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인 가의 저주The Dain Curse> 1978년
“아직은 요. 저는 경찰이 아니라 보험 회사의 의뢰를 받은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의 탐정입니다. 이제 막 수사를 시작했지요.”
“보험 회사요?”
그의 목소리는 놀란 듯했다. 짙은 색 눈썹이 역시 어두운 색 뿔테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예, 모르셨습.....?”
“그렇죠. 그렇겠죠.”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휘휘 저어 나의 말을 멈췄다. 정교한 작업을 하는 손이 대개 그렇듯 손끝이 지나치게 발달된, 길고 가는 못생긴 손이었다.
“당연히 보험을 들었겠지요. 그 생각은 못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다이아몬드가 아니었으니까요. 그건 할스테드의 소유였죠.” (P13)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던 서랍장은 여섯 개의 서랍이 한데 걸려 잠기도록 만들어진 녹색으로 칠한 강철 제품이었다.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던 위에서 두 번째 서랍은 열려 있었다. 서랍과 틀 사이로 쇠 지렛대나 정 같은 것을 쑤셔 넣은 듯 움푹 팬 자국이 있었다. 다른 서랍들은 아직 잠겨 있었다. 레게트 씨는 도둑이 다이아몬드가 있던 서랍을 억지로 열다가 서랍장의 잠금 장치가 완전히 망가져 다른 서랍을 열려면 기술자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혼혈 가정부가 진공청소기를 밀고 다니는 방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뒷문 문틀과 문에 서랍장처럼 흠집이 나 있었다. 같은 도구를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P19)
프리슬리 부인은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종종 집 앞 창문가에 앉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밤 중 두 번, 그 남자를 보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는 키가 크고 젊으며, 고개를 앞으로 쭈욱 빼고 걷는다 하였다. 거리가 어두워 피부와 머리색이나 옷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그를 처음 본 것은 한 주 전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지켜보거나 찾는 것처럼 프리슬리 부인과 레게트 씨 댁이 있는 쪽을 보면서 약 15분에서 20분 간격으로 대여섯 번 정도를 거리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였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새벽 1시쯤이었다고 하였다. 며칠 후, 토요일에 한 번 더 보았는데 이번에는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정쯤 아래쪽 길모퉁이에 서서 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노라고 했다. 약 30분 후 사라졌으며 그 후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고도 하였다. (P23-24)
나는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마흔 정도 된 남자로 퉁퉁하고 창백한 얼굴에 희끗희끗하게 세기 시작한 짧은 머리와 숱 없는 짙은 색 콧수염을 길렀고, 팔다리는 짧고 통통했다. 배꼽 바로 위와 가슴 왼쪽 높은 곳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다.
“남자고, 죽었지.”
내가 시신 위로 담요를 다시 덮자 오가르가 말했다.
“달리 아는 거 없고요?”
“이자랑 다른 놈 하나가 보석을 훔치고는 다른 놈이 혼자 꿀꺽 하기로 한 모양이야. 봉투도 여기 있지.”
그 말과 함께 오가르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엄지로 넘겨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없다 이 말씀이야. 바로 조금 전에 화재 비상구로 도망친 다른 놈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지. 몰래 빠져나가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보긴 했는데 골목을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놓쳤다는군. 코가 길고 키가 큰 놈이래.”
그가 봉투로 침대 위를 가리켰다.
“이놈은 여기 일주일 정도 있었고, 뉴욕 출신 루이스 업튼이라는 자야. 그것 말고는 알아낸 게 없네. 이 동네 사람 누구도 그가 다른 이랑 있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하는군. 그 코가 긴 놈을 아는 사람도 없고.” (P32-33)
“하지만 이게 무언가 근사한 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요. 레게크가 범죄자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싸구려 보험 사기 이상의 것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가 대단한 음모의 주동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신문 좀 읽었구먼? 그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나? 주류 밀매의 왕? 국제 범죄단 두목? 백인 노예 거물? 마약 밀매단 보스? 아니면 남자로 변장한 위조의 여왕?”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하지만 그가 머리가 좋은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의 내면에 시커먼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생각에 관한 한 머리가 핑핑 도는 것들에 목말라하면서도 언제나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냉정하다는 거 말씀드렸잖아요. 그는 광기로 생각을 잔뜩 취하게 만들면서도 몸은 언제나 건강하고 민감하게 만들어 놓는 노이로제 환자예요. 도대체 뭘 대비하기 위해설까요? 정신이 그렇게 취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차갑고 멀쩡하기도 하죠. 잊고 싶은 과거가 있다면 몸으로, 그러니까 감각적 자극을 이용하면 가장 쉽게 그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어요. 물론 마약도 좋고요. 하지만 과거가 죽어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이 현재에 나타날 것을 대비해 언제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요. 그렇다면 몸은 튼튼하게 유지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신을 마취시키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겠지요.”
“그래서 이 과거라는 게 뭔가?” (P40-41)
교차로에 닿기 직전 푸른색 세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아슬아슬한 순간 콜린슨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하여 핸들을 트는 데 성공했으나 깔끔하게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단 몇 센티미터 차이로 세단을 피했지만 그 차 뒤로 비껴가는 순간 우리의 뒷바퀴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콜린슨은 최선을 다했다. 그는 미끄러지는 차를 단번에 바로 세우려 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지만 길모퉁이는 협조해 주지 않았다. 모퉁이는 본래 자리에 굳건히 서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곧장 그리로 미끄러져 옆면으로 모퉁이를 치고는 그 뒤에 서 있던 가로등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가로등이 반으로 부러지더니 보도 위로 쓰러졌다. 이내 자동차가 모로 서자 우리는 가로등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부러진 기둥에서 솟구친 가스가 발치에서 성난 듯 쉬식 소리를 내었다.
얼굴 한쪽이 온통 긁힌 콜린슨이 네 발로 기어 나와 자동차 엔진을 껐다. 나는 가슴에 얹혀 있던 가브리엘을 들어 올리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른쪽 어깨와 팔이 망가졌는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에서 가르릉 소리를 내며 흐느꼈지만 한쪽 뺨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 말고는 멀쩡해보였다. 내가 그녀의 쿠션이 되어 충돌의 충격을 거의 흡수한 덕분이었다. (P83)
그가 엉망이 된 우리의 옷과 콜린슨의 피투성이 얼굴, 그리고 상처가 난 가브리엘의 뺨을 훑어보며 물었다.
“자동차 사고. 심각한 건 아니라네. 다들 어디 있나?”
내가 물었다.
“모두들 실험실에 있습니다.”
그가 ‘모두들’이라는 말을 희한하게 강조했다. 그런 다음 내게 속삭였다.
“이리 와 봐요.”
나는 콜린슨과 소녀를 문간에 세워두고 그를 따라 계단 발치로 갔다. 그가 내 귀에 입을 갖다 대더니 속삭였다.
“레게트가 자살했어요.”
나는 놀랐다기보다 짜증이 났다.
“어디 있나?”
“실험실에요. 레게트 부인과 경찰도 거기 있어요. 겨우 30분 전에 그랬답니다.”
“모두 다 올라가 보지.”
내가 말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가브리엘까지?”
그가 물었다.
“힘든 일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네. 어쨌든 지금 약에 잔뜩 취해 있어서 아마 약 기운이 떨어진 나중보다 충격을 더 잘 견뎌 낼 거야.”
내가 콜린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실험실로 올라갑시다.” (P85-86)
나는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어쩌면 업튼을 따라 여기까지 온 루퍼트와 연락이 닿아 그에게 업튼을 죽이라고 시켰는지도 모르지요. 안 그래도 그가 원하던 일이니까. 그가 업튼을 죽인 뒤 찾아오자 당신은 그의 등에 칼을 꽂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다만 벽장 속에 있던 가브리엘이 그걸 보았다는 건 몰랐지요. 하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 이상의 위기에 처했다는 건 알았을 겁니다. 루퍼트의 살인을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았을 거라고요. 당신의 집은 이미 지나친 관심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유일한 탈출구를 이용했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 전체, 아니면 그를 설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털어놓고 그가 모조리 뒤집어쓰게 만든 거죠. 그런 다음 여기 탁자에서 그에게 이 총을 건네준 겁니다.
그는 당신을 보호했어요. 언제나 그랬죠. 그의 첫 번째 아내이자 당신 동생 릴리를 죽인 건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은 그가 그 죄를 뒤집어쓰게 했어요. 당신은 그 일 이후 그를 쫓아 런던으로 갔습니다. 정말 사건과 무관하다면 동생을 죽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당신이 그를 여기에서 찾아냈고, 당신이 그를 따라 여기에 왔고, 당신이 그와 결혼한 거죠. 당신이 그와 릴리의 결혼이 잘못된 거라 생각했고, 당신이 그녀를 죽인 겁니다.”
‘당신’을 강조하며 호통을 치는 나의 목소리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저 여자가 그랬어요! 저 여자가!”
가브리엘이 소리치며 콜린슨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저 여자가.......” (P100-101)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광기에 찬 증오심은 더 이상 눈빛과 목소리 뒤에 숨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 속에, 그리고 그녀의 표정에, 그리고 자세에 담겨 있었다. 이 미친 증오심만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생명체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덟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는 것을 칠 수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살아 있었으나 서로에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만 있었다.
그녀가 휙 몸을 돌리더니 방 반대편에 있는 소녀에게 한 팔을 뻗었다. 이제 지독한 승리의 기운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는 묵직하고 활기를 띠었다. 그녀의 말은 마치 무언가를 복창하는 듯 몇 개의 단어씩 묶여 있었다.
“넌 릴리의 딸이야. 너는 그 애와 나, 그리고 데인 가의 모든 사람들이 지닌 검은 영혼과 썩은 피의 저주를 받았지. 넌 아기일 때 이미 엄마의 피를 손에 묻혔어. 그리고 내가 준 선물인 비뚤어진 마음과 마약 중독의 저주도 있지. 너의 인생은 네 엄마나 나처럼 검게 변할 것이다. 그리고 네 주변 사람의 인생 역시 모리스처럼 검게 변할 거야. 그리고 네........”
“그만 멈추게 해요!”
에릭 콜린슨이 소리쳤다.
공포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던 가브리엘이 끔찍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P107-108)
“그러면 데인 가의 저주라는 것이 다만 핏속에 흐르는 야만적인 기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건가요?”
“그 정도도 못 되네. 단지 성난 여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악의에 찬 말일 뿐이야.”
그가 뿌연 담배 연기 뒤에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인생에서 흥미와 상상력 같은 걸 모조리 없애버리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문제라니까요. 가브리엘이 자기 어머니를 죽이는 데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보면 그런 저주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나요?”
“그녀가 정말 도구였다고 하더라도 아닐세. 그리고 나 같으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겠어. 레게트 씨는 가브리엘이 엄마를 죽였다고 굳게 믿는 것 같긴 했지만, 그는 딸을 보호하려고 편지에 그 옛날 이야기까지 상세히 써 놓았지. 하지만 그가 아이의 어머니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는 건 레게트 부인의 말일 뿐, 뚜렷한 증거가 없지 않나. 오히려 가브리엘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믿으며 자랐다고 했어. 그건 레게트 부인이 가브리엘 앞에서 한 말이니 믿을 수 있지. 물론 그럴 가능성이야 있지만 나는 그가 아이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고 믿지 않네. 하지만 그 시점부터는 모두 다 추측에 그칠 뿐. 진실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 그건 그렇고 레게트 부인은 그를 원했고 결국 손에 넣었는데 도대체 왜 죽인 걸까?” (P114-115)
리스 박사의 조언에 따라 앤드루스는 콜린슨의 반대를 무시하고 가브리엘 레게트를 성배의 사원으로 보냈다. 그녀가 원했고, 당시 리빙스턴 로드먼 부인처럼 남부끄럽지 않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고, 할던 부부는 에드거 레게트의 친구가 아닌가. 당연히 앤드루스는 그녀를 보내 주었다. 그것이 엿새 전이었다. 그녀는 미니 허시를 하녀로 데리고 갔고 리스 박사가 매일 같이 그곳에 들려 그녀를 만났다. 처음 나흘 동안 그녀는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닷새 째 되던 날. 그녀의 상태를 본 그는 깜짝 놀랐고 말았다.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흐렸고, 마치 일종의 큰 충격을 받은 사람 같은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미니한테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할던 부부로부터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일 일어난 건지,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한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에릭 콜린슨도 매일 리스로부터 가브리엘의 상태를 듣고 있었다. 리스의 마지막 방문에 대해 들은 콜린슨은 펄쩍 뛰며 당장 그녀를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P123)
맨발에 바닥이 차가울 텐데도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정면에 희미하게 보이는 네모난 회색 물체를 향해 곧장 우리를 이끌었다. 그녀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여기요.”
나는 손전등을 켰다.
빛이 번쩍, 하더니 흰색과 은색으로 수정처럼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넓은 제단에 반사되었다.
제단 아래 세 개의 계단 중 가장 낮은 곳에 리스 박사가 죽은 채 똑바로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잠든 것처럼 평화로웠다. 그의 팔은 양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코트와 조끼의 단추가 풀려 있긴 했으나 옷은 전혀 구겨지지 않았다. 셔츠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셔츠 앞자락에는 똑같이 생긴 네 개의 구멍이 있었고,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모두 가브리엘이 내게 준 단검으로 낸 것이 분명했다. 이제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이마를 만져보자 그리 차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단 계단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그 아래 바닥에는 그가 가지고 다니던 코안경이 금 하나 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나는 몸을 편 뒤 그녀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눈이 부시다는 불쾌함 외에는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당신이 죽였다고요?” 내가 물었다. (P146-147)
나는 다른 방처럼 잠금 장치가 없는 그녀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손전등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 버튼을 눌렀다. 침대에 누운 미니가 보일 정도의 빛이 새어나왔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방 안 공기는 무거웠다. 이 탁한 공기는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시들어 죽은 꽃 냄새였다.
나는 침대에 누운 그녀를 쳐다보았다. 똑바로 누운 채 살짝 벌린 입으로 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잠기운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인디언의 특색이 강하게 드러났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나 역시 기운이 빠지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워야 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좋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멍한 기운이 점점 나를 덮치고 있었다. 백합, 데이지..... 죽은 꽃....... 가만, 인동덩굴 냄새도 있던가? 갑작스레 이 질문의 답을 밝히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들고 있던 손전등이 무거웠다. 너무 무거웠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그것이 떨어지게 놔두었다. 손전등이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엉? 누가 내 발을 건드린 거야? 가브리엘 레게트.... 에릭 콜린슨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했었나? 그건 전혀 말이 안 되는데..... 가만, 말이 되는 건가?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힘껏 흔들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머리는 마치 1톤은 되는 것처럼 무거웠고 좀처럼 좌우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몸이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P157-158)
제단 한쪽 끝에 가브리엘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그 빛을 향해 치켜 올려져 있었다. 그 밝은 빛 속에 그녀의 얼굴은 유령처럼 희고 무표정했다. 리스의 시신이 놓여 있던 제단 계단 위에 애러니아 할던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검푸른 멍 자국이 있었다. 손과 발은 넓은 흰색 띠로 묶이고, 양팔은 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있었다. 옷은 대부분 갈가리 찢긴 채였다.
흰색 가운을 걸친 조셉이 아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양팔을 넓게 벌려 높이 쳐들었다. 등과 목이 뒤로 젖혀져 턱수염 달린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길게 굽은 날과 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식칼이 들려 있었다. 하늘을 향해 뭐라 말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등지고 있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문을 통해 들어가자 그가 팔을 내리고 아내 위로 몸을 굽혔다. 우리는 아직 그로부터 10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었다. 내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조셉!”
그가 몸을 펴고 나를 보았다. 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조셉을 부르느냐. 더 이상 이름이 아닌 그 이름을?”
그가 물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다. 사실 그때, 콜린슨과 함께 그를 쳐다보며 그의 목소리를 듣던 그때, 나는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던 참이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조셉은 없다. 앞으로 세상도 알게 되겠지만 너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겠지. 너희 사이에 조셉이라 불리며 존재했던 이가 사실은 조셉이 아니라 신 그 자체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면 가거라.”
그때 나는 “웃기시네.” 하며 곧장 놈에게 달려들었어야 했다. 다른 놈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자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레게크 양과 할던 부인을 데려가야겠습니다.”
나는 우유부단하게 거의 사과하다시피 말했다.
그가 가슴을 더욱 폈다. 흰 수염이 난 그의 얼굴이 엄해졌다.
“가라. 너의 불복종이 화를 부르기 전에 여기를 떠나라.”
그가 명령했다.
“쏴요. 지금 쏴요. 당장! 쏴요!”
애러니아 할던이 계단에 묶인 채 말했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바 없습니다. 당신은 감옥에 갈 겁니다. 자, 이제 칼을 내려놔요.”
내가 그에게 말했다.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자야! 너는 이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가 소리치며 나를 향해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이런 모습은 웃겨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멈춰!”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그의 볼을 꿰뚫었다. 볼에 난 총알 구멍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눈도 깜빡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P171-173)
사람을 죽여 빠져나오지 못할 곤경에 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그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또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지. 이 미치광이 조셉에게 이제 나를 ‘처리’하는 건 단순히 시체가 한 구 더 늘어난다는 것에 불과했지. 그와 핑크 부부는 다시 한 번 미니에게 유령을 풀어놓으려 했네. 아, 그건 그렇고 핑크 부부를 기소하려는 시도는 없을 것 같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미니가 이미 순순히 리스 박사를 죽였으니 나라고 못 죽일 게 뭐 있겠나?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탓에 그들은 아직 대량 살인을 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걸세. 단적인 예로 내 총과 하녀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총을 빼고는 집 안에 총기류가 전혀 없었지. 물론 그들은 하녀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고, 그러니까 부엌칼과 하수구 청소기 같은 것들을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그 단검이 유일한 무기였단 말이지. 그리고 곤히 잠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도 있었을 거야. 영적 지도자들이 똘똘 뭉쳐 웬 탐정 놈을 잡겠다고 들쑤시고 다니는 소리에 잠이 깬다면 로드먼 부인이 얼마나 싫어했겠어. 어쨌든 그들의 계획은 미니를 구슬려 조용히 내 몸에 단검을 박게 하는 거였네. (P188)
“그 인간은 부도 수표라도 내게 뭘 사 주기 위해서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니까요. 내 입에 풀칠하기 위해선 내가 직접 돈을 벌어야 했다고요. 그러니 이제 와서 그 인간 사진으로 뭔가 얻어 내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안 그래도 어디선가 다른 년이 실컷 그 돈을 쓰고 있을 텐데. 자, 그럼 얼마 줄 거예요?”
그녀는 그 사진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보고 있었지만 나는 결국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6시가 넘어 그날 밤 당장 나를 케사다로 데려다줄 기차는 없었다. 나는 짐을 꾸리고 차고에서 차를 꺼낸 다음 길을 떠났다.
케사다는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태평양 방면으로 기울어진 험난한 산자락에 위치한 호텔 하나짜리 작은 마을이었다. (P200)
시신은 거의 물에 잠긴 바위의 비스듬한 단면 위에 똑바로 누운 채 허벅지부터 머리끝까지 거품이 이는 물에 완전히 덮여 있었다. 나는 시신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집어넣은 뒤 평평한 곳에 서서 두 발에 힘을 준 다음 힘껏 끌어 올렸다.
그것은 에릭 콜린슨이었다. 갈기갈기 찢긴 등은 살점과 옷을 통해 뼈가 드러나 보였고 반밖에 남지 않은 뒤통수는 완전히 으깨어져 있었다. 그를 물 밖으로 끌어낸 뒤 마른 바위 위에 눕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주머니 안에 154달러 82센트의 돈과 시계, 칼, 금색 펜과 연필, 종이, 편지 두 통, 그리고 수첩이 들어 있었다. 나는 종이와 편지, 책을 펼친 뒤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 쓰인 것과 그의 죽음 사이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말고는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뽑힌 덤불과 바위 사이에 떨어진 모자, 그리고 시신의 자세 말고는 단서를 제공할 만한 것이 그의 몸에도, 주변에도 없었다. (P205)
“카터 부인이 바로 그 사건에 휘말렸던 가브리엘 레게트고 카터는 에릭 콜린슨입니다.”
“쯧, 쯧, 쯧.”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그로부터 두 주 전에 죽었고요.”
“쯧, 쯧, 쯧, 대체 무슨 일이래요?”
“가문의 저주라나요.”
“확실해요?”
그는 비교적 진지해 보였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아직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싱거운 사람이라고 해도 케사다의 부보안관이고 따라서 이 일은 그의 소관이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 권리가 있었다.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동안 나는 1913년 파리부터 두 시간 전 절벽 길에 이르기까지 아는 것을 모두 그에게 털어놓았다.
“리노에서 결혼하고 돌아온 콜린슨이 나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할던 일당의 재판 때문에 멀리 떠날 수는 없었지만 아내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 했어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오웬 피츠스테판이라고 아십니까?” (P211)
누군가 숨을 곳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모래 위에는 크고 작은 발자국과 빈 깡통, 그리고 모닥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하비 거군.”
롤 리가 보트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우리 배가 그 옆여 섰다. 우리는 밖으로 뛰어내려 첨벙거리며 모래 위로 올랐다. 코튼이 앞정서고 나머지는 그의 뒤에 넓게 퍼져 섰다.
그때였다. 마치 홀연히 나타난 것처럼 하비 위든이 소총을 들고 V자 맞은편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묵직한 얼굴에는 분노와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가 고함을 치기 시작하자 목소리에서도 그러한 감정이 그대로 느겼졌다.
“이 망할 배신.......”
그의 목소리는 그가 발사한 총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코튼이 옆으로 몸을 던졌다. 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단 몇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가 피츠스테판과 나 사이로 날아오더니 그의 모자챙에 구멍을 내고 뒤의 바위에 박혔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총 네 자루가 동시에 발사되었다. 어떤 것에서는 두 발 이상 발사되었다.
위든이 곧장 뒤로 넘어지며 그의 양발이 공중에서 아치를 그렸다. 그에게 다가갔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가슴에 세 방, 머리에 한 방이었다.
우리는 바위벽 속 좁게 뚫린 구멍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가브리엘 콜린슨을 찾아냈다. 비딱한 모양 때문에 우리가 있던 곳에서는 입구가 보이지 않던 긴 삼각형 모양의 동굴이었다. 그 안에는 마른 해초 더미 위에 담요가 깔려 있고 통조림 몇 개와 등, 또 다른 소총 한 자루가 있었다.
가브리엘의 작은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열이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도 겁에 질려 처음에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나나 피츠스테판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가 타고 온 배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P274-275)
“그렇지. 하지만 위든이 기꺼이 코튼과 장단을 맞춰 줄 이유는 뭐였을까? 게다가 이게 사원에서 벌어진 소동과는 어떻게 관련이 있지?”
“두 사건이 관련되어 있는 건 확실해요?”
피츠스테판이 물었다.
“당연하지. 가브리엘의 아버지, 새어머니, 의사, 그리고 남편, 그러니까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단 몇 주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나. 그 모두들 하나로 잇는 데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연결고리를 더 찾고 싶다면 이야기해 주지. 업튼과 루퍼트가 첫 번째 사건을 수사하다 살해됐지. 두 번재 사건에서는 할던이 죽었고, 세 번째는 위든이 죽었네. 레게트 부인이 남편을 죽였고, 코튼도 아내를 죽였을 거고, 마지막으로 할던도 내가 막지 않았다면 분명 아내를 죽였을 거야. 가브리엘은 어릴 때 이모의 조종을 당해 어머니를 죽였고, 가브리엘의 하녀는 리스 박사를, 그리고 나까지 거의 죽일 뻔했잖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레게트 씨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글을 남기고 죽임을 당했네. 코튼 부인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서로 일치하는 쌍들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설사 이 중에 진짜 우연이 있어도 반기를 들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피츠스테판이 생각에 잠겨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말처럼 한 사람의 솜씨 같고요.”
피츠스테판이 동의했다.
“미친 놈이고 말이야.”
“참 완고하시네요. 하지만 그 미친 사람도 분명 동기는 있을 거예요.”
“왜?”
“당신 같은 사람들은 정말 못 말린다니까요. 가브리엘과 관련된 동기가 없다면 왜 모든 사건이 그녀와 엮여 있겠어요?”
그가 대꾸했다.
“모두 그런 건지는 모르지. 우리는 다만 엮여 있는 것들만 볼 뿐이니까.” (P282-284)
“난 다른 사람들처럼 또렷하게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단 한 번도, 아무리 간단한 것도요. 내 머릿속에서는 모든 게 언제나 뒤죽박죽이에요. 무슨 생각을 하려고 하든 나와 생각 사이에는 언제나 안개가 있죠. 그리고 다른 생각들도 끼어들어요. 그래서 원하는 생각은 언뜻 보지도 못한 채 다시 잃어버리고 말아요. 그러면 다시 안개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데, 겨우 찾고 나면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죠.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겠어요? 매일 매일 그런 삶을 산다는 게? 그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라는, 어쩌면 더 심해질 거라는 걸 안다는 게?”
“당연히 모르죠. 내가 듣기엔 지극히 평범한 것 같습니다. 늘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리 그런 척을 해도 말이죠. 생각이라는 건 힘든 일이에요. 안개에 가린 것이라도 최대한 많이 보고, 또 그걸 최선을 다해 맞춰나가는 거죠. 그게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에 그리도 매달리는 이유입니다. 처음 잡기가 그렇게 힘든 데 비해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든 생각은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도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고, 멀쩡하고, 자명한 것 같거든요. 혹시라도 그걸 놓쳐 버린다면 다시 그 안개 뿌연 혼란 상탤 뛰어 들어 새롭게 생각을 끄집어내야 하고.....”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엔 왜 당신이 싫었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하지만이란 말은 됐어요. 진짜 미친 사람이랑 정말 멍청한 사람만 빼면 모든 사람이 가끔씩, 아니면 그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지 모른다고 의심한다는 것쯤은 알 나이 아닙니까? 광기의 증거는 정말 쉽게 찾을 수 있지요. 자기 속을 파고들면 들수록 더 많은 것을 캐낼 수 있는 법이니까. 당신처럼 지독하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이겨 내지 못할 거요. 자신이 미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돌고 또 도는 꼴이라니! 아직 미치지 않은 게 대단한 일이죠.” (P303-305)
식사를 마친 뒤 미키와 나는 밖으로 나갔다. 봄날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맥먼이 아침에 내려올 거야. 자네는 그와 함께 경비견이 되는 걸세. 시간을 둘이 알아서 나누되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항상 이곳을 지켜야 해.”
내가 말했다.
“힘든 일은 절대 직접 안 하시죠. 여기 이곳은 뭡니까? 함정?”
그가 투덜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으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는 거죠? 행운의 부적 같은 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뭔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성공적인 계획의 결과도 바보들한테는 언제나 운처럼 보이는 법이지. 딕 폴리에게 소식은 없고?”
“없어요. 여기에서 곧장 집으로 가는 앤드루스를 따라갔습니다.”
그때 앞문이 열리며 노란 불빛이 현관에 드리웠다. 어두운 색 망토를 어깨에 걸친 가브리엘이 노란 불빛 속으로 나오더니 문을 닫고 자갈로 된 길로 내려왔다. (P330)
그녀가 다시 웃더니 입술을 핥았다.
“하비와 나는 돈이 필요했지만 앤드루스에게 충분히 얻어 낼 수가 없었어요. 괜히 의심을 살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납치된 것처럼 꾸며 돈을 받아 낼 생각이었어요. 하비를 죽여 버리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정말 근사한 한 마리 야수였는데, 그 폭탄은 나한테 있었어요. 몇 달 동안이나 가지고 있었죠. 아버지가 영화사를 위해 무슨 실험인가를 하고 있을 당시 실험실에서 훔친 거였어요. 그리 크지 않아서 만일을 대비해 몸에 지니고 다녔었죠. 원래는 당신을 죽이려 한 거였어요. 오웬과 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건 또 다른 거짓말이에요.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 폭탄은 당신을 죽이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사실을 밝혀 낼까 봐 걱정이 됐으니까. 나는 너무 불안했어요. 두 사람이 나가고 당신 방에 한 사람만 남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게 당신일 거라고 확신했죠. 그것이 오웬이라는 걸 알았을 땐 너무 늦었어요. 문을 열고 폭탄을 던질 때 비로소 보았으니까요. 이제 원하는 걸 알았죠? 모르핀을 줘요. 이제 더 이상 나를 가지고 놀 필요가 없잖아요. 얼른 줘요. 당신은 성공했어요. 지금 이야기한 걸 글로 써 오면 서명해 줄게요. 이젠 내가 중독을 끊게 하거나 구해 낼 가치가 있는 사람인 척 할 필요 없어요. 얼른 모르핀을 내놔요!” (P363)
“당신 정말 사람 놀래는군요. 그래도 그에게 이유가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피츠스테판이 말했다.
“자네가 리스의 살인을 계획했네. 다른 사람은 단순히 공범일 뿐이었어. 조셉이 죽자 모든 죄는 모두가 미친 사람이라 여긴 그에게 덮어씌워졌지. 그거면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풀려나기에 충분했어. 하지만 자넨 콜린슨까지 죽였고, 또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는 누가 알겠나. 핑크는 이대로 가다간 사원 살인에 관련된 진실이 밝혀지고 자신까지 끌려들어갈 걸 알고 있었지. 그래서 있는 대로 겁을 먹고 자네를 멈추려고 한 거야.”
“점점 나아지는군요. 그래서 내가 콜린슨을 죽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살해를 사주한 거지. 워든을 고용했지만 그에게 돈을 쥐어 주지는 않았어. 그러자 그가 가브리엘을 납치해서는 돈을 내놓으라고 한 거지. 자네가 원한 게 그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 굴에서 그와 맞닥뜨렸을 때 그의 총알이 가장 가까이 날아온 것도 자네였고.” (P369)
모르핀 중독에서 벗어난 것 외에도 시골에서 두 달을 보낸 덕분에 도시로 돌아온 그녀는 그 어느 때와도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정오, 재판 중간에 시간이 비는 틈을 타 그녀와 나, 로렌스 콜린슨이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제가 무감각해져 버린 걸까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요. 거의 약에 절어 있던 게 기억납니까? 그것이 심한 충격으로부터 당신을 구했죠. 정말 다행이었어요. 이제부터는 모르핀을 멀리하세요. 그러면 모든 게 오래 전의 흐릿한 꿈처럼 기억될 테니까.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언제든 다시 약을 하면 되고.”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치유 기간 동안 날 괴롭히던 거 기억나요? 당신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절대 안 돼요. 정말 즐거워하더라니까요.”
마지막 말은 로렌스 콜린슨을 향한 고자질이었다.
“내게 욕을 하고, 놀리고, 끔찍한 말로 위협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절 유혹하려고 했다니까요. 제가 종종 품위 없이 굴면 저 사람을 원망하셔야 해요. 로렌스, 주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니까.”
그녀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P390-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