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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크랜포드>

영화 <크랜포드> 2007년

by 노용헌

크랜포드(Cranford)는 BBC에서 2007년도에 2009년까지 방영된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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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크랜포드는 아마존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어느 정도 이상의 집세를 받는 집 소유주는 모두 다 여성이다. 결혼한 부부가 이 동네에 터전을 잡기 위해 오더라도, 남자들은 어쨌든 마을에서 살지 않는다. 크랜포드의 저녁 파티에서 유일한 남자인 것을 알고 놀란 겁쟁이든지, 군대의 연대장이든지, 배의 선장이든지, 혹은 철도에서 불과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인근의 거대 상업도시인 드럼블에서 벌인 사업 때문에 일주일 내내 그곳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어쨌든 남자들은 크랜포드에 거주하지 않는다. 설사 거기에 산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 의사가 한명 있기는 하다. 그는 약 50킬로미터 정도를 회진 구역으로 돌고, 잠은 크랜포드에서 잔다. 하지만 남자들이 모두 의사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잘 선별한 꽃으로 꾸민 정원을 풀 한포기 없이 깨끗하게 손질하는 일도, 이 꽃들을 탐내듯 울타리 너머로 기웃거리는 꼬마 녀석들을 을러 쫓아버리는 일도, 열린 대문을 통해 정원 안으로 들어온 거위를 다시 밖으로 훑어내는 일도, 쓸데없는 토론이나 이유를 댈 필요 없이 문학과 정치의 모든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도, 교구 내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확실하고도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는 일도, 하녀들을 감탄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유지하는 일도, 가난한 사람에게(다소 거만한 태도로) 자선을 베푸는 일도,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 서로 진심으로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 일도, 크랜포드의 여성만으로 충분했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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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 높은 절약!’ 크랜포드의 어법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 말인지! 그곳에서는, 절약은 언제나 ‘격조 높은’ 일이었고 돈 낭비는 언제나 ‘천박하고 허세 부리는’ 행위였다. 그건 일종의 신포도식 오만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마음의 평화와 만족을 누렸다. 그럴진대, 어느 날 육군 대위 출신인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크랜포드에 정착하기 위해 와서,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했을 때 우리가 느낀 절망감이란! 방문과 창문을 미리 꼭꼭 걸어 잠그고 친한 친구에게 낮게 속삭이는 소리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대로 한복판에서 우렁찬 군대식 목소리로, 집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가난 때문이라고 말하다니!

크랜포드의 숙녀들은 신사 한 분과 남자 한 명이 자기 영지를 침입해 들어온 사실만으로도 긍끙 앓고 있었다. 그는 반액 퇴직 급료를 받고 있는 퇴역한 대위였고 인근의 철도 건설 현장에 일자리를 얻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 작은 마을 사람들은 철도 건설을 격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이며 끔찍한 철도일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하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을 친구로 대해줄 수는 없다. (P11-12)


젠킨스 양은 캡틴 브라운이 존슨 박사를 가볍고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헐뜯었다며 아직도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제시의 언니 브라운 양이 만성적인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순전히 짜증이 나서 그런 걸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파서 가끔씩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것이다. 물론 병으로 인한 신경성 흥분이 참을 한계를 넘으면 그녀가 정말 짜증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제시 양은 언제나 심하게 자책을 하며 보통 때보다 더욱 참을성 있게 언니를 돌보았다. 브라운 양은 자신의 성급하고 짜증 잘 내는 성격에 대해 자책할 뿐 아니라, 동생과 아버지가 자신의 병에 필요한 약간의 호사를 누리게 해 주려고 경제적으로 쪼들린다며 괴로워하곤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여 그들의 짐을 덜어주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원래 너그러운 성격에 신랄함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와 제시는 묵묵히 그런 그녀를 참아내며 다정하게 그녀를 돌봐 주었다. (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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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잰킨스 양도 있었다. 동생에게 자신을 데보라로 부르게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유대인 이름은 그렇게 발음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성서에 나오는 데보라라는 이름의 이스라엘의 여성 예언자를 자기 성격의 롤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여러 면에서 준엄한 여전사와 비슷했다. 물론 현대의 풍습과 옷차림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젠킨스 양은 크러뱃을 매고 기수 모자 같이 생긴 작은 보닛을 썼으며, 전체 모습에서 자립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풍겼다. 하지만 그녀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현대적 개념은 경멸했을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고, 천만에! 그녀는 여자가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26-27)


“아주머니, 사실입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죠.”

그는 그 장면을 회상하며 몸서리를 쳤다.

“캡틴은 하행 기차를 기다리며 새로 나온 소설책에 푹 빠져 있었어요. 여자 아이가 엄마에게 가려고 언니 품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철로를 가로질러 아장아장 걸어가기 시작했죠. 기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캡틴은 아이를 발견하고 철로로 달려가 그 애를 안아들었죠. 하지만 발이 미끄러졌고 곧 바로 기차가 그의 몸을 덮쳤어요. 아, 하느님, 하느님! 모두가 사실 그대로예요. 사람들이 캡틴의 딸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러 갔습죠. 그래도 그분이 아기를 엄마에게 던졌고, 아기는 땅바닥에 어깨를 부딪치긴 했지만 목숨을 구했어요. 불쌍한 캡틴은 하늘나라에서라도 그걸로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부인? 오, 하느님, 그에게 축복을 내려 주소서!”

거친 짐수레꾼은 사내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고개를 돌려 흐르는 눈물을 감추었다. 나는 젠킨스 양을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해쓱한 얼굴로 마치 기절이라도 하려는 표정으로, 내게 창문을 열라는 손짓을 했다.

“마틸다, 모자 좀 가져다 줘. 아이들에게 가 봐야겠어. 오, 하느님, 내가 캡틴에게 무례한 말을 했다면 용서하소서!”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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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티!”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세상에 혼자 버려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손수건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얘야, 나를 매티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 언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싫어했어. 언니가 싫어하는 일을 많이도 했는데, 이제 언니가 가고 없으니! 괜찮으면, 이제부터 나를 마틸다로 불러 주겠니?”

나는 그러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폴 양과 함께 당장 그날부터 새 이름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마틸다 양의 의중이 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모두 익숙한 이름 대신 새 이름을 입에 붙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큰 성과는 없어 차츰 우리는 그 노력을 포기해 버렸다.

폴 양 집에서의 체류는 매우 조용했다. 오랜 세월동안 크랜포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해오던 젠킨스 양이 없어지자 모두들 어떻게 파티를 여는지조차 몰랐다. (P44)

“잘 했어, 마사. 매티 양에게 너처럼 충직한 하녀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 이 집은 네가 있기에 편안하니?”

“아주머니, 마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집엔 먹고 마실 것도 많아요. 집안일도 수월하고요, 하지만......”

마사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뭐, 마사?”

“하지만, 마님이 저에게 이성을 사귀지 못하게 하시는 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이 동네는 젊은 남자가 정말 많거든요. 저와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전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제가 아는 여자들은 주인님 몰래 사귀기도 해요. 그렇지만 전 약속을 했으니, 지키려고요. 아니면 이런 집에서는 남자들이 찾아와도 마님이 전혀 모를 수도 있어요. 부엌도 널찍해서 어두운 구석도 많아 남자를 숨기려고 들면 어디든지 그럴 수 있어요. 지난 일요일 밤의 일만 해도 그래요. 젬 헌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려야 했기 때문에 제가 울었다는 걸 숨기진 않을게요.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어울릴만한 착실한 젊은이예요. 하지만 전 마님께 약속을 했으니까요.”

마사는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고, 나도 달리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젠킨스 양 자매가 하녀의 애인에 대해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알고 있었고, 매티 양의 불안정한 현재 상황에서 그 공포심이 완화되었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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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티 양은 꾸러미를 풀면서 한숨을 쉬다가, 시간이나 인생의 흐름을 한탄하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도 되듯 곧바로 한숨을 억눌렀다. 우리는 따로 편지들을 살펴보기로 하고 같은 꾸러미에서 서로 다른 편지를 꺼내 내용을 상대방에게 말해 주고 난롯불에 던져 넣기로 했다. 나는 그날 밤 전까지는 옛날 편지를 읽는 것이 그렇게 슬픈 일인지 미처 몰랐다. 왜 그랬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편지는 다른 여느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내용이었으며, 적어도 초기의 편지는 그랬다. 현재 시점의 생생하고 강렬한 느낌이 살아 있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너무나 강렬했으며, 편지에 표현된 그대로 따뜻하고 팔팔한 심장이 도저히 멈출 것 같지도, 양지 바른 곳에서 흙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편지들이 더 슬픈 내용이었으면 읽을 때 덜 슬펐을 것이다. 매티 양의 주름진 뺨 위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안경도 자주 닦아 주어야 했다. 마침내 나는 눈도 침침해지고, 잉크색이 바래 희미해진 편지를 읽기 위해선 방이 좀 밝아야겠다고 생각해 다른 쪽 초도 켜자고 말했다. 하지만, 천만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글씨를 알아보았고, 자신의 사소한 절약 방법을 기억했다. (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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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젠킨스 양이 사망했을 당시는 피츠 애덤 부인과 왕래를 터도 좋을지에 대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젠킨스 양과 함께 상류사회의 엄격한 법칙에 대한 명확한 지식도 사라져 버렸다. 폴 양이 소견을 말했다.

“크랜포드의 좋은 가계의 숙녀들은 대부분 나이 많은 독신녀거나 아이 없는 과부라서 우리가 회칙을 약간 완화해서 좀 더 포괄적으로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만간 우리 마을엔 사교계라는 것이 사라져 버릴 거예요.”

포레스터 부인도 거들었다.

“피츠 애덤 부인은 피츠라는 이름이 귀족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어요. 피츠 로이라는 이름도 있잖아요. 지금은 피츠 클래런스라는 이름도 있고요. 모두 저 위대한 윌리엄 4세의 자식들이잖아요. 피츠 애덤! 정말 예쁜 이름이에요. 그리고 내 생각엔 십중팔구 ‘애덤의 자식들’이라는 뜻일 거예요. 몸속에 귀족의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에겐 감히 피츠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죠. 이름에는 의미가 많아요. 내겐 소문자 에프(f) 두 개를 붙여 포크스(ffoulkes)라는 철자를 쓰는 친척이 있어요. 그는 언제나 대문자 이름을 깔보면서, 그런 건 나중에 새로 생긴 가계의 이름이라고 했어요. 난 친척이 하도 까다롭게 따지길래 그냥 총각귀신이 되겠구나, 라고 걱정을 했죠. 하지만 그는 온 천지에서 페링던(ffaringdon)이란 이름의 부인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어요. 아주 예쁘고 가문이 좋은 여자였어요. 돈이 많은 과부였죠. 포크스 씨는 그녀와 결혼했어요. 전부 그녀 이름 앞에 붙은 소문자 에프 두 개 때문이었어요.”

피츠 애덤 부인으로서는 크랜포드에서 피츠 뭐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었으므로, 그게 이 마을에 정착하려는 이유일리는 없었다. 그녀가 이 지역 사교계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과거의 호긴스 양으로서는 상당한 신분 상승이 될 것이라고 매티 양은 짐작했다. 그리고 그게 그녀의 희망이라면 그걸 꺾는 건 너무 잔혹한 짓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녀와 왕래했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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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난 고든의 가게를 나와 우연히 조지 여관으로 들어갔어요(내 하녀 베티에겐 거기서 객실 청소를 하는 육촌이 있는데 그 애 소식을 궁금해 할 것 같았거든요).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내가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갔는데 어쩌다 보니 연회실로 통하는 통로에 서 있는 거예요(매티 양! 연회실과 거기서 추던 궁정 미뉴에트 춤이 기억나시죠?). 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계속 걸어갔어요. 그러다보니 문득 내가 내일 밤 공연 준비가 한창인 곳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됐죠. 그 방은 커다란 나무 접이로 나뉘어 있고 크로스비 씨네 사람들이 나무 접이 위에 아주 침침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빨간 플란넬을 붙이고 있었어요.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장막 뒤로 가려고 했어요. 바로 그때 거기서 신사 한 분이(틀림없이 신사였어요) 불쑥 나오더니 자기가 도와줄 일이 있느냐는 거예요. 그 남자가 상당히 엉터리 영어를 구사해서 난 저절로 <바르샤바의 다대오>, <헝가리 인의 형제들>, <산토 세바스찬>이 생각나더군요. 내가 그 남자의 과거사를 혼자 열심히 상상해 보고 있는 동안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방밖으로 나가 버리더군요.

아니, 잠깐만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세요!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나는 바로 베티의 육촌동생과 딱 마주쳤어요. 그래서 물론, 난 베티에게 안부를 전해줄 겸해서 잠시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 아이는 내가 본 사람이 마술사라는 거예요. 엉터리 영어를 구사하던 그 신사분이 바로 시뇨르 브루노니라고 하더군요. 바로 그 순간, 그가 계단을 지나가면서 내가 하는 인사를 받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자기도 인사를 하더군요. 외국인은 참 예의가 바르구나, 뭐, 그런 인상을 받았죠. 하지만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린 순간, 난 장갑을 연회실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안전하게 머프 안에 넣어 두긴 하지만 난 언제나 뒤늦게야 그걸 찾곤 했죠.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갔고, 내가 방을 가로 질러 있는 장막의 한쪽에 있는 출입구 쪽으로 살금살금 가는데 바로 아까 만나 계단을 지나간 그 신사분과 다시 딱 부딪혔어요. 이번엔 방 안에서 밖으로 나왔는데, 그 방은 다른 출입문이 없다는 걸 매티 양도 기억하시죠! 그는 아까처럼 엉터리 영어로 거기에 볼일이 있는지 물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내가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주 단호했어요. 물론, 그래서 나는 장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희한하게도 바로 그 순간 장갑을 발견했죠.”

그러면 그때 폴 양은 마술사를 본 것이다. 살아있는 진짜 마술사를!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녀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P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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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련의 사건이 시뇨르 브루노니가 크랜포드를 방문한 이후부터 생겼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우리는 그 사건들을 그와 연관지어 생각했는데, 그가 정말 관계가 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모든 종류의 듣기 거북한 소문들이 동시에 마을에 떠돌기 시작했다. 한두 건의 강도 사건이 있었다. 말 그대로 진짜 강도 사건 말이다. 몇 명의 남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치안 판사 앞에 섰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강도를 당할까 봐 겁이 났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매티 양의 집에서 그때부터 오랫동안, 우리는 부엌과 지하실 주변 전체를 매일 밤 규칙적으로 한 바퀴 순찰을 돌곤 했다. 매티 양이 부지깽이를 들고 앞장서고 내가 난로용 솔을 들고 그 뒤를 따르고, 맨 뒤에 마사가 삽과 부젓가락으로 경고음을 내면서 따라왔다. 그러나 마사가 가끔 무심코 두 도구를 부딪쳐 소리를 냈고 그 굉음에 깜짝 놀란 우리는 뒤쪽 부엌이나 광, 하여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셋이서 우르르 도망쳤다가 겁에 질린 원인을 알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욱 용감하게 다시 출발하곤 했다.

낮에 우리는 소매상인이나 농부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한밤중에 말의 말굽을 펠트 천으로 감싼 짐마차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경비가 허술한 집이나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집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P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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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터 부인은 그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 원기 회복차 먹을 수 있도록 자신의 정평 난 음식인 브레드 젤리를 만들었다. 브레드 젤리는 포레스터 부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애정 표현이었다. 언젠가 폴 양은 그녀에게 요리법을 물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부인은 폴 양에게 자기는 죽을 때까지 요리법을 남에게 알려 주지 않을 것이며, 죽고 나면 매티 양에게 주라고 유언 집행자에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매티 양이, 아니 포레스터 부인이 말한 것처럼 (자기 유언의 항목을 상기하고, 그 위엄성을 위해서) 마틸다 젠킨스 양이 요리법을 일단 자기 수중에 쥐면 만인에게 공개하든지 가보로 대대로 전하든지, 자기는 알 수도 없거니와 그 내용을 유언에 포함시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맛있고 소화 잘 되며 유일무이한 음식을 포레스터 부인이 마술사에게 보낸 것이다.

귀족이 거만하다고 누가 말했는가? 여기, 티렐 가 태생이고 루퍼스 왕을 활로 쏘아 죽인 위대한 월터 경의 후손이며, 런던탑에 유폐된 어린 왕자들을 살해한 사람의 피가 흐르는 부인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들고 광대인 사무엘 브라운을 보러 간다! 하지만 사실, 불쌍한 남자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친절함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모습은 보기가 참 좋았다. 그리고 그가 터키 풍의 옷을 입고 첫 번째 등장했을 때를 같이 해서 생겼던 공포가, 그의 두 번째 등장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도 보기에 근사했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창백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었으며, 무겁고 흐릿한 그의 두 눈은 자기의 충실한 아내와 창백하고 슬픈 표정의 어린 딸을 봤을 때에만 잠시 반짝였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무서움을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희한한 마술로 우리들 사이에 불가사의에 대한 열정을 피어나게 했던 사람이, 겁이 많은 말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를 만큼 일상사를 꾸리는 재주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가 다시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P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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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티 양의 질문에 건성으로 (거의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을 때, 계단에서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 밖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마치 유령의 짓인 양, 문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잠시 후, 마사가 건장한 젊은이를 질질 끌며 들어왔다. 젊은이는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고, 그냥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정돈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었다.

“마님, 이 사람은 젬 헌이에요.”

마사가 소개 삼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주 숨이 찬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녀가 마틸다 젠킨스 양의 응접실처럼 예의를 지켜야 하는 장소로 남자를 억지로 끌고 오기까지 둘이 꽤나 몸싸움을 한 듯했다.

“그러니까, 마님. 이 남자가 저와 당장 결혼하고 싶어 해요. 마님, 우리는 수입에 맞게 조용한 방 한 칸만 있으면 됩니다. 아무 곳이라도 괜찮아요. 오, 매티 마님, 너무 무례한 소리 같지만 저희와 함께 사시면 안 될까요? 젬 헌도 저만큼이나 그러기를 원해요. 이 멍청아! 너도 그렇다고 왜 말을 안 해? 이 남자도 저와 마찬가지로 무척 원해요. 안 그래 젬? 단지 보시다시피, 지금 이 사람이 상류사회 어른 앞에 부려 나와 있으니 정신이 멍해서 그래요.”“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젬이 끼어들었다. (P220-221)


여기서 나는 폴 양이 글을 적어 놓은 것 같은 작은 카드를 손에 숨겨 참조하는 것을 목격했다.

“스미스 양.......”

그녀는 나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모인 사람 모두에게 ‘메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공식행사니까).

“나는 내 친구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대해 여기 모인 숙녀분들과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단다(내가 해야 할 직분이라고 생각하고 어제 오후에 그랬어).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여유가 있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의무일 뿐만 아니라 기쁨이라고 --진정한 기쁨이야, 메리!-- 생각했어.”

바로 여기서 그녀는 목이 메었고, 안경을 닦고 나서야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녀, 마틸다 젠킨스 양을 도울 수 있는 대로 도와주기로 했단다. 단지, 품위 있는 여성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섬세한 독립성을 감안해서(나는 폴 양이 다시 카드를 쳐다보았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비밀리에 소액의 정성어린 기부금을 내고 싶단다. 아까 말한 감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오늘 아침에 너를 보자고 한 까닭은, 너의 아버지께서 사실상 마틸다 양의 모든 재정 문제의 사적 조언자니까, 네가 딸로서 그분과 의논해서 우리가 낸 기부금을 마틸다 젠킨스 양이 어느 기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받는 돈으로 만들 수 있지나 않을까 해서야. 네 아버지라면 그녀의 투자를 다 아시니까, 그 기관을 가공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폴 양은 연설을 끝내고 찬성과 동의를 구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가 여러분의 뜻을 잘 전달했죠? 그럼, 스미스 양이 답사를 생각할 동안 음료를 좀 드시지요.”

나는 대단한 답사를 하지 못했다. 할 말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친절한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취지의 말을 중얼거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폴 양의 말씀을 아버지께 전해 드릴게요. 만약 매티 양을 위해서 뭔가가 마련되면.....” (P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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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는 내게로 몸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이상한 이야기에 그렇게 쇼크를 먹은 것 같은 표정 짓지마, 새침데기 메리 아가씨. 나는 제미슨 부인을 좋은 사냥감이라고 생각해. 그것 말고도, 난 호긴스 부인과 그녀를 화해시킬 참인데 그 첫 번째 조치가 그녀를 계속 깨어 있게 하는 거야. 오늘 밤도 가엾은 마술사의 후원자로 그녀 이름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매수해 놨지. 그리고 저기 들어오고 있는 호긴스 씨 부부에게 적의를 드러낼 틈을 주지 않으려고 해.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싸움 이야기를 듣고 매티 누나가 아주 괴로워하니까. 나는 계속 이야기를 할 테니까 너는 너무 충격받은 표정을 짓지 마. 오늘 밤, 나는 한 팔엔 제미슨 부인을, 다른 한 팔엔 호긴스 부인을 끼고 연회실로 들어갈 거야. 내가 그러는지 못 그러는지 두고 보라고.”

이럭저럭 그는 이 일을 해냈고, 그들 둘이서 대화를 나누게까지 만들었다. 고든 소령 부부가 크랜포드 주민 사이에 감돌고 있는 냉랭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크랜포드 지역에는 과거의 친밀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나는 그런 변화에 감사한다. 매티 양이 평화와 온정을 그렇게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매티 양을 사랑하고, 그녀가 곁에 있어 우리 모두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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