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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고산자>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2016년

by 노용헌

훗날에 사람들이 이르기를.

일찍이 제 나라 강토를 깊이깊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의 시작과 끝. 그것의 지난날과 앞날. 그것의 형상과 효용. 그것의 요긴한 곳과 위태로운 곳을 그리는 데 오로지 생애를 바쳐 마침내 그 모든 걸 품어안은 이가 있었던바, 그가 바로 고산자라 했다. 평생 산을 그리워했으되 그 산 중에서도 옛산을 닮고,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은 꿈이 있어 스스로 고산자라 불렀다고 했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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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사람들이 아무도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평생 그 시대로부터 따돌림당했으니 그는 고산자요(孤山子)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그 뜻이 드높았으니 그는 고산자(高山子)요, 사람으로서 그의 염원이 최종적으로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산을 닮고, 그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어했으니, 그는 고산자(古山子)라고도 했다.

그의 이름이 김정호(金正浩)다. (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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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 지도란 저울과 같다.

사람살이의 저울이요, 세상살이의 균형추요, 생사갈림의 나침반이다. 손쉽게 땅의 요긴함과 해로움을 알아보게 하고, 완만한 것과 급한 것, 너른 것과 좁은 것,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미리 분별하게 할 뿐 아니라, 시기를 살펴 위급할 때엔 가히 생사를 손바닥처럼 뒤집을 수 있으니 어찌 이것을 만민의 저울이라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바람 찬 벼랑길을 걸어왔지만 후회는 없다.

아버지의 고혼(孤魂)이 등 떠밀어 향리를 떠났고 산맥과 물길과 바람을 쫓아 예까지 왔다. 마음 같아선 한달음에 달려가 판각을 끝내기 전의 저 뜨거운 필사본 대동여지도를 아버지 영전에 먼저 바치고 싶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이내 단정히 앉는다.

한달음에 서문을 쓸 것이 아니라 고향 토산골을 한번 다녀오는 게 어떨까 하고 그는 잠깐 생각한다. 마음자리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산맥처럼 준엄하게 앉아 아침해의 첫 촉수가 문살에 떨어지길 숨죽이고 기다린다. 겨울 텃새 몇 마리가 푸드드푸드드득 날아가며 문창에 흰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어떤 새의 날갯짓은 백두대간 어깨가 꿈틀거리는 것 같고, 또 어떤 새의 날갯짓은 압록강 2,034리 물길이 또아리를 트는 것도 같다.

그는 참지 못하고 빙긋 웃는다. (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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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고되고 팔이 아플망정, 판각을 하면서 언제나 그의 의중이 환하고 훈훈했던 것은 골마다 마을마다 그 자신만이 웅숭깊게 품고 사는 잊지 못할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고을에는 인정이 넘치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고, 어떤 산과 물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간신히 헤치고 나온 모험의 기억들이 깃들어 있고, 또 어떤 봉수대와 고성엔 못다 한 정한을 남기고 죽은 원혼들의 호곡소리가 깃들어 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제일 많은 기억들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산하와 순박한 인심과 비옥한 땅에서 받은 감동에 닿는다. 오래된 기억들은 묵은 술과 같아서 배고프고 무섭고 화나고 울던 일들에서조차 향기가 난다. 그 향기로운 기억들 속에서 살 양이면, 판각을 서둘러 끝낼 것 없이 숨이 다하도록 산하를 새기는 일만 하고 싶다.

“형님, 해도 너무하네요.”

바우의 걸진 목소리가 건너온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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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을 만들려면 송연묵(松煙墨)이 좋다.

송연묵이라 함은, 소나무를 태워 만든 그을음을 아교와 섞어 만든 것으로 먹색이 순하고 선명하다. 먹을 빻아 물에 탄 뒤에 술을 적당히 섞고 재주껏 찍어내야 닥종이에 먹물이 골고루 스며들고 번지지 않으면서 빨리 마른다. 바우가 술을 적당량으로 섞지 않고 찍어내 이 모양이다. 먹솔질을 너무 힘껏 했거나 기름칠을 잘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찍어서야 절첩장(折帖裝)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다 질끈 눈을 감는다. (P29)


그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언필칭 이기론(理氣論)을 주창하고 심성(心性)에 기반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도덕적 실천을 앞세웠던 애당초의 건국이념은 온데간데없고, 김씨 일족에 줄만 잘 대고 재물 있으면 현감도 떡 사듯 살 수 있는 이런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골백번을 생각해봐도, 혜강처럼 열려 있으면서 꼿꼿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늘 전통과 풍속과 예교(禮敎)를 지키되 서양 문물에 문을 아낄 것 없이 열어야 한다 했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평등히 등용해야 한다 했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상하 없이 수평을 이루되 교류해야 한다고 했지 않았던가. 그가 낸 수많은 저술들도 바로 이미 땅에 떨어진 이(理)의 절대성을 부정한 자기 이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란 붕우무별(朋友無別)이라면서 그와의 관계에서 형식적 틀을 결연히 깨뜨린 것도 그이가 시작일진대, 사소한 의심으로 그런 그이와 감정에서 멀어지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 마음자리가 협소한 탓일 게다.

다시 희끗희끗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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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가 그 무렵 말한 적이 있었다.

정호 너는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땅의 지도를 그리고, 나는 하늘 끝에서 하늘 끝까지, 하늘의 지도를 그리는 거야. 그래서 합치면 우주만물의 지도가 되는 거지.

그렇게, 총명하고 꿈이 깊은 한기였다.

쓰러진 그의 뒤를 이어 판관어른 댁 최한기 도령까지 무릎 꿇어 앉은 일이 둘러선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불문가지였다. 누각 앞 공터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말없이 연좌하고 있었다. 산벚꽃이 계속해서 무더기무더기로 졌고 새떼들은 포르르포르르릉 날았다. (P57)


아버지는 먼저 학봉산을 넘으려 했을 것이고, 적설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자 우회해 학봉산과 고달산 사이의 다른 길을 찾으려 북동쪽 방향을 잡았던 게 틀림없었다. 문제의 지도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시각을 다투어 가야 한다고 현감은 또 얼마나 으름장을 놓았을 것인가.

지도가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믿었다.

지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양면성으로 작용한다. 지도가 없으면 사람의 오감이 부풀어오를 대로 올라 스스로 지도가 되지만,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믿기 때문에 오감은 만삭의 돼지처럼 그 운명이 느려진다. 엉터리 지도가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P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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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은 꿋꿋하고 시선은 판판하다.

내일은 내일의 운세가 있을 터이다. 그는 내친김에 일찍이 방장도(方丈圖)를 처음 그린 바 있는 진나라 사람 배수(裵秀)가 설파한 여섯 가지 지도 작성의 원칙을 열거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그가 금과옥조로 삼은 기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지도를 헤아리는 분률(分率)이다.

둘째는 눈금을 활용하는 방안(方眼) 또는 준망(準望)이고, 셋째는 길이를 산출하는 도리(道理)이고, 넷째는 땅의 높낮이를 드러내는 고하(高下), 다섯째는 각(角)을 나타내는 방사(方邪), 여섯째는 돌아가는 길과 곧은길을 보여주는 우직(迂直)이다. 이 여섯 가지 원칙은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결국 한 몸뚱어리로 뭉쳐 지도가 된다. 준망이 정해지면 원근(遠近)과 곡직(曲直)이 드러나고, 분률이 정해지면 도리를 통해 고하와 방사가 나타난다. 그는 여섯 가지 원칙의 세세한 주해를 달고 곧 산맥과 물길에 대한 그의 신념을 풀어쓴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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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그를 구한 것은, 그가 아버지를 찾아내라면서 산벚나무에 둘러싸인 토산현 아문 앞에 무릎 꿇어 앉았던 날, 끝내 기진해 쓰러진 그를 안아눕히고 숟가락 물을 입에 흘려준 해주댁이었다. 해주댁의 시숙(媤叔)이 이방으로 있어 남보다 한 발 앞서 관아 돌아가는 낌새를 귀띔받았을 터였다. 땔감도 떨어져 냉방에 쓰러져 자고 있는데, 누가 흔들어 깨워 눈을 떠보니 해주댁이었다.

“이놈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해주댁은 남이 들을세라 소리를 한껏 낮춘 쉰소리를 냈다.

“해 뜨면 포졸들이 너를 잡으러 오게 돼 있대. 이번에 붙잡혀 가면 죽는 거야. 니 형이 뭐라드라. 홍경래인가 홍총각인가, 암튼 그 수하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구먼. 믿을 일인지는 모르겄다만, 참수된 니 형의 주머니에서 너와 니 애비 이름이 나왔단다. 난을 일으킨 대장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까지 도는 판에 관아 사람들이 가만히 있겄냐. 역적으로 몰리면 어찌 될지는 알고 있을 거고. 사세 그러니 어서 떠나거라.”

“우리 형, 역적 아니에요!”

“아니고 기고 이놈아, 상관없는 세상이다. 관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러게 어린 것이 관아 앞으로 나가 왜 그리 이퉁을 부렸냐. 파직된 전임 사또가 널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내가 사또래도 그렇지. 당신 벼슬을 뗀 니놈을 죽이고 싶었을 거야. 아이고야. 독한 놈인 줄 알았더니 웬 눈물바람이래. 자, 싸고 말 것 없지만, 내가 대충 꾸렸으니 이 보퉁이 어깨에 묶어라. 그리고 이건 보리개떡이다. 니 애비 꼴 나지 말고 무조건 아는 길로 해서 해주 쪽으로 가. 해주 들어가면 선창에서 육손이 아저씨를 찾아라. 내 친정오라버니다.”

해주댁은 숨 돌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어린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문갑을 뒤져 찾아낸 것은 은비녀 한 개였다.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가 남몰래 꺼내 보곤 하던 은비녀를 손에 쥐자 더욱 눈물이 났다. 물질 나가서 죽었다던 어머니의 비녀라고 했다. 보리개떡은 허리에 차고 보퉁이는 어깨에 사선으로 둘러 짊어졌다.

하늘은 별 하나 없이 캄캄했다. (P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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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만 있다면 헤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아버지도 이러다 죽었을까.

혹시 죽고 나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거나 어머니의 형상을 비로소 볼 수 있다면, 차라리 죽음의 어둔 굴속으로 끌려가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낮은 곳에선 물이라도 마실 수 있었는데 상봉이 가까워서일까. 마실 물도 없었다. 암벽과 암벽으로 이어진 험한 산이었다. 입술은 갈라졌고 혀는 감각이 없었다. 아버지도 이렇게 헤매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을 터였다.

아, 아버지......

그는 비틀거리면서 아버지를 불렀다.

정말 아버지가 나타난 게 그때였다. 아버지는 벼랑을 인 거대한 너럭바위에 앉아 있었다. 목마르겠구나, 얘야, 여기 물이 있어. 아버지가 함박 웃으며 말했다. 토산을 떠나고 나흘째 저물녘이었다.

그는 비틀비틀, 아버지를 향해 나아갔다.

이상야릇한 것은 아버지의 얼굴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늘어나고 제멋대로 넓어져서 그 모양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코가 길쭉해졌다 하면 입술 선이 고불탕고불탕해지고, 머리 끝이 뾰조록해졌다 하면 볼이 늘컹늘컹 꽈리처럼 불어났다. 아버지가 자신을 웃기려고 헛된 마술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서 웃어주고 싶었지만 얼굴 살이 도통 움직여지지 않아 속이 상했다.

눈앞이 까무룩해졌다. (P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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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서 갖고 내려온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토산과 곡산이 나타나 있는 두 장의 목판본 지도였다. 곡산이 들어 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22첩(疊) 중에서 열 번째 첩의 네 번째 판이고, 토산이 자리잡은 것은 열한번째 첩의 세 번째 판이었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22첩이 되게 분할하고 동서는 팔십 리 간격에 따라 여러 절(折)로 쪼갠 것은, 이처럼 온 백성이 필요한 판만 분리해 가볍게 소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도성에서 강릉을 가려면 제 13첩의 네 절만 지니면 될 테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전도(全圖)를 품고 다닐 필요가 없는 셈이다. 여지껏 모든 지도가 이렇게 고안되지 않은 것은, 지도는 오로지 나라의 것일 뿐이라는 관리와 사대부 들의 유아독존적인 생각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지도가 나라의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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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젖은 손이 관자놀이 솜털을 슬몃, 스치고 지났다.

봄날, 죽순들이 숨가쁘게 뻗어나올 무렵, 대나무숲 한가운데서 맡았음 직한 냄새가 혜련 스님으로부터 비밀스럽게 그에게 건너오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비몽사몽간에 있으면서 그러나 어느 순간, 말할 수 없이 깊고 푸른 갈망을 느꼈다. 죽음에 대한 갈망인 것도 같고 죽음을 넘어서는 그 어떤, 혁신에 대한 갈망인 것도 같았다. 안타깝지는 않았다. 안타깝기는커녕, 먼 길을 걸어서 마침내 어머니의 집에 당도한 것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더 완전한 지도에 대한 차갑고 옹골진 갈망과 달리, 그것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갈망이었다. 잠이 때맞추어 그를 가만가만 끌어당겼다.

그는 이윽고 고요히 잠들었다. (P164-165)


그가 청구도, 동여도를 완성시키고 마침내 필생의 꿈이었던 대동여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위당의 도움이 제일 컸던 게 사실이다. 위당이 없었다면 비변사 깊은 서고에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는 수많은 지도들을 어찌 볼 수가 있었겠는가. 때때로 재물의 도움을 받은 것도 여러 차례이거니와, 훌륭한 지도야말로 국가 방위의 근간이라 여기고 중인 신분의 그를 비변사에 드나들 수 있도록 하거나, 비변사의 전국도, 군현도등을 고루 살필 수 있게 해준 것이야말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게 하는 데 있어 결정적 지원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산자를 위해 돕는 게 아니오.

위당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나라에서 할 일을 나라에서 녹을 받는 이보다 고산자가 더 힘을 내니, 고산자를 돕는 게 나라를 돕는다 생각해서 하는 일이오. 내게 조금도 고마워할 필요가 없소.

위당 신헌은 그런 사람이다.

너른 세상의 산과 물, 산의 이어짐과 물의 이어짐, 그리고 사람살이의 온갖 터전과 그 통로와 그 역사와 그 요해(要害)를 어찌 혼자 더듬어 살펴 다 그려낼 수 있겠는가.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은 혼자 발품을 들여 그린 것이라기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품을 더 많이 활용하여 완성해낸 것이다. (P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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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한 지도를 그리고자 합니다. 이용후생입지요. 제 선친께서 일찍이 실제와 다른 지도로 억울하게 작고하셨습니다. 관아에서 내준 지도였어요. 지도란 사람살이의 흥망은 물론이고 목숨줄이 달려 있는 겁니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강토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으로는 나도 대마도, 우리 땅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적 이상이나 정치적인 목적, 판단은 제 소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시 말해 대마도를 우리 강토로 그려내도록 하는 일은, 여기 계신 대감 같은 분의 소임이지요.”

“나는 고산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혜강이 빈 술잔을 채우며 어조를 높인다.

“더구나 고산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닙니다. 비변사나 규장각 관리라면 당대의 정치적 이념이나 전략에 따라 국토를 달리 정해 그릴 수도 있겠으나, 그에 비해 고산자는 객관성을 엄격히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겠지요. 고산자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거나 그 근본이 유동적이거나 한 곳은 일단 뒷일로 미루어둔 것이고, 그것은 실학에 바탕을 둔 과학자로서 금도를 지킨 것이라 봅니다. 어떤 당대의 위정자가 여기저기를 그리라고 해서 그린다면, 다음에 다른 권세자가 빼라고 하면 또 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사구시의 과학이란 차가운 머리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고산자가 정치적 판단이 뚜렷하지 않은 곳을 지도에서 우선 제외한 것은 올바른 처사라 봅니다. 대감 생각은 어떻습니까?” (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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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지도들만 해도 그러하다.

가령 농포자 정상기의 동국지도엔, 백두산으로부터 간도 쪽 동북 방향을 향해 구부러진 실선을 그어 표시하고 토문강원(土門江原)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른 지도에는 이런 표식이 여럿 보인다. 이는 송화강 상류를 토문강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송화강 아래쪽의 드넓은 간도 지역이 조선 땅으로 편입될 터인데, 청국은 토문강을 두만강, 그러니까 도문강(圖們江)이라 한사코 주장하고 있으니 결론이 날 리 없다.

시비가 남은 국경 문제는 예민하고 유동적이다.

과학적 탐구와 빈틈없는 실측으로 지도를 그려야 하는 개인이 감히 국경 문제를 감흥에 따라 이리 그리고 저리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간도를 둘러보고자 하는 것은 그러므로 국경에 대해 분연한 소신을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대마도도 그러하고 간도도 마찬가지다. 여력이 있다면 별도의 상세도로서 대마도와 간도의 지도를 완성해보고 싶다. 우리 역사의 그림자가 오랜 세월 그곳에 걸쳐 있고, 우리 민족이 부분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회가 된다면 간도를 넘어 더 깊이 들어가 이참에 청국의 문물을 두루 살펴보고 싶기도 하다. (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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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 변방에서..... 첩자로 몰려 내가 죽는구나.

그는 상체를 일으키려고 버둥거리면서 생각한다. 어떻게 말을 지어낸다고 해도, 서간도 일대를 상세하게 그린 초벌지도에 대해 상대편이 믿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군막 너머로 얼어붙은 강이 보이고, 강 건너 아스라이 마을 한켠이 눈에 들어온다. 내 나라 강토가 저리 가까운데 갈 길이 없으니 저승보다 멀다. 지도만 없었더라도 이런 취조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환도를 든 군졸이 이윽고 칼집에서 쓱 칼을 뺀다.

“첩자가 아니라면, 지도를 그릴 리 없다!”

군교가 콧구멍을 씰룩거리며 오금을 탁 박는다.

모처럼 청명한 하늘이다. 막사의 벽 틈으로 흘러들어온 하오의 햇빛이 군졸의 환도에 반사돼 쨍 눈을 찌르고 달려든다. 그는 눈을 감고 만다. 평생 흘러 다녔던 수많은 길들이 한꺼번에 천지사방에서 쏟아져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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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東史)]에도 일찍이 이렇게 적혀 있지 않았던가

東史曰 朝鮮音潮汕 因仙水爲名

叉云鮮明也 現在東表日先明 故曰朝鮮

조선(朝鮮)이란 조선(潮鮮)이며, 그것은 천자(天子)가 있는 북쪽 나라라는 의미로 붙여진바, 선명(鮮明)하다 함은, 해 뜨는 동쪽(日)에서 달 지는 서쪽(月)까지 넓은 지역을 두로 밝혀(明)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鮮) 뜻이다.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가장 먼저 밝히니 세상에서 가장 환한 곳이 조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자신의 몫이라면, 이제 매달려 비굴하게 보전해야 할 남은 정한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첩자가 믿으면 목을..... 목을 치시오.”

그는 이윽고 환도 앞으로 목을 길게 뺀다.

길게 늘어뜨린 군졸의 쥐꼬리 같은 변발 끝이 피 젖은 어깨에 닿는다. 변발 끝은 환도 끝이나 다름없다. 아, 이것이 국경이다. 국경은..... 칼이구나. 그는 속으로 부르짖는다. 얼어붙은 압록강변의 마른 갈대밭을 휩쓸고 가는 덴바람 소리가 무참하다.

그는 부르르 떨며 눈을 감는다. (P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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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렷다?”

“네. 소인, 지도쟁이 김정호가 맞습니다.”

이윽고 부제조 영감이 묻고 그가 대답한다.

“짊어져온 것이 무엇이더냐?”

“대동여지도를 축소한 대동여지전도 목판이옵니다. 저기 통덕랑 어른께서 가져오라 하시기에....”

“왜 그런 걸 만들었느냐?”

“......”

그는 질문의 속뜻을 몰라 대청마루 위를 빤히 올려다본다.

하문하고 있는 부제조보다 오히려 신경쓰이는 게 전임 형조참판을 했다는 김성일의 부친이다. 대청마루 한가운데 좌정한 전임 형조참판은 몸이 비대하다. 안석에 기댄 채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 있어 마당에서 볼 땐 두 겹으로 겹친 턱살이 작은 구릉을 이룬 듯하다. 긴 장죽을 물고 있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는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이야말로 대청마루 위의 모든 사람들을 당당히 거느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왜 대답이 없느냐?”

부제조 영감의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진 쉰소리다.

“그게, 그러니까, 제 뜻은.....”

“네놈이 대동여지도 목판을 만든답시고, 전에 여기, 참판어른 산판의 피나무를 무단으로 베었다는 건 내 진즉에 들어 알고 있다. 그것만 해도 죄가 크거늘, 만약 거짓을 보태다가는 살아서 저 대문을 나가지 못할 줄 알아라. 의금부에 일러 네놈을 잡아 족칠까도 했다만, 기밀을 요하는 문제라서 일의 전후를 먼저 알아보고자 이곳으로 부른 것이 너로선 오히려 천행일 것이다. 다시 묻겠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더하여 저기 있는 대동여지전도 목판본을 만든 건 무슨 까닭이냐.”

“특별한 까닭은 없습니다. 대감마님.”

“없다? 지도란 무릇 나라의 것이다. 너는 중인의 비천한 신분일진대. 지도를 목판으로 만들어 시정잡배들에게까지 내돌리면서 까닭이 없다?”

“다른 뜻은 없사옵고, 다만, 다만 천한 것들도 양반님네 못지 않게 그 생업을 추스르는 데 있어 정확한 지도가 꼭 필요한지라. 오로지 그 생업을 돕고자....”

“허어, 이놈이 방자하기가 듣던 바와 같도다. 하면, 조정에서 지도를 내돌리지 않아 천것들이 생업을 해가는 데 지장을 받고 있다 그 말이냐?”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감마님.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 소인은 답답할 뿐입니다. 저기 계신 통덕랑 나리께 제 뜻은 이미 소상히 일러드린 일도 있거늘, 나리, 통덕랑 나리, 뭐라 말씀 좀 해보시지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하며 소인을 불렀지 않습니까?”

“.....”

김성일은 아무 대답도 없이 짐짓 딴 데를 본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듯한 낯선 표정이다. 해는 그사이 많이 기울어서 담장의 그림자가 사랑마당 끝까지 뻗어나가 있다. 땅바닥에 꿇고 앉은 무릎뼈가 시리고 아프다. 봄이 막 시작될 즈음이라 해도 밤이 되면 때로 얼음이 어는 계절이다. 벌써 이각(二刻) 넘게 무릎 꿇고 앉아 있었으니 오금이 저리고 시릴 수밖에 없다.

“안 되겠다. 저놈을, 쳐라!”

부제조 영감의 목소리가 쇳소리로 솟는다. (P27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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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마님!”

그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 부른다.

그것은 간도의 혼강과 압록강변에 있는 임강 사이의 지세(地勢)를 그린 것이고 글로 주석을 단 것이다. 얼어붙은 간도를 목숨 걸고 북동진하면서 그린 여러 초벌지도 중의 한 장임에 틀림없다. 새카만 손과 싯누런 앞니를 가진 땅딸한 청나라 군교가 전광석화처럼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처럼 첩자로 몰려 모진 매를 맞았었지. 혹독한 추위 때문에 북간도를 살피는 걸 포기하고 압록강을 넘어오려다가 붙잡혀 생겼던 일이다. 소중한 서간도 일대의 초벌지도는 물론이고 어머니의 은비녀까지 다 빼앗긴 채, 캄캄한 한밤을, 구사일생으로 도망쳐나온 임강에서 잃었던 것을, 겨우 초벌지도 한 장에 불과할망정,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놀라워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말해보라, 네가 그린 게 아니더냐?”

“아닙니다. 대감마님. 이것은..... 제가 그, 그리고 쓴 것이 맞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다만..... 간도에 우, 우리 조선 백성이 많이 살고 있는지라, 평생 오로지 지도만 그려온 사람으로써..... 그 땅의 형상과 요해(要害)를 알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 이것은, 추위 때문에 압록강을 넘어 나오려다가 청나라 군교에게 붙잡혀 수색을 당해 모조리 뺏긴 초벌지도 중의 한 장이 틀림없습니다.”

“군교에게 붙잡혔다는데 어찌 살아 돌아왔느냐?”

“저들의 졸개 중에..... 조선 백성이 있었습니다. 한밤중 저의 결박을 풀어주고..... 저의 눈이 되어 함께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습지요. 본디 만포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

“소인이 거짓을 아뢰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네놈이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넘기고 그 값으로 풀려난 게 아니더냐. 조선의 첩자로 생각했다면 저들이 보상 없이 그리 손쉽게 너를 놓쳤을 리 없다.”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제가 어찌 간도 그 먼 곳까지,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들고 갔겠습니까. 그때는 더구나 집을 떠난지 일 년이나 됐을 때였습지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소인을 의금부로 넘겨주십시오.” (P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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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신심이 깊을 대로 깊을지도 모른다. 그가 집을 비운 오랜 세월 동안, 여주댁을 어머니처럼 생각해 드나들어온 순실이다.

“순실이도 세례명이라든가, 서양 이름을 가졌었던가.”

“참 내, 아버지인 형님이 모르는 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무슨 아버지라고..... 집을 비운 적이 더 많은 사람이라, 면목이 없네.”

“제가 아는 한, 순실이에겐 아직 서양 이름 없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형님.”

“내 죄업이 많으이.....”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쉰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순실이에겐 정말 모질고 못된 아비였을 것이다. 이대로 그애를 잃는다면 그 원결과 회한은 구천에 닿을 게 틀림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할 참인데, 붙잡을 지푸라기 하나 없으니 막막하다.

평생 사나이로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던가 싶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를 그리고 그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백번 이롭게 했다 한들, 그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알아주는 이도 드물고, 나라에선 오히려 그걸 빙자해 목줄을 조인다. 짐승에게 잡아먹힐 뻔하거나, 청국은 물론 내 나라의 관리들에게 목이 달아날 뻔했을 때에도, 꿈이 워낙 깊고 높았던지라, 일찍이 지도를 그려온 일을 진실로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 돌아보니 평생의 삶이 헛것인 양 덧없다.

갑자기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다. (P3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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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께 한 가지 요긴한 청이 있습니다.”

“청이라니요. 일어나 말씀하시지요. 상중인 듯하고.”

“예, 나리, 사, 사실입니다. 평생 우의를 나누었던 소중한 세 명의 동무를 며칠 새 잃었습니다. 아울러 소인이 그린 대동여지도 또한 죽었다고 여기고.....”

“대동여지도가 죽다니요?”

“한평생 그걸 그리기 위해 살았으나 그로 인해 아이를 팽개쳐두어 죽게 만들었으니 대동여지도가 대신 죄를 받아 죽어야 마땅하다 여겼습니다. 또한 소인도 곧 죽을 것입니다. 만장의 석장은 죽은 동무들을 위한 것이고, 한 장은 곧 죽을 소인을 위한 것이고, 한 장은 소인이 그린 지도의 죽음을 애도한 것입니다.”

“허어, 영문을 모르겠소이다. 죽게 만들었다는 아이는 무엇이고, 또 세 사람의 동무가 며칠 새 죽었다는 것은 무엇인지.....”

“동무 하나는 또라젓을 좋아했고, 또다른 동무 하나는 화각장을 좋아했습니다.”

“그렇다고 만장을 이리 쓰시다니요. 그나저나 나머지는 금량관이라 쓰셨는데, 금량관이라 하면 벼슬이 정승판서에 이를 터, 어찌 어르신께서 동무라고 할 것이며, 또 그런 분이 최근 죽었다하면, 당연지사 나부터 알 것인데.....”

“자세한 사연은 차마 말씀 못 드립니다. 다만 대동여지도와 소인 자신이 죽었다 하는 것은 좀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리석은 제 자식 때문에.....”

“말씀하시구려.”

종사관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만장에 지도를 박아넣은 것은 기실 종사관에게 설명한 것과 그의 속뜻이 사뭇 다르다. 대동여지도란 곧 조선 강토인바, 장죽을 문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심중으로 보면 망하고 말 조선에 대한 만장이다.

조선은 머지않아 망할 거외다. (P3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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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뭘 하고 살라우?”

배가 막 출발하는데 바우가 또 묻는다.

“그야..... 지도를 그리지.”

그가 미소짓고 대답한다.

“아이구, 형님. 어찌 살려고 또 그놈의 지도를 그려요?”

“이제, 바람이..... 가는 길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길을 내 몸 안에 지도로 새겨넣을까 하이, 오랜...... 옛산이 되고 나면 그 길이 보일걸세. 허헛. 내 처음부터 그리고 싶었던 지도가 사실은 그것이었네. 그 동안 자네 신세가 많았어.”

“형님.....”

마침내 배가 떠나고 바우만 부둣가에 남는다.

돛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좋은 바람이다. 물 위의 길은 바람에 따라 생겨나고 바람 끝을 따라 또한 이내 지워진다. 그는 뱃전에 서서 삽시간에 멀어지는 마포나루를 본다.

햇빛이 투명하고 한없이 희다.

이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다. 어떤 이는 조선의 명운이 다한 을사년(1905년)까지 무려 백 살이 넘게 살아서 그가 은애(恩愛)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걸 보았다고도 했고, 어떤 이는 그가 일찍이 남몰래 보아둔 옛산에 들어가 푸른 정기에 기대 살아 백 살이 넘고도 젊은이처럼 먹고, 일하고, 자주 환하게 웃었다고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혜련 스님을 부처로 알고 지극히 모시기를 멈추지 않아 마침내 이승에서 사랑의 완성을 보았다고도 했지만, 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나라가 망하고도 그가 믿었던 유장한 강과 우뚝한 산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무궁한 것은, 훗날 그 강토에서 사는 사람들이 본 그대로다. (P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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