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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2015년

by 노용헌

1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2편 <50가지 그림자-심연>, 3편 <50가지 그림자-해방>으로 이어지며 각각 2권의 분량으로 총 6권의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3부작 중 첫 번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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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이 씨를 뵈러 왔습니다. 캐서린 캐버너 대신 온 아나스타샤 스틸이라고 합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스틸 양.” 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키자 그 앞에 선 나는 괜히 시선이 의식되었다. 내 남색 재킷 대신 케이트의 정장 블레이저라도 빌려 입고 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나도 나름대로 노력해서 하나밖에 없는 치마도 입었고 그런대로 괜찮은 무릎 높이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고 파란 스웨터를 입었다. 내게는 이게 근사한 옷차림이었다.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여자 때문에 기죽지 않은 척했다.

“캐버너 양은 약속이 되어 있으시네요. 여기 서명해주십시오. 스틸 양. 오른쪽 마지막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20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P12)


“스틸 양.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여자는 하얀 가죽 의자들이 죽 늘어선 대기석을 가리켰다.

가죽 의자 뒤에는 널찍한 유리벽으로 된 회의실이 있었고, 안에는 역시나 널찍한 진한 색 나무 탁자와 그에 어울리는 의자들이 적어도 스무 개 정도 탁자 둘레에 놓여 있었다. 그 너머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유리로 된 창이 있어서 시애틀의 마천루들과 사운드(푸젯 사운드: 미국 워싱턴 주 북서부 태평양에 연해 있는 만)로 향하는 도시 경관이 내다보였다. 경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에 나는 잠시 마비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와.

자리에 앉아 질문 목록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살펴보면서 간단한 이력 하나 적어놓지 않은 케이트를 향해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인터뷰를 하게 될 이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흔 살인지, 서른 살인지조차 몰랐다. 이런 짜증스러운 불확실성에 다시 신경이 곤두서서 안절부절못했다. (P13)


“철학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런 철학은 없는데. 어쩌면 나를 이끄는 원칙은 있을지도. 카네기의 말이죠. ‘자기 정신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남자라면 정당한 자격이 있는 다른 것도 모두 소유할 수 있으리라.’ 난 아주 특이하고 성공을 위해 억제할 줄 알죠. 난 통제하기를 좋아합니다. 나 자신과 내 주위의 사람들 모두를.”

“그런 것을 소유하고 싶으신가요?”

넌 통제광이라니까.

“소유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죠. 하지만 그래요. 기본적으론 그러길 원하죠.”

“최종소비자처럼 말하시네요.”

“실제로 그러니까.”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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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이야기를 해봐요.”

어째서 이런 걸 알고 싶어 하는 거지? 너무 지루하잖아.

“어머니는 새남편 밥과 함께 조지아에 사세요. 의붓아버지는 몬테사노에 사시고요.”

“당신 아버지는?”

“아버지는 제가 아기 때 돌아가셨어요.”

“유감이군요.”

곤란해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났다.

“전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그래서 어머니는 재혼하시고?”

나는 코웃음 쳤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는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군요?”

그는 건조하게 말하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턱을 문질렀다.

“그건 그레이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벌써 한 번 나를 인터뷰했을 텐데. 그래서 그때 캐묻는 질문을 다시 모을 수 있었던 거고.”

그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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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형광등 불빛이 비치는 어둡고 차가운 콘크리트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나는 벽에 기대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나도 모르게 달갑지 않은 눈물이 눈에 고였다. 왜 우는 거지? 이런 무분별한 감각을 느끼는 나 자신에 화가 나서 땅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았다. 할 수 있는 한 내 몸을 작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더 작아질수록 이런 어이없는 고통도 작아질지 모른다. 머리를 무릎 위에 기대고 불합리한 눈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리도록 놔두었다.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에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하다니. 박살날 희망, 박살난 꿈, 쉬어버린 기대.

나는 한 번도 거절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농구나 배구를 할 때 같은 팀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 마지막까지 남겨진 적은 있었지만 충분히 그럴 만했다. 달리기와 공을 다루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체육에는 젬병이었으니까. 나는 운동신경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연애에서는 그런 입장에 놓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평생 동안 불안하게 살아온 나였다. 너무 창백하고 너무 말랐고 너무 초라하며 촌스럽기까지. 부족한 점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내 쪽에서 먼저 퇴짜를 놓곤 했다. 같이 화학 수업을 듣는 남자애 중에 나를 좋다고 한 사람도 있었지만 관심에 불을 붙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 빌어먹을 크리스천 그레이 말고는. (P83)


아주 조용했다. 빛조차 숨을 죽였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이 침대 속에서. 음.....? 눈을 떴다. 잠깐 동안은 고요하고 평온하게 낯설고 익숙하지 못한 환경을 즐겼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침대 머리는 거대한 태양의 형태였다. 기이할 정도로 낯익었다. 방은 크고 공기가 잘 통했으며 갈색과 황금색, 베이지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어디? 뒤죽박죽이 된 머리는 최근의 시각적 기억들을 힘겹게 끌어냈다. 어머나, 히스먼 호텔이잖아..... 스위트룸. 케이트와 함께 이런 비슷한 방에 서 있었지. 하지만 이 방은 더 커 보이는데, 아, 세상에. 나는 크리스천 그레이의 스위트룸에 있구나.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간밤 기억의 파편들이 천천히 내게 찾아들었다. 술, 아, 마시지 말았어야 할 술. 전화, 하지 말았어야 할 전화. 구토, 하지 않았어야 할 구토. 호세와 그다음에 나타난 크리스천. 아아, 나는 마음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여기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 티셔츠와 브라, 팬티를 입고 있었다. 양말은 벗었다. 청바지도. 맙소사.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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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힐긋 돌아보았다. 계기판의 어렴풋한 빛 속에 비친 그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비행요.”

“비행을 하려면 통제와 집중이 필요하지..... 내가 좋아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활공이야.”

“활공?”

“그래, 보통 사람들은 활주라고도 하나. 글라이더와 헬리콥터. 난 둘 다 운전하니까.”

“아.”

돈 많이 드는 취미생활이네. 그가 인터뷰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독서를 좋아하고 가끔 영화를 보러 가는 정도였다. 정말 여기는 내 분수에 맞지 않았다.

“찰리 탱고 진입하라, 오버.”

항공관제탑에서 들려오는 형체 없는 목소리에 공상에서 깨어났다. 크리스천은 절제되고 유능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애틀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이제 시애틀 바로 외곽 언저리에 있었다. 우아! 정말로 눈부신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애틀 야경. (P145-146)


“어째서 내게 특별히 <테스> 책을 보낸 거예요?”

나는 물었다. 크리스천은 잠깐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질문에 놀란 듯했다.

“음, 토머스 하디를 좋아한다면서.”

“그 이유뿐이에요?”

나조차도 내 목소리에 담긴 실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입이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그게 적절해 보였으니까. 난 당신을 엔젤 클레어처럼 어이없이 높은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알렉 더어버빌처럼 타락시킬 수도 있으니.”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회색 눈이 어둡고 위험하게 반짝였다.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면, 난 타락을 선택하겠어요.”

나는 속삭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의 잠재의식은 입을 딱 벌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숨을 헉 멈췄다.

“아나스타샤, 입술 그만 깨물어. 아주 정신이 사나워, 넌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예요.”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잠깐만 자리 좀 떠도 괜찮겠지?”

그는 방 저편의 너른 문으로 사라졌다. 몇 분 정도 지난 후에 그는 서류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건 비공개 합의서야.”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품위 있게도 약간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변호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

그는 내게 서류를 건넸다. 나는 완전히 정신이 멍했다.

“2번 항목, 타락을 고른다면 여기 서명해야 해.”

“내가 뭐든 서명하기 싫다면요?”

“그럼 고귀한 이상의 엔젤 클레어겠지. 그 책 내용이 대체적으로 그렇지 않나.”

“이 합의는 뭘 의미하는 거죠?”

“네가 우리에 관해서 공개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믿을 수 없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맙소사, 이건 나빴다. 정말로 나빴다. 이제는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P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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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넌 자루를 뒤집어 써도 예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가 우리 어머니에게 인사했으면 좋겠어. 옷 입고 난 가서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올 테니까.”

그는 입을 엄하게 일자로 꾹 다물었다.

“5분 안에 그 방으로 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무슨 옷을 입고 있든 내가 직접 와서 끌어낼 거니까. 티셔츠는 이 서랍 속에 있어. 드레스 셔츠는 벽장에 있고, 마음대로 골라 입으라고.”

그는 잠깐 나를 찬찬히 살핀 후, 방을 나섰다.

어처구니없어라. 크리스천의 어머니라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상황이었다. 어쩌면 어머님을 만나면 이 퍼즐의 작은 부분을 제자리에 끼울 수 있을지도 몰라. 어째서 크리스천이 지금같이 되었는지 이유를 알게 될지도..... 갑자기 그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내 셔츠를 주웠다. 밤새 그렇게 있었는데도 별로 구겨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P228)


그의 타오르는 진지함. 갈망이 눈에 떠올랐다. 근본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다. 어째서 나지? 어째서 그 열다섯 명은 아니었지? 아, 안 돼.....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그냥 숫자로? 열여섯 번째로?

“열다섯 명은 어떻게 됐어요?”

나는 불쑥 물었다.

그는 놀라서 눈썹을 치키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간략히 요약하자면.....”

그는 말을 멈추더니 적당한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양립할 수 없었던 거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난 당신과 양립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래.”

“그들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건가요?”

“그래, 아나스타샤. 만나지 않아. 난 한 번에 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지.”

아, 이건 새로운 소식이네.

“알았어요.”

“조사를 해, 아나스타샤.” (P247)


그의 눈을 똑바로 봐서도 안 된다. 얼마나 이상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기회를 잡을 유일한 방법인데, 하지만 누구 눈을 속이겠어? 어차피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 수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게 좋다. 그의 눈은 무척 아름다우니까. 사람을 사로잡는 지적이고 깊고, 지배적인 비밀을 가진 짙디짙은 눈, 나는 타오르는 연기 같은 눈빛을 생각하고 내 허벅지를 꼭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게다가 그를 만질 수도 없다. 뭐 그건 놀랍지 않아. 그리고 이 멍청한 규칙들은..... 아니, 안 돼. 이건 할 수 없어.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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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케이트.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 않아. 그저 섹스만 할뿐이야. 크리스천의 용어지. 그는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대.”

“그 남자 뭔가 괴상한 점이 있다 싶더라.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구나.”

나는 수긍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는 탄식하고 있었다. 오, 케이트..... 네게 다 털어놓을 수 있다면. 이 이상하고 슬프고 변태적인 남자에 대해서 다 말할 수 있다면. 그러면 너는 내게 이 남자는 잊어버리라고 말할 수 있겠지. 바보 같은 짓 그만하라고.

“모두 다 약간 버거운 것 같아.”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말이야말로 올해 가장 과소평가된 표현이지. (P313)


그의 이메일을 읽으니 더 눈물이 났다. 나는 합병을 하는 사업가가 아니다. 인수되는 기업이 아니다. 하지만 이메일을 읽으니 그런 기분이었다. 답장은 쓰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파자마를 주워 입고 그의 재킷을 걸친 후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누워서 어둠 속을 응시하며 그가 내게 자기를 멀리하라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아나스타샤, 넌 나를 멀리해야 해.’

‘난 네게 어울리는 남자가 아냐.’

‘난 마음과 꽃을 바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난 사랑을 나누지 않아.’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지.’

베개에 대고 흐느껴 울면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생각도 그것이었다. 내가 아는 것도 이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함께 새로운 진로를 지도에 그려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P355-356)


케이트의 연설 주제는 ‘대학 졸업 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였다. 아, 그래, 정말로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 크리스천은 케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아마도 놀란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를 인터뷰하러 간 사람이 케이트가 될 수도 있었지. 그가 점잖지 못한 제안을 하고 있는 대상이 케이트가 될 수도 있었어. 아름다운 케이트와 아름다운 크리스천이 함께, 나는 내 옆에 앉은 두 여자애들과 마찬가지 신세였을 거야. 멀리서 그를 숭배하면서. 나는 케이트라면 그와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저번에 케이트가 저 사람을 뭐라고 했더라? 소름 끼친다고 했던가. 케이트와 크리스천이 대결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어느 쪽에 돈을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케이트가 화려하게 연설을 끝맺자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첫 번째 기립박수였다. 나는 케이트를 보고 환히 웃으며 환호했고, 케이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잘했어. 케이트, 케이트가 자리에 앉자 관중도 자리에 앉았다. 총장이 일어나 크리스천을 소개했다..... 젠장, 크리스천도 연설을 하는구나. 총장이 간단하게 크리스천의 이력을 늘어 놓았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회사를 소유한 CEO이며 진정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는 말이었다.

“...... 또한 우리 대학에 큰 기부금을 내신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그럼 크리스천 그레이 씨를 환영의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총장은 크리스천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예의 바른 박수갈채가 터졌다. 내 심장이 목까지 튀어올랐다. (P36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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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촛불의 불꽃이 무척 뜨거웠다. 촛불은 지나치게 뜨거운 산들바람 속에서 깜박이며 춤을 추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열기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 부드러운 거미줄 같은 날개가 어둠 속에서 앞뒤로 퍼덕이며 둥근 빛 속에서 먼지 비늘을 흩뿌렸다. 나는 저항하려고 했으나 자꾸 끌려갔다. 곧이어 주위가 환해지더니 나 또한 태양을 향해 날고 있었다. 빛에 눈에 부셨고 열기에 살이 타고 녹아갔다. 허공에 떠 있으려고 노력하면서 나 또한 지쳐갔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열기는..... 숨이 막혔고 압도적이었다. 그 열기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떴더니 내 몸은 크리스천 그레이에 감싸여 있었다. 그는 나를 마치 승리 깃발처럼 감쌌다. 그는 머리를 내 가슴에 대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팔을 내 몸 위에 올려 나를 꼭 끌어안았고 다리 하나로 내 양다리를 감쌌다. 그의 열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무거웠다. 그가 아직도 내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잠깐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밖은 밝았다. 아침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P38)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마치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그의 말에 즉시 따랐다. 마치 내 주변에 펼쳐지는 사건들을 지나가는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저 매혹적인 것 이상, 그저 선정적인 것 이상이었다. 특별하게도 이제까지 한 일 중에 가장 흥분되고 무서운 경험이었다. 나는, 스스로 인정하듯이 50가지 다른 빛깔로 망가져버린 아름다운 남자에게 나를 맡기고 있었다. 나는 짧게 찾아온 공포의 전율을 억눌렀다. 케이트와 엘리엇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니까.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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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아파트 이사는 어떻게 됐나요?” 그레이스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레이스의 질문 덕에 뒤죽박죽인 생각으로부터 정신을 딴데로 돌릴 수 있어서 고마웠다. 나는 이사 얘기를 했다.

전체 요리를 다 먹었을 쯤, 그레첸이 다시 나타났다. 새삼스럽지도 않게, 나는 크리스천에게 자유롭게 손을 올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저 그 여자에게 이 남자가 내 것이 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는 어쩌면 50가지 다른 빛깔로 엉망진창 망가져버린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내 것이었다. 그레첸은 식탁을 치우면서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가깝게 크리스천의 몸을 스쳤다. 다행하게도 크리스천은 그 여자의 존재에 무관심했지만 내 안의 여신은 김을 펄펄 뿜으면서 못마땅해했다.

케이트와 미아는 파리에 대한 얘기를 열심히 늘어놓고 있었다.

“파리에 가봤어요, 아나?” 미아가 순진하게 질문하는 바람에 나는 질투심 어린 망상에서 깨어났다.

“아니요, 하지만 가고 싶네요.” (P113)


그가 GPS를 조작한 후 운전석의 버튼을 누르자 클래식 오케스트라 선율이 차 안을 채웠다.

“이건 뭐예요?” 수백 대의 바이올린 현이 켜는 달콤하고, 달콤한 소리가 우리를 덮쳤다.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곡이지, 베르디의 오페라야.”

아, 정말 아름다웠다.

“<라 트라비아타>? 들어본 적 있어요. 어디서 들어보았는지는 생각 안 나지만, 무슨 뜻이에요?”

크리스천이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히죽거렸다.

“뭐, 문자 그대로는 ‘타락한 여자’라는 뜻이지. 알렉산드르 뒤마의 책 <동백꽃의 여인>을 바탕으로 한 거야.”

“아, 읽은 적 있어요.”

“그럴 줄 알았지.”

“불쌍한 화류계 여성의 이야기였죠.”

나는 폭신한 가죽 좌석에서 불편하게 꿈지럭거렸다. 넌지시 무슨 말을 전하려는 걸까?

“흠, 우울한 이야기였어요.” 난 중얼거렸다.

“너무 우울해? 다른 음악 고를래? 여기 내 아이팟에 있어.”

그는 예의 비밀스러운 미소를 다시 저었다. (P257)


단일 프로펠러 파이퍼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내 불안한 위장은 목구멍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어쩜..... 정말 날게 되는구나. 마크는 천천히 활주로를 질주했고 밧줄이 팽팽해지자 우리는 갑자기 앞으로 쏠렸다. 우리는 날아갔다. 내 뒤에 설치된 무선장치로 중얼중얼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크가 관제탑과 교신하는 것 같았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파이퍼가 속도를 붙이자 우리도 빨라졌다. 글라이더는 덜컹거렸고 우리 앞의 단일 프로펠러기는 아직도 땅 위에 있었다. 과연 위로 뜨기는 할까? 갑자기 내 위가 목에서 사라져 몸을 통과해 저 땅으로 자유낙하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하늘에 떠 있었다.

“이제 간다!” 크리스천이 내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우리만의 공기방울 속에 떠 있었다. 내 귀에 들리는 건 고막을 찢는 듯한 바람소리와 저 멀리서 윙윙대는 파이퍼의 엔진 소리뿐이었다.

양손으로 가장자리를 붙들었다. 얼마나 꽉 잡았는지 내 주먹이 하앴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피해, 서쪽 내륙으로 향하며 더 높이 올라 들판과 숲, 집들과 95번 주간 고속도로 위를 날았다.

세상에, 머리 위엔 오직 하늘뿐이라니 정말 놀라웠다. 찬연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따뜻한 색조를 띄었다. 호세가 ‘매직 아워’에 e해서 떠들던 기억이 났다. 사진가들이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각. 그건 바로 동이 튼 직후였고, 나는 바로 지금 그 시간에 있었다. 크리스천과 함께. (P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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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뜩 잠에서 깼다. 꿈속에서 막 계단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벌떡 일어나 앉았을 때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었다. 사방은 어두웠고 나는 크리스천의 침대에 홀로 있었다. 무언가 나를 깨웠다. 무언가 성가신 생각이, 침대 밑에 놓인 알람 시계를 흘끔 보았다. 아침 5시였지만 푹 쉰 느낌이었다. 왜 그럴까? 아, 시차 때문이구나. 조지아는 지금 아침 8시일 것이었다. 맙소사....

역을 먹어야 해. 무엇이 나를 깨웠든 감사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희미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크리스천이 연주하고 있었다. 놓쳐서는 안 될 광경이었다. 나는 그가 연주하는 광경을 보는 게 좋았다. 알몸으로 의자에 걸어놓은 가운을 집어서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가운을 걸치면서 큰 방에서 들려오는 탄식조의 마술적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에 둘러싸인 크리스천은 마치 빛의 공기방울 속에 앉아 연주하는 듯했다. 머리카락이 윤나는 구릿빛으로 빛났다. 그가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벌거벗은 듯 보였다. 그는 아름답게 연주하며 우울한 음악에 흠뻑 빠져서 집중하고 있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림자 그늘 속에 숨어 망설였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P327)


아파트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텅 비었고 익숙하지 않았다. 여기를 집으로 느낄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다.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끝에는 참으로 슬프게도 바람 빠진 헬리콥터 풍선이 묶여 있었다. 정확히 나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찰리 탱고. 벌컥 치미는 분노에 그 풍선을 잡아 침대 난간에 묶은 줄을 끊어서 떼어낸 후 꼭 껴안았다. 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신발도 신고 옷도 그대로 입은 채로 침대 위로 쓰러져 소리쳤다.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신체적이고,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감정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것이 내 골수까지 스며들었다. 슬픔, 스스로 자처한 것이었다. 저 아래 깊은 곳. 역겹고 달갑지 않은 생각이 내 안의 여신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뒤틀며 비웃었다. 허리띠가 준 육체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황폐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납작해진 은박 풍선과 테일러의 손수건을 가슴에 끌어안고서 슬픔에 몸을 맡겼다. (P35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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