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방황하는 칼날> 2009년
<방황하는 칼날>(2014)
에마는 올해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의 눈에는 다른 평범한 소녀들만큼 밝고 건강하게 자란 것처럼 보인다. 엄마를 여의었던 열 살 무렵에는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며 방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지만 용케 밝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딸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지금은 “아빠, 좋은 사람이 있으면 재혼해.”라고 자신을 놀릴 정도다.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리라. 정말로 자신이 재혼한다고 하면 강한 거부감을 보이리란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가 자기 나름대로 엄마의 죽음을 극복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지금 학교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갔다. 이를 위해 그는 딸에게 유카타(일본의 전통 의상으로 평소에 입는 간편한 옷)를 사주었다. 하지만 아직 유카타를 입은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혼자 입을 수 없다면서, 친구 어머니에게 입혀 달라고 하겠다고 가져간 것이다. 그는 유카타를 입은 모습을 꼭 사진으로 찍어오라고 했으나 그녀가 그 말을 기억할는지는 심히 의심스러웠다. 에마에게는 즐거운 일에 빠지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는 나쁜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카메라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찍혀 있는 것은 모두 친구들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P9)
가이지와 아쓰야의 움직임은 기가 막힐 정도로 신속했다. 그들은 일단 차를 세우고 소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가자.”라는 가이지의 말을 신호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일단 아쓰야가 소녀를 추월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등 뒤에서 가이지가 소녀를 덮쳤다. 조금 전에 준비한 클로로포름 손수건을 소녀의 입에 댄 것이다. 소녀의 발이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소녀의 몸을 잡고 동시에 마코토 쪽을 쳐다보았다. 빨리 차를 가져오라는 뜻이다. 마코토가 옆에 차를 대자 그들은 소녀를 가운데 두고 뒷자리에 올라탔다. 손발이 착착 맞는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많이 이 같은 일을 반복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코토가 물었다.
“도착하기 전에 눈을 뜨면 어떡하지?”
“당분간은 눈을 뜨지 않을 거야.”
“눈을 뜨면 또 클로로포름 손수건을 입에 대면 되지, 뭐.”
“그건 안 돼. 잘못하면 죽을지도 몰라.” (P21)
만 하루가 지나자 경찰에서는 유괴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에게 매스컴에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선뜻 동의했다. 사건을 공개하는 편이 수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경찰의 판단을 믿은 것이다.
그는 흐느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몹시 무겁고, 권태감이 피부 속까지 파고들었다. 생각할 기력조차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에 수염의 거친 감촉과 기름기의 번지르르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는 자신이 세수조차 하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일어서려고 천천히 허리를 들었을 때,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베갯맡에서 무선전화기의 착신램프가 깜빡거렸다.
텔레비전 뉴스가 나간 이후,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친척과 친구, 회사 동료 등 모두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걱정하지 말게, 무사할 테니까.’.... 다들 아무런 근거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귀찮기만 한 그런 전화에 그는 계속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제발 그냥 내버려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또 그런 전화인가? 아니다. 분명히 에마에 관한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는 전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는 그렇게 직감했다.
그는 무선전화기를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가미네 씨 댁이죠?”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다.
“그런데요.”
“나가미네 시게키 씨인가요?”
“네.”
그러자 상대는 한 박자 쉬고 나서 말했다.
“여긴 경시청인데요, 실은 따님인지 아닌지 확인해주셔야 할 시신이 발견되어서요.....”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P38-39)
사체의 신원을 밝히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체 특징이 가우구치 시에서 행방불명된 열다섯 살 소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지문을 조회한 결과, 지문 역시 일치했다. 경찰서에서 아버지인 나가미네에게 연락한 것은 이러한 확인절차가 끝난 다음이었다.
경시청 수사1과의 오리베는 반장인 히사쓰카와 함께 나가미네의 사체 확인에 입회했다. 조토 서에 도착한 나가미네는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실제로 딸의 처참한 모습을 봤을 때는 마지막 기력을 쏟아내 울부짖었다. 그의 절규와 분노와 울음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되었다. 오리베는 그의 깊은 슬픔에 압도되어 도저히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라도 좋으니까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라는 히사쓰카의 말에 그는 놀랍게도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의 얼굴을 보고 오리베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기를 모두 소진해버린 듯 울고 난 그의 얼굴에는 범인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
히사쓰카는 조터 서의 응접실을 빌려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장인 히사쓰카가 직접 유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P41)
히사쓰카는 외견상 사체에 상처가 없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에마의 팔에는 주사에 의한 내출혈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사를 놓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사를 놓은 방법도, 주사를 놓은 위치도 엉터리였으므로 의사나 간호사가 놓은 게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각성제다. 형사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했다. 오리베도 그러하고, 히사쓰카도 그러하다. 한꺼번에 다량의 약물을 투여하면 드물긴 하지만 급성 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
물론 히사쓰카의 말처럼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어쩌면 에마는 독살되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주사는 직접적인 사인과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현재까지 알고 있는 사실만이라도 아버지에게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오리베는 생각했다.
밤이 이슥할 무렵, 부검 결과가 나왔다. 오리베를 비롯한 히사쓰카 반 형사들이 모두 경시청 회의실에 모였다.
서류를 손에 들고 히사쓰카가 토해내듯 말했다.
“사인은 급성심부전. 체내에 남아 있던 소변에서 반응이 나왔어. 마약이야.” (P45)
별안간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은 커다란 기계에 있는 하나의 톱니바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계에서 톱니바퀴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강한 불안과 공포가 그의 가슴을 압박했다. 가벼운 휴대전화가 돌연 무겁게 느껴졌다. 에마는 이 휴대전화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이어져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줄기 희망에 매달려 이 휴대전화번호를 눌렀을까?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전원을 켰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양 액정화면에 고양이 사진이 나타났다.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일까?
그는 부재중 수신번호를 보기로 했다. 그녀를 차에 집어넣은 다음, 딱 한번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은 누구에게 걸려온 전화였을까? 만약 5분만 빨리 전화가 걸려왔다면, 어쩌면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액정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아빠’였다. 날짜와 시간은 틀림없이 불꽃놀이가 있었던 날 밤이다.
그는 재빨리 전원을 껐다. 가슴 깊은 곳에서 허무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휴대전화를 다시 책상 속에 집어넣고 침대에 누웠다. (P60)
그는 전단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으로 괜찮을까? 뭔가 예상치 못한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정보를 제공하려면 여기에 쓰여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하는 수밖에 없다.
다음 순간, 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에마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단지에는 에마의 집 전화번호는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집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리라. ‘아빠’라는 마지막 부재중 전화가 집 전화번호일 것이 틀림없다.
그는 핑크빛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P80)
‘....... 이건 장난전화가 아닙니다. 경찰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메시지의 종료를 알리는 전자음과 함께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전화기로 뛰어가서 테이프를 감고 두 번째 메시지를 재생했다.
‘여보세요? 나가미네 씨 댁이죠? 에마 양은 스가노 가이지와 도모자키 아쓰야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이건 장난전화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마 양을 죽인 범인은 스가노 가이지와 도모자키 아쓰야라는 사람입니다. 아쓰야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든 것은 손수건 따위로 입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남자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나이는 추측하기 힘들었다. 남자는 아쓰야라는 사람의 주소를 천천히 말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아쓰야의 우편함 안에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집 안에 들어가면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비디오테이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장난전화가 아닙니다. 경찰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는 잠시 망연히 서서, 전화기에 시선을 멈춘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누가 이런 전화를 건 거지? (P85-86)
그는 이윽고 괴전화의 남자가 말한 주소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낡은 2층짜리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아파트로 다가갔다. 녀석의 집은 1층이라고 했다. 그는 문에 붙어 있는 호수와 문패를 힐끔 쳐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있다........!
문패에는 ‘도모자키’라는 성만 있을 뿐, 이름까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일단 그 문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아파트를 지나 나타난 모퉁이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심장이 종을 치듯 쿵쾅거렸다.
주소는 엉터리가 아니다. 도모자키 아쓰야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해두었다.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두려움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쨌든 불법침입이다. 아무리 피해자의 아버지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으리라.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그러면 다음 일은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주리라. 그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범인의 체포만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의 증오와 슬픔을 범인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에마에게 일어난 불행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경찰에 신고하면 그런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까? 아마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래서 피해자의 유족을 소홀히 대하는 현재의 재판제도가 종종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결심했다. 내 손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내 손으로 증거를 잡아, 범인의 눈앞에 들이밀자. 그리고 왜 아무 죄가 없는 에마에게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추궁하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P93-94)
나가미네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처음에는 집주인이 오면 창문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빨리 실내를 둘러본 그의 시야에 싱크대 위에 놓여 있는 식칼이 들어왔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서 식칼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신발장 대신 놓여 있는 철제 선반 뒤에 몸을 숨겼다. 현관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상대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어깨가 좁은 소년이다. 헐렁한 티셔츠에 회색 힙합 바지를 입고 있다.
그 녀석이다! 아쓰야인지 가이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중 하나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키도, 머리카락의 색깔도 화면에서 본 것과 똑같다. (P101)
나가미네는 계속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상사에게 잠시 쉬겠다고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쓰야가 살해당하기 전날 밤의 일이다. 니시아라이 서 수사본부는 아쓰야를 살해한 범인이 나가미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의 직장에서 소지품을 압수해 지문을 조사했다. 그 결과, 그의 지문이 아쓰야 살해에 사용된 식칼에 있던 지문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가미네는 딸을 잃은 피해자 가족에서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걸음을 내딛으며 오리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나가미네 씨가 아쓰야를 죽인 걸까요?”
“나가미네 씨라..... 하긴 지금으로선 아직 ‘씨’자를 붙여야겠지.”
그 말에서 마노가 나가미네를 범인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런 말을 하는 건 형사로서 자격 미달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말하지 마.” (P116)
아쓰야를 죽임으로써 복수가 허무한 일이라는 사실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또 하나의 짐승을 방치해둘 수 없다. 그것은 에마에 대한 배신이다. 그녀를 괴롭힌 짐승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그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면 법원은 범죄자에게 정당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아쓰야와 마찬가지로 가이지도 미성년자이리라.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그 인간쓰레기들이 빼앗은 것은 에마의 인생만이 아니다. 그들은 에마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탁자 위에 있는 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가방 속에서 만년필과 문구점에서 산 편지지를 꺼냈다.
친지들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많은 폐를 끼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호기심의 눈길을 견뎌야 하고, 매스컴도 끈질기게 따라다니리라. 이렇게 편지로 사죄해봤자 아무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P128-129)
“그래. 나가미네는 아마 아이치 현에 없을 거야. 아이치 현에서 보낸 건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작은 목적일 거야. 나는 이 편지에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
“그게 뭐죠?”
히사쓰카는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나가미네는 언젠가 자기가 지명수배되리라고 각오하고 있을 거야. 그때는 그가 가이지를 쫓고 있다는 것도 세상에 알려지겠지. 문제는 그 소식을 접한 가이지가 어떻게 나오느냐는 거야. 조금 전에도 말한 것처럼 우리로선 가이지가 자진 출두해주면 더할 나위가 없이 바람직한 결말이지. 하지만 그것은 나가미네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야. 복수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니까.”
오리베가 다시 편지의 내용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그걸 막는 게 이 편지의 최대의 목적이라는 건가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지만, 이런 편지가 도착하면 경찰로서는 공표하지 않을 수 없지. 그때는 반드시 소인에 대해서도 언급할 거야. 그런 경우에 소인이 아이치 현으로 되어 있으면, 가이지가 경찰에 출두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왜죠?”
다른 형사의 질문에 마노가 대답했다.
“가이지는 아이치 현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지. 아마 뉴스를 본 가이지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 ‘뭐야? 나가미네는 내가 있는 곳을 모르잖아? 그렇다면 살해당할 우려가 없으니 경찰서로 도망칠 필요는 없겠군.’ 하고.......”
히사쓰카가 마노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말하면 나가미네는 가이지가 있는 곳을 대강 짐작하고 있다는 말이 되지. 그래서 아이치 현을 선택한 거야. 만약 정말로 가이지가 아이치 현에 숨어 있다면 이 편지로 인해 자진 출두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상사들의 추리에 오리베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히사쓰카가 설명해줄 때까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P179-180)
커피를 준비하면서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확실한 의지나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에게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망설이고 있다.
그러나 신고하려는 마음이 희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끔찍한 영상을 보았을 때, 그녀가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막연히 상상했던 그의 분노와 슬픔이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왔다. 그러자 아무 생각 없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경박한 행위처럼 여겨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러나 그 대답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내일 아침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를 보내면 될까? 그것은 단지 귀찮은 일에서 도망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쨌든 그와 얘기하자, 이것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와 얘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시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한 아이의 부모였던 사실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P272-273)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지금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면 내일 아침까지 머물러주세요. 이런 시간에 가셨다고 하면 아버지는 반드시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아버지가 추궁하면 저는 어떻게 해명해야 하죠? 어쩌면 그걸 계기로 아버지가 당신의 정체를 눈치 챌지도 몰라요.”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오늘밤 잘 곳이 있다는 건 저에게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연민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다만 부조리한 사건에 의해 인생의 톱니바퀴가 어긋남으로써 이런 처지에 처한 것이다. 나쁜 짓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복수해야 하는 고통, 그 복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절망-- 그것과 싸우면서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기...... 그 사진, 지금 가지고 계세요?”
“사진이요?”
“저에게 보여주셨던 소년의 사진이요.”
“네,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잠시 보여주실 수 있나요?” (P283)
“이번 사건에 관해서 말이야. 자네가 할 일은 가이지를 찾아내는 거네. 그래서 에마 양 죽음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나가미네에게서 복수할 기회를 빼앗게 되는 거지.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원한을 불완전한 상태로 봉인하는 걸세. 그런 상황에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나?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자네와 나뿐일세. 솔직히 말해보게.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테니까. 어떤가?”
히사쓰카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나서 즉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등을 쭉 폈다. 그리고 침을 집어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가미네 씨가 저희들보다 먼저..... 저희들보다 먼저 가이지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복수를 포기했으면.....”
히사쓰카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잠깐만, 지금 솔직히 말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지.”
“네.......?”
“나가미네가 정말로 복수를 포기하기 바라나?”
“아, 그건.......”
그는 일단 시선을 내리깔고 나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 솔직한 심정은 나가미네 씨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326-327)
그렇다. 분명히 펜션이라고 했다.......
2개월쯤 전이다. 여느 때처럼 아쓰야가 차를 빌려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목적이 여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쨌든 그는 핑계를 대고 그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차를 돌려받을 때, 어디에 갔었냐고 물어보았더니 가이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어디까지 갔는지 알아? 나가노까지 다녀왔어.”
“나가노? 나가노는 왜?”
“아쓰야가 꼬신 여자애가 드라이브하고 싶다지 뭐야? 그래서 냅다 고속도로를 달렸지. 그게 어디쯤이었더라? 어쨌든 나가노야. 한적한 곳에서 내려서 산길로 들어갔더니, 여자애가 무서운지 비명을 지르더군. 그래서 조용히 하라고 칼로 위협했지.”
두 사람은 성폭행할 장소를 찾아서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이미 폐업한 펜션이었다.
“우린 창문을 깨고 몰래 펜션으로 들어갔어. 문을 닫은 지 얼마 안 됐는지, 아직 침대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더라고. 그래서 아쓰야와 함께, 무슨 일이 있으면 아지트로 사용하기로 했어.”
그때는 특별히 기억해둘 만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방약무인한 행동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비상식적인 말을 해도 웬만해서는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난 것이다.
틀림없다. 가이지는 지금 그 펜션에 있다. (P328-329)
변호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군요. 이름이 드러나는 게 싫다면 처음부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미성년자들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건 자신들의 이름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녀석들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사는 일종의 제재라는 건가요?”
“그런 의미도 있지요.”
“의미 정도가 아니라 지금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면 분명히 그것을 노린 것 같은데요. 그건 대단히 오만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변호사는 편집장이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을 가로막고 말을 이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제재는 정당한 장소에서 정당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매스컴이 사람들의 여론을 유도해서는 안 되지요. 그들은 어차피 사회적 제재를 받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우리 어른들은 그걸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쓸데없이 사회적 제재만을 확대하면 그들의 갱생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걸 모르시죠?”
“저희는 그 제재 부분이 약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의 소년법으로는 도저히 현실에 맞게 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뭔가 오해하고 있군요. 소년법은 미성년자를 재판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잘못된 길로 나아간 미성년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거죠.”
“그러면 피해자 입장은 어떻게 되죠? 그들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줍니까? 가해자를 도와주는 게 올바른 일인가요?”
“그건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P378-379)
가이지와 같이 도피생활을 했던 소녀를 찾았다는 뉴스를 나가미네는 다카사키의 비즈니스호텔에서 보았다. 물론 뉴스에서는 가이지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 그는 가이지가 고모로의 펜션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간발의 차이로 경찰에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나 와카코나 그녀 아버지의 호의가 없었다면 지금쯤 가이지에게 복수는커녕 자신이 잡혔을 것이므로 운이 좋았다고 여기는 편이 나으리라. 그리고 경찰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고 해도 가이지를 만날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형사들도 가이지를 놓쳐버렸으니까.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그때까지 어두컴컴했던 실내가 단숨에 쏟아져 들어온 화려한 햇빛으로 가득 찼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카사키의 거리는 이미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P458)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이 커피숍에 있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아무 죄도 없는 여고생이 성적 노리개로 고통당한 끝에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아버지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까? 그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잠시 머릿속에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뉴스가 바뀌면 그들의 관심도 바뀐다.
그러나 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년범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으냐? 그렇게 물으면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
단, 에마는 공범자가 아니다. 에마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그녀에게 속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이지 같은 인간쓰레기를 만들어낸 것이 그를 비롯한 어른들이니 그 뒤처리 또한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다. 뒤처리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때로는 ‘갱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도저히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세상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괴물’을, 사람의 힘으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P481-482)
오리베는 가슴에 손을 대고 권총의 존재를 확인했다. 무전기를 통해 들은 히사쓰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권총을 휴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야. 절대로 나가미네가 발포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 권총은 그러기 위해서만 사용해야 해!”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히사쓰카의 지시는 구체적이지 못하다. 대체 어떤 상황에서 권총을 사용하라는 것일까? 나가미네를 위협할 때 사용하라는 것일까? 하지만 과연 나가미네에게 위협이 통할까? 경우에 따라서는 나가미네의 발포를 막기 위해 경찰이 먼저 총을 쏠 수도 있다. 그러면 나가미네가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장소에서 사냥총을 발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가미네의 목표는 오직 가이지다. 그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으리라. 즉, 그가 총을 쏘는 것은 가이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뿐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가미네를 죽여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경찰의 입장인 것이다.
오리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총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총은 가이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총이다.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짐승만도 못한 그 녀석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총인 것이다.
오리베의 가슴에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우리의 일은 법을 어긴 사람들을 잡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악을 없앤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악을 없앨 수 있을까? 죄인을 격리한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일정 기간 보호받은 죄인들은 세간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죄를 저지른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누구에게도 보복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가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오리베의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똬리를 틀었다.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그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로 ‘악’을 차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P507-509)
나가미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늘의 도움이다. 가이지가 형사들에게 잡히기라도 했다면 사냥총을 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런데 가이지는 인질을 잡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 그 덕분에 형사들이 다가가지 못하고, 관계없는 사람이 휘말리게 될 위험도 줄어들었다.
경찰은 서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이지를 설득하는 형사들에게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이제 가이지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기는 것이리라.
가이지는 여전히 큰소리치고 있다.
“꼼짝하지 마! 가까이 다가오면 모두 죽여버리고 말겠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녀석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세 살짜리 어린애라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더구나 수많은 형사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치려는 것인가.
그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가이지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가 사회적 상식을 습득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기형적인 녀석이라고, 화내고 소리치고 발버둥 치면 주위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에마는 그런 자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원하는 것처럼, 이 녀석도 성(性) 놀이에 필요한 장난감을 원했을 뿐이다. 이 녀석에게 에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가 급격히 좁아졌다. 그의 눈에는 이미 가이지의 모습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이지가 인질로 잡고 있는 소녀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귀에 들리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P520-521)
오리베는 자신도 모르게 총을 겨눴다. 다리를 노릴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는 나가미네의 등을 조준했다. 만일 빗나간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콤마 몇 초 사이에 오리베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총알이 어디에 맞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삽시간에 나가미네의 등이 붉게 물드는 광경은 지금도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나가미네가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보도교 위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가미네는 여전히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이지가 형사들에 의해 순찰차로 떠밀리고 있다. 가이지는 저항을 포기한 듯 보였다.
자네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정말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가이지를 지키기 위해서 나가미네를 쏘았다. 그것은 정말로 옳은 판단일까? (P528)
히사쓰카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그렇게 말한 후, 히사쓰카는 잠시 말을 끊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경찰에 몸담고 있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네.”
마노가 말했다.
“반장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이 사실을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반장님..... 아니, 수수께끼의 정보제공자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가 한 일이 정의였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음 순간, 온화했던 히사쓰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일 뿐, 그의 얼굴에는 즉시 미소가 돌아왔다.
“글쎄, 어떨까? 아무튼 결말이 그렇게 되었으니 옳았다곤 할 수 없겠지. 그러나 정보제공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놓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옳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마 가이지와 아쓰야는 체포되고, 형식적인 복역을 마친 후 세상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면 그들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다시 제2, 제3의 에마가 시체가 되어 강물 위로 떠오를 걸세. 그게 행복한 결말일까?”
마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히사쓰카의 시선이 오리베에게 옮겨지자 오리베는 고개를 숙였다.
히사쓰카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렇겠지.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네. 무참하게 살해 당하는 자식을 두 눈으로 지켜본 부모에게, 법이 그러니까 참고 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 (P534-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