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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영화 <오네긴> 1999년

by 노용헌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총 8장으로 구성된 ‘시로 쓴 소설’이다. 영화 오네긴(Onegin)은 영국에서 제작된 마샤 피엔즈 감독의 1999년 드라마 영화이다. 랄프 파인즈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시몬 보산퀘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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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아무거나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조금씩은 다 배웠고

우리 나라에서 배웠다고 뽐내고

날리기는 다행히도 쉬운 일이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르면(이른바

단호하고 엄격하다는 심판자들 말이네.)

오네긴은 아는 것이 많긴 하나 현학자라네.

그는 복 받은 재능을 가진바

담소할 땐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냥

모든 것을 조금씩 다 건드리고

심각한 논쟁에서는 전문가인 양

학자연하는 태도로 침묵하고

그러다 예기치 않게 불길 같은 경구를 토하여

귀부인들을 미소 짓게 할 줄 알았네. (P15)


슬프도다, 여러 가지 오락에 빠져서 나는

삶의 많은 부분을 망쳤도다!

그러나 도덕이 문란하지만 않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무도회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이 미친 듯한 젊음을.

이 북적거림, 이 번쩍거림, 이 희열을.

여인들의 공들인 옷차림과 살짝 보이는

발을, 러시아에서 날씬한 발은

세 쌍도 찾아내기 어렵지만.

아, 나 그 귀여운 두 발을 참으로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어라......

나 우울하고 냉정해졌지만

여전히 그 두 발을 기억한다, 꿈속에서도

그 두 발은 내 심장을 뒤흔든다.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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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 관습이라는 짐을 벗어 버리고

그처럼 번잡함으로부터 초연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그때

나는 저도 모르게 공상에 빠지고

모방할 수 없는 특이함을 보이는

날카롭고 냉철해진 지성으로 두드러지는

그의 성격을 퍽이나 좋아했다.

나는 분노했고 그는 음울했다.

우리 둘은 열정의 장난을 알았고

삶은 우리 두 사람을 고통스럽게 짓눌렀고

두 가슴 속에 불은 꺼졌고

눈먼 운명과 사람들의 심술이 언제고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생애의 신새벽이었는데. (P44)


생각하며 살아왔던 사람은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고

감정을 지녀 왔던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망령에 휘둘리고

이미 더 이상 황홀감을 느끼지 못한다.

기억의 뱀이, 회한이 갉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종종 그와 대화할 때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때

처음에 오네긴의 혀가 꽤나

나를 당혹스럽게 했었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익숙해졌다.

그의 독기 어린 논쟁이나

반은 독설인 농담들에

또 분노에 찬 음울한 경구들에.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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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긴과 나는 우리 둘만을 위해

낯선 나라로 떠날 채비를 했었다.

그러나 곧 우리는 운명에 의해

오랫동안 헤어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운명하셨던 것이다.

오네긴 앞에 탐욕스러운 빚쟁이들이

한 부대는 모였다. 각자 다 계산이

있었고 이유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예브게니는 귀찮은 일을 꺼려서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고서

큰 손해가 아닌 것을 알고

유산을 그들에게 넘겨 버렸고......

아니면 그때 멀리서 벌써

늙은 백부의 임종을 예견했는지도. (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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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은 외떨어진 들판도

정원의 어둑한 참나무 숲의 서늘함도

시냇물 조용히 흐르는 소리도

모두 그에게 새로웠어도

사흘째는 수풀도, 언덕도, 들판도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붙들지 못하더니

얼마 후엔 벌써 졸음을 일으키게 되니

그는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시골에도

똑같은 권태가 있는 것을. 시골에는

화려한 거리들도 궁전이 없고

카드 게임, 무도회, 시의 밤이 없기는

해도, 우울증이 그를 보초 서고

그를 내내 졸졸 따라다녔다.

그림자처럼, 정숙한 아내처럼. (P50-51)


누구의 시선이 영감을 일으켰소?

누가 그대의 생각에 잠긴 노래를 듣고

사랑스러운 애무로 보상했고

그대의 시는 누구를 경배했소?

맹세코 내 시는, 아무도 경배하지 않았소.

친구들이여, 미칠 듯한 사랑의 격정을

나 고통스럽게 겪었을 뿐이오.

각운의 열병에 사랑의 격정을

결합시킨 자는 복도 많아라, 시(詩)라는

신성한 열뜬 소리를 두 곱으로 늘인 그는

페트라르카의 뒤를 밟아서

심장의 고통을 가라앉히고 나서

명예까지 잡았으니. 아, 그러나

나는 사랑했을 때 바보요 벙어리였다. (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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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불타는 청춘은 아무것도

아무래도 감출 수가 없다.

증오도,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청춘은 다 떠들어 버리고 싶어 한다.

스스로를 사랑의 노병이라 여기며

오네긴은 위엄 있는 태도로 들었고

시인은 심장의 토로를 사랑하여

마음속을 있는 대로 다 털어놓으며

자신의 쉬이 믿는 양심을 다

보여 주었다. 예브게니는 다

수월하게 이해했다. 시인의

청춘 연애담을,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감정들로 넘쳐흐르는 그 얘기를. (P75)


영화 오네긴 13.jpg

아, 그는 사랑을 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이미 그 누구도 못 할 그런 사랑을.

시인의 미친 영혼만이 아직 그렇게

사랑하도록 선고받은 그런 사랑을.

언제나 어디서나 오직 한 가지 꿈만이,

늘상 오직 한 가지 희망만이,

늘상 오직 한 가지 슬픔만이 있을 뿐,

냉각시키는 먼 거리도 가깝기만 할 뿐,

이별의 기나긴 나날도

시에 바쳐진 시간도

이국의 아름다운 여인들도

떠들썩한 소동도, 학문도

처녀다운 열정으로 뜨거워진

그 안의 영혼을 변하게 할 수 없었다. (P75-76)


그때까지 친구들이여, 이 삶을

마음껏 들이마시게, 이 가벼운 삶을!

나 삶의 무상을 이해하네.

그래서 삶의 연연하지 않네.

나 허상들에 눈을 감았네.

그러나 멀리 떼어 놓은 희망들이

가끔 내 마음을 뒤흔드네.

아무런 작은 흔적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건 슬플 것 같으이.

나 갈채를 위하여 살고 쓰지 않네만

아마 나 원하는 모양이네, 다만

내가 지은 소리 하나라도 살아남아 부디

진정한 친구처럼 나를 상기시키도록

내 보잘것없는 운명을 찬미하고 싶다고! (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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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오네긴의 출현은

라린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많은 이웃들도

마음 졸이며 기대했다. 오!

갖가지 추측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모두들 몰래 숙덕거리고

농담하고 심술궂게 속단하면서

그를 타티아나의 신랑감으로 여겼고

어떤 사람은 확언까지 했다.

“혼인은 완전히 준비되었는데, 다만

최신 유행 반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그만

혼인이 미루어지고 있는 터다.....“

렌스키의 혼인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된 이야기로 치부됐고, (P97)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에게 씁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무슨 말이 있을 수 있나요?

압니다. 이제 당신이 저를 경멸로써 벌하시는 것은

당신 뜻에 달렸다는 것을.

그러나 당신이 제 불행한 운명에

한 올의 동정심이라도 가지고 계시다면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할 거예요.

저도 처음엔 침묵을 지키려 했어요.

제 말 믿어 주세요, 당신은

제 이 부끄러운 심정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거예요. (P116)

영화 오네긴 14.jpg

갖가지 위선을 이리저리 행하는 일,

오직 한 가지만을 갖가지로 반복하는 일,

모두가 오래전부터 믿고 있는 일을

진지한 태도로 확신하려 하는 일,

내내 똑같은 거절을 들어주며, 사실은

예전에도 요즘에도 열세 살 먹은

소녀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 편견을 없애려고 애쓰는

따위의 일이 지겹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협박과 애원과 맹세와 두려운 척하기,

여섯 장의 긴 편지, 기만, 소문, 반지, 눈물 흘리기,

이 모든 것이 지겹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 아주머니와 어머니들의 감시와

남편들과의 부담스러운 우정은 어쩌고! (P133-134)


그러나 나는 행복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소.

내 영혼은 행복에 익숙지 않아요.

당신의 완벽함도 아무 소용이 없소.

나는 전혀 그것에 값하는 사람이 아니오.

내 말 믿어요.(양심이 보증 서요.)

결혼은 우리에게 고통이 될 거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든지 간에

익숙해지면 곧 당신에게 싫증을 낼 게

뻔하고, 당신은 울기 시작할 거요. 당신이

흘린 눈물은 내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격분시킬 거고,

한번 판단해 봐요, 결혼의 신이

우리에게 어떤 장미를 준비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마도 질리도록 오래도록.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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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믿어야 하나, 정말로?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자, 누가 있나?

모든 일을, 모든 말을 친절하게 정말로

우리의 자로 재는 자, 누가 있나?

비방의 씨앗을 안 뿌리는 자, 누가 있나?

우리를 근심스레 달래 주는 자, 누가 있나?

우리의 결점을 보고 가만있을 자, 누가 있나?

한 번도 권태롭게 하지 않을 자, 누가 있나?

허깨비를 헛되이 추구하는 자여,

헛된 노력 하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시오, 바로 자신을

흠, 존경하는 내 독자들이여!

자신만이 가치 있는 대상, 더 이상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오, 정말로. (P143)


타티아나는(영혼 깊이 러시아

여성이나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

차가운 아름다움을 지닌, 아,

러시아의 겨울을 사랑했다.

겨울날 햇볕에 반사되는 성에,

썰매, 늦은 저녁노을에

장밋빛으로 빛나는 눈,

주현절 밤의 안개, 그녀는

이 모두를 사랑했다. 사람들은

주현절 밤을 풍습에 따라

흥겹게 잔치하며 보냈다.

점을 쳐 주는 온 집 안의 하녀들은

해마다 귀족 아가씨들에게 장교 남편과

그들의 원정을 예언해 주었다. (P167-168)


어떤 상처가 내 타티아나의 심장을

불태웠는지 그가 알았더라면!

렌스키와 예브게니가 내일 아침이면

무덤의 그늘을 두고 싸우게 될 것을

타티아나가 알았더라면,

그녀가 알 수 있었더라면,

아, 그녀의 사랑은 아마도

두 친구를 다시 화합하게 했을지도.....

그러나 이 열병에 대해 우연으로라도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오네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타티아나는 몰래 괴로워하고 있었다.

유모 한 사람만은 알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녀는 도무지 추측할 능력이 없었고.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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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앞으로.” 냉혹한 마음으로

아직 겨누지는 않은 채 두 원수는

조용하고 확실한 걸음걸이로

꼭 네 걸음을 걸어갔다. 이는

네 걸음 죽음의 계단이었다.

예브게니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먼저 권총을 조용히 올렸고

둘은 또 다섯 걸음을 갔다.

렌스키도 왼쪽 눈을 찡그리며

마찬가지로 오네긴을 겨누며

쏘려 했으나 오네긴이 먼저 쏘았다......

시인에게 정해진 시각이 울린 것이다.

시인은 말없이

권총을 떨어뜨렸고, (P220)


어떨까? 뻔뻔스러운 시선이나 말대꾸나,

또는 다른 사소한 일로 해서

술자리에서 당신을 모욕했거나

아니면 스스로 불같이 화가 나서

당신을 거만하게 결투장으로 부른

젊은 친구가 당신의 총을 맞은

직후에 바로 쓰러져 꼼짝 않고

이마에 죽음의 표지를 드러내고

당신 앞에서 점차로 굳어 갈 때

당신이 필사적으로 흔들고

불러도 아무 소리 못 듣고

아무 말도 못 할 때

말해 보시라, 어떤 감정이

당신 마음을 지배하게 될까?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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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내 사랑스러운 여자

타티아나의 승리를 축하하고

우리 길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자.

부디 내 주인공을 잊지 말라고

나 역시 지나가는 말 두 마디만 하겠소.

나 젊은 친구와 그의 갖가지

기이한 행동들을 노래하니

내 긴 작업을 축복해 주오.

오, 그대, 서사의 뮤즈여!

내게 믿을 만한 지팡이를 맡겨

우왕좌왕하지 않게 해 주오!

이제 됐다. 어깨의 짐을 벗었다! 오!

드디어 고전주의에 경의를 표했으니

비록 늦었으나 입문은 한 셈이다. (P272-273)


최상류 귀족들 대화의 균형 잡힌 형식과

그들의 평정과 냉정을 잃지 않는 자존심이,

이 관등과 연륜의 혼합이 그녀는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 선택된 무리 속에 말없이

안개로 휘감긴 듯 서 있는

저 사람은 누굴까? 모든 사람에게 그는

낯설게 여겨지는 듯하다.

그 눈앞에 지루한 망령들이 줄지어 지나가듯

이 얼굴, 저 얼굴이 어른거리고 지나간다......

그의 얼굴에 적힌 것은 스플린일까, 병적인 오만일까?

그는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혹 예브게니인가?

혹 그가...... 그렇다. 바로 그다.

--그가 여기 우리에게 온 것이 오래되었나? (P281)


그러나 우리에게 젊음이 결국

헛되이 주어졌다는 것,

끊임없이 우리가 젊음을 배반하고 결국

젊음이 우리를 배반하는 것,

우리의 고상한 희망과 신선한 꿈도

궂은 가을 나뭇잎처럼 그리도

빠르게 하나하나 차례차례 다

썩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슬프다.

또 우리 앞에 놓인 지겹게도

똑같은 식사의 긴 행렬을 보고

예식을 바라보듯 삶을 바라보고

점잔 빼는 무리들과 생각도 열정도

공유하지 않은 채 그들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P284)


그 당시 나는 내 소중한 모든 것으로부터

내 마음을 떼어 놓았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타인이 된 저는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채 생각했지요.

자유와 평온이 행복을 대신하다고, 맙소사!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요, 얼마나 벌을 받는지요.....

정말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매순간 당신을 보는 것,

어디서나 당신을 쫓아다니면서

입술의 미소, 눈의 움직임을

사랑에 빠진 눈으로 포착하는 것,

당신에게 오래 귀 기울이고

온 마음으로 당신의 완벽함을 이해하는 것,

당신 앞에서 정신이 아찔해져 꼼짝 못 하고,

창백해지고 여위어 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지요! (P3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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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정한 만남 속에서 내가

첫 연들을 읽어 주었던 이들.....

‘이들은 이제 없거나 멀리 있소.’ 언젠가

사디가 말했듯이, 잊지 못할 이들......

이들 없이 오네긴이 끝까지 그려졌소.

그리고 타티아나라는 사랑스러운 이데알을

이루는 데 함께한 그녀는....... 오호! 많은 것을.

정말 많은 것을 운명은 앗아 갔소!

가득 찬 술잔을 끝까지 마시지 않고

삶이라는 축제를 일찌감치 끝내고

떠난 사람, 삶의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고 내가 나의 오네긴과 그랬듯이

갑자기 소설과 작별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오. (P316)

영화 오네긴 1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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