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크리처스> 2013년
뷰티풀 크리처스(Beautiful Creatures)는 2013년 공개된 미국의 판타지 로맨스 영화이다.
우리 마을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밖에 없다. “멍청이와 못 떠난 사람.” 아버지는 애정이 넘치는 표정으로 이웃들을 이렇게 분류했다. “여기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람과 멍청해서 떠나지 못한 사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출구를 찾아 나갔지.” 아버지가 어느 쪽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감히 용기를 내서 물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작가였고, 우리가 사는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개틀린이었다. 내 고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엘리스 웨이트가 남북전쟁 때 샌티 강 반대편에서 싸우다 죽은 뒤로 웨이트 일가는 항상 여기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 전쟁을 남북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60세 이하인 사람들은 모두 ‘주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부르고, 60세 이상인 사람들은 ‘북부의 공격으로 벌어진 전쟁’이라고 불렀다. 마치 북부 사람들이 품질 나쁜 면화를 핑계 삼아 남부 사람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그랬다. 우리 식구들만 빼고. 우리 식구들은 그냥 남북전쟁이라고 불렀다.
그것 역시 내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였다. (P11)
애마 아줌마는 항상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그 이상 자세히 말해주는 법도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 웨이더스 개울에 있는 아줌마의 집에 가본 것이 마지막이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아줌마의 집에 잘 드나들었다. 애마 아줌마는 개틀린에서부터 반경 160킬로미터 이내의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타로카드 점술사였다. 그건 아줌마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기업으로, 그 역사는 무려 6대조 할머니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개틀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침례교인, 감리교인, 오순절 교회파 교인 등이 잔뜩 살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카드점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유혹 말이다. 그들은 용한 카드 점술사라면 정말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애마 아줌마는 그런 면에서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점술사였다.
가끔 아줌마는 자기가 직접 만든 부적들을 내 양말서랍에 넣어두거나, 아버지 서재의 문 위에 매달아두었다. 나는 그 부적들의 목적이 뭐냐고 딱 한 번 물어보았다. 아빠는 부적을 발견할 때마다 아줌마를 놀려댔지만, 부적을 치우는 법은 결코 없었다. “나중에 후회하느니 신중을 기하는 게 낫지.” 이 말은 아마 애마 아줌마를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줌마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심히 후회하게 될 수도 있었다.
“걔에 대해서 다른 소리는 못 들었어요?”
“너 조심해야 돼. 언젠가 네가 하늘에 구멍을 내는 바람에 우주가 그 구멍으로 몽땅 쏟아져 내리는 날이 올 거다. 그러면 우리 모두 아주 곤란해질 거야.” (P38-39)
나는 잭슨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웠다. 이 마을에 신호등은 이곳을 포함해 딱 세 개뿐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빗줄기가 망치처럼 버터를 두들겨댔다. 라디오에서는 이제 지직거리는 잡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라디오 볼륨을 키웠더니, 낡아빠진 스피커에서 노랫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열여섯 개의 달.’
내 아이팟의 목록에서 사라져버렸던 그 노래,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노래. 리나 두케인이 비올라로 연주했던 노래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는 바로 그 노래였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나는 비터를 급하게 출발시켰다. 하지만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번개가 하늘을 찢으며 지나갔다. 나는 또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폭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앞 유리창의 와이퍼를 켰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번개가 번쩍했다. 나는 또 숫자를 세었다. 하나, 천둥이 비터의 지붕 위에서 우르릉 거리고, 빗줄기가 수평으로 바뀌었다. 앞 유리창은 금방이라도 깨져나갈 것처럼 덜컹거렸다. 비터의 상태를 생각하면 정말로 깨져나갈 것 같았다. (P57)
리나의 눈은 캐롤라이나 해안에 폭풍이 불어오기 직전의 바다 같았다.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 이선. 그건 그냥 꿈인 줄 알았어. 네가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몰랐어.”
“그럼 그게 나라는 걸 안 뒤에는 왜 아무 말 안 한 거야?”
“내 인생이 좀 복잡해. 그래서 네가.... 아니 어느 누구도 내 인생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 이게 무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리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아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우리 몸 아래의 거친 석판이 느껴졌다. 나는 나 자신을 지탱하려고 석판 가장자리를 찾아 움켜쥐려고 했다. 하지만 내 손에 잡힌 것은 석판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작고 둥근 물체였다. 딱정벌레거나 돌멩이인 것 같았다. 그것이 석판에서 떨어져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충격파가 퍼졌다. 리나가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이선?’
‘나도 몰라.’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더니,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정원 안인 건 맞지만, 지금까지 있던 그 정원은 아니었다. 레몬 냄새도 연기 냄새로 바뀌었다..... (P90-91)
나는 주머니에서 로켓을 꺼내 손수건으로 줄을 잡고 몇 번 빙빙 돌렸다.
“그게 뭐냐, 예쁜아?” 셀마가 창턱에 놓인 깡통에서 담배가루를 조금 집어 아랫입술 안쪽에 끼워 넣으며 물었다. 셀마가 다소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다가 외모는 돌리 파튼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렇게 담배가루를 입에 넣는 모습이 아주 이상하게 보였다.
“레이븐우드 농장에서 주운 로켓이에요.”
“레이븐우드? 거긴 왜 갔는데?”
“제 친구가 거기 있어요.”
“리나 두케인 말이냐?” 머시 할머니가 물었다. 물론 머시 할머니가 리나를 모를 리가 없었다. 온 마을이 다 알고 있었으니까. 개틀린은 그런 곳이었다.
“네, 할머니. 학교에서 같은 학년이에요.” 이제 다들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저택 뒤의 정원에서 이 로켓을 주웠어요.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된 것 같아요.”
“그건 메이컨 레이븐우드 것이 아냐. 그린브라이어지.” 프루 할머니가 말했다. 아주 자신있는 목소리였다.
“어디 한번 보자.” 머시 할머니가 실내복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머시 할머니에게 로켓을 건네주었다. 로켓은 여전히 손수건에 싸인 채였다. “안에 글자도 새겨져 있어요.”
“나는 못 읽어. 그레이스, 읽을 수 있겠어?” 머시 할머니가 그레이스 할머니에게 로켓을 건네주며 물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레이스 할머니가 눈을 아주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니셜이 두 개 있어요. 바로 여기에.” 나는 금속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ECW랑 GKD. 로켓을 뒤집으면 날짜도 있어요. 1865년 2월 11일이라고요.”
“그거 낯익은 날짠데.” 프루던스 할머니가 말했다. “머시,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아?”
“그날 결혼이라도 한 것 아냐, 그레이스?” (P108-109)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애마 아줌마가 준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하며 로켓을 꺼냈다. 촛불들이 모두 꺼져버렸다. 전등 불빛들도 희미해지더니 깜박거리다 꺼졌다. 심지어 피아노 소리도 그쳤다.
‘이선, 무슨 짓이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어둠 속에서 메이컨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 든 게 뭐지?”
“로켓이에요.”
“괜찮다면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어주겠나?” 메이컨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가 정말로 차분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유창하고 입심 좋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가 감추려고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절박함이 드러났다.
나는 로켓을 다시 애마 아줌마의 주머니에 넣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식탁 맞은편에서 메이컨이 가지처럼 뻗은 촛대에 손가락을 댔다. 식탁위의 촛불들이 하나씩 다시 살아났다. 식탁 위의 음식은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촛불 빛에 드러난 메이컨의 모습은 불길해 보였다. 그는 또한 나와 만난 뒤 처음으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저울에 우리의 운명을 올려 놓고 자신이 어떤 방도를 선택해야 할지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이제 이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았다. 리나의 말이 옳았다. 메이컨에게 물어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메이컨이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저희 가정부인 애마 아줌마 행동이.... 제가 이걸 보여줬더니 아줌마가 여기에 무슨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거든요. 하지만 리나와 제가 이걸 주웠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삼촌한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환영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안 할 거야. 그 여자가 정말로 제네비브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리나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메이컨 레이븐우드에게 뭐든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 난 그저 이 집에서 나가고 깊을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제 그만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늦어서요.”
“그 로켓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보겠나?” 이건 요청이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P151-152)
나는 그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리나의 무서운 삼촌과 귀신의 집 같은 저택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나가 서둘러 나를 문으로 데려갔다. 나를 빨리 내보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는 듯이, 그런데 리나와 함께 중앙 홀을 지나갈 때,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띄었다.
로켓이었다. 무서운 황금색 눈을 한 유화 속의 여자가 로켓을 걸고 있었다. 나는 리나의 팔을 움켜쥐었다. 리나도 그것을 보고 얼어붙었다.
‘전에는 저게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저 그림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저기 걸려 있었어. 내가 저 앞을 지나친 게 천 번도 더 될 거야. 그런데 저 로켓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P154-155)
나는 한 손으로 내 헝클어진 머리를 문질렀다. “무슨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말해도 돼. 이상한 집안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나도 아니까.”
“넌 이상한 게 뭔지 아는 것 같지? 하지만 넌 아무것도 몰라.”
리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리나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힘든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리나가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 “우리 집 사람들이랑 나는 능력이 있어. 보통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뜻이야. 태어날 때부터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어. 우린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니까.”
리나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1초쯤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리나는 마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때 애마 아줌마가 나타나야 하는 거 아냐?
나는 묻기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같아서 이 질문을 던지기도 힘들었다.
“주술사.” 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주술사?”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을 거는 사람들 말이야?”
리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P162-163)
리들리가 나서서 사람들을 소개해주었다. “우리 엄마는 이미 만났지? 이쪽은 우리 아버지 바클레이 켄트, 그리고 내 남동생 라킨이야.”
“만나서 반갑구나, 이선.” 바클레이가 나와 악수를 하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가 리들리의 손이 내 팔을 잡고 있는 걸 보고 뒤로 물러났다. 라킨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런데 내가 그쪽을 돌아보니 그의 팔이 뱀으로 변해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라킨!” 바클레이가 꾸짖듯이 외쳤다. 뱀이 순식간에 라킨의 팔로 다시 변했다.
“쳇,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고 했더니, 다들 징징거리기나 하고.” 라킨의 눈이 노란색으로 깜박였다.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뱀의 눈이었다.
“라킨, 그만하라고 했지.” 바클레이가 항상 자신을 실망시키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으로 라킨을 바라보았다. 라킨의 눈이 다시 초록색으로 변했다.
메이컨이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모두 앉자. ‘주방’이 최고의 명절 음식을 마련해줬어. 리나와 나는 며칠 전부터 ‘주방’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시달렸지.” 다들 엄청나게 커다란 직사각형 식탁에 앉았다. 식탁의 발은 새 발톱 모양이었고, 상판은 어둡다 못해 거의 검게 보이는 나무였다. 다리에는 복잡한 무늬가 덩굴처럼 새겨져 있었다. 식탁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검은색 촛불들이 깜박거렸다. (P198)
1초 뒤 메이컨은 리들리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잠시 상황을 놓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이 내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숨도 쉬기 힘들었다. 몸이 완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턱조차 얼어붙어서 이를 딱딱 마주치며 떨 수도 없었다. “가거라!” 메이컨이 소리쳤다.
“싫어요!”
“리들리! 멋대로 굴지 마! 어서 가거라. 레이븐우드는 어둠의 마법의 장이 아냐. 여기에는 속박의 주술이 걸려 있다. 빛의 장이야. 넌 여기서 살아 남을 수 없다. 조금밖에 못 버텨.” 델 이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리들리는 델 이모의 말을 고함으로 맞받았다. “난 안 가요, 어머니. 어머니가 날 강제로 보낼 수도 없어요.”
메이컨의 목소리가 멋대로 날뛰는 리들리의 말을 잘랐다. “그렇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이젠 더 강해졌어요. 메이컨 삼촌. 삼촌도 절 통제 못해요.”
“맞다. 네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지. 하지만 아직은 나한테 덤비지 못해. 난 리나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널 다치게 하는 일이라도 어쩔 수 없어.”
리들리는 이 말을 참아 넘기지 못했다. “나한테 그렇게 하겠다고요? 레이븐우드는 어두운 힘의 장이에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에이브러햄 때부터. 그 사람도 우리와 같았어요. 레이븐우드는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삼촌은 왜 이 집을 속박의 주술로 빛에 묶어두는 거예요?”
“레이븐우드는 이제 리나의 집이야.”
“삼촌은 저랑 같은 편에 속해요. 그 여자의 편이라고요.”
리들리가 일어섰다. 나도 그녀에게 끌려 덩달아 일어섰다. 이제 세 사람 모두 서 있었다. 리나, 메이컨, 리들리, 이 셋이 정말이지 무섭기 짝이 없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삼촌의 종족은 무섭지 않아요.” (P203)
“너는 어때? 네 능력은 뭐야?”
리나의 능력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리나가 처음 학교에 온 날부터 리나의 능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다. 하지만 리나가 자주색 잠옷을 입고 우리 집 현관 베란다에 앉아 있던 그날 밤부터 나는 이걸 물어보고 싶어서 용기를 모으고 있었다.
리나는 한동안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나한테 말을 해줄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리나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초록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연체야. 적어도 메이컨 삼촌과 델 이모는 그렇게 생각하셔.”
자연체라, 나는 마음이 놓였다. 사이렌처럼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나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데?”
“나도 몰라. 정확히 말하면, 한 가지가 아냐. 무슨 말이냐면, 자연체는 다른 주술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대.” 리나는 이 말을 아주 빠르게 해치웠다. 내가 제대로 듣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 들었다.
다른 주술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 (P212)
“우리 집안 사람이 열여섯 살이 되면 결정이 내려져. 운명이 결정되는 거야. 델 이모나 리스 언니처럼 빛이 되는 사람도 있고, 리들리처럼 어둠이 되는 사람도 있어. 어둠 아니면 빛. 흑 아니면 백이야. 우리 집안에 회색은 없어. 본인이 직접 선택할 수도 없고,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그걸 되돌릴 수도 없어.”
“본인이 선택할 수 없다니?”
“자신이 빛이 되고 싶은지 어둠이 되고 싶은지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야. 일반인들이나 다른 주술사들은 선과 악을 직접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 집안에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아. 열여섯 살 생일에 그냥 결정되는 거야.”
나는 리나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나도 애마 아줌마랑 오래 같이 살았기 때문에 백마법과 흑마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나가 흑과 백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리나 자신의 일인데.
리나는 여전히 말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님이랑 같이 살 수 없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옛날에는 안 그랬어. 그런데 우리 할머니의 언니인 앨시아가 어둠이 됐을 때 할머니의 엄마는 앨시아를 차마 내보내지 못했어. 그때는 어둠이 된 주술사는 집과 가족을 떠나는 게 법칙이었거든. 이유야 뻔하지. 앨시아의 어머니는 자신이 딸을 도와서 어둠과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래서 그 가족이 살던 마을에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P217)
“그래, 너는 그 그림을 알겠구나. 리나, 메이컨 삼촌의 것이니까 말이야. 사실 네 삼촌이 그 사진을 직접 보내줬어.”
“이 여자분이 누군데요?”
“제너비브 두케인. 너도 알 텐데.”
“몰랐어요.”
“네 삼촌이 너희 가계에 대해 아무것도 안 가르쳐줬니?”
“세상을 떠난 친척들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를 안 하거든요. 제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전혀 없고요.”
메리언 아줌마는 납작한 서랍으로 다가가서 뭔가를 찾았다. “제너비브 두케인은 너의 6대조 할머니야. 사실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지. 라일라랑 나는 두케인 가문의 가계도를 추적 중이었어. 너의 메이컨 삼촌도 우리를 도와줬고....” 메리언 아줌마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작년까지는.”
엄마가 메이컨 레이븐우드랑 아는 사이였다고? 메이컨은 엄마의 저작을 통해서 엄마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람은 자기 집안 가계도에 대해 알고 있어야지.” 메리언 아줌마는 누렇게 변한 양피지를 몇 장 넘겼다. 리나의 가계도가 메이컨의 가계도와 나란히 우리 눈앞에 있었다.
나는 리나의 가계도를 가리켰다. “이상한데, 네 집안의 모든 여자들은 결혼한 뒤에도 성이 두케인이잖아.”
“그게 우리 집안 특징이야. 여자들이 결혼한 뒤에도 성을 그대로 쓰는 거. 항상 그랬어.”
메리언 아줌마는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리나를 바라보았다. “여자들이 특히 강력한 존재로 여겨지던 집안에서는 흔한 일이야.”
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리나 집안의 강력한 여자들에 대해 메리언 아줌마와 너무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리나가 그 강력한 여자들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줌마랑 엄마가 왜 두케인 가계도를 조사한 거예요? 연구 주제가 뭐였는데요?”
메리언 아줌마는 차를 저었다. “설탕 줄까?”
내가 스푼으로 설탕을 떠서 내 잔에 넣는 동안 아줌마는 시선을 돌렸다.
“사실 우리는 이 로켓에 가장 흥미가 있었어.” 아줌마는 제너비브가 로켓을 걸고 있었다.
“특히 한 가지 이야기에 관심이 갔지. 사실 아주 간단한 사랑이야기인데....” 메리언 아줌마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네 엄마는 못 말리는 낭만주의자였잖니, 이선.”
나는 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메리언 아줌마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너희 둘한테도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야. 웨이트와 두케인 사이의 사랑이야기거든. 남군 병사와 그린브라이어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주인공이야.”
로켓이 보여준 환영. 그린브라이어의 화재. 우리가 보았던 제너비브와 이선의 이야기가 바로 엄마가 마지막으로 준비하던 책의 주제였다. 리나의 6대조 큰할아버지의 이야기. (P262-263)
메리언 아줌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애마가 아니니까. 네 삼촌 메이컨도 아니니까. 난 네 할머니도 아니고, 델핀 이모도 아냐. 그냥 일반인이지. 그러니까 중립적이야. 흑마법과 백마법, 빛과 어둠 사이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어. 빛이나 어둠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그게 바로 나야.”
리나는 뒷걸음을 쳤다. 이건 우리 둘 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메리언 아줌마가 어떻게 리나의 가문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아줌마 뭐예요?” 리나의 가문에서 이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중대한 질문이었다.
“난 개틀린 카운티의 수석사서야. 이리로 이사 온 뒤부터 죽 그랬고, 앞으로도 죽 그럴 거야. 나는 주술사가 아니라 그냥 기록하는 사람에 불과해. 기록을 할 뿐이야.” 메리언 아줌마는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매만졌다. “나는 보관자야.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세계의 역사와 비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일반인들의 후예. 세상에는 항상 보관자가 한 명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나야.”
“메리언 아줌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도서관이 있다고. 나는 개틀린의 모든 주민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야. 주술사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여기 말고 다른 도서관은 주로 밤에 일하면 되니까 다행이지.”
“다른 도서관이라면......?” (P273)
“말했잖아요. 메이컨, 여긴 중립적인 곳이에요. 흙의 방에서는 속박의 주문을 쓸 수 없어요.” 메리언 아줌마는 아까 그 책을 꼭 움켜쥔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책을 끌어안고 있으면 어떻게든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책에는 해답이 없었다. 이건 메리언 아줌마가 아까 직접 한 말이었다. 주술로는 우리를 도울 수 없다고.
나는 꿈을 떠올렸다. 진흙 속에서 리나를 끌어당기던 꿈. 내가 여기서 이렇게 리나를 잃어버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컨이 입을 열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앞을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이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든 리나가 가 있는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리나, 내 말 잘 들어라. 그 여자는 널 붙잡을 수 없어.”
그 여자, 나는 리나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았다.
새라핀.
“넌 강한 아이다. 리나, 뚫고 나와. 그 여자는 내가 여기서 널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동안 내내 네가 그림자들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 네 힘으로 해내야 한다.”
메리언 아줌마가 물 한 잔을 들고 나타났다. 메이컨이 그 물을 리나의 얼굴과 입안에 부었지만, 리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나의 입을 손으로 잡고 입을 맞췄다. 세게, 물이 우리의 입가로 똑똑 흘러내렸다. 마치 내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L. 날 두고 가면 안 돼. 이렇게는 안 돼. 그 여자보다 내가 더 너를 원해.’
리나의 눈꺼풀이 퍼덕였다. (P352)
“메리언 아줌마, 그 책은 어디 있어요?” 나는 메리언 아줌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릴 도와주셔야 돼요. 엄마라면 도와주셨을 거예요. 게다가 아줌마는 어느 편도 들면 안 되잖아요.” 내가 비겁한 술수를 쓰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마 아줌마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가 자기 무릎에 털썩 내려놓았다. 항복의 표시였다. 애마 아줌마에게서 항복의 표시를 보게 되다니, “이미 저질러진 일은 어쩔 수 없지. 애들이 이미 실을 잡아당기기 시작했어. 멜기세덱. 그 낡은 스웨터는 어떻게든 풀릴 수밖에 없어.”
“메이컨, 규정이라는 게 있어요. 저 애들이 물어보면, 나는 속박의 주문에 따라 말해줄 수밖에 없어요.” 메리언 아줌마가 말했다. 그리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달의 책>은 루나에 리브리에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메이컨이 자리를 뜨려고 일어섰다가 우리 둘을 향해 돌아섰다. 턱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어두운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자 그의 목소리가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이 서고의 이름이 바로 그 책의 제목을 따서 지은 거니까. 그건 여기서부터 다른 세상에 이르기까지 가장 강력한 책이다. 우리 가문에 영원한 저주를 내린 책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책이 백 년 넘게 행방불명이야.” (P358)
책은 환영 속에서 보았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갈라진 검은 가죽에 자그마한 초승달이 새겨진 표지. 필사적이고 절박한 느낌이 났고, 무겁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정신적으로도. 이것은 어둠의 책이었다. 이 책을 손에 드는 순간 그냥 알 수 있었다. 책에 손끝이 긁혀서 살갗이 벗겨지기 전에 이미, 내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 책이 내 숨결을 조금씩 훔쳐가는 것 같았다.
나는 구덩이 밖으로 손을 뻗어 책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리나가 책을 받아갔고, 나는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가능한 한 빨리 거기서 나오고 싶었다. 내가 제너비브의 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델 이모가 놀라서 숨을 집어삼켰다. “세상에, 내가 이 책을 보게 될 줄이야. <달의 책>이라니. 조심해라. 이 책은 시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물건이야. 어쩌면 더 오래됐을 수도 있고, 메이컨도 놀라서.....”
“삼촌한테는 절대 알리지 않을 거예요.” 리나가 표지에 쌓인 먼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며 말했다. (P386-387)
우리가 매달릴 것이라고는 <달의 책>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리나와 내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몰아내려고 점점 더 애를 써야 했다.
<달의 책>만으로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는 생각.
“능력을 지닌 사람 사이에는 꼬인 힘들이 있고, 거기서 어둠과 빛의 모든 마법이 나온다.”
“어둠과 빛의 얘기는 이제 전부 이해한 것 같아. 그럼 중요한 해답도 알아낼 수 있을까? ‘결정이 내려지는 날의 허점들’ 말이야. ‘제멋대로 날뛰는 변이체 물리치는 법’,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는 법’도 필요해.” 나는 답답했다. 리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P448)
리나는 여전히 <달의 책>에 파묻혀서 백만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달의 책>을 내 방에 놔두면 애마 아줌마한테 들킬까 봐 배낭에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변이체를 설명한 내용이 또 있어. ‘어둠 중의 최고는 이 세상과 지하 세상에 가장 가까운 능력, 즉 자연체다. 변이체가 없으면 자연체도 없다. 어둠이 없으면 빛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봤지? 넌 어둠이 되지 않을 거야. 자연체니까 빛이야.”
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 문단을 가리켰다. “꼭 그렇지는 않아. 우리 삼촌도 방금 네가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이지만, 이걸 봐.... ‘결정이 내려질 때가 되면, 진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어둠처럼 보이는 것이 최고의 빛일 수도 있고, 빛처럼 보이는 것이 최고의 어둠일 수도 있다.’”
리나가 옳았다. 도저히 확신할 길이 없었다.
“그다음 내용은 진짜 복잡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하겠어. ‘어둠의 물질이 어둠의 불을 만들고, 어둠의 불이 어둠과 빛의 주술사들과 악마 세계에서 모든 릴룸의 능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능력이 없다면, 어떤 능력도 있을 수 없다. 어둠의 불은 위대한 어둠과 위대한 빛을 만들었다. 모든 능력은 어둠의 능력이다. 어둠의 능력이 빛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물질? 어둠의 불? 이게 뭐야? 주술사들의 빅뱅이론이라도 돼?” (P449)
리나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낙서 같은 것이 종이를 뒤덮고 있었다. 갈겨 쓴 단어들이 아니라 그냥 낙서였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종이 더미에서 종이를 한 줌 움켜쥐었다. 꿈틀거리는 선과 도형들, 그리고 낙서가 종이에 가득했다. 나는 바닥에 쌓여 있는 종이도 들어서 살펴보았다. 자그마한 원들이 줄지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책상과 바닥에 흩어진 하얀 종이 더미들을 헤집었다. 역시 낙서와 도형들뿐이었다. 종이마다 전부,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여기에 책은 없었다.
아빠는 작가가 아니었다. 뱀파이어도 아니었다.
그냥 미친 사람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이럴 줄 짐작했어야 하는 건데. 리나가 내 등을 문질러주었다.
‘괜찮아. 그냥 어려운 시기를 겪고 계시는 거야. 다시 돌아오실 거야.’
‘아냐. 아빠는 이미 선을 넘었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이젠 아빠까지 잃을 판이야.’
그동안 내내 나를 피하면서 아빠는 뭘 하고 계셨던 걸까? 낮에는 내내 자고 밤에 일한 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위대한 미국 소설을 쓸 것도 아니면서. 그냥 동그라미만 줄줄이 그려대고 있었으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서 도망치려고? 애마 아줌마도 알고 있었을까? 나만 빼고 다들 이 웃기지도 않는 일을 알고 있었던 걸까? (P469-470)
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귀나스 서클. 그거였다. 리나는 촛불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을 감았다. 초록색 불꽃이 폭발하듯 타오르며 불그스름한 오렌지색의 거대한 불꽃으로 변했다. 그 불꽃이 리나의 촛불에서 원을 그리고 선 다른 사람들의 촛불을 향해 뻗어나가 그들까지 함께 비췄다.
“리나!” 나는 폭발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지만 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꽃이 머리 위의 어둠 속으로 흩뿌려지듯 타올랐다. 불꽃이 워낙 높이 솟아올랐기 때문에 나는 그제야 오늘 밤 레이븐우드에는 지붕도 천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꽃이 뜨겁게 타올라서 눈이 멀 지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한 팔로 눈을 가렸다. 핼러윈 때의 일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P525)
“이선, 네 아빠가 발코니에 올라가 계신다니까. 금방 뛰어내릴 것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링크의 말은 들었지만,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요즘 나는 아빠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빠가 미쳤든 아니든 여전히 아빠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빠를 잃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내게 부모라고는 아빠뿐이었다.
‘이선, 너 괜찮아?’
나는 리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오늘 밤에 나는 리나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선, 내 말 들었어?”
‘이선, 얼른 가 봐. 아무 일 없을 거야.’
“야, 어서!” 링크가 나를 끌어당겼다. 록스타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링크는 그냥 나를 나 자신에게서 구하려고 애쓰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리나를 둑 갈 수 없었다.
‘널 여기 남겨두고 갈 수는 없어. 너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어.’
라킨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언뜻 눈에 띄었다. 그는 조금 전에 에밀리에게서 떨어져 나온 참이었다. “라킨!”
“응, 왜?” 라킨도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심지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언제나 무심한 표정을 짓는 사람인데.
“리나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요.” (P546)
리나는 원한이 서린 눈빛이었다. “그래서 줄곧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건가요, 어머니?”
새라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아니, 놀란 표정을 지으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새라핀의 표정이 너무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워서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이 너한테 그렇게 말하던? 난 그저 너랑 접촉하려고 했을 뿐이야. 이야기를 하려고, 그 사람들이 펼쳐둔 속박의 주술만 아니면,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야. 이건 그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야. 물론 그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나도 이해하지. 나는 어둠의 주술사이고, 변이체니까. 하지만 리나, 너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잘 알고 있잖니. 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이미 결정된 일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뀌지는 않아. 넌 내 외동딸인걸.”
“난 당신 말 안 믿어!” 리나가 뱉듯이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는 확신이 없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P565)
나는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 내가 리나와 함께 그린브라이어에 왔을 때 익혀둔 길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납골당이 가까워질수록 불길이 더 뜨거워졌다. 살갗이 벗겨져나갈 것 같았다. 실제로 내 피부가 타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묘석 위로 올라가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돌담에서 발을 디딜 곳을 찾은 뒤 최대한 높이 몸을 끌어올렸다. 납골당 위에는 조각상이 하나 있었다. 천사상 같았는데,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나는 천사의..... 정확히 어떤 부위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발목과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을 움켜쥐고 납골당 지붕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서둘러, 이선! 네가 필요해.’
그 순간 나는 새라핀과 딱 마주쳤다.
새라핀이 내 배에 칼을 꽂아 넣었다.
진짜 칼이 나의 진짜 배에 박혔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던 꿈의 결말이었다. 다만 지금은 꿈이 아니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확실했다. 내 배에 박힌 칼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놀랐니, 이선? 이 체널을 이용하는 주술사가 리나뿐인 줄 알아?’
새라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지금은 그 애가 빛으로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게 내버려둬.’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나는 만약 지금 나한테 남군 군복만 입힌다면 이선 카터 웨이트와 정확히 똑같아질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배에 부상을 입은 것도, 주머니에 로켓이 들어 있는 것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리 장군의 부대에서 탈영한 적이 없고 단지 잭슨 고등학교 농구부를 그만뒀을 뿐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원히 사랑할 주술사 아가씨에 관한 꿈을 꾸는 것 역시 과거의 이선과 똑같았다.
‘이선! 안 돼!’ (P593-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