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택트> 1997년
1997년 개봉한 미국의 영화.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를 원작으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연출하고 조디 포스터와 매튜 매커너히가 주연을 맡았다. 배급은 워너 브라더스이며, 음악은 앨런 실베스트리가 담당했다. 제70회 아카데미 시상식 음향상 후보작이었다.
[1]
엘리는 몸 아래쪽에 있는 단단하고 믿음직한 대지를 다시 한번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은 뒤 긴 호숫가를 사방으로 살펴보았다. 양쪽 물가가 보였다.
“세상은 납작하게만 보여.”
엘리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 모양이다. 이 커다란 구는 하늘 한가운데에서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있다. 엘리는 회전하는 그 구 위에 수백만 명이 붙어사는 모습을 상상했다. 서로 다른 말로 떠들어대고 이상하게 생긴 옷을 입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다 함께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다.
엘리는 다시 드러누워 지구의 회전을 느껴보려고 했다. 약간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호수 건너편 높다란 나뭇가지 사이에서 밝은 별이 반짝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그 빛이 춤추듯 흔들렸다. 더 가늘게 뜰 수 있다면 빛의 길이와 모습이 더 많이 변할 것이었다...... (P18)
엘리는 금성을 올려다보며 지구와 마찬가지로 동식물과 문명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 지구에서와는 다를 것이다. 막 해가 지고 나면 엘리는 동네 바깥으로 나가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깜박임이 없는 그 별을 자세히 살폈다. 머리 위의 구름이 아직까지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것과 달리 그 별은 약간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엘리는 그 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상상했다. 그 별에 사는 다른 누군가도 발끝으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때로 엘리에게는 정말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P32)
처음에 엘리는 널려 있는 부품들로 라디오를 조립했고 다음에는 더 흥미로운 일에 손을 댔다.
바로 암호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잡했지만 제대로 움직이는 기계였다. 영어 문장을 넣으면 간단한 암호 전환기를 거쳐 그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암호로 바뀌곤 했다. 반대로 암호화된 문장을 집어넣어 규칙을 찾고 영어 문장으로 되돌리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P33)
성 해방의 물결 속에서 엘리도 서서히 열정을 키워갔지만 제대로 연인 관계를 만들지는 못했다. 엘리와 남자 친구들의 관계는 길어야 몇 달 정도 계속될 뿐이었다. 관계를 길게 유지하려면 자신의 관심과 의견을 억눌러야 했지만 그건 엘리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호히 거부해온 일이었다. 엘리는 체념 섞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어머니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학문과 동떨어져 사는 남자들은 어떨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듯했다. 한쪽 부류는 진지한 생각이란 전혀 없이 무조건 애정을 퍼부어댔다. 또다른 부류는 <괜찮은> 남자를 <낚아채기>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괜찮은>이라는 말은 얼마나 기준이 모호한 것일까 하고 엘리는 생각했다. 그건 실제로 그 우스꽝스러운 놀음에 참여하는 여자들이 만들어내는 기준이 아닌가. 대부분의 여성들은 정열과 편안한 인생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려는 것 같았다. 이성(理性)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과 이기심은 서로 적당히 어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성에 대한 계산된 속박이란 엘리에게는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무의식적인 자연스러움을 따르고 싶었다. 엘 리가 제시를 만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P40-41)
1960년대 후반 소련은 금성 표면에 우주선을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류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주선이 사상 최초로 다른 행성에 내려앉았던 것이다. 십년도 더 전에 미국의 한 전파천문학자는 금성이 거대한 전파 방출 원천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금성이 행성 온실 효과를 통해 거대한 대기 속에 열을 가두어 두었다는 것이었다. 이 설명에 따르면 행성 표면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뜨거워야 했다. 수정으로 지은 도시나 지구를 내려다보며 궁금해 하는 금성인이 살기에는 너무 뜨거운 것이다. 엘리는 뭔가 다른 설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고 전파 방출은 온화한 기후의 금성 표면 위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헛된 공상을 하기도 했다. 하버드와 매사추세츠 공대의 천문학자들은 금성 표면이 펄펄 끓고 있다는 것 외에는 전파 데이터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엘리는 거대한 온실 효과라는 개념을 믿을 수 없었고 믿기도 싫었다. 그건 행성이 자멸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주 탐사선 베네라 호가 금성에 착륙해서 온도를 재어보았을 때 표면 온도는 실제로 납이나 주석이 금방 녹아버릴 정도로 높았다. 엘리는 수정 도시가 녹아버려 금성 표면을 규산염 눈물로 뒤덮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에는 금성 온도가 그 정도 높지 않았을 테니 그건 잘못된 상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인정하듯 엘리는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성격이었다. (P43-44)
일년 동안 엘리는 데이비드 드럼린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드럼린은 머리 좋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자신을 능가하는 누군가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는 유형이었다. 드럼린은 엘리에게 전파천문학 분야의 핵심 이론을 가르쳤다. 그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소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엘 리가 보기에 그는 화를 잘 냈고 무자비할 정도로 자기 집착이 심했다. 드럼린은 엘 리가 너무 낭만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주는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엄격하게 질서정연하다는 것, 우리는 우주가 움직이는 대로 생각해야지 낭만적인 기질, 특히 소녀 취향의 감정을 우주에 억지로 투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연의 법칙이 금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만 인간의 재량권이 허용된다는 것 등이 그가 말하는 요지였다. (P45)
엘리는 루비 마이크로파 증폭기에 매달렸다. 루비는 거의 완벽하게 투명한 알루미나(산화알루미늄, 즉 알루미늄의 산화물)가 주성분이었다. 붉은색은 알루미나 결정체에 산재된 작은 크롬 불순물에서 나왔다. 강력한 자기장을 루비에 갖다 대면 크롬 원자들의 에너지가 <들뜬상태>가 된다. 혹은 물리학적 표현으로 <활성화>가 된다. 엘리는 증폭기 속에서 들뜬상태가 된 작은 크롬 원자들이 약한 전파 신호를 증폭시키는 그 모습이 좋았다. 자기장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크롬 원자들의 활성 정도도 높아졌다. 이렇게 해서 증폭기는 선택된 특정 전파 주파수에 각별히 민감하게끔 조정될 수 있었다. (P50)
거대한 전파망원경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된다. 그 이유는 폴 고갱이 타이티 섬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과 같았다. 망원경들은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잘 작동하는 것이다. 민간용 혹은 군수용으로 전파가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 전파망원경은 몸을 숨겨야 했다. 푸에르토리코의 어느 이름 없는 계곡에 은거하거나 뉴멕시코 혹은 카자흐스탄쯤에 있는 광활한 사막으로 망명을 가야 했던 것이다. 전파 간섭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터라 아예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망원경을 설치해야 한다는 말도 설득력을 얻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관측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은 완고하고 단호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내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기 일쑤였고 아이들은 틈만 있으면 집을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다.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격리된 관측소에서 머물며 일하기로 한 연구원들은 오히려 실제적인 경험론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안테나 모양이나 관측자료 분석에 대해서는 알아도 퀘이사(준성準星, 태양계로부터 40-100억 광년 거리에서 강력한 전파 에너지를 내는 천체)나 펄서(강한 자기장을 가지고 고속 회전을 하며, 주기적으로 전파나 X선을 방출하는 천체)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는 그런 전문가들이기 십상이다. 대개가 어렸을 때부터 별에 대해 꿈꿔온 부류는 아니었다. 그때는 집 차고에서 자동차를 수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을 테니까. (P52-53)
인간은 숨어 있는 유형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형을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연속되는 파동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으로 끊어지는 박자나 짤막한 멜로디는 충분히 인간의 상상력을 부채질할 만했다. 엘리는 이미 알려져 있는 은하계 전파 원천을 향해 방향이 맞춰져 있는 망원경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전파가 발생 원천으로부터 지구까지 오는 사이에 행성간 희박한 가스층을 통과하면서 전자와 부딪쳐 흩어질 때 발생하는 <피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린 활이 미끄러질 때처럼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 피잉 소리가 분명하게 들릴수록 중간에 전자가 많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전파의 발생 원천이 지구에서 더 멀다는 뜻이었다. 엘리는 워낙 그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전파의 피잉 소리를 듣자마자 단번에 정확한 거리를 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번 것은 약 1천 광년쯤 되는 거리였다. 가까이 있는 별들에 비하자면 멀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은하계의 일부에 속하는 그런 거리였다. (P68-69)
펠트 천으로 배구공을 붙인 위에 <약탈자>라고 쓰인 점퍼를 입은 당직 근무자가 밤교대를 위해 통제 건물로 가고 있었다. 마침 몇몇 천문학자들이 건물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하는 참이었다.
“자, 이제 외계인을 찾아 헤맨 지 얼마나 되었나? 아마 5년도 더 됐지?”
당직 근무자는 가벼운 농담 속에 숨은 가시를 느꼈다.
“우리 생각도 좀 해달라고.”
또다른 천문학자가 말했다.
“레이사 밝기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야. 아주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망원경 사용 시간을 2퍼센트밖에 배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마 평생 매달려도 못 끝낼 거야.”
“알아, 나도 알고 있다고.”
“이봐, 우리는 우주의 기원을 되돌아보게 될 거야. 그건 대단한 연구라고. 우린 최소한 확실히 존재하는 우주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한데 자네들은 도대체 외계인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지 않나.”
“애로웨이 박사님께 말해 보게. 그런 의견을 들으면 기뻐하실 것 같군.”
당직 근무자는 약간 빈정거리며 말했다. (P89-90)
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엘리는 몇 개의 망원경을 동원하여 다른 주파수 영역에서 직녀성을 관찰해 보았다. 그러자 1420 메가헤르츠 수소선과 1667 메가헤르츠 수산기선을 비롯한 여러 주파수대에서 똑같이 단조로운 신호음이 들려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파 스펙트럼 전체에 걸쳐 마치 전자적 교향악이라도 연주하듯이 직녀성은 소수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드럼린 선생은 혁대 버클을 만지작거렸다.
“전에도 이런 신호가 있었다면 놓쳤을 리가 없다고. 모두 몇 년 동안이나 직녀성을 관측하지 않았나. 엘리는 10년 전 아레시보에서도 직녀성을 살펴보았지. 그럼 지난 화요일부터 갑자기 직녀성이 송신하기 시작했다는 얘긴가? 왜 하필 지금 그렇게 할 생각이 났을까? 아르고스 연구소가 가동된 지도 벌써 몇 년인데 이제야 신호를 보내온다는 말인가?”
“어쩌면 송신기가 고장 나서 몇 세기 동안 수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발레리언이 말했다.
“어쩌면 지구 쪽으로 신호를 보내는 주기가 백만 년에 한 번인지도 모르고요. 아시다시피 생명체가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행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만이 유일한 생명체가 아닐 수 있으니까요.” (P113)
데어 헤르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멀뚱멀뚱한 표정이었다. <이런, 생물학에서도 편광 현미경을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데> 엘리는 생각했다.
“가시광선이든 전파든 간에 빛의 파동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각도에 따라 다르게 진동을 하게 돼요. 진동이 회전을 하게 되면 파동이 타원형으로 편광되었다고 말하죠.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 오른손잡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 왼손잡이라고 해요. 좀 우스운 표현이지만 어쨌든 그 두 가지 편광을 이용해서 정보를 송신할 수 있어요. 약간 오른쪽으로 편광되면 0이고 약간 왼쪽이면 1이죠. 이해하겠지요? 우리에게는 진폭 변조와 주파수 변조가 있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인류 문명은 편광 변조를 별로 이용하지 않죠.
직녀성의 신호는 편광 변조를 지닌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지금 점검하는 중이죠. 드럼린 선생님이 신호 속에 두 편광이 동일한 빈도로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편광에 무언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정보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키츠 차관보의 말이 순수한 의도로는 들리지 않아요. 우리가 무언가 다른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다고요.” (P119-120)
이제 그들은 직녀성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별은 메시지를 보내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보낸 것입니다. 그게 누굴까요? 메시지를 보낸 목적은 선한 것일까요? 악한 것일까요? 그들이 메시지를 해독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신의 서명이 남을까요, 악마의 저주가 남을까요? 메시지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과학자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혹은 그들이 믿는 바와 다르다는 이유로 무언가 숨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저들이 아닙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과학은 과학자들 손에만 맡기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각 교파의 지도자들이 반드시 메시지 해독 작업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도 본래의 자료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우리의 입장은 뭐가 되겠습니까? 과학자들은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는 하겠죠. 그건 실제로 그들이 믿는 내용일 수도, 그렇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P181)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역시 증명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는 어떻게 아는가? 빛의 속도에 그는 얼마나 근접해 보았을까? 상대성이란 그저 세상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다. 아인슈타인은 인류가 먼 미래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당연히 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도 알지 못했다. 신은 원한다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원한다면 우리 인간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과학에나 종교에나 한계는 있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두 가지 중 하나에 전적으로 의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성서에 대해서나 자연계에 대해서나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하지만 두 가지는 모두 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따라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딘가에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학자나 종교학자, 혹은 둘 다의 직무 유기에서 온 것이다. (P188)
자신이 데어 헤르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언제였는지 엘리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워싱턴으로 가는 여행길에서였다.
파머 조스와는 도대체 언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르고스 연구소를 방문하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문제는 메시지의 해석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불경스러운 태도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과학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중립적인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엘리는 어디든 갈 자세가 되어 있었다. 데어 헤르가 중재에 나섰다. 대통령은 다른 학자를 끼워넣지 말고 엘리 혼자 파머 조스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또한 몇 주 후에는 세계 메시지 컨소시엄이 파리에서 열리게 될 예정이었다. 엘리는 베게이와 함께 세계 데이터 수신 프로그램을 총지휘했다. 이제 신호 수신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최근 몇 달 동안 메시지 내용을 놓치는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P199)
엘리는 탁자 위로 손을 내밀어 백과사전 16권을 집어들었다. 파지를 서표 삼아 끼워둔 쪽을 펼치자 <성스러움>이라는 부분이 나타났다.
“신학자들은 성스러움이라는 감정의 특별하고 반(反)이성적인, 즉 비(非)이성적인 것이 아닌 측면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대요. 그 측면을 <누미너스>라고 부른다는군요.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어디 보자...... 1923년 루돌프 오트라는 사람이 <성스러움의 개념>을 쓰면서부터였다고 하고요. 그는 인간이 누미너스를 추구하고 숭배할 운명이라고 믿었어요. 그걸 <엄청난 신비>라고 불렀지요.
엄청난 신비에 접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지만 개인적인 이질감은 느끼지 않는다는군요. 그는 누미너스가 <총체적 타인>이라고 생각했고 인간은 그 총체적 타인에 대해 완전한 경이감으로 답한다고 주장했어요. 종교인들이 성스러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바로 이런 걸 전하려 한다면 저도 공감할 수 있어요. 마침내 신호를 듣게 되었을 때 저도 바로 이런 느낌을 가졌거든요. 모든 과학도들이 그런 경이감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이제 이 부분을 들어보세요.
<과거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은 신성함이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종교의 몰락을 예언했다. 종교사에 대한 연구를 보면 종교의 형태는 늘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본성과 표현은 일치되는 법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온 신성함과는 전혀 다른 궁극적인 개념 구조를 세워나가고 있는가의 여부는 매우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제 생각은 이래요. 관료화된 종교들은 누미너스를 직접, 마치 6인치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듯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미너스란 이런 것이다라고 머릿속에 집어넣어주려 해요. 누미너스가 종교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그런 관료화된 종교를 따르는 사람과 혼자서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 중에서 과연 누가 더 종교적이겠어요?”
“자,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한번 봅시다.”
데어 헤르가 대답했다. 그건 평소 엘 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투를 흉내낸 것이기도 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벌거벗은 남녀 한 쌍이 침대에 누워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안드로메다 은하가 구세주의 부활보다 더 누미너스한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럼 그 사람들은 멋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요, 모르고 있는 거요?” (P211-212)
“당신들 과학자들은 너무 소심하군요.”
빌리 조 랭킨이 말했다.
“당신들은 바구니 아래로 빛을 감추는 걸 좋아합니다. 제목을 보고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추측하는 일은 절대 없죠. 상대성 이론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첫 논문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이었습니다. E=mc2 이 제목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절대 아니지요. 제목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 하느님이 나타나신다면 아마 당신들은 <공기중 나무 모양 자발적 연소> 정도의 표현을 사용하겠죠. 그러면서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공식을 동원하고 <가설의 경제화> 운운하겠지만 신에 대해서는 절대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당신에 과학자들은 너무 회의적입니다..... (P219-220)
“아니면 지구와 무슨 연결점이라도?”
“글쎄요. 별의 속성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런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연한 사실은 이 별이 만2천년 전에는 북극성이었고 앞으로 만4천 년이 지나면 다시 북극성이 될 거라는 겁니다.”
“북극성이라......”
빌리 조 랭킨은 여전히 낙서를 하는 중이었다.
“물론 몇천 년뿐이에요. 영원히 북극성이 되는 건 아니지요. 지구는 돌고 있는 팽이와도 같아요. 그 축은 하나의 원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엘리는 펜을 사용해 지구 축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걸 세차 운동이라고 불러요.”
“로데스의 히파쿠스가 발견한 거지요.”
파머 조스가 덧붙였다.
“기원전 2세기였어요.”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맞아요. 지금 현지.....”
엘리가 말을 계속했다.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북극으로 날아간 화살은 작은곰자리안의 별 쪽을 향하게 돼요. 안 그래도 점심 직전에 곰 이야기가 나왔었죠. 빌리 조 랭킨 목사님? 하지만 지구 축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방향은 조금씩 바뀌죠. 완전히 한바퀴 도는 데는 2만6천년이 걸려요. 지금은 작은곰자리가 북극에 있고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만2천 년이 흐르고 나면 직녀성이 그 일을 맡을 거예요. 여기에 무슨 물리적인 연관은 없어요. 은하수 안에 별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도 23.5도 기울어진 지구의 회전축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요.” (P236-237)
바루다의 목소리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날 점심을 함께했던 베게이의 어조를 연상시켰다.
“우리가 어떤 복잡한 기계의 제작 설명서를 수신하고 있다는 의견에는 베게이, 애로웨이 박사 등 여러 과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여러분 모두 염두에 두고 계시는 점이리라 생각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메시지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첫 부분에는 우리의 기대대로 메시지를 해독 방법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칩시다. 전세계는 여전히 협력을 계속하여 모든 데이터, 추측과 꿈들을 공유합니다.
직녀성의 생명체들이 그저 심심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그 기계를 만들기를 바랄 겁니다. 무엇에 쓰는 기계인지 말해 줄지도 모릅니다. 아닐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만약 기계의 용도를 말해준다고 해도 그 말을 믿어야 할까요? 저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별로 즐거운 상상이 되지는 않더군요. 그건 트로이의 목마인지도 모릅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기계를 만들고 작동시켰는데 대규모 공격군이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면 어떻게 하죠? 지구의 종말을 위한 기계라면요? 제작해서 켜는 순간 지구가 폭발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건 이제 막 발전해서 우주로 나오는 문명을 억압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방법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별다른 비용이 들 것도 없지요. 그저 메시지를 보내 수신한 문명이 알아서 스스로를 파괴하게끔 만드는 것이니까요.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그저 개인적 견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모두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한 행성에 살고 있는 공동 운명체입니다. 자, 이제 한마디로 제 의문점을 정리하겠습니다. 차라리 수신된 메시지를 없애고 전파망원경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회의장은 금방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다. (P260-261)
오후 시간을 혼자 보내지 않으려고 엘리는 수하바티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리>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단어 중에는 <아브히지트>라는 것이 있지요. 고대 인도에서는 직녀성을 바로 <아브히지트>라고 불렀답니다. 우리 힌두 문명의 성인들이 악의 신인 아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도 직녀성의 힘을 빌려야 했지요. 듣고 있나요, 엘리?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페르시아에도 아수라가 있는데 거기서는 아수라가 선한 신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신 중의 신, 빛의 신, 태양의 신을 아후라 마즈다라고 부르는 종교가 생겨났어요. 예를 들어 조로아스터교와 미트라 신교 같은 것이 그렇지요. 아후라와 아수라는 같은 이름이에요. 조로아스터교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종교이고 미트라 신교는 초기 기독교에 커다란 위협을 가한 종교였어요. 그런데 앞서 말한 힌두교의 성인들은 데비라고 합니다. 대개 여성이지요. 페르시아에서는 데비가 악의 신이 되었어요. 일부 학자들은 악마를 뜻하는 영어 단어 <devil>이 여기서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결국 인도와 페르시아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부르는 이름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에요. 아마도 이건 아리아인들이 우리 조상인 드라비다인들을 침략해 남쪽으로 몰아낸 역사를 반영하는 걸 겁니다. 결국 키르타르 산맥을 기준으로 어느쪽에 사는가에 따라 직녀성이 선을 돕는지 아니면 악을 지지하는지가 결판나는 셈이죠.” (P274-275)
“애로웨이 박사, 무슨 말인지 정말 몰라요?”
베게이는 목의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그걸 예측하지 못한다니 놀랍군요. 지구는..... 집단 수용소가 되는 겁니다. 인류는 모두 여기 갇혀 사니까요. 우리는 이 집단 수용소 담장 바깥에 커다란 도시들이 있다는 전설 같은 소문을 들어왔어요. 그 도시의 넓고 멋진 길에는 사륜마차들이, 다니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피 코트를 입고 산책하기도 한다지요. 하지만 그 도시는 너무도 멀고 우리는 너무 가난해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가 없어요. 또 그쪽에서도 우리가 가는 걸 바라지도 않죠. 그래서 우리를 그 집단 수용소에 버려둔 거예요.
하지만 이제 초청장이 왔습니다. 시 챠오무 중국 대표의 말처럼요. 환상적인 일이지요. 글자를 새겨 넣은 초청장과 빈 마차가 도착했고 이제 우리 중에서 다섯 명을 뽑아 마차에 태워 보내야 합니다. 물론 가고 싶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초청장에 솔깃해 하는 이들은 늘 있기 마련이죠. 혹은 그것이 이 집단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거기 간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나요? 대공이 우리를 만찬에 초청할까요? 그곳의 지도자가 우리 집단 수용소의 비참한 일상에 대해 질문을 던질까요?
그럴 리 없지요. 애로웨이 박사. 우리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 커다란 도시를 구경하고 그 모습에 그곳 사람들은 포복절도하겠지요. 재미있는 동물로 우리를 전시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더 뒤떨어진 존재일수록 그들은 더 재미있어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몇 세기마다 한번씩 인간은 다섯 명씩 직녀성에 가서 주말을 보냅니다. 시골뜨기들을 불쌍히 여겨서, 또 우월한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초청하는 겁니다.” (P289-290)
[2]
“왜 과학자를 보내야 하는지는 저도 알고 있어요. 메시지는 과학에 대한 내용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씌어 있지요.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직녀성의 생명체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고요. 데어 헤르, 저도 잘 기억하고 있다고요.”
“애로웨이 박사는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불가지론자이지요.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독단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똑똑하고 강인하며 전문가답지요. 광범위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데어 헤르, 이 프로젝트에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아요. 애로웨이 박사 때문에 벌써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모욕감을 느꼈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나요?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들만해도 절반 이상이 우리 일이 형편없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판국이니 전 가능한 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고 싶은 겁니다. 애로웨이 박사는 당신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지만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지는 않아요. 의회에서나 교회, 지구 중심론자, 심지어 국무 위원들까지도 반대하고 있거든요. 캘리포니아에서 애로웨이 박사는 파머 조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빌리 조 랭킨 목사는 더할 수 없이 화가 나버렸어요. 어제 그 사람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서 말하더군요. 기계는 신이나 악마에게로 곧장 날아갈 것이며 어떤 경우라 해도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를 보내는 편이 좋다고요. 아마 파머 조스와 내가 가깝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주장을 밀어붙이려 했던 모양이에요. 분명 자기가 가고 싶었던 거겠죠. 빌리 조 랭킨이나 애로웨이 박사보다는 드럼린 교수 쪽으로 결정하는 편이 원만할 것 같군요.
물론 드럼린 교수가 냉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믿을 만하고 애국적이며 무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과학자로서 명성도 있고 그 자신도 가고 싶어하고요. 그렇게 결정합시다. 그리고 애로웨이 박사는 차선책으로 두는 편이 좋겠어요.”
“그렇게 애로웨이 박사에게 말해도 될까요?”
“드럼린 교수보다 애로웨이 박사한테 먼저 연락이 가면 안 되지요. 최종 결정이 내려지고 드럼린 교수에게 통보가 된 후 알려주도록 하세요....... 자, 기운 내요. 데어 헤르. 애로웨이 박사가 이 지구에서 당신 곁에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지 않나요?” (P52-53)
설계도는 완벽했다. 언어와 기본 기술을 설명한 해독 열쇠와 기계 제작 방식을 담은 메시지, 두 가지 모두에서 명확하지 않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때로는 너무도 명백한 중간 단계들이 지루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되곤 했다. 예를 들어 수학의 기본 계산에서 2x3=6이라면 3x2 역시 6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식이었다. 매 제작 단계마다 확인 절차가 있었다. 정해진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에르븀은 순도 96퍼센트여야 했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부품 31일 완성되어 불산 6몰 용액 속에 넣고 나면 나머지 성분 구조는 제시된 도표와 정확하게 일치해야 했다. 부품 408이 조립되고, 2메가가우스 횡단 자기장을 걸면 회전자는 초기 정지 상태로 되돌아올 때까지 엄청난 초당 회전수를 보였다. 어떤 확인 작업에서든 오류가 발생하면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P67-68)
엘리, 드럼린 선생, 그리고 피터 발레리언은 전세계가 수신하고 있는 직녀성 신호에 관한 정기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장에서는 모두들 바빌론 화재 사건을 화제에 올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가장 밑바닥까지 타락한 구제 불능의 인간들만이 어슬렁거릴 시간에 발생한 화재라고 했다. 모르타르와 소이탄을 휴대한 습격대가 엔릴 대문과 이시타르의 문을 통해 동시에 안으로 몰려든 것이다. 피라미드 형 신전은 훨훨 타올랐다. 신문에는 벌거벗다시피 한 사람들이 아수르 신전에서 황급히 빠져나오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부상자는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습격대의 공격 직전, 지구가 벼락불에 쪼개질 운명이라고 강조하는 신문인 <뉴욕 선>은 공격을 예고하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이것이 부패와 타락에 지쳐버린 사람들이 미국의 위신과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하늘의 지휘를 받아 실행하는 천벌이라고 했따. 바빌론 사의 회장은 성명을 통해 이 습격을 비난하며 범죄적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헤든은 어디 있는지 말 한마디 없었다. (P76-77)
조사관들이 도착했을 때 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별로 말해드릴 게 없어 죄송하군요. 우리 세 사람은 원형 통로를 따라 걷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 모든 것이 공중으로 날아올랐죠. 그게 전부입니다. 도움이 못 되어 유감입니다.”
엘리는 동료들에게도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말한 뒤 자기 아파트에 틀어박혀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두문불출했다. 엘리는 기억을 되살렸다. 원형 통로에 들어서기 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드럼린 선생을 미줄러로 태워주었을 때는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되살려냈던 것이다. (P88-89)
일본에서도 훗카이도라는 장소가 선정된 데는 그 독특성이 한몫을 한 것 같았다. 기후 탓에 일본의 일반적 건축 양식과는 전혀 다른 풍이 발전했고 더군다나 이 섬은 털 많은 원주민 아이누족의 고향이었다. 아이누족은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겨울 날씨는 미네소타나 와이오밍 못지않게 추웠다. 훗카이도는 물자 공급 면에서는 문제가 있었지만 물리적으로 일본 주요 섬들과 격리되어 있어 보안 면으로는 유리하기도 했다. 물론 혼슈와 훗카이도를 연결하는 51킬로미터 길이의 세계 최대 지하 터널이 완공된 지금은 격리라는 말에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다.
훗카이도는 개개 기계 부품을 시험하는 데는 충분히 안전하다고 여겨졌지만 기계 조립 현장으로 변모한 후에는 우려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단지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싼 산들에서 알 수 있듯 화산 활동으로 말미암아 지반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 하나는 하루 1미터씩 솟아오르기도 했다. (P137)
가끔 12면체의 한 끝이 벽을 스쳤고 그러면 벽에서 무언가 긁혀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12면체 자체는 아무 손상을 입는 것 같지 않았다. 얼마 지나자 긁혀 떨어진 미세한 입자들이 구름처럼 12면체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12면체가 벽을 건드릴 때마다 엘리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충격을 완화시켜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흐릿한 노란 불빛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가 했다. 터널은 부드럽게 구부러지기도 했는데 그러면 12면체도 구부러져 나아갔다. 엘리가 볼 수 있는 한 12면체를 향해 달려드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참새 한 마리와 부딪치더라도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 뻔했다. 심연으로 끝없이 떨어지고 만다면? 엘리는 뱃속에서 물리적인 통증을 느꼈다. 정말 그렇다해도 후회는 때늦은 것이었다.
블랙홀이야, 엘리는 생각했다. 그래, 블랙홀. 난 블랙홀 사상(事象)의 <지평면>을 통과해 <공포의 특이점>을 향하고 있는 거야. 아니, 어쩌면 이건 블랙홀이 아닌 <숨은 특이점naked singularity>으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 물리학자들은 그 태초의 무한(無限) 지점을 <숨은 특이점>이라고 불렀어. 특이점 근처로 가면 인과 관계가 뒤집혀 결과가 원인보다 먼저 올 수도 있고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 정말로 특이점으로 가는 것이라면 겪었던 일을 기억하기는커녕 살아남을지도 의심스러웠다. 엘리는 과거에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회전하는 블랙홀 내에서는 점이란 없고 <고리 특이점>이나 훨씬 더 복잡한 것뿐이다. (P160)
엘리는 뒤돌아 12면체가 막 빠져나온 구멍을 관찰했다. 칠흑보다 더 검은 원이 보였다. 직녀성의 고리 체계의 한 부분을 가리고 있는 원이었다. 망원렌즈를 한층 열심히 들여다보자 중심부로부터 희미하고 묘한 빛이 보이는 듯했다. 호킹 방사선일까? 아니야, 그렇다면 훨씬 더 파장이 길어야 했다. 터널 저 건너편 지구에서 오는 빛일까? 저 검은 원의 다른쪽 끝은 훗카이도인 것이다.
행성들. 행성들은 어디에 있을까? 엘리는 다시 망원렌즈를 통해 고리 너머를 살폈다. 숨어 있는 행성, 메시지를 보내온 생명체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고리가 끊어진 부분이 나올 때마다 중력의 영향으로 먼지가 사라져버린 부분을 찾으려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행성을 찾았나요?”
시 챠오무가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가까이에 커다란 혜성이 몇 개 있을 뿐이에요. 그 꼬리가 보여요. 하지만 행성 같은 건 없군요. 혜성은 꼬리가 수천 개는 되는 것 같아요. 아마 입자로 되어 있겠죠. 블랙홀이 항성 고리에 커다란 구멍을 내 놓았어요. 우리는 지금 그 구멍 근처에 있지요. 천천히 직녀성 궤도를 돌면서 말이에요. 수억 년 정도에 불과한 비교적 젊은 별 체계군요. 일부 천문학자들은 여기서 곧 행성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메시지 송신은 어디서 된 것일까요?”
“어쩌면 이건 직녀성이 아닐지도 몰라요.”
베게이가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전파 신호는 직녀성에서 왔지만 우리가 타고 온 터널은 다른 체계와 연결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직녀성과 똑같은 온도로, 저걸 보세요, 푸른색이잖아요. 똑같은 고리 체계를 가진 다른 별이 있다는 가정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요. 사실 저 빛 때문에 별자리를 통해 정확히 직녀성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전 이것이 직녀성일 확률을 90퍼센트로 봐요.”
“도대체 그 생명체들은 어디 있는 걸까요?” (P166-167)
다섯 탑승자 중에서 엘리는 유일한 전파천문학자였다. 물론 세부 전공이 광학 스펙트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엘리는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터널과 4차원 시공간에서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모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일행이 빠져나온 블랙홀은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체계의 궤도상에 있는 듯했다. 또한 여러 개가 함께 존재하면서 그중 두 개는 연속된 궤도를 공유했다. 즉 하나에서 빠져나오면 다음 것 속으로 들어가는 식인 것이다. 지금도 일행은 그 한 쌍의 블랙홀을 경험하는 셈이었다. 눈에 보이는 별 체계들은 서로 전혀 달랐고 태양계와 비슷한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천문학적으로 커다란 시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제2의 12면체 같은 인공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눈에 띄게 밝기가 변화되고 있는 별 근처를 지나는 참이었다. 마침 엘리가 조도를 조절해야 하는 망원렌즈를 들여다보고 있던 참이라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RR 라이래 별들 중 하나 같았다. 그 다음에는 5성 체계, 그리고 희미하게 빛나는 갈색 왜성이 나왔다. 어떤 것은 활짝 열린 우주 공간에 놓였고, 다른 어떤 것은 성운 속에서 타오르는 분자 구름에 묻혀 있었다. (P174)
그들은 다시 돌아온 것이 기뻤다. 몹시 흥분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자 위에 올라서기도 하고 서로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모두들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임무를 완수했을 뿐 아니라 무사히 모든 터널을 통과하여 되돌아온 것이다. 갑자기 공전 상태에 있던 전파가 기계 상태를 알리기 시작했다. 벤젤 세 개도 감속되었다. 대전 상태가 약해졌다. 지구에 남아 있던 프로젝트 팀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궁금했다. 자기 시계를 보니 최소한 하루는 지난 듯했다. 그러면 2000년이 되었으리라.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 걸 묻기 전에 우선 우리가 겪은 일을 이야기해야 해. 엘리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소형 비디오카세트 수십 개가 들어 있는 가방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 필름이 공개되고 나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바뀌게 될까? (P225)
장관은 과장된 몸짓과 현란한 용어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설명과 해석을 만들어내는 데 그는 온 정열을 쏟았다. 잠시 후 엘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다섯 탑승자가 돌아왔다.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만 가진 채 말이다. 그 이야기에는 중요한 함축점이 담겨 있었다. 우주의 생명체들이 은하계를 건설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키츠 장관은 지구의 파괴적인 힘을 상징했다. 그는 핵 대립 전략을 만들어낸 미소 정상들의 뒤를 잇는 후계자였고 반면 우주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온 다양한 종들이 함께 조화를 이뤄 일하는 조직이었다. 그러한 외계인의 존재란 그 자체가 무언의 비난이었다. 터널이 반대쪽에서부터 작동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계인들은 순식간에 지구에 도착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키츠 장관은 어떻게 미국을 지켜낼 수 있을까? 기계 제작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키츠 장관은 열광적으로 기계 제작을 주장했고 결국 그런 행동은 직무 태만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터널에서 선악을 가리는 천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 여행의 진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이었다. 아니,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변할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엘리는 키츠 장관을 동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소한 백여 세대 이상 세상은 장관보다도 더 못한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규칙이 다시 쓰여지려는 이때 등장했다는 것은 그의 불운이었다.
“만약 당신 이야기를 모두 믿는다고 해도......”
키츠 장관이 말을 이었다. (P244-245)
새로운 시대의 여명기에 우주 장례란 값비싼 유행이었다. 이미 상업화되어 경쟁력 있는 사업으로 부상한 우주 장례는 과거라면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처음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곳에 유해를 뿌리고 싶어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이제 동네 수준을 뛰어넘어 지구 주위를 영원히 돌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언장에 한 줄 써놓기만 하면 족했다. 그러면 죽은 뒤 화장되어 장난감 같은 상자에 재가 담긴다. 상자 위에는 이름과 출생일, 사망일, 간단한 비문, 그리고 원한다면 종교적 상징을 그려 넣을 수 있다. 그러고는 수백 개의 다른 상자들과 함께 우주로 끌어올려져 혼잡한 정지궤도 층이나 불안정한 저궤도를 피해 배치된다. 그리하여 밴앨런 방사능대 한 중간에서 자신이 태어난 행성 주위를 신나게 돌게 되는 것이다. 이 방사능대의 양자 폭풍 속으로 진입하려는 정신 나간 인공위성은 하나도 없을 테지만 재라면 아무 문제 없지 않은가. (P253)
엘리는 터널이 웜홀이며 여러 은하의 무수한 별들 주위로 적절한 간격을 두고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에다의 가정에 대해 생각했다. 웜홀은 모양은 블랙홀과 비슷했지만 특성이나 기원은 달랐다. 웜홀은 질량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는 웜홀이 직녀성 궤도를 돌고 있는 입자에 중력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웜홀을 통해 다양한 생명체와 우주선들이 은하계를 가로지르거나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웜홀이라. 이론물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주는 사과였다. 그리고 누군가 사과 안에 터널을 뚫어 그 통로들이 중심에서 통하도록 해 놓은 셈이었다. 표면에 사는 세균이 볼 때 그것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사과 바깥쪽에서 사는 존재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존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터널 건설자들은 그저 성가신 존재에 불과하겠지. 만약 터널 건설자들이 사과에 구멍을 뚫는 벌레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 (P299)
숫자들이 서로 바뀌는 유형 속, 초월수 그 깊숙한 곳에는 완전한 원이 있었다. 0들 속에 1로 표시되는 형태의 원이었다.
우주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그 원은 말하고 있었다. 어떤 은하에 살고 있는 원의 둘레를 지름으로 나누어 충분히 계산하고 나면 소수점 몇 킬로미터 아래쪽에서 또다른 원을 발견하는 기적을 만나는 것이다. 더 계속하면 더 풍부한 메시지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걸 발견하는 생명체의 외모나 특성, 출신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우주에 살아있는 한, 그리고 수학에 평균적인 재능만 가지고 있는 한 조만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이미 여기 있었다.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하기 위해 자기가 사는 행성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 우주의 구조 속에, 물질의 본성 속에 마치 위대한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조그마하게 예술가의 서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류와 신, 악마, 터널을 관리하는 존재와 건설한 사람들을 넘어 우주를 앞서는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원이 완성되었다. 엘리는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하였다. (P304-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