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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의 <헤아려본 슬픔>

영화 <섀도우랜드Shadowlands> 1995년

by 노용헌

<헤아려본 슬픔>은 C.S. 루이스가 59세에 암판정을 받은 아내 헬렌과 결혼한 후 4년만에 아내의 죽음을 겪으면서 느낀 슬픔을 그린 글이다. 영화 <섀도우랜드>는 안소니 홉킨스, 데브라 윙거 주연으로 C.S. 루이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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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

어떤 때는 은근히 취하거나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다.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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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도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문제가 더 쉬워지는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그만둘지도 모르는 위험에 빠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짜 위험이란, 그분에 대해 이처럼 끔찍한 사실들을 믿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결론은 “그러니 하나님이란 결국 없는 거야.”가 아니라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인 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순종하며 말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자주 지극한 공포심이 사무친 원한을 억눌렀으며, 사랑이라는 행동(혹시 연기演技)으로 그러한 과정을 숨겨왔던가? 그렇다. 모든 의미에서 행동(혹은 연기)이다.

물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해 버리면 매우 간단하다. 솔직히 말하자.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분을 부르지 않을 때에는 임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P23)


죽은 자와의 약속, 아니 어느 누구와 한 약속이라도 그것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죽은 자의 소망을 존중한다’는 것이 함정임을 알게 되었다. 어제 어떤 사소한 일에 대해 “H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할 뻔하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이러한 언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평한 행위가 아니다. 머지않아 나는 ‘H라면 좋아했을 만한 일’이라는 표현을 무기삼아 가정에서 독재를 휘두르게 될 것이며, 결국 그녀가 좋아했을 만한 일들은 점점 더 흐려져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위장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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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죽고, 암으로 죽고, 또 암으로 죽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내, 다음 차례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그러나 H 자신은 암으로 죽어가면서,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암에 대해 예전에 가졌던 공포의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암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 이름과 개념은 어느 정도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이는 나도 어느 수준까지는 거의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단지 암, 전쟁, 불행(혹은 행복)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매시간 매순간을 만난다. 그 좋았다 나빴다 하는 모든 양태를 만나는 것이다. 최고로 좋은 순간에도 나쁜 순간들이 많고, 최악의 시절에도 좋은 순간들이 많다. 우리는 결코 소위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의 총합적인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릇되게도 그렇게 부른다. ’사물 자체‘란 단지 이러한 좋았다 나빴다 하는 순간들의 총체일 뿐이다. 그 나머지는 그저 이름이거나 개념일 뿐이다. (P29)


내게는 쓸 만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상상 속에서조차 그녀의 얼굴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 아침 군중들 속에서 본 한 낯선 얼굴은 오늘 밤 눈을 감으면 아주 선명하게 내 눈앞에 떠오를 수도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아주 다양하게, 수많은 각도로, 여러 가지 빛 아래에서, 여러 가지 모습(깨는 모습, 잠든 모습, 웃는 모습, 우는 모습, 먹는 모습, 말하는 모습,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아 왔기 때문에, 그 모든 인상들이 우리 기억으로 떼지어 몰려와 결국엔 그저 흐릿함으로 퇴색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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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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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한다고 얻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고통 속에 있으며 이를 피할 수 없다. 현실은, 똑바로 쳐다본다면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이 왜 여기서는 의식(意識)이라는 끔찍한 현상으로 피어나고 저기서는 그런 현상이 퇴색하는가? 왜 현실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보면서 혐오하여 움츠러드는 우리를 만들어 내는가? 더 이상한 것은, 누가 그런 현실을 보기 원하며 찾아내려 애쓴단 말인가? 아무 필요 없을 때조차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에 치유할 수 없는 암종(癌腫)을 남기는데 말이다. H와 같은 사람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만약 H가 ‘지금 없다면’ 예전에도 없었던 셈이다. 나는 한낱 원자들의 덩어리를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다. 결코 없었고 이제도 없는 것이다. 죽음은 항상 거기 있었던 텅 빈 진공을 드러내 보여 줄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직 가면을 벗지 않았을 따름이다. 모두들 파산 상태에 이르렀지만, 어떤 이들은 아직 선고를 받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건 말도 안 된다. 텅 빈 진공이 누구에게 드러난다는 말인가? 파산이 누구에게 선고된다는 말인가? 다른 불꽃놀이 상자들에게? 아니면 다른 원자들의 덩어리에게? 물질적 사건들의 조합이 다른 물질적 사건들의 조합에 대해 오인을 하고 실수를 하다니, 믿기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다. (P49-50)


그리고 슬픔은 여전히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중간한 미결 상태 같기도 하다. 혹은 기다림 같기도 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은 삶이 영원히 임시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을 가치 없어 보이게 한다. 나는 차분히 안정할 수가 없다. 하품을 하고 몸을 뻗대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시간밖에 없다. 거의 순수한 시간, 그 텅 빈 연속만이 있는 것이다. (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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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나 H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 대화도 나눠야 하는 덕분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쩌면 H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가 최악의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이유 없이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생각, 무언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생각이 퍼져 간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기분 나쁜(아침식사 중에 이야기하면 전혀 놀라울 것조차 없는 그런) 꿈속처럼 그 모든 환경이나 분위기는 아주 음산하다.

그런 것이었다. 마가목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왜 하필이면 그것이 우울하게 보이느냔 말이다. (P59)


이러한 내 슬픔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그래서 내가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랴? 내가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든, 내가 그녀를 기억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더 무겁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겪었던 괴로움. 그 모든 괴로움이 이제는 과거형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나는 아무리 독실한 영혼이라 해도 죽음의 문턱을 넘으면서 성인(聖人)이 된다거나 평화를 얻게 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믿는다는 것은 턱없이 부질없는 소망을 품는 짓이나 다름없다.

H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올바른 영혼을 지녔으며 영민(英敏)하고 칼과 같이 벼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 죄 많은 남자와 결혼한 죄 많은 여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많은 환자들 중 하나였고, 아직까지 치유받지 못한 남녀들이었다. 거기엔 닦아 주어야 할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박 닦아 내야 할 얼룩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 칼은 더욱더 빛나게 벼려져야 한다.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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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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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에서는 어떤 것도 ‘거기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은 어떤 단계를 계속 벗어나지만, 그 단계는 언제나 되풀이된다. 빙빙 돌아 원이로구나.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나는 그저 뱅뱅 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선형의 계단 위에 있다고 감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인가?

나선형 계단이라면 오르고 있는 것인가, 내려가고 있는 것인가?

얼마나 자주, 언제까지나 계속 그럴 것인가? 얼마나 자주 그 광대한 공허감이 나를 새삼스럽게 덮쳐 오며 이렇게 말하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같은 다리가 계속하여 잘리고 또 잘린다. 살 속을 쑤시고 돌아오던 칼의 느낌이 느껴지고 또 느껴진다.

사람들은 말한다.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도 여러 번 죽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 먹는 독수리도 끼니 때마다 생생한 간을 쪼아 먹지 않았던가? (P83-84)


나는 내가 어떤 상태를 묘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것은 지도가 아닌 역사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임의로 어느 지점에서 그 역사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P87-88)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떠나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함께 가져가 버렸는지 알기나 하오? 당신은 내게서 나의 과거조차 앗아가 버렸소. 우리가 함께하지 않았던 과거마저도.

잘려진 부분이 과거와 단절된 고통으로부터 회복되고 있다고 말하다니 틀린 소리였다. 그 고통은 너무나 여러 방면으로 나를 괴롭히면서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드러나는 탓에 내가 속은 것이었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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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이것이 당신의 진짜 조건입니까? 제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그녀를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괘념치 않을 때에만 H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주여,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여 주소서. 제가 어린아이들에게 “지금은 사탕을 못 먹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자라서 정말로 사탕을 원하지 않을 때쯤이면 실컷 먹어도 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H와 영원히 헤어져 나를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이 그녀의 존재에 더 큰 기쁨과 더 큰 광휘를 더해 주는 것이라면 물론 나는 ‘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지상에서 그녀를 결코 다시 보지 않음으로써 암을 고칠 수 있다 했다면,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다른 문제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그게 아니다. (P97-98)


우리는 서로를 이상화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비밀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H는 이미 내 결점과 약점을 대부분 알았다. 그보다 더한 것을 본다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비난하나 이해하며, 조롱하지만 용서하려무나. 이것이 사랑의 기적이니, 사랑이란 매혹되면서도 올바로 꿰뚫어 보는 힘을 주며, 그러면서도 환멸을 느끼지 않게 한다(남녀 모두에게 그런 능력을 주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 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처럼 꿰뚫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앎은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 자신과도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므로 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보면서도 사랑하시는 것이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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