이 바로 그의 창조적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다 온 작은 시골 마을의 소박한 세계와 고대 시인 아리온의 가면 뒤에 여느 평범한 필부의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P92)
[2 재건의 염원]
1680년 무렵 독특하고 수다스러운 전기 작가 존 오브리(John aubrey)는, 스트랫퍼드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윌 셰익스피어가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축업자가 되기 위해 수습받는 과정에 있었고, 때때로 직접 짐승들을 도살할 차례를 맞곤 했다는 글을 남겼다. “송아지를 죽일 때면, 그는 아주 고상한 태도로 그 일을 해냈고, 장문의 연설을 하곤 했다고 한다.” 젊은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자신의 직업 문제를 해결하고 작가라는 천직을 찾게 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뜬소문에도 상당한 흥미를 가졌던 오브리는, 그가 학교를 떠난 시점인 1570년대 후반에서 1580년대 초반의 시간대와 런던에서 처음으로 전문 배우이자 극작가로 이름을 알린 1590년대 초반의 시간대 사이에 그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P93)
셰익스피어는 술고래들을 묘사할 때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한 모습을 근거로 했다. 그는 술을 잔뜩 퍼 마신 주정뱅이들의 다리가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그들의 코와 뺨에 터진 핏줄, 꼬인 발음으로 늘어놓은 장황한 연설에 주목했고,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특별한 이해심, 즐거움, 심지어 애정을 가직 그들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공감과 감정 이입은 또 다른 요소와 함께 엮이기도 했는데, 햄릿의 목소리를 빌어 이야기하던 압도적인 허망감도 섞여 있었다. 그는 토비 벨치 경이 조카에게 의탁해서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의 친구라고 말하는 앤드루 경(Sir Andrew)을 무자비하게 등쳐 먹는 것, 그리고 자기가 괴롭히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비리비리한 소년에게서 역으로 흠씬 두들겨 맞아도 싼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폴스타프에게서도 비슷한 것을 보는데, 바로 진흙탕을 뒤집어쓴 신사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어둡고 더 깊은 형상을 띤다. 그것은 타락한 천재, 심오한 냉소가, 거부할 수 없이 현란한 사기꾼, 병들고 비겁하며 유혹적이고 사랑스러운 괴물,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토비 벨치 경과 폴스타프 양쪽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 음주벽은 무해한 흥겨움, 즉석에서 터지는 재치, 그리고 귀족층의 무분별한 유쾌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교활하고 타산적인 전략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차 없이 착취하는 측면도 있음을 드러내어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그런데 이 전략은 언제나 실패하는 전략이다. 위대한 계획, 상상의 부, 무한한 미래라는 환상은 모두 공허한 결과로 이어지며, 상징적인 아버지의 실체에 실망한 성인 아들의 경멸 속에서 조금씩 시들어 간다. “하느님이 그대를 축복하시길, 내 사랑스러운 아들아!” 런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는 할을 보며 폴스타프는 외친다. “나는 그대를 모른다. 늙은이여.” 할은 이렇게 대답하는데, 이 부분은 셰익스피어가 쓴 것 중 가장 싸늘하고 충격적인 대사 중 하나이다.
그대의 축복들은 모두 나가떨어지라 이르라.
저 하얗게 센 머리로 광대놀음이나 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싫은지!
나는 오랫동안 저 사람을 꿈속에서 그려 왔지.
저 탐닉으로 살찐 몸, 먹을 대로 먹은 나이, 불경한 태도를,
하지만 이제 잠에서 깨고 보니, 내가 꿨던 그 꿈을 나 경멸하노라.
-헨리 4세(2부, 5,5,41.45-59)
이것들은 새로이 왕위에 오른 영국 왕이, 유별나게 재미있으면서도 위험하기로 소문난 그의 친구에게 하는 말이며 역사극에서의 줄거리 구도와 맥락을 따라 장중하게 쓰인 대사들이다. 하지만 할과 폴스타프의 관계가 보여 주는 강한 유대감과 그 유대가 깨진 순간의 엄청난 비애감을 받아들일 때, 역사성의 경계를 넘어서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다 특별한 친밀감과 사적인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P120-122)
[3 거대한 공포]
설령 윌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배우라는 직업을 갖기로 확고히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무대 위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고자 길을 떠나 노상에서 노래와 저글링으로 식사와 숙소 비용 몇 푼씩을 벌어 가며 최종 목적지인 런던으로 향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적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에서 자기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은 보통 곤경에 빠진 사람이었으며, 당대 사회는 근본 없는 떠돌이들에게 마뜩잖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나중에 셰익스피어는 여러 작품에서,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렸거나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겪는 박해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원정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들이나 방랑하는 음유 시인들의 시대는 사라졌다. 마치 환상 속에서가 아니면 아예 존재한 적조차 없던 것처럼, 순회 여행을 하는 수사들이나 순례자들은 분명히 동시대에도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안에서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수도회 단체들은 국가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순례지들은 과격한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폐쇄되거나 파괴당했다. 노상을 떠도는 방랑자들은 있었으나 그들은 각종 위험에 굉장히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보호 수단이 없는 상태로 혼자서 여행하는 여자들은 공공연한 공격과 강간의 대상이 되기 쉬웠으며, 이러한 경우 가해자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혼자 여행하는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위협을 받는 일이 적었으나 그럼에도 가능한 최대한의 보호 수단을 갖출 필요는 있었다. 여행이 필요한 사업들은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모든 행상인과 땜장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주의 담당관 두 사람의 허가를 받은 면허가 필요했으며, 그러한 허가증이 없는 사람은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 (P151-122)
왜 당국에서는, 이제 막 옥스퍼드를 졸업한 앳된 사제들이 자기 꾸러미에 묵주를 지닌 채 좀 돌아다니는 것 정도를 두고 그토록 경계했을까?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사람은 영웅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자신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는 평정, 직업, 명예, 안온함과 가족까지 모두 버리고, 성스러운 전장이 펼쳐지는 신실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해 매일같이 자신의 삶을 내던지면서 위험을 불사하며 봉사하는 영웅이었다. 유럽의 수도원에서 사제로 임명을 받고, 자신의 신앙을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적이 되어 버린 왕국으로 몰래 진입한 커탬과 같은 사제는, 곳곳에 놓인 정보원들의 함정을 무사히 피하면서 어느 동정심 많은 가톨릭교도의 저택에 몰래 은신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곳에서, 집의 하인이나 어린 자녀의 가정 교사로 가장한 채 숙식하면서, 그는 비밀리에 세워진 제단 위에서 설교를 하고, 영성체를 주재하고, 고해성사를 듣고, 죽어 가는 자들의 마지막 의식을 집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로버트 뎁데일이 그랬던 것처럼, 악령을 쫓는 구마식을 집행했을 수도 있다. 개신교의 관점에서 이러한 자는 아무리 잘 봐줘야 불쌍하고 망상에 빠진 얼간이자 위험한 광신도였고, 외국 정부의 앞잡이인 내란 음모자였다. 곧 로마에 있는 음험한 주인들의 명령을 쫓아서, 교황과 그 일당의 손에 조국을 갖다 바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반역자인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개신교의 입장에서의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로마의 가톨릭교회는 영국 가톨릭교도들이 당국에 반기를 들도록 장려했는데, 1580년에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영국의 이단 여왕을 암살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상의 대죄가 아니라고 선포하면서 이러한 요청의 의미는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이 선포는 분명히 여왕 살해에 대한 공식 허가였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토머스 커탬 사제가 가톨릭 물품이 든 작은 꾸러미를 든 채로 스트랫퍼드 근교에서 붙잡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토머스 커탬의 형 존이 마을 학교 교사직을 금방 내놓은 것도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존 셰익스피어와 그의 동료 의원들은 —그리고 특히나 가까운 가톨릭 친척을 둔 이들은— 틀림없이 엄청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정부 당국의 조사와 의혹이 그들에게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170-171)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는 많은 형태의 영웅주의가 나타나는데, 그럼에도 이념적인 영웅주의 —하나의 관념이나 체제에 맹렬하고, 자기 희생적으로 고착하는 것— 같은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도, 가시적인 교회나 그 일원에 대해 깊은 숭배나 경탄을 보낸 적이 없다. 그가 묘사한 몇몇 눈에 띄는 가톨릭 종교인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런스 수사(Friar Laurence)—은 본질적으로 호감이 가게 그려진 인물들이지만, 교회의 위계상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언제나 불쾌한 성미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역사극 <존 황(King John)>에서는 극 중 배경이 13세기 초반임에도, 사실상 시대 배경과 맞지 않는 개신교적 관념으로 아주 신랄하게 교황을 공격한다. 존 왕은 교황의 특사에게 잔뜩 분개한 어조로, 어떻게 교황이 감히 “신이 내린 왕”에게 그의 뜻을 강제로 부과하려고 하는지를 묻는다.
추기경이여, 그대가 주워섬기는
그토록 경미하고, 무가치하고, 터무니없는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대답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에게 이 얘기를 전하라, 그리고 영국 전역에서 입을 모아
이오 같이 덧붙여지리라. 그 어떤 이탈리아의 사제도
우리의 영토에서 십일조나 통행세를 걷어 가지 못하리.
하느님 아래서는 짐이 수장이니
그의 아래엔 그의 신민들이 있을 것이다.
짐이 다스리는 곳은 짐이 홀로 지킬 것이며
다른 필멸의 손의 도움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3,1,74-84)
거칠고 노골적으로 쓰인 이 장면은 철저히 개신교적 입장에서 교황을 약올리는 관점이다. 물론 이 관점이 곧 젊은 나이부터 오래 몸담아 왔던 가톨릭에 대해서 셰익스피어가 최종적으로 갖게 된 태도를 종합해서 보여 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당국으로부터 쫓기는 예수회 수사 캠피언 앞에 섰을 때 젊은 셰익스피어가 무엇을 느꼈을지도 이것으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일생 동안 아주 열정을 다해 지지한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성자적 성격은, 역설적으로 캠피언이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의 학생들이 피하기를 기원했던 바로 그 주제와 감정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에로틱한 성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P191-192)
[4 연애, 결혼식, 후회]
만약 윌이 1582년에 랭커셔에서의 긴장된 체류를 마치고 스트랫퍼드로 돌아온 것이 맞다면, 그리고 그해 여름에, 외부에 들키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메시지나 비밀스러운 종교 성물을 남몰래 뎁데일 가족에게 전달하기 위해 쇼터리에 가기로 했던 거라면, 그가 그곳에서 앤 해서웨이를 상대로 연애를 시작한 것은 바로 공포의 제국에 대한 저항이었음이 명백하다. 앤의 세계는 그가 지금까지 노출되어 있던 위험한 세계와 완전히 정반대에 있었다. 사이먼 헌트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남학생들만의 유대, 자신의 학생 로버트 뎁데일과 함께 수도원으로 떠나 버린 학교 교사, 캠피언, 파슨스, 커탬과 그 외 다른 예수회 수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모의, 독실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려 하던 젊은 청년들의 비밀 모임과 같은 것들이, 그가 경험해 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만일 실제로는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았다고 해도, 윌은 그저 스트랫피드 출신의 미숙한 사춘기 소년일 뿐이었으며 그에게 미친 주된 사회적 영향이란 그의 가족과 왕립 신축 학교의 또래 소년들에서 오는 것들뿐이었다고 해도, 앤 해서웨이는 여전히 그에게 놀라운 신세계적 대안을 열어 준 장본인일 수 있다. 윌의 가족이 보유한 종교적 신념이 가톨릭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했는데, 앤의 경우에는 거의 그 반대였다. 앤의 아버지 리처드는 유언장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묻어 달라.“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주로 청교도들이 선호하던 단순하고 의례 없는 매장 방식을 의미하는 관례적 표현이었다. 앤의 형제인 바살러뮤 역시 그러한 매장을 요청했는데, ”마지막 심판의 날 일으킴을 받아 주 하느님의 선택받는 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주 하느님의 선택받는 자“라는 표현은, 이들이 캠피언이나 혹은 그 점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어머니의 친척들인 아덴 가문의 가톨릭교도들과도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보여 준다. (P203-204)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오래도록 행복한 미래를 가꾸어 갈 커플을 쉽게 만들어 내지 않았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라이샌더(Lysander)와 허미아의 사랑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며, 드미트리어스(Demetrius)와 헬레나(Helena)는 그들의 눈꺼풀에 사랑의 묘약이 남아 있는 한에서만 서로를 소중히 받아들일 것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배우들의 연기 전달력이 훌륭하다면, 관객들은 페트루치오와 케이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말다툼 속에는 서로에 대한 강렬한 성적 이끌림이 반쯤 숨겨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연극의 결말은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양쪽 모두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수 없는 두 가지 결혼 생활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는 커플이 지금까지처럼 계속해서 쉬지 않고 다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의 뜻이 일방적으로 꺾이고 마는 것이다. <좋으실 대로>의 결말이 성공적인 것처럼 먹혀드는 이유는, 아무도 로절린드와 올랜도, 또는 터치스톤(Touchstone)이 부르듯 나머지 ”예비 신랑 신부들“의 미래의 가정 생활을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5,4,53) 바이올라는 변장을 위해 걸치고 있던 남성의 의복을 계속 입고 있는 상태이므로, <십이야>는 그녀를 원래대로 얌전하고 어린 여자의 입장으로 재차 받아들여야만 하는 관객의 부담을 덜어 버린다. 심지어 연극이 끝나 갈 때조차 올시노는 실제 여성 아내를 맞이한다기보다 여자처럼 나긋나긋하게 생긴 남자 애인과 약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관계에 대한 그 무엇도, 그들이 서로 잘 맞는 운명의 짝이라거나 혹은 엄청난 행복이 그들 앞에 놓여 있으리라는 전망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제시카와 로렌초(Lorenzo)는 제시카의 아버지 샤일록에게서 훔친 돈을 함께 써 버리면서 쾌락을 느끼지만, 그들의 희롱 섞인 농담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로렌초: 바로 그런 밤에
제시카는 부자 유대인에게서 돈을 훔쳤지.
그리고 방탕한 사랑을 달고 베니스에서부터
벨몬트까지 멀리 달아나 버렸다네.
제시카: 바로 그런 밤에
젊은 로렌초는 그녀를 사랑한다 맹세했지.
수많은 믿음의 서약으로 그녀의 영혼을 훔치며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실된 것은 없었다네.
(5,1,14-19)
여기서 비치는 불안감은 —아버지의 재산을 털어 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쁜 믿음, 그리고 배신과 함께 뒤섞이는— 포샤와 바사니오(Bassanio)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희극적인 보조 역할인 네리사(Nerissa)와 그라치아노(Graziano)에게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헛소동>의 히어로(Hero)와 미숙하고 잔인한 클라우디오(Claudio)에 비하면, 적어도 이들은 희망찬 미래라도 갖고 있는 신혼부부인 것이다. <헛소동>을 비롯한 초기 희극의 모든 커플들에서는 오직 비어트리스와 베네딕(Benedick)만이, 계속해서 지속되는 애정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또한 관객들이 그들이 서로에게 가한 수많은 모욕을 눈감아 주고, 애초에 그들이 서로 속아서 연애 관계에 진입하게 된 것을 잊어주고, 또한 그들이 내내 입으로 주장하는 바와는 반대로 사실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넘겨짚어 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P231-233)
[5 다리를 건너며]
1583년 여름, 열아홉 살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기혼 남성의 삶에 안착하는 중이었다. 이제 막 딸이 태어났으며, 그는 따로 분가하지 않고 부모님과 누나 조앤, 남동생 길버트, 리처드, 에드먼드 그리고 헨리 스트리트에 있는 넓은 집에서 능력껏 고용한 하인들 몇 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장갑 가게에서 일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교사나 변호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약간의 돈을 벌었을 수도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시를 썼을 테고 류트를 연습하고, 펜싱 기술도 다듬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신사의 생활 방식을 모방하는 능력을 계속 배양하고 있었을 것이다. 북부에서의 체류와 거기서 겪은 일들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제 다 지난 일이었다. 랭커셔에서 전문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했던 거라면, 최소한 지금은 당분간 그 일을 옆으로 제쳐 둔 상태였다. 그리고 만약 그가 가톨릭 신앙을 둘러싼 비밀 모의, 성자들과 순교의 길이라는 어두운 세계를 살짝 맛봤다면 —킹피언을 교수대로 보낸 그 세계—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 세계로부터 결정적으로 나와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대신 그는 일상의 세계를 끌어안으며 받아들였다. 혹은 일상의 세계가 그를 끌어안으며 받아들였거나. (P255-256)
셰익스피어는 이중 의식의 대가였다. 그는 가문의 문장 발행에 돈을 쓰면서도 그러한 요청에 내포되어 있는 허세욕을 조롱했고, 부동산에 투자를 하면서도 <햄릿>에서는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사업가에게 조소를 보냈으며, 인생과 가장 깊은 에너지를 극장에 쏟아부었으면서도 동시에 극장을 비웃고 그 자신을 무대 위의 구경거리로 삼아 온 것을 후회했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접한 모든 단어들,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가 겪은 인생의 모든 경험을 계속해서 재활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작품이 갖는 엄청난 풍부함을 설명할 길이 없다— 동시에 그는 타인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자신의 약점을 차단하고 특정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영영 포기했다. 그리고 토머스 루시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의 경우, 그는 1590년 후반에 이처럼 가벼운 대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을 쓰면서 그 속에 한때 그를 사로잡았던 강력한 공포의 흔적을 깊이 묻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P265-266)
셰익스피어가 이러한 꿈을 갖고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것은 배우가 된다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였으며 극작가의 기술을 연마하는 데도 필수적인 요소였고, 연극을 보기 위해 몇 페니를 지불한 관객의 의지를 북돋우는 바로 그러한 꿈이었다. 그에게는 또한 좀 더 사적인 동기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토머스 루시와의 곤란한 상황으로 밀어 넣은 게 무엇이든 그 앞에 닥친 곤경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욕구, 아내와 세 아이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 무절제한 아버지가 벌여 놓은 장갑 가게와 불법 양모 거래에서 달아나고 싶은 욕구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연극에서, 그는 반복적으로 인물들이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분리되어, 정체성의 상실을 겪고, 낯선 환경으로 내던져지는 상황을 꾸몄다. 아덴의 숲에 있는 로절린드와 실리아(Celea), 일리리라의 해변에 선 바이올라, 황야에 있는 리어, 글로스터와 에드거, 타소스와 페리클레스, 시칠리아에 버려진 갓난아기 퍼디타, 웨일스의 산에 있는 이노젠(Innogen) 혹은 이모젠(Imogen), <태풍>에서 영에 홀린 섬에 도착한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 (P283-284)
셰익스피어는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에, 말하자면 근대성을 혐오하고 배움을 경멸하며 무지의 미덕을 기리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발광 섞인 절규와 그 극적인 성격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여기에서는 본인 자신의 일부를 투영하는 성격으로도 나타나는데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할 것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상상할 때— 그는 그들에게 일면의 괴기스러운 어리석음뿐 아니라 비통한 정서까지도 부여하고 있다.
그대는 가난한 자들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두고, 이들을 불러들여 그대로 그 문제에 대해 묻는 치안 판사를 임명했다. 그에 더하여, 그대는 그들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두었고,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가장 살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던 그들을 목매달아 처형했다.
(4,7,34-39)
문맹이라는 이유로 악당들의 목숨이 부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미친 생각이다. 하지만 케이드는 당시 영국의 법에 실제로 존재하던, 만만치 않게 광적인 측면에 항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P291)
[6 도시 근교에서의 삶]
마을을 가로지르는 거리 끝에 이르면, 혹은 거기서 몇 분만 더 걸어가면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세계, 그는 바로 그런 곳에서 자랐다.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런던의 부스러지는 벽들을 넘어서서 수킬로미터에 걸쳐 확장되어 있는 촘촘한 연립 주택들, 창고들, 채소를 키우는 작은 텃벝들, 작업장들, 총기 주조장들, 벽돌 가마들, 풍차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서 이어진 냄새 나는 배수용 도랑들과 고물상의 쓰레기 더미들이었다. 매일같이 도심을 왕래하며 살아가는 도시 근교 거주자의 삶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셰익스피어는 탁 트인 시골 풍경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런던 사람들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시골에서 보내며 누리는 가족적인 즐거움은, 도심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조만간 역병이 닥칠 것이라는 널리 퍼진 믿음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붐비고 악취 나는 거리를 지나다닐 때면 꽃다발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그 냄새를 대신 맡거나 혹은 콧구멍 속에 정향을 넣고 다니면서 악취를 피하려고 애썼고, 역병을 일으키는 도시의 악취를 쫓기 위해 실내에서는 독특한 연기를 내뿜는 향이나 향초를 태웠다. 깨끗한 시골 공기는 문자 그대로 생명을 연장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역병이 닥칠 때마다 도시를 떠나서 다른 곳에 거주하다 올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앞다퉈서 도시를 빠져나갔으며, 그만한 재주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한나절이나마 교외 들판을 산책하고 싶어 했다. (P297-298)
고통과 죽음의 공간과 아주 가까에게 있는 것은 쾌락의 공간이었다. --뱅크사이드(Bankside)의 처형대는 사창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의 연극에는 창녀들이 사는 사창굴(‘유곽’)이 종종 등장한다. 돌 티어시트, 오버돈 부인(Mistress Overdone) 그리고 성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그들의 동료들은 신속하게 그러나 인상적으로 묘사되며, 이들과 연관되는 포주들, 문지기들, 급사들, 그리고 하인들의 모습도 같이 그려진다. 그는 사창가를 질병, 악덕, 혼란의 장소로 묘사했지만, 또한 아무리 해도 근절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장소로도 바라보았다. 남자와 여자, 신사와 평민, 노인과 젊은이, 학식이 높은 자와 문맹자를 한데 모으는 이곳은, 엄격하게 계층화된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동료애 속에서 다양한 조합을 하나로 묶는 보편적인 공통점을 지적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들이 하는 일이 소규모 사업인 듯이 묘사했다. 여러 가지 실무적으로 곤란한 점들을 붙잡고 씨름해 가면서 —높은 경쟁률, 거칠거나 무관심한 고객들, 적대적인 행정 당국 관계자들— 약간의 최종 이익을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사업 말이다. (P307)
희극은 너를 좋아하니?
예, 선생님. 성스러운 요일에는요.
그들은 나를 여전히 마음에 들지만, 설교하시는 분들이 그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 너 그것을 아니?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좋지 않아요.
그러면 왜 그것들은 사용되니?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들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들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연극 무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여러 주장을 한데 모았다. 연극은 미덕이 포상을 받고 악덕이 처벌을 받는 것을 보여 주고,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고, 자칫 위험한 계략을 꾸밀 수도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무해한 것들로 대신 채워 준다고. 하지만 극장들이 살아남아 번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바로 하찮은 수습 직공에서부터 나라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이 모두 각자 자기가 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P318)
셰익스피어는 말로처럼 역사에 바탕을 둔 서사극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자국의 역사를 소재로 삼아 튜더 왕조가 질서를 잡기 이전, 유혈과 갈등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쓸 생각이었다. 그는 말로가 그랬던 것처럼 한 세계 전체를 되살려서 재현하기를 원했으며,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초인적인 영웅들이 죽음을 불사한 투쟁에 뒤엉키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동양의 이국적인 영토가 아니라 영국의 과거에 무대를 잡고 있었다. 역사극의 가장 핵심적인 발상 자체는 —현존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시간으로 관객을 되돌려 보내되, 그 시간이 동시대 관객에게 여전히 불가사의할 만큼 친숙하며 현대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 완전히 참신한 것이 아니었으나,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역사극에 전례없는 에너지와 힘 그리고 강한 설득력을 불어넣었다. <헨리 6세> 연작은 특히 셰익스피어가 이후 같은 장르에서 보여 준 엄청난 업적에 비하면 전체적인 다듬새가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이 연작이 주는 인상을 통해 충분히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탬벌레인>이 이룬 성취를 모방할 만한 대항마적 재료를 찾아서 홀린셰드의 영국 역사서 <연대기>를 골똘히 검토하는 한 극작가의 모습이다. (P332-333)
[7 무대를 흔들다]
만약 <헨리 6세> 연작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 말로를 만난 적이 없다면, 그 이후에라도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말로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말로와 함께 여러 다른 극작가들도 —그 당시에는 시인들이라고 불린— 만났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런던의 연극 무대에 올려질 시와 극본을 쓰는 사람들이었으며, 시대가 부리는 어느 마법의 순간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와 모인 듯 놀라운 군상을 이루었다. 마치 열두 명 이상의 비범한 화가들이 모두 같은 시대의 피렌체로 모여들거나, 수년 동안 뉴올리언스나 시카고에 엄청난 재능을 가진 재즈와 블루스 음악가들이 연쇄적으로 등장한 것과 비슷한 종류의 현상이었다. 물론 그러한 순간이 도래한 데에는 순수한 유전적 우연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합리적인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해당 시대에 수반되는 사회 제도적, 문화적 상황이다. 16세기 후반 런던의 상황에는 도시 인구의 경이적인 증가, 대중 극장들의 발생, 새로운 연극을 필요로 하는 경쟁적인 시장의 형성이라는 요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대중에게 점점 인상적인 수치로 널리 퍼져 가던 문맹률 감소, 수사적 효과에 고도의 예민성을 갖추도록 학생들을 훈련하는 교육 체계, 정교하게 다듬어진 볼거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정치적 취향, 교구 주민들이 길고 복잡한 설교를 듣도록 강제하던 종교 문화, 그리고 활기차고 쉼 없이 지적인 소양을 키우는 문화 역시 그와 같은 요인들이었다. 어느 정도 지적인 수준과 유능함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선택할 길이 별로 없었다. 현존하는 사회 체제의 깊이나 다양성보다 교육 체제가 더 앞서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등 교육을 받았는데도 성직자나 법조인의 길을 가고 싶지 않은 남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다지 명예롭게 평가받는 일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을 손짓해서 불러 모았던 것이 연극 무대의 세계였다. (P347-348)
1580년대 후반에 그가 걸어 들어간 장면에 대해 회고하면서, 셰익스피어는 그가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적응의 자세를 취해야 했는지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덮어씌운 냉정함 —혹은 할에게—은 그와 그린의 관계에서 한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어쩌면 그건 그들 사이를 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린에게서 자신이 필요한 요소들을 쏙쏙 빼 왔다고 한다면 —예술가로서 그는,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들을 빼내 왔다고 해야 하겠지만— 그는 또한 창의적인 관용에서 우러나온 기적적인 행위를 보여 주기도 햇따. 이는 전적으로 비감상적인 성격의 일이며,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혀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인간적인 관용이란 절박한 그린에게 실제로 돈 몇 푼을 쥐어 주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베풀어진 관용은 어리석고, 허세스럽고, 쉽게 낭비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린에게 표한 경의는 금전적인 것이라기보다 미학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그를 폴스타프로 변신시키면서, 셰익스피어는 그린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선물을 남겼다. (P392)
[8 주인/애인]
셰익스피어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폄하했다가 뒤이어 벌벌 떨었던 사람이 삼류 인쇄업자 헨리 체들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토머스 내시도 이 공격에 한몫 가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심지어 로버트 그린이 남긴 마지막 임종의 말을 가장해서 글을 쓴 유령 대필 작가가 바로 그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이 소문은 사실 앞뒤가 맞는 얘기였다. 어쨌든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이 풍자 작가는 이전에도 교육 수준이 낮은 배우들을 대상으로 이에 필적할 만한 독설을 지면에 한가득 쏟아 내며넛, 그들을 훌륭한 작가들이 쓰는 무운시를 서툴게 따라 하려는 ”오합지졸의 위조범 무리“라고 묘사한 적이 있었다. 평소 내시는 독설 뒤에 숨은 진짜 작가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대상이 되는 일조차 기꺼워했었는데, 남을 공격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격정적이고 무자비한 재치를 보이기로 유명하다는 평판을 쌓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시 누군가와 이례적으로 불안감이 느껴지는 대화를 나눴던 모양이다. 보통은 옥신각신 반박하며 물고 늘어지는 태도를 금방 철회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즉시 인쇄소로 달려가서 자신은 <그린의 은화 한 닢짜리 재치>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하찮은 거짓말쟁이 전단지“라고 부르는 소책자를 출간했다. 내시는 그 자신의 맹렬한 면책 시도 행위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하느님께서 내 영혼에 대해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 주신 적은 없지만, 만약 그 책자에 있는 내용 중 한 단어 한 음절이라도 내 펜 끝에서 나온 것이 있다면, 혹은 내가 그 책자를 쓰거나 인쇄하는 데 그 어떤 작은 내용이라도 사전에 미리 알았던 것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히 버리셔도 좋다.“ 이러한 말투는 분명히 극도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의 당혹감과 공포를 드러낸다.
질문은 바로 누가 내시를 이토록 진땀 흘리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정답은 아마도 벼락출세자 셰익스피어 본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험악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P393-394)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심리적 전략은 클래펌과 정반대였다. 그는 이 아름다운 청년에게 자신의 반영물을 어서 떨치고 나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에게 그가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대의 거울을 보고, 그대가 바라보는 얼굴에게 말하라,
이제 그 얼굴이 또 다른 대상을 빚어야 할 때이니.
(3,1-1)
자신이 반영된 모습을 갈망하듯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청년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과 꼭 닮은 반영물을 만들어 냈듯이 육체적으로도 똑같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즉 자신의 형상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생식을 통해서 —“신선한 보완”— 자신의 모습을 미래에 남김으로써 그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오직 바보만이 “후세를 잊지 않음으로써/자신을 향한 사랑의 무덤”을 파게 된다고 말한다. (3,3,7-8) (P400)
은유는 종종 시에서 독자를 특정 인물이나 상황으로부터 극적 거리를 두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여기서의 은유는 육체와 감정상의 근접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인물이 겪는 모든 상황들을 한결같이 줌을 바짝 당긴 클로즈업 상태에서 보게 된다. 아도니스의 뺨에 난 보조개는 “둥글고 고혹적인 웅덩이들”이며, “그들은 비너스의 애정을 삼키기 위해 입을 활짝 열었다.” (247-48행) 여신의 얼굴은 성적인 흥분으로 인해 “짙은 냄새를 풍기며 뜨거운 김을 뿜어 올렸다.” (555행)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비스듬히 쓰러질 때 —혹은 비너스가 아도니스를 땅으로 끌어당겨 넘어뜨렸다고 해야 할 때— 그들은 단순히 꽃들 위에 눕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푸른 정맥이 드러나는 제비꽃들” (125행) 위에 눕는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직접 드러낸 적은 없지만 —어쨌든 이것은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판타지였으므로— 셰익스피어는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 그 자신의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유지하고 있다. 마치 그가 사우샘프턴 또는 그 자신이 헌사를 통해 슬쩍 말을 흘리듯이 “이 세상”이, 자신의 장난스러운 정체성의 동일시와 투사 능력을 잘 이해하고 알아주기를 원한다는 듯이. 그는 분명히 비너스를 통해 작품 안에 현존하며, 그녀의 육체적 긴급함과 말을 잘 지어내는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자신을 내보인다. (P422)
[9 사형대에서 터진 웃음소리]
소네트, <비너스와 아도니스> 그리고 <루크레스의 겁탈>로 얼마나 후한 보상을 받았든 간에, 셰익스피어는 그의 재정적, 예술적 성공운을 후원자와의 관계에다 걸지 않았다. 대신 그는 흑사병이 가라앉자 극장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고,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극작가로서 발군의 명성을 쌓았다. 대중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야 했던 극단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새로운 극본들이 필요했다. 성실한 인쇄업자라면 주문이 밀려드는 여러 건의 극본을 찍어 내면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런던의 세 귀부인들>, <행상인의 예언>, <아름다운 엠>, <새 소식 한 부대>, <타타르인 불구자의 비극적 이야기>,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등 새로운 연극이 쏟아졌다. 하지만 1597년 벤 존슨이 떠들썩하고 존재감 있게 등장하기까지, 셰익스피어의 진지한 경쟁자는 크리스토퍼 말로 한 사람뿐이었다. 재능이 뛰어난 두 동갑내기 시인은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며 대결을 펼치는 구도에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돌면서 신중하게 상대를 꼼꼼히 살폈고, 상대의 장점을 모방했고, 그리고 결국 상대를 넘어서고자 시도했다. 이 대결은 각자에게 중대한 초석이 되었던 초기작인 <탬벌레인>과 <헨리 6세>를 넘어서서, 놀라울 정도로 닮은 두 편의 훌륭한 역사극인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와 말로의 <에드워드 2세> 그리고 역시 둘 다 훌륭한 성취를 보여 준 에로틱한 장시 셰익스피어의 <비너스와 아도니스>와 말로의 <히어로와 리앤더>로 이어진다. (P445-446)
이 개념적인 필수성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운명이 갖는 역사적 교차성—은 물론, 실제 유대인들을 향한 관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베니스를 포함한 특정 도시들은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사회적 괴롭힘을 받지 않고 거주 기간을 연장하면서 지내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들이 땅을 소유하거나 대부분의 ‘정직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했다. 그들에게 허락된 직종, 심지어 권장되던 일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이다. 그러한 금전상의 유동성은 교회법상 기독교인들이 이자를 받지 못하던 사회에서 매우 유용했지만,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대중적인 혐오의 대상이자 상류층을 착취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세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두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뿌리 뽑아 절멸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때마다, 교황들은 정기적으로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라는 소망을 표시했지만, 이는 오직 비참함에 처한 한 집단의 상태를 직접 보여 주기 위한 실례를 보존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교황의 논지는 곧 이 불행하고 빈곤하고 나약하고 불안한 소수 집단의 현 상태가,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를 환기하는 유용한 예시가 된다는 점이었다. 개신교도들은 고대 유대교의 역사적인 현실을 탐색하는 데 더 많은 흥미를 보였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의 실천과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동기에 힘입어 히브리어 기도문과 유월절과 속죄와 일반적인 고해에 대해서 학구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짧은 기간 루터는 심지어 당대의 유대인들을 향해 호의를 품기까지 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부패하고 신비주의적인 가톨릭교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새롭게 정화되고 개혁을 거친 개신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마저 고집스럽게 거절하자, 루터의 암묵적인 존경은 분노로 변했고, 마치 그 자신도 가장 편견에 찌든 중세 가톨릭 수사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기독교도들을 불러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회당에 가둔 채 불태워 죽였다. (P453-454)
자신의 가장 위대한 경쟁자가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을 때, 셰익스피어는 이미 상당히 전도가 유망한 상태였으나 당시 시점에서의 실제적인 성취는 말로의 놀라운 연극과 시의 연작들의 양에 필적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서로를 개인적으로 잘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거리감 있는 익명성을 취득하기엔 너무나 좁은 바닥이었으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상대방을 좋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해 표시한 애정이나 흠모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서로에 대한 의혹과 반감을 드러내는 지점들도 꽤 많다. 말로가 죽고 난 뒤 5년 정도 지나서, 셰익스피어는 <좋으실 대로>에서 말로의 가장 유명한 대사를 인용함으로써 고인이 된 경쟁자에게 간접적인 헌사를 표시했다. 상사병이 난 등장인물이 말로를 “죽은 목자”라고 언급하면서 이제 그녀는 그의 “권능의 톱날”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즉 그의 대사들에 강력한 설득력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죽은 목자여, 나 이제 그대의 권능의 톱날을 알게 되었구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누가 사랑에 빠진 적이 있겠는가?”
(3,5,82-83) (P466)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군중 속에 있었을까? 로페스의 재판은 그에 연루된 권력 파벌 간의 경쟁과 충격적인 내용의 기소로, 대중의 강렬한 주목을 받았다. 셰익스피어는 어떤 경우라도 처형의 집행 자체에 흥미를 품고 있었다. 그의 초기 소동극인 <실수 연발>은 초읽기로 앞둔 형 집행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이며, <리처드 3세>와 다른 역사극에서도 사형 집행자가 내리치는 형장의 도끼는 연극 전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는 군중이 보이는 태도에도 극작가로서 매료되었으며 또한 생의 종말을 앞둔 남녀 사형수가 보이는 마지막 순간의 행동거지에도 관찰자로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주제에 입각한 가장 유명한 대사가 <맥베스>에 나오는데, 왕을 배반하고 역모를 꾸민 지방 호족의 삶이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장면의 묘사다.
그의 삶에서 가졌던 그 어떤 것도
그 삶을 떠나는 그의 모습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죽었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무 부질없는 하찮은 것처럼 털어 내 버리듯이 말입니다.
(1,4,7-11)
이 행들을 쓴 극작가 자신이 직접, 실제 처형식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한 행사들은 수도 런던에서 끔찍할 정도로 자주 일어나곤 했으니까. (P478)
희극을 쓰는 극작가는 본래 작품 내외의 웃음을 즐기는 법이다. 하지만 이 희극의 결말에서 셰익스피어는 마치 군중의 웃는 면면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기라도 한 듯, 완패한 이방인을 향한 조롱의 말에 역겨움을 느끼는 동시에 매료되기라도 한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행위의 대중적인 매력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가 동시에 그 규칙에 역겨움을 느끼기라도 한 것 같다. “당신들이 그 가엾은 이방인들을 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로페스 혹은 샤일록— 상상력을 펼쳤을 때, 셰익스피러는 자신이 본 것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샤일록의 강제된 개종은 —그가 참조했던 원전에는 없는 전개로— 셰익스피어가 특별히 집어넣은 부분인데, 이는 극작가 본인이 개인적으로 지켜보았을 소름 끼치는 처형이나, 영국 연대기 역사서에서 읽었을 유대인들의 대규모 추방처럼, 실제 역사에서는 훨씬 더 추악했던 대안들을 모면하기 위한 극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웃음소리는 개종이 사실상 타자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집에서 도망쳐서 자신의 의지로 기독교도가 되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도 예외는 아니다. 광대 란슬롯(Lancelot)은 유대인의 딸인 그녀가 저주를 받았다고 투덜거린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다들 기독교도들로 만들어 버리니 돼지값이 오르겠구먼,” 이라고 덧붙인다.(3,5,19)
돼지값이 오르는 문제는 사실 이 연극이 탐색하는 문제들 중 가장 비중이 적은 부분이다.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국가가 로페스에게 가했던 것을 샤일록에게 똑같이 행하지 않기로 선택했지만, 그는 다른 종류의 해부학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P485-486)
[10 망자와의 대화]
1596년 봄에서 여름 무렵 셰익스피어는 단 하나뿐인 아들 햄넷이 아프다는 전갈을 받았을 것이다. 전갈을 받은 즉시 그가 바로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런던에서의 다른 업무들에 치여서 바로 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그를 바쁘고 정신없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해 7월 22일에 여왕의 권력가 친족이자 셰익스피어 극단의 후원자인 궁내 장관 헨리 캐리가 사망했다. 궁내 장관 자리는 카범 경에게로 넘어갔지만, 배우들은 여전히 캐리의 아들인 헌스던 경 조지 수하에 있었다.(카범도 1년 안에 사망하는 바람에 궁내 장관의 직위는 다시 조지 캐리에게로 돌아갔고, 극단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로드헌스던스멘 극단이 되었다가 곧 원래대로 로드챔벌린스멘 극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극단 후원자의 죽음에 이어 앞날이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자 배우들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설교자들과 공무 행정 관리들이 런던의 윤리적 건강과 공공 보건을 위해서 극장들을 폐쇄해야 한다고 다시금 목청을 드높였을 때 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도시 내 모든 여관이나 술집에서의 공연이 금지되었고 1596년 여름에 당국 관계자들이 모든 극단의 일시적 폐쇄 조치 명령서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한 조치라고 알려진 그러한 폐쇄 명령은, 셰익스피어 극단 구성원중 일부가 왜 그해 여름에 켄트(Kent)의 파버샴(Faversham)과 다른 고장들에서 공연을 하고 다녔는지를 설명해 준다. (P507-508)
셰익스피어가 이 격변의 사태에 전율을 느낀 이유는 충분했다. 사우샘프턴은 최종적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1601년에는 에섹스와 함께 그 역시도 처형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으며, 에섹스가 처형되고 만 상황에서 셰익스피어에게는 사우샘프턴을 잃게 된다는 감정적인 두려움 외의 다른 정치적 이유들도 있었다. 극작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그의 극단을 고려해 볼 때, 반란 사태가 터지기 몇 년 전에 그들이 취했던 어떤 행동들 때문에 당시의 격변 상황이 뒤늦은 재앙으로 변모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596년 후반 혹은 1597년 초반에, 셰익스피어는 <헨리 4세>에 등장하는 뚱뚱한 기사의 이름을 정하면서 올드캐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었다. 이 이름은 결국 압박에 못 이겨 폴스타프로 바뀌었지만, 초기 이름을 올드캐슬로 정했던 것은 카범의 7대 영주이자 역사적인 올드캐슬의 자손으로 알려진 윌리엄 브룩(William Brook)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브룩을 적으로 삼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는데, 그 당시나 혹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연극 공연 허가 업무를 감독 관장하는 궁내 장관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에섹스와 사우샘프턴의 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셰익스피어는 그의 연극에 출연하는 광대처럼, 사우샘프턴의 비호를 믿고 브룩을 향해 모욕적인 농담을 날려도 된다고 느꼈던 것 같다. (P541)
종교 개혁은 그에게 놀라운 선물 —한때 풍족하고, 고도로 복잡성을 가졌던 체계가 깨어지고 난 파편—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이 선물을 정확히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는 자신이 성취한 세속적인 성공에 무관심하지 않았지만, 수익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셰익스피어는 한때 완전하던 의례들이 모두 깨지고 손상되어 버린 후의 세계에서(대부분의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는 바로 그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연민과 혼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끌어모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자기 존재의 핵심에서 그 같은 감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1596년에 아들의 장례식에서 그것을 느꼈고,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다시 한 번 이중으로 배가된 그 감정들을 경험했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가장 깊이 표현한 예술 작품으로써 감정에 대답했다. 바로 <햄릿>으로. (P561)
[11 왕에게 마법 걸기]
<햄릿>은 셰익스피어에게 작가로서나 배우로서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준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이 희곡을 통해 그는 극작가로서의 경력 전체를 새롭게 정비하는 큰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미 1600년 이전까지도 그는 비극 작가로서 상당한 경험을 쌓아 왔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리처드 3세>, <로미오와 줄리엣>, <리처드 2세> 그리고 <줄리어스 시저>에서 그는 복수에의 욕망, 제왕들의 병적인 야망과 그들의 운명을 좌우한 무책임성, 명문가들 사이의 살인적인 원한, 정치적 암살에 뒤따르는 치명적인 결과들을 탐색했다. <햄릿>이 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 희곡이 새로운 주제를 도입해서 발전시켰다거나 더욱 예리하고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줄거리를 주조해 나가는 것을 배웟다거나 하는 것과 연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세부점들을 대담하게 쳐내 버리는 적출의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강렬한 내향성의 표현과 관련이 있다. 그는 비극을 어떻게 조립할 것인지 다시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극적 줄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데에 사건의 인과 관계 설명이 얼마만큼 필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고, 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기 위해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명쾌한 심리적 근거 또한 얼마만큼이나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효과를 헤아릴 수 없이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줄거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 되는 요소를 빼 버린다면,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행위들을 뒷받침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 동기, 또는 도덕 원칙이 설명되지 않도록 가로막아 버린다면, 오히려 관객과 그 자신에게 특히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반응이 솟구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극작의 중요한 핵심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불투명성(opacity)을 전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불투명성이야말로 기존의 논리적 설명이 속박, 수납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극적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셰익스피어는 깨달았다. (P563-564)
왜 셰익스피어는, 혹은 다른 극작가는 1605년 11월에 일어난 지극히 극적인 사건들을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사건들은 국가의 위기와 구원을 다루는 완벽한 이야기를 구성해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임스의 주요 자문가였던 솔즈베리 백작에 의해 주의 깊게 연출되어— 악마적인 책략으로 폭로해 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왕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다. 익명으로 투고된 경고장은 “그들은 이 국회에서 끔찍한 타격을 입을 것이며, 그럼에도 누가 그들을 다치게 하는지는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만 쓰여 있었다. 솔즈베리는 그와 추밀원은 이 난해한 문구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왕이 대단히 탁월한 능력으로 이 말의 숨은 의미를 해독해 냈고, 국회 의사당의 지하를 살펴보라고 수하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11월 5일을 국가의 감사 공휴일로 제정하는 법령이 반포되었으며, 이 법령에서 당국 관계자들은 “만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훌륭하신 국왕 폐하께 성령으로 강림하사, 전하께 도달한 편지의 난해한 구문들을 두고 그 모든 평이한 의미를 초월하여 해석하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파멸적인 책략이 성공을 거뒀을지도 모른다고 선언했다. 멜로드라마처럼 과장된 이 일화는 극단들에게는 완전히 특별하게 준비된 선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킹스멘 극단은 왜 이를 활용하지 못했을까?
답은 극단의 소재 선정에 있어서 공식적으로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는 유구한 역사에 있었다. 이 역사는 런던에 공공 극장들이 세워지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9년 엘리자베스의 통치가 시작되던 첫해에, 여왕은 그녀의 사무관들에게 어떤 “막간극”도 “종교적인 문제, 혹은 공익 자산의 국가 통치가 어떻게 다루어지거나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공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단순히 극장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러한 금지령을 가장 폭넓은 관점에서 시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연극에서 당대의 논란들이 지나치게 밀접하게 다루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검열 경보가 내려졌다. 그에 대해서, 왕실과 지배 계층은 그들이 얼마나 찬사를 받고 돋보이도록 그려지는가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존재가 무대 위에서 묘사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한 연출을 허가할 경우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 있었고, 또한 여왕의 표현에 따르자면 극장이 “위엄을 갖춘 존재를 친근하고 익숙한 것들로 바꿔 놓”는 데 성공할 것을 두려워했다. (P589-590)
[12 일상적인 것의 승리]
세익스피어는 이르게는 1604년, 그가 <리어 왕>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부터 은퇴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한 듯 보인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 올 위험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과정이었다는 뜻이지,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쓰던 비극은 극도의 노년 상황에 대한 깊은 명상이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능력들을 불가피하게 포기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집과 토지, 권위, 사랑, 시력 그리고 온전한 정신 자체를 잃게 되는 상황 말이다. 이 통렬한 상실에 대한 생각은, 기이한 은둔자나 쇠퇴에 빠져든 상태에 직면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 막 마흔 살에 접어든 엄청나게 정력적이고 성공적인 극작가 본인을 돌이켜 보면서 북받쳐 올랐다. 사람들의 예상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시기였음에도, 마흔 살은 결코 노인으로 생각되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창 흘러가기 바쁜 중년의 나이였으며, 마지막 심판의 순간이라 할 수는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에 등장하는 젊은 사람들의 연령대에 가까웠으며 —고너릴, 리건(Regan) 그리고 코델리아, 에드거와 에드먼드— 끔찍한 운명에 직면한 것으로 묘사되는 두 노인, 리어와 글로스터의 연령대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P617-618)
하지만 일상을 포용한다는 것은 결코 상실과 보상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위대한 상상력의 성취와 그 성격에 대한 문제였다. 배우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셰익스피어는 이국적인 지리, 고대의 문화, 전설과 역사로 남은 인물들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은 익숙하고 친밀한 것들에도 가깝게 놓여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비범한 것들의 중심에서 평범성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다. 셰익스피어는 때때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판을 받아 왔다. 현학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토가를 입은 로마인들이 마치 런던 노동자들처럼 머리 위로 모자를 벗어던지는 모습을 불쾌하게 지켜보았다. 예의와 법도를 따지는 비평가들은 코를 푸는 데나 쓰는 손수건이 극중에서 언급되는 것은 너무 품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비극의 중심에 자리한 상징적인 장치라는 점에 기함했다. 그리고 최소한 한 사람의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나이가 든 리어가 광란 상태에 빠져서 야생의 황야를 누비는 것은 외경심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반감과 미학적인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일 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일상의 범주 위로 광활하게 높이 날아가지도 않았고, 형이상학의 장대한 홀에 들어가서 매일매일의 삶을 뒤로 한 채 문을 닫아 버리지도 않았다. (P669-6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