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플리 언더 그라운드> 2005년
리플리 시리즈 역시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태양은 가득히〉(1960), 〈리플리〉(1999) 이외에도 여러 차례 영화화되며 화제를 모았다. 『지하의 리플리』는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 배리 패퍼 주연의 〈리플리 언더 그라운드〉(2005)로, 『리플리의 게임』은 빔 벤더스 감독, 데니스 호퍼 주연의 〈미국인 친구〉(1977),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 존 말코비치 주연의 〈리플리스 게임〉(2005)으로 영화화되었다.
아네트 여사가 높다란 목소리로 불렀다. “런던에서 전화 왔어요!”
“갑니다.” 톰은 모종삽을 툭 던져 놓고 계단을 올랐다.
아래층 전화기는 거실에 있었다. 청바지 차림이라 노란 새틴 소파에 앉지 않았다.
“여보세요, 톰? 제프 콘스턴트입니다. 혹시.....” 지지직.
“더 크게 말해 봐요. 연결 상태가 나빠서요.”
“이제 좀 들립니까? 난 잘 들리는데.”
런던에 사는 사람은 매번 잘 들리나, 톰은 생각했다. “좀 낫네요.”
“내가 보낸 편지는 받았습니까?”
“아뇨.”
“이런, 문제가 생겼어요. 조심하라고 연락드린 겁니다. 일전에.....”
타다닥, 웅웅, 감이 멀어지더니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뭐야.” 톰은 가볍게 탄식했다. 조심하라고? 갤러리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더와트 법인 문제인가? 조심하라니? 톰은 회사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더와트 유한 책임 회사를 세우라고 한 장본인이라서 법인 수익금의 일부를 받는 것뿐이었다. 톰은 전화기를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벨이 다시 울리기를 바랐다. 제프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아니, 제프가 스튜디오에 있는지, 갤러리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프 콘스턴트는 사진작가였다. (P11)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눈앞에 선했다. 머치슨이 자신이 구매한 더와트의 작품을 들고 나와 미술상들에게 폭로한 다음 신문에 제보할 것이다. 그랬다간 의혹이 제기돼 더와트가 공중분해 될 것이다. 패거리가 톰가지 끌어들이려나? (톰은 더와트의 친구들이자 갤러리 관계자들을 ‘패거리’라 여겼다. 패거리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치가 떨렸다.) 버나드가 앙심을 품어서라기보다, 성인군자에 가까운 병적인 청렴결백을 실천하고자 톰 리플리의 이름까지 언급할지 모른다.
톰은 자신의 이름과 평판을 흠결 없이 지켜 왔다. 그동안 저지른 짓에 비하면 감탄할 정도로 깨끗하게 유지한 것이다. 플리송 제약 회사 사장이자 백만장자인 자크 플리송의 딸 엘로이즈 플리송과 결혼해 프랑스의 빌페르스쉬르센에 사는 톰 리플 리가 더와트 유한 책임 회사라는 사기극을 기획해 수년간 수익금을 일부 챙겨 왔다는 사실이 프랑스 신문에 실리기라도 하는 날엔 망신살이 뻗칠 것이다. (P13)
내가 더와트인 척하면 되지 않을까, 맞다, 이거지! 해결책을 찾았다. 완벽하고도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더와트는 톰하고 비슷한 나이였다. 톰은 지금 서른하나. 더와트는 살아 있었더라면 서른다섯 정도 됐을 것이다. 더와트는 눈동자가 청회색이었다고 했는데, 신시아(버나드의 여자 친구)였나 버나드였나, 둘 중 한 사람이 불멸의 더와트의 생김새를 쏟아 내듯 설명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턱수염을 짧게 길렀다고 하니, 톰에게는 썩 도움이 될 것이다.
제프 콘스턴트라면 분명 톰의 아이디어를 반길 것이다. 기자 회견도 해야 할 텐데,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과 늘어놓을 사연을 준비해야 한다. 더와트가 나하고 키는 비슷했을까? 흠, 기자들 중에 그걸 외우고 다닐 사람이 과연 있을까? 머리카락 색은 더와트가 더 진했겠지만 염색하면 그만이었다. 톰은 차를 조금 더 홀짝인 다음 계속 거실을 서성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만큼은 놀랄 만큼 똑같이 꾸며야 한다. 제프와 에드뿐 아니라, 버나드가 봐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닮아야 한다. 실패할 경우, 기자 회견은 패거리가 해야 할 것이다.
톰은 토머스 머치슨과 대면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침착하고 자신감 넘치게, 이게 가장 중요하다. 더와트가 자기가 그린 자기 그림이 맞는다고 하는데, 대체 머치슨이 뭐라고 더와트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우기겠는가? (P17-18)
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더와트가 실은 자살한 게 아니라 살아 있다고 하면 어떨까요? 모처에 잠적해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런던으로 그림을 부친다고 하면요? 버나드가 계속 그린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입니다.”
“음...... 아, 그런 방법도 있겠네요. 그럼 그리스에 산다고 할까요? 이거 꽤 괜찮은 생각인데요, 톰! 그럼 영원히 계속할 수 있겠어요!”
“멕시코에 산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리스보다야 멕시코가 안전할 것 같은데요. 더와트가 멕시코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데, 마을 이름은 아무한테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죠. 당신과 에드와 신시아만 알고 있다고요.”
“신시아는 빼야 해요. 버나드하고 헤어진 이후론 얼굴을 볼 수가 없거든요. 신시아가 이 일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게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에요.”
제프가 그날 밤 에드에게 전화해 톰의 제안을 알렸다.
“그냥 생각만 해 본 겁니다. 실제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톰이 말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다. 더와트가 멕시코에 살면서 그림을 보낸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에드 밴버리와 제프 콘스턴트는 자살했다고 알려졌던 더와트가 ‘부활’했다는 드라마 같은 사연을 더 많은 잡지에 뿌리면서도 멕시코에 사는 더와트의 사진은 공개하지 않았다. 더와트가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림은 멕시코 중동부 베라크루스라는 항구 도시를 거쳐서 오는데, 제프나 에드조차 더와트가 사는 마을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더와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은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세상에 비쳤다. 일부 비평가들은 더와트는 작품마저 병적이고 우울하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그때부터 더와트는 영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 몸값이 가장 비싼 동시대 화가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P22-23)
“어떤 화가가 자신의 화풍으로 그릴 때보다 남의 화풍으로 그리는 경우가 잦아지다 보면, 자신의 화풍보다 모방한 화풍에 점차 익숙해지고 편안해져서 아예 몸에 배어 버리다 못해 독창적인 창작물로 승화시키지 않을까? 마침내 굳이 따라 그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위작 화가가 그린 가품이 또 다른 진품의 반열에 오르는 건 아닐까?”(P24)
두 사람이 악수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톰이 인사했다.
“이쪽은 에드먼드 밴버리, 이쪽은 머치슨 씨입니다.” 제프가 양쪽을 소개했다.
에드와 머치슨 씨가 인사를 나누었다.
“제가 <시계>라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지금 갖고 왔습니다.” 이제 머치슨 씨가 활짝 웃더니 경이로운 눈빛으로 톰을 우러러보았다. 톰은 머치슨이 실제로 더와트를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기를 바랐다.
“아, 그러세요.”
제프가 조용히 문을 다시 잠갔다. “좀 앉으시죠, 머치슨 씨.”
“네, 고맙습니다.” 머치슨이 의자에 앉았다.
제프가 책장이며 책상 모서리에 두고 간 빈 잔들을 묵묵히 치우기 시작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더와트 씨, 저는 당신이 <시계>에서 보여 준 화법이 확실히 다르다는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그림을 설명하는 건지 당연히 아시죠?”
그냥 묻는 건지, 구체적으로 묻는 건지 톰은 궁금했다. “당연히 알죠.”
“그럼 그 작품에 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톰은 계속 서 있었다. 한기가 온몸을 뒤덮었는데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전 제 작품을 제 입으로 설명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시계>에 시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머치슨 씨, 제가 제 그림에 직접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건 아셨나요? 누가 특정 그림에 <일요일 정오>라는 작품명을 붙였다면, 그건 제 손을 떠난 일입니다.” (톰은 갤러리에 전시중인 더와트의 작품 스물여덟 점이 실린 도록을 훑어봤었다. 제프였는지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정성스레 책상 매트 위에 펼쳐 놓은 도록이었다.) “제프, 네가 붙였어?”
제프가 웃었다. “아니, 에드가 붙인 것 같은데, 한잔하시겠어요. 머치슨 씨? 제가 바에서 만들어 드리죠.” (P39)
“그렇습니까? 그 모종의 이유란 게 뭡니까?”
머치슨은 더와트의 작품이 위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댔다. 톰은 정신을 집중해서 들었다. 더와트가 5년 전부터 지금까지 군청색과 카드뮴 적색을 조색하여 사용하는데(더와트가 사망하기 전이니, 그렇다면 시작은 버나드가 아니라 더와트였다), <시계>와 <욕조>에서만 초기작에서 보이는 코발트 바이올렛을 원색 그대로 쓰는 기법으로 회귀했다는 게 문제였다. 머치슨은 자기도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 나와 있는 화가와 그림과 관련된 서적들을 섭렵했습니다. 단색인지 조색한 건지 구별하는 일은 전문가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말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쓰지 않기로 한 색상을 다시 쓰는 화가는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화가가 새로운 색상을 선택할 때, 보통 무의식적으로 결정하게 되거든요. 더와트가 작품마다 라벤더 색을 쓰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가 소장한 <시계>와 당신이 관심을 보이는 <욕조>를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더와트의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거 대단히 흥미로운 주장인데요? 저희 집에 있는 <의자에 앉은 남자>도 주장하시는 바와 하필 딱 들어맞는 것 같은데요. <시계>는 어쩌실 셈입니까?”
머치슨이 체스터필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직 제 얘기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좀 전에 버나드 터프츠라는 영국인과 술을 마셨는데요. 그 남자도 화가라는데 저처럼 더와트를 의심하는 것 같더라고요.”
톰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정말입니까? 누군가 더와트 대신 그림을 그리는 거라면 그야말로 큰일인데요. 그 남자 뭐라던가요?” (P50-51)
톰은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고 싶지 않았기에 그 주제에 관련된 대화만 고수했다. 판 메이헤런 얘기를 꺼냈다. 머치슨도 익히 아는 화가였다. 판 메이헤런이 그린 얀 페르메이르의 위작은 마침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판 메이헤런은 자신을 옹호하는 동시에 허세를 떠느라 위작을 그렸음을 처음 고백했겠지만, 심미적 측면에서 봤을 때 그가 새롭게 창조한 얀 페르메이르를 구입한 이들에게 희열을 선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진실을 완전히 외면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군요.” 머치슨이 지적했다. “화가의 화풍에는 그 사람의 진심과 진솔함이 담겨야 합니다. 남의 서명을 위조하듯 따라 그릴 권리가 타인에게 있을까요? 명성을 위해, 은행 잔고 때문에 위작을 그리는 게 그런 목표를 위한 겁니까?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으로 이미 쌓아 올린 명성이잖습니까?” (P69)
“버나드는 처음 가담할 때부터 부끄러운 짓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요!” 머치슨이 톰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더와트로 변장한 게 당신이었습니까? 그래, 더와트의 손이 이랬었지.” 머치슨이 씁쓸하게 웃었다. “남들은 내가 사소한 걸 눈치채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니까!”
“눈썰미가 무척 좋군요.” 톰은 다급히 말하다가 별안간 욱하고 화가 치밀었다.
“세상에, 어제 내가 이 말을 했었던 것도 같군요. 어제 이 생각을 했었어요. 당신 손을 보면서 손에다가는 분장하지 못한다는 생각을요.”
톰이 애원했다. “제발 들쑤시지 마시죠. 갤러리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습니까? 버나드가 그림은 곧잘 그린다는 걸 당신도 부인할 순 없잖아요!”
“이 일을 끝까지 함구한다면 난 천벌을 받을 겁니다. 안 됩니다. 당신이든 누구든 내가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머치슨의 얼굴이 붉으라푸르락해지고 턱살이 출렁거렸다. 머치슨이 바닥에 와인 병을 쾅 내려놓았다. 병이 깨지지는 않았다.
머치슨이 와인을 거절하는 순간, 톰의 가슴 속에서 모멸감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당장은 아주 살짝만 들던 모멸감에 짜증이 더해지자 폭발하고 말았다. 톰은 와인 병을 집어 들고 머치슨의 옆통수를 그대로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병이 깨지면서 와인이 사방으로 튀어다. 병 밑바닥이 빠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치슨이 휘청거리더니 선반에 부딪혔다. 선반 전체가 흔들렸으나 와인 병은 넘어지지 않았다. 넘어진 건 머치슨뿐. 머치슨이 풀썩 주저앉으면서 와인 병 주둥이에 부딪혔지만 와인이 쓰러지지는 않았다. 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쥐고 보니 텅 빈 석탄 통이었다-- 머치슨의 머리통을 내리친 다음 한 번 더 휘둘렀다. 석탄 통 밑바닥이 묵직했다. 머치슨이 피를 흘리며 모로 쓰러졌다. 온몸이 돌바닥 위에서 뒤틀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혈흔은 어쩐다? (P72-73)
톰이 머치슨을 죽인 까닭은, 더와트 유한 책임 회사를 지키는 동시에 버나드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치슨이 지하실에서 더와트로 변장한 사람이 톰이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톰은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머치슨을 죽인 것이다. 톰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같이 지하실로 내려갈 때 머치슨을 죽일 마음이 있었나? 머치슨을 죽일 의도는 없었나? 톰은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버나드는 벅마스터 갤러리 3인조 패거리 중 일원으로 톰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인물인데도, 톰은 버나드가 제일 좋았다. 에드와 제프는 동기가 너무 뻔했다. 그들의 동기란 돈을 벌자는 것, 신시아가 버나드를 찬 걸까. 톰은 궁금했다. 더와트를 흉내 내 그림을 그린다는 게 민망한 나머지 (한때는 신시아를 사랑한 건 분명했지만) 버나드가 신시아에게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버나드가 풀어놓는 버나드만의 버전을 듣는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버나드에겐 뭔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런 신비로움에 이끌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리라. 방수포에 싸인 추한 살덩어리를 집 뒤편에 있는 숲속에 두고 왔는데도, 톰은 자기 생각에 취해 저 멀리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버나드의 욕망, 공포, 수치심, 사랑을 몽상하다 보니 기분이 묘하다 못해 날아갈 것처럼 상쾌해졌다. 버나드는 원조 더와트처럼 성인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P90)
이 밤에 혼자 시체를 파내서 스테이션왜건에 싣고 가서 다시 묻는다는 건 녹록지 않았다. 어디에 묻지? 작은 다리에서 떨어뜨리자. 버나드에게 도와 달라고 해야겠다. 버나드가 폭발할까. 아니면 현실에 부딪혀 도와주겠다고 할까? 버나드에게 자백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시체가 있다는 말에 버나드가 충격을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지 누가 아나?
난감한 문제였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버나드가 ‘믿음의 도약’을 취할 것인가? 그 말이 떠오르자 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런던으로 달려가 더와트로 변장할 때, 톰은 믿음의 도약을 취했었다. 그리고 그 도약은 성공을 거두었다. 머치슨을 죽일 때도 믿음의 도약을 취했었다. 될 대로 되라지, 모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니.
톰은 계단을 올랐다. 발목이 시큰거려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첫 번째 계단을 아픈 발로 디디려면 한쪽 손을 금빛 천사 모양을 한 엄지 기둥 위에 올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버나드가 망설인다면 버나드마저 해치워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죽여야 한다.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버나드는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이진 못할 것이다. 만일 버나드가 돕지 않겠다면서 머치슨이 죽었다는 사실까지 까발리기라도 한다면.....
톰은 계단을 올라갔다. (P121)
버나드가 두툼하고 누런 공책을 들고 내려왔다. 너덜너덜한 공책을 뒤적이며 뭔가를 찾으면서 거실을 서성였다. “더와트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여기에 제가 필사해 둔 더와트의 일기가 있습니다. 더와트가 그리스를 떠나면서 런던에 두고 간 짐 가방 속에 있던 건데, 제가 잠시 빌렸거든요. 일기는 그림이라든가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 등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서두가...... 아, 찾았다. 7년 전에 쓴 일기입니다. 이게 진짜 더와트의 모습이라고요. 읽어 드릴까요?”
“네, 그러시죠.” 웹스터가 말했다.
버나드가 더와트의 일기를 읽었다. “‘예술가에게 있어 우울이란 ‘자아’로 회기하느라 생기는 우울감 말고는 있을 수가 없다.’ 더와트는 자아에 따옴표를 붙여서 강조했어요. ‘자아’란 소심하면서도 과시욕이 넘치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의식의 확대경이라서, 그걸 들이대고 봐서는 절대로 안 된다. 진정한 두려움이 닥쳤을 때, 그림을 그리는 사이사이에, 휴식을 취하는 도중에 자아를 슬쩍 들여다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 모습을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버나드가 씩 웃었다. “그런 우울감에는 비참함은 물론이거니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라는 쓸데없는 의심이 담겨 있다. 게다가 ‘내가 얼마나 형편없이 부족한 존재인가!’ 라는 한탄까지 포함된다. 그뿐만 아니라, ‘벌써 몇 년 전에 일찌감치 알아채고 그만두었어야 했다’라는 더더욱 처참한 자각에까지 이르게 되면, 손만 내밀면 나를 사랑해 줄 이들에게조차 기댈수 없게 된다. 일이 잘 풀릴 때에는 그들이 필요 없다. 지금 이렇게 나약해진 내 모습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 태워 버렸어야 할 목발처럼, 먼 훗날 그것이 내 가슴에 날아와 꽂힐 것이다. 오늘 밤, 어두운 밤의 기억은 오로지 내 안에서만 살게 하라.‘ 다음 문단으로 이어집니다.” 버나드가 경건하게 말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터놓으면서도 훗날이 일이 비수가 되어 꽂힐 거라고는 겁내지 않는 이들이 최고의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걸까? 친절과 용서는 대체 이 세상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옆에 앉아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 순진하고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들, 그들의 얼굴에서 친절과 용서를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친구들은 어떠한가? 죽음이라는 적과 드잡이하는 순간, 자살을 염두에 두는 순간 나는 그들을 찾는다. 혹은 통화가 돼도 오늘 밤에는 바쁘단다. 꼭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단다. 자존심이 너무 센 누군가는 무너져 내리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 ’오늘 밤엔 꼭 보고 싶어. 지금 못 보면 대체 언제 보는데!‘ 내가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썼을 때 그랬다. 너무나 애처롭지만 얼마나 인간적이고 당당한 모습이었던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성스러운 게 있을까? 서로 교감하는 행위속에 신비로운 힘이 담겨 있다는 걸 자살은 알고 있다.” 버나드가 공책을 덮었다. “물론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더와트가 꽤 젊었죠. 서른도 안됐을 때였으니까요.”
“참으로 뭉클하네요.” 형사가 말했다. “언제 쓴 글이라고 하셨나요?”
“7년 전 11월입니다. 더와트가 10월에 런던에서 자살 시도를 한 후 회복하면서 쓴 겁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수면제를 먹었거든요.” (P139-140)
“지하실에 가서 샴페인 가져올게!" 엘로이즈가 외쳤다.
“내가 가져올게.” 톰이 슬리퍼를 신으며 다급히 말렸다.
“입에 밴 맛을 없애야겠어. 샴페인 생각도 나고, 다들 베르틀랭 부부가 꽤 쪼들리며 사는 줄 알겠어. 마시라고 내온 술 좀 봐. 흔해 빠진 포도주가 뭐야!” 엘로이즈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톰이 아내를 가로막았다.
“내가 내려간다니까! 당신은 얼음이나 가져와.” 엘로이즈가 말했다.
아무튼 톰은 엘로이즈가 지하 와인 저장소로 내려가는 게 싫었다. 톰이 주방으로 내려가 얼음 틀을 빼는데 비명이 들렸다. 멀어서 또렷하진 않았지만 엘로이즈의 비명이었다. 끔찍했다. 현관 복도를 뛰어갔다.
비명이 또다시 들렸다. 예비용 화장실에서 엘로이즈와 맞닥뜨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지하실에서 목매달았어!”
“세상에!” 톰은 엘로이즈를 살짝 부축해서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내려가지 마, 여보! 끔찍해!”
보나 마나 버나드겠지. 톰이 엘로이즈를 부축해 계단을 올라오는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엘로이즈는 프랑스어로, 톰은 영어로 말했다.
“약속해. 내려가지 않겠다고! 경찰에 신고해, 톰!”
“알았어. 신고할게.”
“누구지?”
“나도 모르지.” (P155)
톰은 7시가 되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엘로이즈가 곤히 자고 있어서 살짝 침대에서 빠져나와 아내의 침실에 걸어 둔 가운을 걸쳤다.
아네트 여사가 일어났으려나.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여사가 보기 전에 지하실에 있는 버나드의 양복을 치우고 싶었다. 이제 보니 와인 얼룩과 머치슨의 혈흔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수사 팀이 나선다면 당연히 혈흔을 찾겠지만, 톰은 그런 일은 없으리라 낙관했다.
재킷 단추에 걸린 바지를 끄르는데, 흰 종이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버나드가 길고 삐죽한 필체로 남긴 메모였다.
당신 집에서 옷으로 육신을 만들어 내 목을 매단다. 내가 매단 건 더와트가 아니라 버나드 터프츠. 내가 참회할 유일한 길은 지난 5년간의 나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그래야 여생 동안 내 작품을 정직하게 그리는 데에 매진할 수 있으리.
버나드 터프츠
톰은 메모를 구겨서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접어서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이 메모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버나드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누가 알까. 버나드의 꾀죄죄한 정장에 묻은 먼지를 턴 다음 걸레를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세탁소에 옷을 맡겨야겠다. 나쁠 건 없다. 정장을 들고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아네트 여사가 세탁소에 가져가도록 복도 탁자 위에 두기로 했다. (P157)
톰은 버나드의 생각을 다시 정상 궤도로 돌려놓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웹스터가 할 일은 머치슨을 찾는 것이지, 더와트를 찾는 게 아닙니다. 난 올라갑니다.”
톰은 방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창문을 위에만 살짝 열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아네트 여사가 오늘 저녁에는 잠자기 좋게 이불을 젖혀 놓지 않았다. 톰은 온몸이 떨려 방문을 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바보같은 짓일까? 현명한 처사일까? 비겁해 보이겠지. 그래서 톰은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읽다 만 트리벨리언의 <영국 사회학사>를 집어 들었다가 불어 사전에서 ‘포르주(forge)'란 단어를 찾았다. 영어로 ’위조하다‘라는 뜻이었다. 고대 불어로는 ’대장간‘을, ’파베르(faber)'는 ‘대장장이’를 의미했다. 불어로는 쇠를 다루는 작업에만 국한된 의미로 쓰였다. 불어로 ‘위조’는 ‘팔시피카시옹(falcification)'이나 ’콩트르페르(contrefaire)'였다. 톰이 이미 아는 단어였다. 사전을 덮었다.
뜬눈으로 한 시간째 누워만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피가 도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놀랄 지경이었다. 높은 데에서 추락하는 기분이 멈추지 않았다.
손목시계의 라듐 바늘이 12시 반을 가리켰다. 엘로이즈에게 전화해야 하나? 전화하고 싶었지만 야심한 시각에 전화해 장인어른의 미움을 더 사고 싶지는 않았다. 망할, 처가 식구들이란!
누가 뒤에서 덮치더니 목을 졸랐다. 톰은 두 발로 이불을 차려고 발버둥 쳤다. 목을 조르는 버나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잡아 당겼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두 발을 버나드의 몸통에 대고 밀었다. 목에서 버나드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버나드가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지더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톰은 램프를 켜려다가 쓰러뜨릴 뻔했다. 대신 물잔이 쓰러지면서 파란 동양풍 러그 위로 물이 쏟아졌다.
버나드가 고통스레 헥헥거리고 있었다. (P169)
“맞아요. 일단 머치슨을 숲속에 묻어 놨는데 경찰 조사가 시작됐어요. 그래서 경찰이 숲을 뒤지기 전에 머치슨을 숲에서 파내야 했어요.” 톰은 대충 내다 버리는 동작을 했다. 버나드가 거들었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제일이었다. 버나드가 원한다고 해도 --버나드가 원하는 게 뭘까? 오명을 씻는 일?-- 되도록 얽히지 않는 편이 버나드에게 더 나았다.
“세상에, 맙소사. 머치슨 부인을 만날 수 있겠어요?” 에드가 물었다.
“쉿.” 제프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재빨리 말을 막았다.
“그럼요. 내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머치슨이 날 알아봤다고요. 지하실에 내려갔는데, 런던에서 더와트인 척한 사람이 나라는 걸 머치슨이 눈치챘거든요. 내가 머치슨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탄로 났을 겁니다. 알잖아요?” 톰은 졸음을 쫓으려고 서성였다.
둘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더니 감격했다. 동시에 둘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톰 리플 리가 전에도 사람을 죽였었지. 디키 그린리프였나? 프레디라는 남자도 죽인 것 같던데. 심증만 있었는데 설마 사실은 아니겠지? 톰이 이번에도 살인에 진지하게 임했으니 더와트 유한 책임 회사에서 감사의 표시를 얼마나 해 주기를 기대할까?’ 감사니, 진심이니, 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엔 다 같은 말 아닌가? 톰은 그걸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바라지 않을 정도로 이상향을 꿈꾸고 있었다. 톰은 제프 콘스턴트와 에드 밴버리가 더 넓은 도량을 갖기를 바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거장 더와트의 친구,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였다. 더와트가 얼마나 위대한가? 톰은 이 질문은 피했다. 그럼 버나드는 얼마나 위대한가? 솔직히 말해 화가로서는 대단했다(우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프와 에드는 버나드를 수년간 외면해 왔다). 톰은 버나드를 대신해 몸을 더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여러분, 브리핑은 내일 합시다. 누가 더 오나요? 너무 피곤해서 당장 자야겠어요.”
에드가 톰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머치슨 일로 불리한 증거가 있나요, 톰?”
“없어요.” 톰이 씩 웃었다. “사실 말고는 없어요.” (P199-200)
“웹스터 형사님께 듣자 하니, 이탈리아에서 살해당한 디키 그린리프 씨와 친구 사이셨다면서요.”
“친구 사이는 맞는데, 디키는 살해당한 게 아니라 자살한 겁니다. 5개월 정도 알고 지냈습니다. 6개월이었나.”
“자살한 게 아니라면...... 웹스터 형사님께서는 자살은 아닐 거라고 의심하시는 것 같던데요. 자살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죽였을까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두 다리를 단단히 디딘 채 차를 음미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나요. 디키는 자살했는걸요. 다른 길이 없었을 겁니다. 화가로서도 앞이 안 보였고, 그렇다고 부친의 사업을 이어 받자니 그쪽으로는 아예 생각이 없었거든요. 조선업, 다시 말해 보트를 제작하는 회사였으니까요. 디키는 주변에 친구가 많았어요. 그래도 나쁜 친구는 없었죠.” 톰이 말을 끊자 다들 동작을 멈추었다. “디키가 적을 만들 이유가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 남편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더와트의 위작이 어디선가 계속 그려지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여기 사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일당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부인이 엘로이즈를 쳐다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시죠, 리플리 부인?” (P221)
왼쪽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가 이내 그쳤다. 톰은 숲으로 몇 걸음을 더 들어가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버나드!” 톰이 거칠게 고함쳤다. 버나드한테도 분명 들렸을 것이다.
완벽한 정적에 휩싸인 듯했다. 버나드가 망설이는 걸까?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니, 환청이었나?
톰은 숲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20미터 남짓 들어가자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이 펼쳐지면서 그 너머로 연회색 바위 절벽이 보였다. 높이가 족히 10미터는 되어 보였다. 바위 절벽 위에 버나드의 더플백이 보였다. 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했다. 가까이 다가가며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톰은 절벽 끝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험하지는 않았다. 버나드가 돌무더기 비탈을 걷거나 고꾸라진 다음에야 절벽에서 뛰어내리든 굴러떨어지든 했을 것이다.
“버나드?”
톰은 왼쪽으로 이동했다. 그쪽이 내려다보기에 더 안전했다. 작은 나무를 부여잡은 채 혹시나 미끄러져서 뭐라도 잡아야 할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붙들 나무를 하나 더 봐 두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축 늘어진 회색 물체가 저 아래 돌무더기 위에 보였다. 한쪽 팔을 쭉 뻗고 있었다. 마치 4층 높이에서 떨어져 돌무더기 속으로 처박힌 물체처럼 보였다. 버나드는 미동조차 없었다. 톰은 안전지대로 돌아왔다.
톰이 더플백을 집어 들자, 측은할 정도로 가벼웠다.
몇 분을 흘려보낸 후에야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톰의 손에는 여전히 더플백이 들려 있었다.
버나드를 찾을 사람이 있을까? 강에서 누가 버나드를 본 건 아니겠지? 강 위에 사람이 있을 리가? 등산하던 사람이 지나가다가 우연이라도 버나드를 발견할 것 같진 않았다. 당장은 그럴 리 없어 보였다. 톰은 아래로 내려가 버나드를 가까이 살펴보는 일은 감당할 수 없었다. 톰은 버나드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기이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P239-240)
게다가 버나드가 자살한 건, 톰이 버나드를 죽음으로 몰로 간 사람이 자기라고 믿는 것과는 별로 상관없었다. 아니, 아예 무관했다. 버나드는 숲에서 톰을 가격하기 며칠 전에 톰의 집 지하실에 허수아비를 매닮으로써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가?
톰은 이내 두 가지를 깨달았다. 버나드의 시신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생각이 그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 버나드의 시체를 더와트의 시체라고 우길 경우, 버나드 터프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겠지만, 그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전화가 울리자 톰은 다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제프의 음성이 들렸다.
“나예요, 톰. 여기 잘츠부르크예요. 내 목소리 들립니까?”
통화 연결 상태는 아주 좋았다.
“버나드가...... 죽었어요. 절벽에서 몸을 던졌어요. 뛰어내렸다고요.” (P241)
“여보, 나는 잘츠부르크에서 더와트도 죽었다는 말까지 해야 해. 그래서 말인데, 혹시 누가 물으면, 더와트가 런던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해 나를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고 당신이 똑 말해야 해. 내가 잘츠부르크로 갔다고 더와트에게 전해 준 사람이 당신이야. 알았지? 기억할 수 있지? 그게 사실이니까.”
엘로이즈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다가 살짝 짓궂게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데?”
아내의 목소리에서 묘하게 철학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사실 그건 철학자들이나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걸 왜 톰과 엘로이즈가 고민해야 하나? “2층으로 올라가자. 내가 잘츠부르크에 갔다 왔다는 걸 보여 주겠어.” 톰이 엘로이즈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톰의 침실로 가서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구경했다. 엘로이즈가 녹색 조끼를 걸치고 파란 재킷을 품에 안았다. 입어 보니 재킷이 몸에 꼭 맞았다.
“가방도 새로 샀네!” 엘로이즈가 옷장에 넣어 둔 갈색 돼지가죽 가방을 보며 말했다.
“흔해 빠진 가방인데, 뭐.” 톰은 불어로 말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톰은 엘로이즈를 가방에서 떼어 놓았다. 제프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교환원의 말에, 톰은 몇 번이든 연결이 될 때까지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톰이 샤워하는 동안 엘로이즈가 말을 걸었다. “버나드가 죽었다고?” (P253-254)
“잘츠부르크에 갔다가 언제 올 거야?”
“일요일이면 오겠지. 그런 일이 하루 이상 걸릴 리가 없잖아. 내일 갔다가 일요일에 올 거야. 경찰이 원하는 건 숲속 그 현장을 알려 달라는 것뿐이거든. 버나드가 묵었던 여관하고.”
“정말 잘됐어.” 엘로이즈가 중얼거리며 베개에 기댔다. “그럼 애들은 월요일에 오는 거지?”
“다시 전화한다고 했으니, 월요일 저녁에 오라고 할게.” 톰은 침대에 다시 누웠다. 엘로이즈가 크리스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와 크리스의 친구 같은 청년들이라면 잠시나마 엘로이즈를 즐겁게 해 줄 것이다. 톰은 청년들이 온다는 약속이 잡혀서 기분이 좋았다. 텔레비전에서 옛날 프랑스 영화가 나왔다. 루이 주베가 바티칸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 같은 차림을 하고 미늘창으로 누군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톰은 내일 잘츠부르크에 가서 침통한 표정으로 딱 부러지게 행동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오스트리아 경찰에겐 당연히 경찰차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톰이 경찰차를 타고 숲속 그 현장으로 지체없이 안내해야 한다. 숲에 가도 아직은 날이 훤할 테니, 내일 저녁에는 린츠 거리에 있는 데르 블라우에 여관으로 곧장 가야 한다. 짙은 머리색을 하고 프런트를 보던 여자가 버나드 터프츠도, 여관에 와서 버나드를 찾았던 톰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톰은 마음이 놓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나오는 최면 같은 대사를 따라 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웹스터겠지.” 톰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톰은 수화기를 들려다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바로 그때, 그가 한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예감이 들자 고통이 밀려왔다. 모든 죄가 까발려지면 민망해서 어쩌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자. 아직 쇼는 끝나지 않았어. 용기를 내! 톰이 수화기를 들었다. (P269-270)
하이스미스가 창조한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톰 리플리는 교양 있고 지적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밴 인물인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고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데에 도가 튼 사이코패스다. <리플리> 5부작 중 1권은 <재능있는 리플리>에서 톰 리플리는 교활한 거짓말로 선박회사 사장 그린리프를 속여 돈을 타내고, 그 돈으로 그린리프의 아들 디키를 찾으러 유럽으로 떠난다. 톰은 디키와 친해져서 그의 집에 얹혀살지만 디키가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하자 디키의 신분을 가로채려는 모종의 계획을 세운다.
<지하의 리플리>에서는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에도 이어지는 톰 리플리의 기행을 그린다. 톰은 1권에서 강탈한 부를 발판 삼아 제약회사 딸과 결혼해 프랑스 근교 저택에서 부유하고 한가로운 삶을 누린다. 과거 시끄러웠던 구설수로 더럽혀진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인이 된 화가 더와트의 위작을 그리도록 사주해 수수료를 받아 챙긴다. 그런 그의 앞에 위작임을 눈치채고 이를 폭로하려는 인물이 나타난다.
<리플리의 게임>에서 톰은 파티에서 만난 액자 가게 사장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투병 중인 그의 약점을 이용해 게임을 시작한다. 톰의 계략에 말려든 사장은 죽기 전에 아내와 아들에게 얼마라도 남겨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감언이설에 흔들려 제 발로 살인자의 길로 들어선다.
<리플리를 따라온 소년>에서는 미국에서 온 한 소년이 어느 날 밤 톰을 따라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년은 나이와 이름은 물론 출신 배경까지 속였지만, 톰은 소년이 거대 식품 기업의 아들임을 눈치챈다. 소년은 자기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자백하지만, 톰은 살인을 했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며 자신도 여러 번 사람을 죽였다고 소년을 다독인다.
5부작의 완결편인 <심연의 리플리>에서는 톰은 연쇄 살인마로서 최대 위기를 맞이한다. 그가 사는 동네로 미국인 부부가 이사를 왔는데, 그들은 톰의 과거를 아는 눈치다. 탐욕스러운 미국인 남편은 톰이 죽여서 유기했던 시신을 강에서 건져냈다. 이 일로 톰은 그간의 행적이 만천하에 발각될까 봐 불안에 떤다. (P280-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