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양들의 침묵> 1991년
미국의 범죄 스릴러 소설가 토마스 해리스가 1988년에 출간한 세번째 장편소설 및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1991년에 개봉한 영화. 한니발 렉터 시리즈 4부작 중 첫번째 영화이지만, 내용상으론 3부에 해당된다. 원작 소설은 브램 스토커상을 받을 만큼의 명작으로, 영화도 스릴러물의 걸작을 꼽을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작품이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영화로 유명하다.
연쇄 살인을 다루는 FBI 내 행동과학부는 콴티코 기지 연수원 건물의 반지하식 일 층에 있었다. 사격 훈련장에 있다가 호건 로(路)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온 클라리스 스탈링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상태였다. 범인을 체포할 때의 사격 요령을 배우느라 바닥에 엎드리고 뒹구는 바람에 머리카락에 풀잎이 붙었고 FBI 연수원 마크가 찍힌 방풍 재킷에도 잔디 얼룩이 묻었다. 외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탈링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깐 살폈다. 이제 와서 몸단장할 필요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튀어오라는 잭 크로포드 부장의 호출을 받은 터라 손에서 화약 냄새가 났지만 씻을 시간이 없었다.
어수선한 사무실로 들어가자 남의 책상 앞에 홀로 서서 통화하는 잭 크로포드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스탈링은 충격을 받았다. 스탈링이 아는 크로포드는 본인 직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중년의 수완가였다. 그 나이에도 홈플레이트 뒤에서 거칠고 솜씨 좋은 포수로 활약하는 걸 보면, 대학 시절 야구 쪽 재능으로 학비를 해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P9-10)
그는 엉성하게 묶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수사관용 설문과 생존 피해자용 설문도 같이 들어 있어. 파란색은 살인범용 설문지인데 살인범이 본인 의지로 답하려고 할 경우에만 적용이 가능해. 분홍색은 조사관이 살인범을 상대로 물을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로 구성했어. 이 질문들로 살인범의 반응과 답변을 수집하는 거지. 필요한 서류 작업이 상당히 많아.”
서류 작업이라..... 클라리스 스탈링은 이번 건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아닐지를 영민한 비글처럼 가늠해봤다. 어떤 일거리가 될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됐다. 미가공 데이터를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에 입력하는 고되고 단조로운 작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직무로든 행동과학부에 들어가 근무하는 건 구미가 당겼지만 비서 업무에 한정된 일을 맡게 된 여성 요원이 결국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뻔했다. 퇴직하는 날까지 그런 일만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잘 선택하고 싶었다. 크로포드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은연중에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스탈링은 재빨리 그 질문을 간파해야 했다. (P14)
스탈링은 반가움과 우려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면담 대상자가 누굽니까?”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 박사.”
문명인이 모인 자리라면 언제나 그렇듯 그 이름 뒤에 짧은 침묵이 뒤따랐다. 스탈링은 크로포드를 차분히 바라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식인종 한니발 말씀이군요.”
“그래.”
“좋습니다. 제가 하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접니까?”
“주된 이유는 자네 손이 비니까. 그가 호락호락하게 협조해줄 것 같지는 않아. 이미 우리측 요청을 거절했어. 직접은 아니고 중재자인 수감소 소장을 통해서지만. 이번에는 자격 있는 조사관을 보내서 개인적으로 면담 요청을 해볼 생각이야. 그밖에 다른 이유를 자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어. 지금 우리 부서에는 그 일을 할 만한 인원이 남아 있지 않아.” (P16)
“한니발 렉터는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해. 수감소장 칠턴 박사는 자네가 렉터를 상대하면서 취하게 될 실질적 절차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려 할 거야. 그러니 정도를 벗어나지 마. 어떤 이유로든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돼. 렉터가 자네에게 말을 건다면 그건 그가 자네에 대해 알아내려고 한다는 뜻이야. 뱀이 새 둥지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호기심이지. 그자와 면담하면서 약간씩은 정보를 주고받겠지만 그자에게 자네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주지 마. 자네에 관한 개인적인 사실들을 그가 머릿속에 담아두지 못하게 해야 해. 그자가 윌 그레이엄 요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자네도 잘 알 거야.” (P19)
“그렇게 알고 있단 말이죠? 어쨌든 우리는 렉터를 연구해보려고 했습니다. ‘이 수감자를 우리의 기념비적인 연구 기회로 삼아보자’고 생각하면서요. 이런 표본을 산 채로 확보하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거든요.”
“무슨 표본이요?”
“순수한 소시오패스요. 하지만 렉터는 속내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고 표준검사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를 싫어합니다. 나를 적으로 취급해요. 그러고 보면 크로포드는 참 영리합니다. 그쪽을 렉터에게 접근시키는 걸 보면 말이죠.”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죠. 칠턴 박사님?”
“젊은 여자를 이용해 그를 ‘자극’하려는 거잖습니까. 미인계를 쓰겠다는 거죠. 렉터는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여자 구경을 못 했습니다. 세탁부 정도는 흘끗 볼 수도 있었겠지만요. 우리는 그곳에 여자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죠. 여자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요.” (P27)
렉터 박사의 감방은 다른 감방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른 감방들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는 식이었지만, 렉터 박사의 감방 맞은편에는 벽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밖에도 여러모로 독특했는데, 감방 앞면은 쇠창살로 돼 있고 그 안쪽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두 번째 장벽이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꽉 채우는 튼튼한 나일론 그물로 된 장벽이었다. 그물 너머에는 바닥에 볼트로 고정된 탁자 하나, 잔뜩 쌓인 페이퍼백과 신문들이 보였다. 등받이로 높고 수직인 딱딱한 의자는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한니발 렉터 박사는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이탈리아판 <보그>를 정독하고 있었다. 그는 스테이플러 철심을 뺀 잡지를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는 다 읽은 페이지를 옆에 한 장 한 장 쌓았다. 그의 왼손 손가락은 여섯 개였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쇠창살과 약간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좁은 현관 입구 정도의 거리였다.
“렉터 박사님.”
목소리가 크게 떨리지 않고 멀쩡하게 나왔다. 잡지를 읽고 있던 그가 눈을 들었다. 순간 스탈링은 그의 시선에서 웅웅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의 몸안에 흐르는 혈류의 소리였다.
“제 이름은 클라리스 스탈링이라고 합니다. 잠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P33-34)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야, 스탈링 수사관. 내가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든 거지. 나를 외부 조건에 이런저런 영향을 받은 존재로 평가 절하할 생각 마. 당신은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을 포기하고 행동주의자들의 학설을 따르기로 한 것 같군, 스탈링 수사관. 당신은 도덕적 존엄성이라는 잣대로 모든 이를 평가하지만,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도덕적 존엄성의 결여 때문만은 아니야. 날 봐, 스탈링 수사관. 나를 악하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악한가, 스탈링 수사관” (P46)
그는 손은 들어 스탈링의 말을 막았다. 스탈링은 그의 손이 곱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길이와 모양의 중지가 두 개였다. 희귀한 다지증이었다. 그는 조금 더 부드럽고 유쾌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이리저리 재서 수량화하고 싶어 하는군. 스탈링 수사관. 당신은 야망이 무척 큰 사람이야. 그렇지? 고급스러운 핸드백에 싸구려 구두 차림으로 찾아온 당신이 내 눈에 어떻게 보일 것 같나? 촌뜨기티가 팍팍 나. 도시 생활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느라 취미도 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시골뜨기. 당신 눈은 싸구려 탄생석 같아. 대꾸할 때마다 표면이 온통 반들거려. 당신은 나름 똑똑한 인재야.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영양 섭취를 잘한 덕분에 뼈대는 그럭저럭 잘 자랐지만 기성세대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해. 스탈링 수사관. 웨스트버지니아 주나 오클라호마 주 출신인가? 대학에 남을지, 여군에 입대할지 고민하다가 그 일을 하게 된 것 같은데, 아닌가? 당신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해줄 테니 잘 들어. 스탈링 학생. 당신 방에는 금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가 있을 거야. 그 목걸이가 얼마나 조잡한 싸구려 인지 알게 된 순간부터 그 목걸이가 보기 싫어지거든. 한번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만사가 다 지겨워져. 처음에는 고맙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지겨워지면서 손대기도 싫어지고 먼지가 쌓여 끈적끈적해지는 거야. 지겹다. 지겨워. 아주 지겨워. 사람이 똑똑하면 많은 것들을 망칠 수가 있어. 취향이라는 것도 늘 똑같지 않지. 이 대화를 상기할 때마다 당신은 얼굴에 상처 입은 멍청한 짐승을 떠올리게 될 거야. 목걸이의 구슬이 끈적해지면 목에 뭘 걸고 다닐 건가? 밤에 그런 고민을 하게 되지 않겠어?” (P47-48)
차 안에서 무언가 썩어가는 퀴퀴한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가 풍겼다. 무어라 콕 짚어낼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기억을 건드리는 냄새였다.
차 안으로 들어간 스탈링은 운전석 뒤의 칸막이를 열고 차 뒤쪽에 손전등을 비췄다. 손전등 불빛에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금속 단추가 달린 정장 셔츠였다. 셔츠 위쪽을 비춰봤으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얼굴은 없었다. 손전등을 조금씩 아래로 비췄다. 반짝이는 금속 단추들, 새틴 소재의 옷깃, 지퍼가 살짝 열린 바지. 다시 손전등을 위로 올렸다. 깔끔한 나비넥타이와 목깃 속 마네킹의 하얀 목이 도드라졌다. 그 목 위에는 불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무언가가 씌워져 있었다. 검은 두건 같았다. 마치 앵무새의 새장을 덮어놓은 것처럼,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두건으로 덮여 있었다. 벨벳인 듯했다. 두건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인지 몰라도, 차량 뒷자석 뒤쪽의 선반과 마네킹 목 위에 얹어놓은 합판을 지지대 삼아 놓여 있는 듯했다.
스탈링은 앞좌석 쪽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초점을 맞춘 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P97)
저장통에 든 건 턱 바로 밑에서 깔끔하게 잘린 머리였다. 보존액인 알코올 성분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희뿌옇게 된 두 눈이 스탈링을 마주 봤다. 입은 벌어졌고 거의 회색이 된 혀가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머리는 저장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수년에 걸쳐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공기에 노출된 정수리 부분은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 (P99)
“솔직히 말하면 그가 징징대며 털어놓는 얘기를 듣는게 신물이 났어. 라스페일에게도 최선이었지. 어차피 치료가 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정신과 의사라면 누구나 나한테 보내버리고 싶은 지긋지긋한 환자 한두 명쯤은 데리고 있을 거야. 이런 얘기는 처음 해보는데, 막상 하고 보니 또 신물이 넘어오네.”
“그래서 라스페일의 시신을 오케스트라 단장과 지휘자에게 먹이셨어요?”
“손님들이 오기로 했는데 장 보러 갈 시간이 없잖아. 냉장고에 있는 거로 뭐든 만들어서 대접해야지, 클라리스. 클라리스라고 불러도 괜찮겠나?” (P111-112)
스탈링은 사건 파일을 펼쳤다. FBI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버팔로 빌은 다섯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 밝혀진 것만 다섯 번이니 더 많을 수도 있다. 지난 10개월 동안 버팔로 빌은 여성을 납치 살해한 뒤 살가죽을 벗겼다. 스탈링은 무히스타민 테스트 결과가 담긴 검시 초안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며 범인이 희생자들을 죽인 후에 살가죽을 벗겼다는 걸 확인했다.
버팔로 빌은 살가죽을 벗겨낸 시신들을 전부 강에 유기했다. 시신들은 각각 다른 주의 다른 강에서 발견됐는데, 모두 주간 고속도로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가까운 강 하류였다. 다들 버팔로 빌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자일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한 자루 이상의 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 당국이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P130)
그는 백인 남성으로 추정됐는데 연쇄 살인범들은 대개 자신이 속한 인종 집단 내에서 살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죽인 여성들이 모두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시대에는 이름을 알린 여성 연쇄 살인범이 거의 없다는 게 그가 남성으로 추측되는 이유였다. <뉴욕 타임스>의 두 칼럼니스트는 시인 E.E. 커밍스의 짧은 시 ‘버팔로 빌’에서 ‘그대는 이 푸른 눈의 소년이 마음에 드는가, 죽음이여’라는 구절을 인용해 칼럼 제목을 달았다.
파일 표지 안쪽에 이 시구가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크로포드가 붙여놓은 듯했다. 버팔로 빌이 젊은 여성을 납치한 장소와 시신을 유기한 장소 사이에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보이지 않았다. 시신이 유기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견된 경우 사망 시간을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었는데, 경찰은 그 외에도 살인자가 저지른 짓을 한 가지 더 밝혀냈다. 버팔로 빌이 희생자들을 곧바로 죽이지 않고 한동안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희생자들은 납치되고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후에 사망했다. 이는 그가 여성들을 가둬두고 은밀하게 작업을 진행한 장소가 있다는 걸 뜻했다. 즉 그는 떠돌이가 아니었다. 어딘가에 거미줄로 함정을 파놓고 희생자를 잡아들이는 문짝거미에 가까운 자였다. (P131-132)
“몇 마디만 더 할게, 스탈링. 자네라면 일급 과학수사 능력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그 이상의 능력이야. 자네가 말수가 적은 건 좋게 보고 있어. 나 역시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니까. 다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일을 벌이기 전에 나한테 미리 알려주면 좋겠네. 어떤 질문을 해도 멍청하다고는 생각 안 해. 자네는 내가 못 보는 걸 볼 줄 아니까. 나한테 말해달라는 거야. 이 사건에서 자네가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거니까.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이번 기회에 자네 실력을 한번 보기로 하지.” (P140)
“범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도록 해. 범인이 갔던 장소에도 가보고 놈에 대한 느낌을 얻어봐. 수사 내내 놈을 증오할 필요는 없어. 지나치게 미워할 필요는 없단 얘기야. 그렇게 수사를 하다가 운이 따르면 지금까지 봐온 자료에서 단서를 포착할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눈에 들어오는 단서가 생기면 나한테 알려달라는 거야. 스탈링.
내 말 잘 들어. 범죄라는 건 원래 혼란스러운 거라서 수사 또한 뒤죽박죽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어. 다만, 경찰들에게 휘둘려 혼란에 빠지지는 마, 늘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범죄를 자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분리시켜 생각해야 해. 버팔로 빌에 대해 어떤 패턴이나 대칭적인 요소를 부여하려고 애쓰지 마. 열린 마음으로 조사하다 보면 언젠가는 놈이 존재를 드러낼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런 식의 수사는 동물원과 비슷해. 수사 관할이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고 어떤 관할 지역은 멍청이들이 위에 올라앉아 이래라저래라 하거든. 그런 자들이 가진 정보도 요긴할 때가 있으니까 두루두루 잘 지내면서 정보를 얻어야 해. 우린 지금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포터 시로 가고 있어. 그쪽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괜찮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우리를 밀수 감시관처럼 대하면서 경계할 수도 있겠지.“ (P141-142)
시신은 가슴에서 무릎까지의 가죽이 깔끔하게 벗겨져 있었는데, 투우사의 바지와 새시 벨트로 가려질 만
한 넓이였다. 유방은 작았고 유방 사이의 흉골에는 사망 원인인 듯 보이는 별 모양의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상처의 폭은 손바닥 넓이 정도였다. 둥그런 머리통을 보니 눈썹 바로 윗부분부터 귀, 목덜미까지의 가죽이 벗겨진 상태였다. (P152)
“이번이 여섯 번째 희생자인데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어깨 뒤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피부가 절단됐고, 가슴에 총을 맞고, 목 안에 곤충 번데기가 들어 있는 것으로는 첫 번째입니다.”
“부러진 손톱은 잊어버렸나보군.”
“아뇨. 부장님. 손톱이 부러진 것으로 따지면 두 번째 시신입니다.”
“맞아. 이번 부속 초안에는 그 고치에 대해 언급하지 말고 비밀로 해둬. 나중에 허위자백하는 놈들을 걸러낼 때 써야 하니까.”
“범인이 전에도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고치나 곤충을 희생자의 목구멍에 넣는 짓이요. 물에서 발견된 시신이라 검시관들이 부검에서 놓쳤을 가능성이 있어요. 검시관들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니까요. 뭔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으면 나머지는 간과해버리기도 하죠..... 다시 확인해봐야 할까요?” (P169)
“우선 일반적으로 야외에서 시신에 우글거리는 벌레는 아닙니다. 물에 사는 곤충도 아니니 우연이 아니면 물에 들어갔을 리 없겠죠. 수사관님이 곤충에 대해 얼마나 익숙하신지, 얼마나 자세히 듣고 싶으신지 모르겠군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건 미성숙한 곤충이고 번데기 단계에 있죠. 이런 고치 안에 머물면서 유충에서 성충으로 변하는 겁니다.”
로든이 코를 찡그리고 안경을 밀어 올리며 옆에서 한마디 했다.
“피각이 있는 번데기지, 필치?”
“그래, 그런 것 같아. 자, 이 미성숙 상태인 곤충에 대해 샅샅이 밝혀보자 이거죠? 좋습니다. 이건 대형 곤충의 번데기 상태예요. 진화된 곤충 대부분은 이렇게 번데기 상태를 거치죠. 이런 형태로 겨울을 나는 겁니다.” (P185-186)
“사람들은 대부분 나비를 좋아하고 나방을 싫어하죠. 하지만 사실 나방이 훨씬 흥미롭고 매력적입니다.”
“파괴적이기도 하잖아요?”
“일부, 아니 상당수가 그렇죠. 하지만 나방은 온갖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처럼요.” 그는 승강기가 한 층을 내려올 동안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눈물을 먹고 사는 나방이 몇 종류 있습니다. 오직 눈물만 먹고 마시며 살아가죠.”
“어떤 종류의 눈물이요? 누구의 눈물 말인가요?”
“사람만 한 크기의 대형 육상 포유류의 눈물이죠. 나방에 대한 오래된 정의는 이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씩 소리 없이 먹거나 소모하거나 낭비하는 것.’ 파괴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고요.... 늘 이런 일을 하십니까? 버팔로 빌 같은 자를 쫓는 일?” (P192-193)
24시간 뉴스를 내보내는 라디오 채널을 찾아 맞추고 일기예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뉴스가 나왔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멤피스의 뉴스 보도는 아침 7시에 내보냈던 뉴스를 거의 그대로 재탕하는 수준이었다. 마틴 상원의원의 딸이 실종됐고 그녀의 블라우스가 버팔로 빌의 방식대로 등판이 잘린 채 발견됐으며 목격자가 없다는 것. 그리고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발견된 시신은 아직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웨스트버지니아. 포터 시 장례식장과 관련된 기억중 하나가 스탈링의 머릿속에 분명하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계시처럼 스탈링에게 힘과 빛이 되는 기억이었다. 간직해야 할 기억이기도 했다. 스탈링은 애써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마음속에 부적처럼 품었다. 포터 시 장례식장 시체안치실의 세정대 앞에 서 있는 동안 스탈링은 놀랍고도 기쁜 기억에서 힘을 얻었다. 바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P220)
“살인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렉터 박사는 몇 년간 대형 정신병원을 운영했어.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 주 법원을 비롯해 동부 해안 지역의 여러 법원으로부터 수많은 정신감정을 의뢰받아 진행하기도 했지. 그러면서 미친 범죄자들을 수두룩하게 만난 거야. 그러다 직접 살인을 저지르게 됐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몰라. 그냥 재미를 위해서일 수도 있어. 그건 오직 본인만 알겠지. 라스페일은 렉터에게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온갖 얘기를 다 했어. 클라우스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도 털어놨을지 몰라.” (P230)
“앞으로 사흘 동안 렉터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어. 우리가 그 기간에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볼티모어 경찰은 법원이 가로막고 나설 때까지 렉터를 쥐어짤 거야.”
“지난번에도 쥐어짜 봤지만 아무것도 안 나왔잖아요. 렉터 박사는 땀 한 방울 안 흘렸을 텐데요.”
“그가 경찰들에게 뭘 줬다고 하지 않았나? 종이로 접은 닭이었지?”
“예, 맞습니다.”
렉터가 종이를 접어 만든 닭은 지금 스탈링의 지갑 안에 들어 있었다. 스탈링은 구겨진 그 종이 닭을 꺼내서 작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잘 편 다음, 꼬리를 잡고 주둥이로 바닥을 찧게 했다.
“볼티모어 경찰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지. 렉터는 그들이 잡아두고 있는 죄수니까. 그러다 캐서린의 시체가 강에서 발견되면 경찰들은 마틴 의원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
“마틴 의원은 어떻게 견디고 있어요?” (P237-238)
“믿기지가 않는군, 클라리스.”
“믿으셔야 합니다.”
“아, 당신은 믿어. 하지만 당신은 살가죽을 제대로 벗기는 방법보다 인간의 행동에 대해 더 모르는군. 상원의원이 당신을 통해 제안한다는 건 좀 생뚱맞지 않나?”
“박사님이 저를 선택하셨잖아요. 저하고만 얘기하겠다고 하셨죠.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으로 바꿔드릴까요? 아니면 캐서린을 구해내는 일에 도움을 못 줄 것 같아서 그러시는 건가요?”
“무례하기도 하고 사실도 아닌 말이로군. 클라리스. 난 잭 크로포드가 누구든 내게 그런 보상을 제안하게끔 허용할 거라고 생각 안 해..... 내가 당신을 통해 상원의원에게 말을 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엄격하게 맞교환을 할 생각이야. 당신에 관한 정보를 약간 받는 대신 범인에 대한 정보를 넘기도록 하지. 어때?”
“어떤 질문인지 들어보고요.”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캐서린이 기다리고 있잖아. 살인마가 숫돌에 칼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캐서린이 옆에 있었으면 당신한테 어떻게 해달라고 할까?”
“질문부터 들어볼게요.”
“어린 시절 최악의 기억은 뭐지?” (P267)
1분쯤 지나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충은 고치를 만들어 번데기가 돼. 그리고 때가 되면 아름다운 이마고가 되어 비밀스러운 변화의 방에서 나오지. 이마고가 뭔지 알아, 클라리스?”
“날개 달린 성충이요.”
“그리고?”
스탈링은 고개를 저었다.
“오래된 정신분석 용어이기도 해. 이마고는 유아기에 형성돼 무의식에 묻혀 있다가 성인이 됐을 때 유치한 짓을 하게 만드는 부모의 이미지를 뜻하지. 고대 로마인들이 장례식에서 사용한 조상들의 밀랍 흉상에서 따온 용어야...... 냉정한 크로포드도 번데기에서 그런 의미를 읽어냈을 거야.”
“곤충학 저널 구독자 목록을 범죄자 지문 색인에 등록된 성범죄자 목록과 대조하라고만 하셨어요.”
“우선, 버팔로 빌이라는 명칭은 쓰지 말도록 하지. 그건 잘못된 이름이고, 당신들이 찾는 범인과는 아무 관련도 없어. 편의상 그를 빌리라고 부를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요약해서 말해줄 테니 잘 들어. 준비됐나?”
“준비됐습니다.”
“번데기는 ‘변화’를 뜻해. 벌레가 나비 혹은 나방이 되는 거지. 빌리는 변화를 원해. 그래서 그는 진짜 여자들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있는 거야. 자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어야 하니까 몸집 큰 여자들을 납치했지. 그동안 납치한 여자들을 보면 그가 ‘탈피’를 꿈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는 이층집에서 그 일을 벌이고 있어. 왜 이층집인지 이유는 알아냈나?”
“계단에서 목을 매달기 위해서요.”
“맞아.” (P288-290)
“글쎄요. 서툰 관료적 거짓말로 정보를 얻어내겠다는 발상은 진실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는 것보다 더 해로울 수 있습니다. 저희를 그런 식으로 보호해줄 생각 마세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셔서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다니엘슨 박사님. 저한테 큰 도움이 됐네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말씀드리죠. 진실을 좋아하시니 잘 들어보세요. 지금까지 범인은 젊은 여자들을 납치해서 살가죽을 벗겨왔습니다. 그 가죽을 자기 몸에 걸치고 신이 나 있죠. 우리는 그자가 다시는 그런 짓을 벌이지 못하게 막으려는 겁니다. 박사님이 신속하게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후 오전 중에 법무부는 박사님의 협조 거부를 이유로 공식적인 범원 명령서를 요청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뉴스 시간에 보도가 나가게 할 생각입니다. 법무부에서 뿌리는 보도자료에는 우리가 존스홉킨스 병원의 다니엘슨 박사에게 협조 요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는 내용이 담기겠죠. 버팔로 빌 사건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캐서린 마틴의 시체가 강에 유기됐던 사실이 상기될 겁니다. 그다음 희생자의 시체들이 버려질 때마다 우리는 존스홉킨스의 다니엘슨 박사에게 협조를 구하려다 거부당한 일을 언급할 거고요. 박사님이 밥존스 대학교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을 겁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지금 볼티모어에 보건복지부 직원들이 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 클리닉은 연방정부로부터 특별 수당을 받고 있죠. 박사님도 그 수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마틴 상원의원은 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특별 수당 담당부서 직원들에게 이렇게 묻겠죠. 성전환 수술은 일종의 미용 성형수술 아닌가요? 그럼 그 직원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할 겁니다. ‘아마도요. 상원의원님 말씀이 옳습니다. 미용 성형수술이 맞습니다.’ 그럼 박사님이 운영하시는 이 프로그램은 코 성형수술 클리닉과 마찬가지로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되겠죠.”
“모욕적이군요.”
“아뇨. 사실을 말한 겁니다.”
“겁박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위협을 해봤자--” (P323-324)
크로포드가 볼티모어 빈민가를 걸어가면서 스탈링에게 한 말은 그가 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에서 얼어죽을 것 같던 추위가 이어지던 새벽에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스탈링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의 권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였다.
“지금이 제일 어려운 시기야. 스탈링. 이 시기를 잘 이용하면 자네한테 도움이 될 거야. 가장 힘든 시험을 치른다고 생각해. 분노와 좌절이 생각을 흩트리게 하지 마. 자네가 상황을 지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 감정을 낭비하고 어리석게 굴면 최악의 결과와 마주할 거야. 칠턴은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고, 캐서린은 그놈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잖아. 아직 기회가 있어. 실험실의 액체 질소 온도가 얼마나 되지?”
“예? 아, 액체 질소의 온도는..... 섭씨 영하 200도 정도 됩니다. 그것보다 조금만 더 올라가도 끓어오르죠.”
“액체 질소로 무언가를 얼려본 적 있나?”
“예.”
“난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마음의 쓸데없는 감정을 얼려버리길 바라. 칠턴과의 일을 얼려버려. 렉터에게 받은 정보만 취하고 감정은 얼려. 목표를 똑바로 봐. 스탈링. 중요한 건 바로 그거야. 자네는 정보를 얻으려 노력했고 대가를 치렀고 정보를 얻었어. 그럼 이제 그 정보를 사용해야지. 그 정보는 칡턴이 훼방을 놓고 나서기 전과 달라진 게 없어. 우리한테 쓸모가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야. 더는 렉터에게 정보를 얻어낼 수 없겠지. 지금까지 자네가 얻어낸 정보를 잘 굴려봐. 나머지 감정은 얼려버리고. 칠턴의 엉덩이는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걷어차면 돼. 지금은 그에 관한 감정을 냉동시켜 옆으로 치워둬. 그래야 목표를 제대로 볼 수 있어. 목표는 캐서린 마틴의 목숨과 헛간 문에 걸린 버팔로 빌의 가죽이지. 목표물에 시선을 집중해.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나한테도 쓸모가 있어.” (P338-339)
“일찍요. 아직 어두울 때였어요.”
“그럼 무슨 일이 있어서 깼을 테군. 뭐였지? 꿈을 꿨나? 무슨 꿈이었어?”
“잠에서 깼는데 양들이 울고 있었어요. 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고 양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죠.”
“어린 양을 잡고 있었나보네?”
“예.”
“당신은 뭘 했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저는 그저--”
“그 말을 데리고 뭘 했어?”
“불도 안 켜고 옷을 입은 뒤 밖으로 나갔어요. 한나는 겁에 질린 상태였어요. 우리 안의 말들이 전부 두려워하면서 서성이고 있더라고요. 한나는 제가 가까이 가니까 저인 걸 알아보고 제 손에 코를 가져다댔어요. 헛간과 양 우리 옆의 작업장에 전등이 켜져 있었어요. 갓도 없이 알만 있는 전구였고 커다란 그림자가 져 있었죠. 냉장 트럭이 와서 요란하게 공회전 중이었고요. 저는 한나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어요.”
“안장을 채웠나?”
“아뇨. 안장을 가져갈 순 없었어요. 밧줄로 된 고삐가 전부였어요.”
“어둠 속에 길을 나섰는데 불 켜진 곳에서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그 소리가 오래 가진 않았어요. 양은 열두 마리뿐이었으니까요.”
“요즘도 한 번씩 잠을 설치지 않나? 캄캄한 새벽에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잠을 깨지?”
“가끔요.”
“당신이 버팔로 빌을 잡으면, 캐서린을 무사히 구해내면 양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거라고 생각하나? 그 양들도 모두 무사해지고 당신도 어두운 새벽에 양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깨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클라리스?”
“예.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요.” (P404-405)
“펨브리. 어서 말을 시켜, 제기랄.” 그리고 테이트는 무전기에 대고 보고했다. “교도관 두 명이 쓰러졌습니다. 보일은 사망했고 펨브리는 중상입니다. 벡터는 사라졌습니다. 렉터는 교도관들의 권총을 훔쳐 달아났으며 무장한 상태입니다. 교도관들의 건벨트와 권총집은 책상 위에 있습니다.”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순찰경위의 목소리가 계속 지직거렸다.
“들 것을 올려 보내도 되는지 계단을 확인해주겠나?”
“올려 보내십시오. 4층으로 올라오라고 하시면 됩니다. 층계참마다 경찰을 배치해뒀습니다.”
“알았다. 경사. 이쪽 8번 초소에서 본관 4층 창문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걸 봤다는 보고가 있었다. 출구는 우리가 봉쇄했으니 렉터는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층계참을 계속 지켜라. SWAT이 오고 있다. SWAT이 렉터를 제거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SWAT에게 맡겨야죠.”
“렉터의 무기는?”
“권총 두 자루와 칼 한 자루입니다. 제이콥스. 건벨트 안에 탄약 확인해봐.” (P428-429)
“그는 펨브리의 제복을 입고 펨브리의 얼굴 일부를 떼서 자기 얼굴에 붙였어. 보일의 몸에서도 살점을 일부 뗐고, 그리고 피가 떨어지지 않게 펨브리의 시신을 방수 매트리스 커버와 그의 감방 침대 시트로 둘둘 말아서 승강기 위에 숨겨뒀어. 그런 다음 펨브리의 제복을 입고 펨브리처럼 피칠갑을 한 채로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향해 총을 쏜 거지. 그래야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올 테니까. 렉터가 그 총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어. 바지 뒤쪽에 넣어뒀을 수도 있겠지. 경찰들이 사방에서 총을 들고 설치는 중에 구급차가 도착했어.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들어와서 훈련받은 대로 자기네가 해야 할 일을 했지. 기도 삽관을 하고 엉망이 된 얼굴을 붕대로 감아 지혈한 뒤 그곳을 빠져나갔어.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하지만 구급차는 병원까지 가지 못했고 경찰들이 아직 찾는 중이야. 구급대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아. 코플리 얘기로는, 경찰이 그 시각 구급차 배차담당자의 통화 녹음을 들어보고 있는 중이래. 그런데 구급차를 두 번 호출한 거로 나왔어. 한 번은 경찰 쪽에서 부른 거고 다른 한 번은 렉터였던 것 같아. 렉터가 총을 쏘기 전에 직접 구급차를 불렀을 거야. 그래야 그 자리에 오래 누워 있지 않게 될 테니까. 렉터 박사는 재미 삼아 그런 짓을 하잖아.” (P446-447)
“이건 해골박각시나방입니다. 이 암컷 나방은 가지 식물 위에 올라앉아 있어요. 저희는 이 나방이 알을 낳기를 바라고 있어요.”
해골박각시나방은 경이로우면서도 무시무시했다.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커다란 날개는 마치 망토 같았고 털이 수북한 넓은 등에는 이름처럼 해골 무늬가 있었다. 행복한 정원에 이런 무늬의 나방이 갑작스레 날아들면 사람들은 모두 기겁할 테다. 무늬는 시커먼 눈구멍과 광대뼈, 눈 옆의 관골궁까지 사람의 두개골과 절묘하게 닮아 있었다.
“아케론티아 스틱스라고도 불립니다. 저승에 흐르는 두 개의 강, 즉 아케론 강과 스틱스 강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죠. 신문에 보니까 FBI가 쫓는 그 범인이 매번 시체를 강에다 버린다면서요?”
“예, 이건 드문 나방인가요?”
“이 나라에선 그렇죠. 여기서는 자연 상태에서 볼 수 없는 나방입니다.”
“원래 어디에 서식하는 나방이에요?”
스탈링은 우리의 철망 지붕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숨결에 나방의 등 털이 흔들렸다. 나방이 끼익 소리를 내며 사납게 날개를 파닥이자 스탈링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나방의 날갯짓이 빚어낸 약간의 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다.
“말레이시아요. ‘아트로포스’라는 유럽 종도 있는데 이 나방과 클라우스의 목구멍에서 나온 나방은 말레이시아 토착 나방입니다.”
“누군가 이 나라에서 이런 나방을 키운 거네요.” (P458-459)
맵은 공부하면서 할머니가 보내준 혼합 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여러 찻잎을 섞은 그 차를 맵은 ‘똑똑한 사람들의 차’라고 불렀다. 맵과 렉터는 스탈링이 아는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맵은 가장 안정적인 심리를 가졌고, 렉터는 제일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스탈링은 양극단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이 균형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너 오늘 연수원 수업 빠지길 잘했어. 체육 교관인 김원씨가 우릴 녹초가 될 정도로 굴렸어. 거짓말 아니야. 한국은 여기보다 중력이 더 센 게 분명해. 그러니까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렇게 붕붕 날아다니겠지. 그들에게 체육은 너무 쉬우니까 여기서도 체육 교관 일자리를 얻는 거잖아...... 참, 존 브리검 교관이 찾아왔었어.” (P480-481)
범인은 무슨 짓을 하지, 클라리스? 범인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원칙은 뭘까? 그는 왜 사람을 죽일까? 갈망이야. 우린 어떤 식으로 갈망을 품게 될까? 우린 매일 보는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는 거야.
렉터 박사의 시선이 자신의 피부에 닿지 않으니, 스탈링은 그가 했던 말을 좀 더 편하게 곱씹을 수 있었다. 콴티코 한가운데에 있는 안전한 연수원 안이라 마음이 편해서일 수도 있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것을 갈망하면서 욕망을 품기 시작하는 거라면, 버팔로 빌은 첫 번째 희생자를 죽였을 때 놀랐을까? 자기와 가까운 곳에 사는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첫 번째 시신은 잘 숨겨두고 두 번째 시신은 아무렇게나 유기한 건가? 시체 유기 장소가 무작위라는 인상을 주려고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두 번째 희생자를 납치해서 죽인 후 빨리 발견될 만한 곳에 버렸을까? (P515)
“물러서, 새끼야.”
조그만 개가 낑낑거리자 제임은 권총을 거뒀다. 캐서린은 다른 쪽 손으로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난 당신을 모욕할 생각 없어. 전화기만 내려줘. 통화가 되는 전화기여야 해. 당신은 여기서 도망가.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난 상관 안 해. 난 당신을 본 적도 없어. 프레셔스는 내가 잘 돌볼게.”
“안 돼.”
“프레셔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야. 당신 생각 말고 프레셔스의 행복을 생각해. 당신이 여기다 대고 총을 쏘면 프레셔스는 귀가 멀 거야. 내가 원하는 건 통화가 되는 전화기야. 전화선을 대여섯 개쯤 연결해. 끝을 잘 연결하면 선을 늘일 수 있어. 그리고 전화기를 이리로 내려. 이 개는 나중에 항공 화물로 당신한테 보내줄게. 우리 가족은 개들을 키우고 있고 엄마도 개를 좋아하셔. 당신은 달아나도 좋아. 당신이 어떻게 하든 난 상관 안 해.”
“너한테 물을 한 방울도 주지 않을 거야. 너한테 있는 그 물병이 마지막이야.” (P530)
‘안 돼! 지금 쏴.’
스탈링은 사천 번도 넘게 연습한 대로 허리춤의 권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권총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가늠쇠에서 가슴 중앙까지 일직선을 이루도록 두 손으로 총을 쥐었다.
“꼼짝 마.”
그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대로 천천히, 두 손 들어.”
‘놈을 밖으로 끌어내야 해. 우리 둘 사이의 저 테이블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자. 놈을 앞문 쪽으로 데리고 가서 거리 한복판에 엎드리게 하고 배지를 꺼내는 거야.’
“제임 검, 널 체포한다. 천천히 집 밖으로 나가.”
그런데 놈은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만약 그가 주머니로 손을 넣거나 등 뒤로 손을 뻗었다면, 그곳에 무기가 있었다면, 스탈링은 그를 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냥 그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가 지하실 계단을 빠르게 달려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스탈링은 테이블을 빙 돌아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통 앞에 섰다. 놈은 사라졌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계단통에는 아무도 없었다.
‘덫이야.’ (P596)
“캐서린, 놈은 죽었어. 이제 놈은 당신을 헤치지 못해. 위층으로 올라가서 전화를....”
“안 돼! 날 꺼내줘! 꺼내줘! 꺼내줘!”
“말했잖아. 놈은 죽었다니까. 여기 놈의 총이 있어. 기억나지? 가서 경찰서와 소방서에 연락할게. 나 혼자서는 당신을 끌어올릴 수 없어. 잘못하다간 당신이 도로 떨어질 수도 있고. 지금은 전화부터 하고 다시 내려와서 당신 옆에서 기다려줄게. 알았지? 그래. 그 개 입 좀 다물게 해. 알았지? 다 괜찮을 거야.”
소방관들이 도착하자마자 지역 텔레비전 뉴스팀들이 몰려왔다. 벨베데어 경찰보다 더 빨랐다. 소방대장은 뉴스팀들이 켜놓은 조명등을 노려보다가 그들을 지하실 계단 위로 전부 내쫓은 뒤, 캐서리 마틴을 우물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파이프로 틀을 만들었다. 그는 제임 검이 천장 들보에 달아놓은 갈고리는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방관 한 명이 사다리를 밟고 우물로 내려가 캐서린을 구조용 의자에 앉혔다. (P608)
취미로 시작한 살인에 맛을 들이게 되면서 그는 경찰에 처음 체포되기 한참 전에 미리 탈출 준비를 해뒀다. 훗날 도망자가 될 경우에 대비해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챙겨둔 것이다. 서스퀴해나 강 강둑에 위치한 휴양지 별장 벽에는 돈과 새 신분증, 여권, 그리고 그 여권 사진을 찍을 때 사용한 화장품이 숨겨져 있었다. 여권은 만료됐겠지만 곧장 갱신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에 단체 관광객 배지를 붙이면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그를 리우까지 데려가 줄, ‘남아메리카의 화려한 풍경’이라는 기분 나쁜 이름의 단체 관광에도 이름을 올려뒀다.
그는 호텔비 계산을 위해 고인이 된 로이드 와이먼의 이름으로 수표를 써놨다. 수표가 은행에서 처리되는 기간이 닷새나 되니 시간을 넉넉히 벌 수 있을 것이다 수표 처리 기간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의 전표가 컴퓨터에 입력되는 기간보다 더 길었다.
오늘 저녁 그는 미뤄둔 편지를 쓰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우편물 재발송 서비스로 보낼 계획이었다. (P635)
클라이스, 양들은 울음을 그쳤나?
당신은 내게 한 가지 정보를 빚졌다는 걸 잊지 말게. 물론 내가 원해서 준 것이긴 하지만.
<타임> 국내판과 매월 첫날 발행되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개인 광고를 실어서 대답해주면 좋겠군. <차이나 메일>에 실어도 괜찮아.
대답이 ‘예’이든 ‘아니오’든 난 놀라지 않을 거야. 당분간 양들은 울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클라리스, 당신이 보게 될 지하 감옥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야. 앞으로 수 차례 보게 될 것이고 당신이 사건을 채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축복처럼 침묵하겠지.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은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
당신을 만나러 갈 계획은 없어, 클라리스, 당신이 살아 있는 세상이 내게는 훨씬 흥미로우니까. 당신도 내게 그런 예의를 차려주길 바라.
렉터는 펜을 입술에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드디어 창문을 갖게 됐어.
지평선 위에 오리온 별자리가 보이는군. 그 근처에는 2000년도 이전까지는 우리 눈에 가장 환하게 보일 목성이 떠 있어. 당신에게 시간과 고도를 말해줄 의향은 없어. 당신도 그 별자리를 보고 있으면 좋겠군. 우리는 어쩌면 같은 별들을 지향하고 있을 테니.
클라리스.
한니발 렉터 (P636-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