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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대시너의 <메이즈러너>

영화 <메이즈 러너The Maze Runner> 2014년

by 노용헌

영화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2015), 〈메이즈 러너: 데스 큐어〉(2018)

웨스 볼 감독이 연출하고 딜런 오브라이언, 카야 스코델라리오, 토머스 생스터, 이기홍이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메이즈 러너〉 시리즈는 2014년 제1편 〈메이즈 러너〉, 2015년 제2편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을 개봉해 첫 주에만 전 세계적으로 6억 3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흥행을 기록했다. 2018년 1월, 제3편 〈메이즈 러너: 데스 큐어〉가 개봉했다.

영화 메이즈 러너 11.jpg

서늘한 어둠, 퀴퀴하고 먼지 자욱한 공기 속에서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새로운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금속 바닥이 금속 벽과 맞닿은 곳. 갑자기 바닥이 덜컹대며 흔들리는 바람에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가 엉금엉금 기어 뒤로 물러났다. 공기가 서늘한데도 이마에 땀이 맺혔다. 등이 딱딱한 금속벽에 닿자 그대로 몸을 옆으로 밀어서 그 공간의 모퉁이로 향했다. 두 다리를 몸에 바짝 붙이고 웅크린 채,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만을 바랐다.

또 한 번 거칠게 덜컹거리더니 광산 갱도의 낡은 승강기처럼 그가 앉아 있는 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사슬과 도르래가 거칠게 쓸리는 소리, 오래된 강철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에서 날 법한 괴상한 끼익끼익 소리가 방의 벽에 부딪치며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P7)

마침내 카메라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그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전부 소년들이고 나이 차는 어느 정도씩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승강기 안에서 자신이 기대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토머스는 혼란에 빠졌다. 10대 청소년들이었다. 고작 어린애들이었다. 두려움은 일부 사라졌지만,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누군가 승강기로 밧줄을 내렸다. 밧줄 끝에 큰 고리 모양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토머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리 안으로 오른발을 넣고 밧줄을 움켜잡았다. 소년들이 그를 끌어올렸다. 천장의 구멍 가까이에 이르자 수많은 손들이 그의 옷을 잡고 당겨 올렸다. 얼굴들과 색깔과 빛이 소용돌이치며 세상이 빙빙 돌았다. 온갖 감정이 폭풍처럼 밀려와 속이 꼬이고 뒤틀렸다. 고함을 지르고 울음을 토하고 싶었다. 그가 천장의 예리한 가장자리 너머로 올라오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잠잠해지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토머스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반갑다, 새끼야. 공터에 온 걸 환영한다.” (P10-11)


“뭣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는 건데?”

척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음, 비탄(悲歎)의 괴수들한테 쏘였거든.”

“비탄의 괴수들?”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쏘였다느니, 괴수라느니, 들을수록 큰 두려움이 밀려와서, 척이 말하는 그 괴수라는 것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척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토머스는 좌절의 한숨을 내뱉으며 나무에 도로 기댔다.

“나보다 아는 게 딱히 더 많은 것 같진 않네.”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토머스는 막연히 중얼거렸다.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기억상실의 증상은 상당히 이상했다. 세상의 작용방식에 대해서는 대부분 기억하나 세부적인 내용과 얼굴, 이름들이 떠오르지 않는 식이었다. 다 멀쩡한데 열두 단어마다 한 단어씩 빠져 있어서 읽기가 고역스럽고 혼란스러운 책처럼, 그는 자신의 나이조차 알지 못했다.

“척. 내가...... 몇 살로 보여?”

척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열여섯 살 정도. 궁금해할까 봐 알려 주는 건데 키는 175센티미터쯤 되고..... 머리카락은 갈색이야. 아, 얼굴은 꼬챙이에 꿰어 튀긴 간처럼 못생겼어.”

척은 이렇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토머스는 뒷부분은 잘 듣지도 못했다.

‘열여섯? 열여섯 살이라고?’ (P27)

영화 메이즈 러너 02.jpg

“장난해? 지금 나 놀려? 이 벽들이 진짜로 움직인단 말이야?”

“정말 움직인다니까 그러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돌벽들이 움직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나 참. 이 틈새에 여닫이문이 붙어 있다든가 벽에서 작은 벽이 미닫이문 형식으로 이동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이 벽 자체가 움직인다는 게 말이 돼? 거대한 데다 이 자리에 천년은 꼼짝 않고 서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만에 하나 이 벽들이 움직여서 사방을 막아 버리면 그는 공터 안에 꼼짝 없이 갇히게 되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끔찍했다.

척은 답답하다는 듯 팔을 뻗어 올리며 대꾸했다.

“나도 몰라. 그냥 움직인다니까. 돌을 박박 가는 소리가 나면서 벽들이 움직여. 저 바깥 미로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 벽들이 밤마다 위치를 바꾼단 말이야.” (P43)

“난 저 바깥에 나가 돌아다니는 이들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 미로에 나갈 거야.”

“뭐래?”

척은 난처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코머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러너 말이야. 러너들이 저 밖에 나가서 하고 있는 일. 나도 같이 할 거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있네. 잠이나 자.”

척은 툴툴대며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토머스는 자신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쳤다.

“러너가 될 거야.”

척이 다시 한쪽 팔꿈치를 세우며 토머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은 당장 때려치우는 게 좋을 거야.” (P56)

창밖에 기괴한 불빛이 나타난 것이다. 불 켜진 수영장 옆에 서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빛의 스펙트럼이 뉴트의 몸과 얼굴을 비쳤다. 토머스는 실눈을 뜨고 유리창 너머를 쳐다보며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목 안에 묵직한 덩어리가 차오른 것처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저게 뭐지?’

그런데 뉴트가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토머스에게 속삭였다.

“창밖에는 미로가 있어.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전부, 아니 생활 전체를 미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 하루 종일 미로를 경배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말이야. 저놈의 미로에 빌어먹을 해답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풀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알겠어? 내가 널 여기 데려온 이유는 멋대로 까불고 돌아다니면 안 되는 이유, 이 젠장맞을 벽들이 밤마다 닫히는 이유, 저 미로에 맘대로 나가 돌아다니면 안 되는 이유를 알려 주기 위해서니까 똑똑이 봐.”

뉴트는 담쟁이덩굴을 여전히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서서는 토머스에게 가까이 와서 유리창 너머를 보라고 손짓했다.

토머스는 시키는 대로 유리창의 차가운 표면에 코를 바짝 댄 채 바깥을 주시했다. (P61)

영화 메이즈 러너 03.jpg

알비가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해! 네가 설명해 줘, 뉴트.”

뉴트는 한 번 더 상자 안을 내려다본 후 엄숙하게 공터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자애가 있어.”

모두가 어수선하게 떠들기 시작해서 토머스는 여기저기서 몇 마디씩 주워들었다.

“여자애?”

“내가 먼저 걔 찜한다!”

“어떻게 생겼는데?”

“몇 살 정도로 보여?”

토머스는 혼란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댔다. 여자애라니? 왜 공터에 소녀는 없고 소년들뿐이지 그때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미처 알아채지도 못했다. 저 소녀는 누굴까? 도대체 왜....

뉴트가 조용히 하라고 외친 후 상자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게 다가 아니야. 아무래도 죽은 거 같아.” (P85)

파랗게 타오르는 두 눈으로 앞뒤를 살피며 소녀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분홍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린 듯 공허한 목소리로 또렷하게 한 문장을 말했다.

“모든 게 바뀔 거야.”

소녀가 눈알을 하얗게 뒤집으며 도로 털썩 쓰러지는 모습을 토머스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쓰러진 후에도 소녀는 오른 주먹으로 꼿꼿이 하늘을 가리켰고, 그 손 안에 단단히 뭉쳐진 종잇조각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토머스는 입이 바짝 말라서 마른침도 삼킬 수 없었다. 뉴트가 얼른 달려와 소녀의 주먹을 펴고 종잇조각을 빼냈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펴 본 뉴트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그 종이를 바닥에 펼쳤다. 토머스는 뉴트의 등 뒤로 다가가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종이에는 굵고 검은 글씨로 다섯 마디가 적혀 있었다.

이 아이가 마지막이다.

다음은 없다. (P89-90)


“지도를 그리는 게 목적이면 미로에 나가 있는 동안 종이를 갖고 다니면서 그리면 되잖아?”

지도는 지금까지 들은 어떤 것보다 더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미로 안에 갇혀 사는 이 생활을 끝내게 해 줄 첫 번째 단서인 것 같았다.

“종이야 당연히 갖고 다니지. 그래도 공터로 돌아오면 이것저것 논의하고 분석 같은 걸 해야 되잖아. 게다가......”

척은 눈알을 위로 굴리며 말을 이었다.

“러너들은 미로에 나가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지도 그리기가 아니라 달리는 데 써. 그래서 그들이 러너라고 불리는 거야.”

토머스는 러너와 지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년 동안 찾아 헤매도 출구를 찾지 못할 정도로 미로의 규모가 어마어마한 건가? 그건 말도 되지 않았다. 문득 알비가 움직이는 벽들에 대해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만약 공터인들이 유죄 선고를 받고 여기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는 죄수들이라면?

‘유죄 선고라.’

이 단어와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서 느꼈던 작은 희망의 불꽃이 조용히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척, 혹시 우리 모두 범죄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말은.....살인을 저질렀다든지 말이야.”

척은 미친놈 쳐다보듯 토머스를 올려다보았다.

“엥?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해?”

“생각해 봐. 우리는 기억을 삭제당했어. 그리고 피에 굶주린 괴물들이 간수처럼 에워싼, 출구 없는 미로 안에서 살고 있어. 이런게 감옥이 아니면 뭐겠어?” (P99-100)

토머스는 알비가 개목걸이의 똑딱 단추를 풀어 벤의 목에 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개목걸이의 단추가 딱 소리를 내며 채워지자 벤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콧물이 줄줄 흘렀다. 공터인들은 말없이 벤을 쳐다보았다.

“제발, 알비. 내가 변화 과정 중에 머리가 잠깐 돌았었나 봐. 저 녀석을 죽일 생각 같은 건 없었어. 잠깐 정신이 나갔던 것뿐이라니까. 제발, 알비, 믿어 줘.”

벤이 애원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처롭게 떨리는지, 어제 묘지에서 목을 물어뜯으려 덤비던 그 벤이 맞는지 믿기 힘들 정도였다.

벤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먹처럼 토머스의 명치를 치며, 더욱 큰 죄책감과 혼란을 느끼게 했다.

알비는 대꾸 한마디 없이 개목걸이만 잡아당겼다. 똑딱 단추가 단단히 잠겨 있는지, 개목걸이가 기다란 막대에 견고하게 부착되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벤의 곁을 지나, 막대를 들고 손으로 쭉 쓸어 가며 그 끝에 이르렀다. 막대의 끝을 단단히 잡고는 모여 선 공터인들을 마주 보았다. 핏발 선 눈에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거친 호흡을 하는 알비의 모습은 토머스의 눈에 악귀처럼 보였다.

막대 반대쪽 끝에 선 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가죽을 거칠게 잘라 만든 낡은 개목걸이를 비쩍 마른 창백한 목에 걸고 부들부들 떨며 울고 있었다. 개목걸이를 목에 건 벤과 알비 사이에는 길이 6미터의 기다란 막개가 가로놓여 있었다. 알루미늄 막대의 중간 부분이 약간 구부러져 있기는 하지만, 토머스의 눈에는 아주 견고해 보였다. (P138-139)

영화 메이즈 러너 06.jpg

“나뿐만 아니라 그 두 녀석도 맹세를 했어.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맹세했지. 너도 나중에 팀장 회의에서 어느 팀장에게 선택을 받아 그 팀 소속이 되면 맹세를 하게 될 거야. 일몰 후에는 미로에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 그 맹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만 돼. 예외는 없어.”

토머스는 척을 흘끗 쳐다보았다. 척의 얼굴도 뉴트만큼이나 창백해 보였다.

“뉴트 형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는 모양이니까 내가 대신 할게. 그 두 사람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건 죽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 민호 형처럼 똑똑한 사람이 길을 잃을 리도 없고, 그런 일은 불가능해. 암만해도 죽은 것 같아.”

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척은 돌아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본부 건물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죽었을 거라고?’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져서 토머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기분이었다.

뉴트가 침통하게 말했다.

“척 말이 맞아. 그래서 우린 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게 해서는 안 되니까.” (P165)


“안 돼. 토미! 절대 안 돼!”

오른쪽 벽의 막대들이 마치 밤 동안의 안식처를 찾아 작은 구멍들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 것 같았다. 요란하게 바닥을 가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남은 문의 폭은 이제 1.5미터, 1.2미터, 90센티미터, 60센티미터로 좁아졌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토머스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막대들이 구멍에 닿기 직전에 문 사이를 빠져나가 미로에 발을 디뎠다.

곧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담쟁이로 뒤덮인 돌벽에 굉음이 광기 어린 웃음처럼 메아리쳤다.

몇 초 동안 세상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문이 닫히며 우르르 울리던 소리가 가라앉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로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에 태양마저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뺀 것처럼, 곧 어둠의 베일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황혼이 깊어지자 미로의 거대한 돌벽들은 마치 잡초로 뒤덮인 거인들의 묘지에 세워진 묘비 같았다. 토머스는 거친 돌벽에 등을 기댔다.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앞으로 닥쳐올 일을 생각하니 극도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알비가 별안간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서 토머스는 깜짝 놀라 앞쪽을 바라보았다. 민호는 몹시 지쳐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토머스는 벽에서 등을 떼고 그들 쪽으로 달려갔다. (P168-169)


토머스는 치솟는 공포를 애써 한옆으로 밀어놓고 덩굴을 이용한 작업에 착수했다.

덩굴 하나를 잡아당겨 알비의 오른팔에 감았다. 덩굴이 여유 있게 끌려오지 않아서 알비의 몸을 약간 더 위로 끌어올려야 했다. 덩굴을 몇 번 감은 후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는 또 다른 덩굴을 잡아당겨 알비의 왼팔에 감고 묶었다. 그런 식으로 다리도 차례로 덩굴로 감아 묶었다. 너무 단단히 묶어서 혈액순환이 잘 안 될까봐 걱정됐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과연 계획대로 될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작업을 계속했다. 이제 자기 몸을 묶을 차례였다.

덩굴 하나를 잡아채서 양손으로 잡고 돌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알비를 묶어 놓은 곳 바로 윗부분까지 올라가는 동안, 덩굴의 두툼한 잎에 손잡이 구실을 해 주고 돌벽에 무수히 나 있는 균열이 완벽한 발 지지대 역할을 해 주어서 토머스는 신이 났다. 알비만 아니면 돌벽 오르는 건 일도 아닐 텐데....... (P182)

몸통은 은색에 원통형이고 두께 8센티미터, 길이 25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관절형의 다리 열두 개가 몸통 아래쪽에 길게 뻗어 있어서 꼭 잠든 도마뱀 같은 모양새였다. 눈에서 내쏘는 붉은 빛 때문에 머리의 생김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직 시각 기관의 기능만 하기 때문인지 머리 자체의 크기는 작았다.

바로 그때 무섭도록 소름 돋는 부분이 그의 눈에 띄었다. 예전에도 딱정벌레 날개깃 한 마리가 그의 곁을 지나 숲 속 깊은 곳으로 후다닥 달려갈 적에 언뜻 보기는 했는데, 지금은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이 딱정벌레 날개깃의 눈에서 나오는 붉은 빛이 몸통에 적힌 단어를 섬뜩하게 비추고 있었다. 붉은 빛 때문에 마치 피로 쓴 글씨 같았다.

사악 (P185)

영화 메이즈 러너 07.jpg

토머스는 미로의 기다란 통로를 따라 접근해 오는 괴물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끔찍하게 잘못된 실험의 결과물처럼, 악몽에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생김이었다. 짐승이면서 기계인 존재, 괴수는 따닥 소리와 함께 돌로 된 바닥에서 몸을 굴렸다. 듬성듬성 털이 나 있고 점액으로 번들거리는 피부, 숨을 쉴 때마다 기괴하게 벌떡거리는 몸뚱이는 흡사 거대한 민달팽이 같았다. 머리나 꼬리가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길이는 대충 1,8미터, 두께는 1,2미터 정도였다.

10 내지 15초 간격으로 둥그런 몸뚱이에서 날카로운 금속 못이 쑥 튀어나오면 놈은 몸을 둥글게 말고서 앞으로 굴러 왔다. 그리고 멈춘 뒤, 추르릅 소리와 함께 금속 못을 도로 축축한 피부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치 방위를 재고 있는 것 같았다. 놈은 이 과정을 되풀이하며 한 번에 1미터씩 이동했다. (P187)

30분이 지났다.

토머스도 민호도 손가락 하나 달싹이지 않았다.

그제야 울음을 그친 토머스는 민호가 울음을 터뜨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다른 아이들에게 얘기해서 계집애 같은 놈이란 소릴 듣게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는 했다. 그러나 손톱만큼의 자제력도 남아 있지 않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의 제한된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가혹한 경험을 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손바닥이 쓰라리고 극도의 피로로 인해 기력도 없었지만 눈물은 자제가 안 됐다.

절벽 가장자리 너머로 머리를 내밀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새벽이 본격적으로 밝아 오고 있어서 좀 더 잘 볼 수가 있었다. 짙은 보라색으로 물든 너른 하늘은 천천히 밝은 파란색으로 변해 가고, 평평한 수평선에 태양의 주황색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로의 돌벽은 깎아지른 절벽이 되어 아래로 뻗어 나가다가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지만 그 아래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미로는 마치 지상에서부터 수 킬로미터 뻗어 올라간 구조물 위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P204-205)

토머스가 기억하는 어느 누구의 눈보다도 진한 푸른색을 띤 눈동자였다. 잠든 소녀의 감은 눈에 그 눈동자를 그려 넣고,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하나로 결합시켜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완벽한 흰 피부, 도톰한 입술..... 소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 한편을 잠시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어두운 구석에서 파닥이는 날갯짓처럼, 명확히 붙잡을 순 없지만 분명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 느낌, 찰나 동안만 머물렀다가 기억의 편린들이 떠다니는 심연 속으로 사라졌지만, 토머스는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있었다.

토머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조그맣게 말했다. 소리 내어 털어놓고 나니 후련했다.

“아는 애야.”

뉴트가 벌떡 일어섰다.

“뭐? 누군데?”

“그건 몰라. 뭔가..... 아는 사이였다는 느낌만 있어.”

토머스는 소녀와 자신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낼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눈을 비볐다.

“그럼, 열심히 생각해 봐.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집중해.”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봐.”

토머스는 눈을 감고, 생각들로 가득한 어둠을 헤치며 소녀의 얼굴을 찾아보았다. 대체 이 소녀는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도 답을 알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토머스는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뉴트를 쳐다보았다.

“모르겠어.......”

테리사.

토머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갔다. (P267-268)

영화 메이즈 러너 04.jpg

척이 장난기 하나 없는 말투로, 낮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 변화 과정을 겪었던 공터인들 대부분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만큼 끔찍한 과거를 기억해 내는 모양이야. 내가 그리워하는 가족들의 집이 그리 좋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형 생각엔 저 바깥세상 어딘가에서 내 진짜 부모님이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 같아? 그분들이 밤마다 나 때문에 우실까?”

자신도 모르게 토머스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상자에 실려 공터에 도착한 후로 삶이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통에, 토머스는 공터인들이 그들을 그리워하는 진짜 가족이 있는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기분이 묘했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직 공터며 미로가 무슨 의미인지, 누가 아이들을 이곳으로 보낸 건지, 여기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골몰했었다.

처음으로 그는 척이 너무나 가여웠다.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이들에게 화가 치밀어서 눈앞에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었다. (P284)


그들은 방금 그 지점을 중심으로 나머지 돌멩이들을 조금씩 옆으로 던져 가며 확인해 보았다. 놀랍게도 돌멩이들이 사라지는 곳은 몇 제곱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민호가 그 공간의 위치와 치수를 그림까지 동원해 맹렬하게 수첩에 적으며 말했다.

“이렇게 작으니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괴수들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서 들어갈 정도로 좁아. 놈들이 미로로 나올 때는 구멍 가장자리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가 절벽 가장자리로 훌쩍 뛰어야 될 테니, 그러고 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야. 나도 뛰어서 건널 수 있을 것 같은데 놈들한테는 일도 아니겠어.”

토머스는 보이지 않는 허공의 그 정사각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절벽에서의 거리와 위치를 머릿속에 정확히 새겨 넣기 위해서였다.

민호는 그림을 마저 그린 후 그 지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 우리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건 마술이 아니야. 하늘이 회색으로 변한 거랑 같은 현상일거야. 출입구를 보이지 않게 가리는 착시 효과라든가 홀로그램 같은 거. 진짜 대단하다.”

토머스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기술로 이런 현상을 만들어 냈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민호는 일어서서 배낭을 어깨에 메며 말했다.

“그래, 대단하긴 하네. 그만 가자. 최대한 빨리 미로의 변경 사항을 확인하고 공터로 돌아가여 돼. 하늘 색깔까지 변했는데 공터에 또 무슨 괴상한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오늘 저녁에 뉴트랑 알비한테 이곳에 대해서 보고도 해야 하고, 이 정보가 얼마나 보탬이 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빌어먹을 괴수들이 어디로 늘 사라지는지는 알게 된 셈이니까.”

“괴수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알게 된 거잖아. 저긴 괴수 구멍이야.”

토머스는 숨겨진 출입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래,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가자.” (P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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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의 물음에 척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자애가 정신이 들었어! 깨어났어!”

토머스는 배 속이 울렁거려 지도제작실 바깥벽에 몸을 기댔다. 소녀. 그의 머릿속에서 말을 건네던 소녀. 소녀의 목소리가 또 들리기 전에, 소녀가 그의 머릿속에서 말하기 전에 어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톰, 내 주변에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날 데리러 와 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어..... 너 말고는 전부 잊어 가고 있어.....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자꾸만 희미해져......

토머스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어떻게 소녀가 그의 머릿속에서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테리사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미로는 암호야, 톰. 미로는 암호야.

토머스는 소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뉴트가 소녀와 얘기를 해 보려고 서둘러 본부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토머스는 슬쩍 그 자리를 떠났다. 잔뜩 흥분해 있는 공터인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모두들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낯선 소녀에게 생각을 집중하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그들 사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터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나중에는 쉼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숲 뒤편의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모퉁이의 담쟁이덩굴 사이로 파고 들어가 웅크리고 앉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요를 덯어썼다. 그렇게 하면 테리사의 목소리를 피해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몇 분이 지나자 벌렁거리던 심장이 차차 진정되었다.

“너에 대해 잊어 가는 게 제일 힘들었어.” (P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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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사는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을 보여 주었다. 하얀 피부에 검은 잉크로 가늘고 자잘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토머스는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뭔데?”

“직접 읽어 봐.”

휘갈겨 쓴 글씨여서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사악은 선한 것이다.

토머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 머릿속을 샅샅이 흝었다.

“이 ‘사악’이라는 단어 본 적 있어. 여기 사는 조그마한 딱정벌레 날개깃들 몸에 적혀 있어.”

“그게 뭔데?”

“도마뱀처럼 생긴 기계인데, 창조자들이 우릴 염탐하려고 보낸 거야. 창조자들이란 건 우릴 여기로 보낸 자들이고.”

테리사는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왜 이런 글을 여기다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으니까 잊지 않게 해 줘.” (P342-343)


토머스는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뭘 놓쳤는지, 알비가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알게 되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공터의 벽들을 잘 봐. 사방의 문을 보라고. 일몰 시간이 지났는데도 닫히질 않았어.”

토머스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태양이 사라지고, 공급품도 못 받고, 밤새 괴수들로부터 공터인들을 지켜 주던 장치도 가동되지 않았다. 처음에 테리사가 했던 말대로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목구멍 속에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알비가 테리사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당장 이 계집앨 감금해 둬야겠어. 빌리! 잭슨! 얠 깜빵에 넣고 주둥이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듣지 말고 무시해.”

테리사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토머스가 나섰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알비, 대체 왜 그래.....”

알비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자 토머스는 심장이 덜컥했지만 하던 말은 끝까지 했다.

“아니...... 공터의 벽이 닫히지 않은 걸 어째서 얘 탓으로 돌리는 건데?” (P346-347)

뉴트는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팔짱을 꼈다.

“신참, 대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미로의 벽에 적힌 글자를 본 후로, 토머스는 줄곧 그 글자에 대해 생각을 거듭했다. ‘세계의 참사: 위험지역 한정실험 관리과’라는 글자. 지금 이 상황에서 그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뉴트뿐일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여기서 어떤 괴상한 실험이나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아. 하지만 그 실험을 끝낼 때가 온 거지. 우리가 여기서 영원히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릴 여기로 보낸 자들이 누구든지 간에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하는 거야.”

가슴에 담아 뒀던 얘기를 털어놓자 토머스는 속이 다소 후련해졌다.

뉴트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서 실은 다 잘된 거니까 여자애를 감방에서 꺼내 주라고? 걔가 여기 온 덕분에 우리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결판을 내게 생겼으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테리사는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거랑 관계가 없어. 테리사는 이 게임에서 졸(卒)에 불과하거든. 그들은 우리가 여길 탈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마지막 도구 혹은 단서로 테리사를 보낸 거라고.”

토머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나를 여기로 보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 것 같아. 그렇게 따지면 끝을 촉발시켰다고 해서 테리사가 악당인 건 아니지.”

뉴트는 감방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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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쯤 별안간 정적이 흘렀다. 괴수가 바로 창밖에 있었다. 토머스의 귀에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바깥에서 빛이 번쩍이며 창문을 막은 널빤지들 사이로 괴상한 빛줄기가 비춰 들었다. 다음 순간 작은 그림자 하나가 그 빛을 가로막으며 앞뒤로 움직였다. 토머스는 그것이 먹이를 향해 내뱉은 괴수의 탐침과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정벌레 날개깃들이 저 밖에서 괴수들에게 길 안내를 해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몇 초 후,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어른거리던 빛이 고정되었다. 널빤지 사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빛이 방안으로 침투했다.

방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어느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다른 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토머스는 문득 감방에 갇혀 있는 테리사 생각이 났다.

테리사가 무슨 말이라도 건네 주길 바라고 있는데,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 놀라 헉 하고 숨을 내쉬며 비명을 쏟아 냈다. 다들 창문 쪽에서 무언가가 들이닥치리라 예상하고 있었지 등 뒤에서 문이 열릴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누가 문을 열었는지 보려고 토머스는 고개를 돌렸다. 겁에 질린 척 아니면 생각을 바꿔 돌아온 알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본 순간 토머스는 충격으로 두개골이 오그라들고 뇌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갤리였던 것이다. (P368-369)


그들은 조용히 토머스의 요청을 따랐다. 유산지에 그린 사본들을 여덟 개 구역 별로 탁자에 늘어놓았다.

초조해진 토머스는 신경이 곤두섰다. 모두 같은 날짜에 해당하는 지도가 맞는지 확인하면서 각 구역별로 사본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1구역부터 8구역까지의 사본 여덟 장씩을 차곡차곡 쌓아 날짜별로 한 번에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결과물이 나타난 순간 토머스는 깜짝 놀랐다. 그림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이미지가 나타났다. 테리사도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위아래 사본들에 그려진 선들이 흐릿하게 겹치면서 마치 격자무늬 판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선들이 다른 곳보다 확실히 더 진했다. 여덟 장의 사본에서 그 부분에 유독 선이 많이 그려진 때문이었다. 미묘하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뚜렷했다.

가운데에는 ‘ㄸ’ 이라는 글자가 나타나 있었다.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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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사가 그의 오른쪽 발목을 쥐고 텔레파시로 물었다.

왜 그랬어. 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어?

왜냐하면......

그러나 토머스는 기운이 빠지면서 더 이상 집중해서 말을 전달할 수 없었다.

뉴트가 혈청을 가져오라며 큰 소리로 지시했다. 잠시 후 팔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삿바늘이 들어간 곳을 중심으로 온몸에 온기가 퍼져 나갔다.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몇 초 후면 완전히 의식을 잃게 될 것이었다.

방 안이 빙빙 돌고, 여러 가지 색깔들이 뒤섞이면서 점점 빠르게 휘몰아쳤다. 어둠이 의식을 집어 삼키기 전에 토머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누구든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속삭였다.

“걱정 마, 일부러 한 거야.......” (P428-429)

“그래, 척한테 들었어. 회의 소집할게. 그런데 왜? 뭘 알아냈는데?”

“내가 알아낸 건 이게 시험이라는 거야. 뉴트. 이 모든 상황이 다 시험이야.”

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험 말이구나.”

토머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야. 그들은 우리 중에 포기하는 아이들을 잡초 뽑듯이 가려내고 최고를 골라내려 하고 있어. 그래서 이런저런 변수를 던져 우리가 포기하게끔 만드는 거라고. 얼마나 독하게 희망을 품고 싸워 내는지,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테리사를 이곳으로 보내 기존의 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마지막 분석을 위한 절차였어. 이제 우리가 마지막 시험을 받아야 할 때가 온 거야. 마지막 시험이라는 건 바로 탈출이야.”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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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테리사랑 나는 창조자들에게 이용당했어. 너희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면, 너희는 아마 우릴 죽이고 싶을 거야. 그래도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테리사랑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알려 주고 싶어서야. 그래야 여길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내가 말했을 때 너희가 내 말을 믿어 줄 테니까.”

토머스는 팀장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다음 얘기를 과연 해야 하는지, 그 얘기를 했을 때 이들이 이해해 줄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해야만 했다.

토머스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테리사랑 내가 이 미로를 설계하는 일을 도왔어. 이 모든 걸 만드는 데 일조했어.”

다들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힌 듯했다. 멍한 얼굴로 토머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의 말을 신뢰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결국 뉴트가 토머스에게 물었다.

“그게 말이 돼? 넌 아무리 많이 쳐 줘도 열여섯 살 정도밖에 안됐는데, 이 미로를 어떻게 만들 수가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토머스도 약간 의심을 품어 보기는 했지만 기억이 워낙 확실했다. 미친 소리 같지만 사실이었다.

“테리사랑 나는...... 머리가 굉장히 좋아. 그것도 창조자들의 변수 중에 하나일 거야.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테리사랑 내가 가진..... 능력 때문에, 창조자들이 이곳을 설계하고 건축하면서 우릴 가치 있게 취급했다는 거야.” (P447-448)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위로 올라온 곳에 자그마한 빨간 버튼이 있었다. 그 버튼에 검은색으로 찍혀 있는 세 단어로 된 글이 보였다. 이렇게 보니 빨간 버튼이 너무나 확실하게 두드러지는데, 왜 지금까지 보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로를 그만 끝내라

멍하게 그 버튼을 쳐다보던 토머스는 몸에 고통이 가해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괴수가 집게발 두 개로 그를 붙잡고 뒤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 마리는 척에게 달려들어 긴 칼날로 척을 베려 하고 있었다.

빨간 버튼.

“눌러!”

토머스가 소리쳤다. 인간이 그토록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있는 대로 목청을 높였다.

테리사가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사방이 갑자기 완벽한 고요함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두운 터널 저 아래에서 문이 스윽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P504-505)


이곳은 공터의 본부 건물을 열 개쯤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지하실이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전후좌우에 온갖 종류의 기계들과 전선, 배관, 컴퓨터들이 가득했다. 토머스가 앉은 곳을 기준으로 오른쪽 벽 앞에 시신을 담을 때 쓰는 관 비슷한 상자 40여개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왼쪽 벽면에는 거대한 유리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리문 너머에 조명이 없어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봐!”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나 토머스는 이미 보고 있었다. 목구멍에 숨이 턱 막혔다. 젖은 거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등줄기를 타고 싸늘하게 소름이 돋았다.

그들 바로 앞의 벽에 진하게 색이 들어간 유리창 20여 개가 수평으로 나란히 나 있었다. 각 유리창 너머에는 한 사람씩 자리하고 앉아 실눈을 뜨고 공터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창백하고 여윈 모습들이라 마치 귀신같았다. 토머스는 잠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살아생전에는 물론 이거니와 죽어서도 결코 행복하지 못한, 굶주리고 분노에 차 있는 추악한 귀신들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그들이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터인들을 미로로 보내고, 공터인들의 삶을 빼앗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창조자들이었다. (P511-512)

“감염자들의 신체에 나타난 증상들은 플레어가 아닌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야. 그 병에 걸리면 우선 망상이 시작되고, 차츰 동물적 본능이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지배하다가 완전히 집어삼키게 돼. 인간성이 말살되는 거지. 그 병은 뇌에 자리를 잡고 있어. 뇌를 온통 차지하고 있단 말이지. 너무나도 끔찍해. 그 병에 걸리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여자의 시선이 토머스에게서 테리사에게 옮겨 갔다가 다시 토머스에게 돌아왔다.

“우린 앞으로도 과학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런 시험을 하지 못하게 할 거야. 목숨을 걸고 ‘사악’ 집단과 싸우기로 맹세했거든. 어떤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인간성을 잃고 살아갈 순 없는 거니까.”

여자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개 얹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도 시간이 가면 더 자세히 알게 될 거야. 우린 안데스 산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쪽에서 살고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안데스 산맥 사이의 지역을 ‘그슬린 땅’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적도’라고 불렀던 곳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야. 그곳은 뜨거운 열기와 먼지뿐이고, 플레어 병에 감염이 돼서 완전히 야만인이 되어 버린 자들이 차지하고 있어. 우린 그곳을 가로질러 가서 치료약을 찾을 계획이야. 그때까지는 ‘사악’ 집단과 싸우면서 그들이 비인간적인 실험과 시험을 하는 걸 막을 것이고, 너희가 우리와 뜻을 같이해 주면 좋겠어.” (P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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