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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

영화 <미 비포 유> 2015년

by 노용헌

영화 <미 비포 유>는 긍정적이고 밝은 루이자가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 윌을 만나 그와 함께 나누는 버킷리스트를 통해 예전의 웃음과 행복을 되찾지만, 새롭게 시작된 인연 속에서 인생의 가치를 깨달은 만큼 그 허무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이야기다. 스위스에서는 실제 존엄사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조조 모예스를 로맨스의 여왕으로 만든 <미 비포 유>의 완결편은 <스틸 미>이다. <애프터 유>는 윌이 죽은 이후 루이자의 삶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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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익 급정거 소리. 무례한 경적 소리에 눈길을 들었다. 눈앞에 반들거리는 검은 택시의 측면이 보였다. 기사는 벌써 차창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시야의 한 끝에 확실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그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는 자기가 그 무언가의 길을 막고 있으며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블랙베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데, 어쩌면 자기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건, 가죽 장갑과 헬멧 아래의 얼굴, 남자의 눈에 떠오른 충격이 거울처럼 자기 표정을 반사하고 있던 것. 폭발이 일어나고 모든 게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P10)


“미안해, 루이자.” 이야기를 마친 후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호주로 돌아가기로 했어. 우리 아버지 상태도 별로 좋지 않고, 성에서도 아예 매점 사업을 시작하는 게 확실해 보이고 말이야. 벽에 공지가 붙어 있더라고.”

생각해보니 내가 진짜로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프랭크는 내게 봉투를 주며 다음 질문이 내 입술에서 미처 튀어나오기도 전에 대답부터 해주었다. “있잖아, 공식적인 계약 같은 걸 한 적은 없지만 너를 잘 돌봐주고 싶었어. 석 달 치 봉급이 들어 있어. 우리 가게는 내일 문을 닫을 거야.”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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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이 일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도 고개를 디밀고 모니터를 보려 했다.

“방금 들어온 겁니다. 지금 방금요. 간병인 자리입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영 재주가......”

“노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 고용이에요. 다른 분 자택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건데, 주소가 당신 집에서 3킬로미터 거리도 안 돼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돌보고 말 상대를 해준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그 사람 뒤를 닦......”

“제가 보기에는 뒤 닦는 일은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모니터를 훑어보았다. “그는..... 사지마비환자입니다. 낮 시간에 식사와 활동을 도울 사람이 필요해요. 이런 일들은 보통 환자가 어디 나가고 싶어 할 때를 위해 같이 있어주고, 환자가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을 도와주는 겁니다. 아, 급여도 썩 괜찮아요. 최저 임금을 훨씬 상회합니다.”

“아마 뒤 닦아주는 일이 포함되어서 그럴 거예요.”

“제가 직접 그쪽에 전화를 해서 뒤 닦아주는 일은 절대 없도록 확인하지요. 그러면 면접 보러 가실 겁니까?”

말만 들으면 진짜 질문 같았다. 그러나 우리 둘 다 답을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집으로 가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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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누가 들어도 솔기가 뜯어지는 소리였다. 내려다보니 내 스커트 천을 맞붙인 박음질선이 뜯겨 너덜너덜한 실크실이 보기 흉하게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미스 클라크, 사지마비환자를 다루어본 경험이 있나요?”

몸을 돌려 트레이너 부인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최대한 재킷으로 치마를 가리려고 꿈틀댔다.

“아니요.”

“간병인 생활을 오래 하셨나요?”

“어..... 제대로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귓전에 시예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배우면 잘 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사지마비환자가 뭔지 아시나요?”

나는 멈칫거렸다. “어..... 휠체어에서 생활해야 할 때를 말하나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 정도가 상당히 다양하지만, 이 경우에 우리는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고 손과 팔의 움직임이 부자유스럽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미스 클라크에게 문제가 될까요?”

“저, 저보다는 그분에게 더 큰 문제겠죠.”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트레이너 부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라.....”

“운전할 수 있어요. 미스 클라크?”

“네.”

“면허 기록은 깨끗하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라 트레이너가 들고 있던 목록의 한 칸에 체크를 했다. (P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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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 부인이 문을 닫고 잠깐 돌아서더니 나를 똑바로 보았다.

“했던 말이지만 한 번 더 해야겠어요. 윌 옆에서 항상 누가 지켜줘야 한다는 게 아주 중요해요. 지난 번 간병인은 자동차를 수리하러 몇 시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는데, 윌이..... 그 여자가 없는 사이에 몸을 다쳤어요.” 그녀는 아직도 마음에 상흔이 남은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요.”

“당연히..... 가끔씩 쉬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그저, 말하자면, 10분이나 15분 이상 혼자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을 뿐이에요. 피치 못할 일이 생기면 인터폰으로 연락줘요. 남편 스티븐이 집에 있을지 모르니까. 아니면 제 휴대폰으로 걸어주세요. 휴가가 필요하면 최대한 빨리 말해주면 고맙겠어요. 임시직을 찾기가 늘 쉬운 건 아니니까요.”

“그럼요.”

트레이너 부인이 거실 장을 열었다. 흡사 미리 여러 번 연습한 연설문을 낭송하는 말투였다. 내 앞에 간병인이 몇 명이나 거쳐갔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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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휠체어를 탄 남자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밑에서 올려다 보았다. 그 눈길이 내 시선과 마주쳤고, 잠시 무서운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피마저 얼어붙게 만들 듯 소름끼치는 신음소리가 났다. 그는 입가를 씰룩거리더니 한 번 더 이 세상 소리 같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뻣뻣하게 경직된 트레이너 부인이 신경 쓰였다.

“윌, 그만두지 못해!”

그는 어머니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또 한 번 원시적인 소리가 그의 명치에서 솟아올랐다. 끔찍하고 괴로운 소음이었다. 나는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모로 꼬아 어깨에 처박은 채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기괴한 외모였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가방을 움켜쥔 내 손등에서 핏기가 하얗게 가셨다.

“윌! 제발 이러지 마!” 부인의 목소리가 신경발작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제발 부탁이야. 이러지 마.”

아 하나님, 나는 생각했다. 저 이 일 못해요. 못 하겠어요. 꿀꺽, 세게 침을 삼켰다. 남자는 아직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도 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저, 저는 루라고 해요.” 어울리지 않게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손을 내밀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잡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나서 그냥 힘없이 흔들기만 했다. “루이자를 줄인 애칭이죠.”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머리도 어깨 위에 반듯이 자리를 잡았다. (P45-46)


“오후에 어디 가고 싶으세요? 그리고 싶으시면 어디 드라이브라도 가면 좋을 텐데요.”

네이선이 가고 난 뒤로 거의 3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홍차 잔을 최대한 사람답게 씻고 또 씻었던 참이라. 이 고요한 집 안에서 한 시간만 더 지내고 나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를 생각하고 있죠?”

“모르겠어요. 그냥 시골길을 한 바퀴 돌고 올까요?” 나는 가끔 하곤 하는 트리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 애는 완벽하게 차분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형이라 사람들이 쉽게 보고 괴롭히는 일이 절대 없었다. 내가 듣기에도 내 말투가 사무적이면서 씩씩하게 들렸다.

“시골이라.” 그는 마치 한번 고려해보겠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뭘 보게 될까. 나무 몇 그루? 하늘?”

“모르겠어요. 보통 어떤 일을 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미스 클라크. 이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앉아 있어요. 그냥 존재한다고 할까.”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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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2주 동안 나는 윌 트레이너를 아주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옛날의 자신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장발로 방치하고 수염고 턱을 다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적 피로, 아니면 꾸준한 심신의 불편(네이선은 그 몸이 편할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탓인지 회색 눈가에는 잔주름이 져 있었다. 눈에는 세상에서 늘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공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그게 방어기제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가 삶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믿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불쌍하게 여기고 싶었다. 정말이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흘끗 보일 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나는 그의 문제가 단순히 꼼짝 없이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한다든가 신체적 자유를 잃었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마치 가톨릭 연도처럼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인간적 굴욕과 건강 문제들, 위험과 불편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내가 윌이라도 아마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일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 맙소사,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지독하게 못되게 굴었는지 모른다.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어김없이 날선 대꾸가 날아왔다. 따뜻하냐고 물어보면 담요가 필요할 때 달라고 말할 능력은 있다고 쏘아붙였다. 영화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진공청소기 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냐고 물어보면, 아니, 그럼 조용히 청소기 돌리는 법이라도 발명한거냐고 대꾸했다. 밥을 먹여줄 때는 음식이 너무 뜨겁다 너무 차다,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포크를 갖다 댄다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는 말이나 행동을 전부 다 꼬아서 사람 멍청이 만드는 데 기가 막힌 재주가 있었다.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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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 둘 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이야.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그냥 친구 사이였어. 서로 걱정해주는 친구 있잖아. 그저 루퍼트는 내가 사고를 당한 후 내게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고......”

“대단한 일 하셨네.”

“제발 이러지 마. 이건 너무 끔찍해. 너한테 얘기하는 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우리 둘 다 그랬어.”

“그래 보이네.” 윌이 쌀쌀맞게 말했다.

루퍼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봐. 우리 둘 다 너를 걱정하니까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서 이 얘기를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너도 알아야 해. 어쨌든 2년이나 됐잖아.”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문 앞에서 돌아서려 했다. 힘이 들어가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다시 들려온 루퍼트의 언성이 한층 높아져 있어서 여전히 다 들렸다.

“이봐, 이러지 말라고. 끔찍하게 힘들 거라는 건 알아...... 이 모든 일이, 하지만 리사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잘 살기를 바라야지.”

“뭐라고 말 좀 해봐, 윌. 부탁이야.”

그의 얼굴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전혀 읽을 수 없는 표정을 고수하면서도 일종의 아득한 경멸을 담은 윌의 얼굴이, 안 봐도 본 것 같았다.

“축하한다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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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죠?”

나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가슴이 터질 듯 두방망이질 쳤다.

“친구 분들께서 똥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고 쳐요. 좋아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날마다 여기 오면서 할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모든 사람 인생을 불쾌하게 만드시더라도 제 인생은 건드리지 않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윌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한 박자 쉬고 다시 말했다. “그러면 내가 그쪽이 여기 안 오면 좋겠다고 한다면?”

“저를 고용하신 건 아니잖아요. 전 당신 어머니가 고용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이젠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 이상 전 절대 안 나가요. 특별히 그쪽 걱정이 돼서도 아니고, 이 멍청한 일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쪽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싶어서도 아니에요. 그냥 돈이 필요해서에요. 알았어요? 전 진짜로 돈이 필요하다고요.”

윌 트레이너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에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왠지 놀라움이 엿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자기 말에 토를 다는 일이 굉장히 낯선 모양이었다.

아, 망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나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사고를 쳤구나.

그러나 윌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가 눈길을 피하지 않자 또 재수 없는 소리를 하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휠체어를 빙글 돌렸다. “사진들이나 맨 밑 서랍에 넣어둬요, 알겠죠? 전부 다.”

그리고 나지막한 윙윙 소리와 함께, 그는 사라졌다. (P82-83)


세상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포장도로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가 하는 실감이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데를 엉망진창으로 땜질해놓았거나 아예 울퉁불퉁하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윌 곁에서 걷다 보니, 고르지 못한 이음새가 나올 때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소스라치는지,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네이선은 모르는 척 태연했지만 그 역시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윌의 어두운 얼굴은 결연해 보였다.

또 하나는 사려 깊은 운전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도 진출입로를 아예 막고 주차를 하거나 너무 빽빽하게 차를 붙여 놓아서 실제로 휠체어가 도로를 건널 길이 아예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충격을 받은 나는 뭔가 무례한 말을 쪽지에 갈겨 와이퍼에 꽂아놓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지만 네이선과 윌은 이골이 난 눈치였다. 네이선이 길을 건널 만한 적당한 지점을 찾고 우리 둘이 힘을 합쳐 휠체어 양옆을 들어 내리고서야 간신히 길을 건널 수 있었다. (P98-99)


“얘야, 아빠와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야. 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 애는......” 부인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한창 망설였다. “윌은...... 자살 기도를 했어.”

“뭐라고요?”

“아빠가 발견하셨단다. 지난 12월에. 정말, 정말 끔찍했어.”

사실 이미 짐작했던 바를 확인했을 뿐이지만, 그래도 온몸의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숨죽이고 우는 소리와 위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또 한 번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슬픔으로 목이 잔뜩 멘 조지아나가 다시 말했다.

“그 여자는......?”

“그래, 루이자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고용한 거야.”

나는 발길을 딱 멈췄다. 복도 반대편 끝. 화장실 쪽에서 나지막하게 웅얼거리는 네이선과 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는 대화를 까맣게 모른 채로, 한 발짝 더 문에 다가섰다. 손목의 흉터를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윌을 혼자 두지 말아야 한다는 트레이너 부인의 과도한 불안감, 내 존재에 대한 윌의 적개심,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별로 쓸모 있는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도. 나는 아기를 보는 보모였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윌은 알았다. 그래서 나를 그토록 미워했던 것이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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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은 제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저 기분 좋은 외출을 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그쪽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

왜 그렇게 작정하고 심술을 부렸느냐고, 그쪽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내가 겪은 온갖 봉변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재미있게 보내려고 어디 그쪽은 노력이나 했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 멍청한 배지를 사라고 허락해주기만 했어도 어쩌면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을 거고 다른 일들은 다 잊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내 말이 그 말이요.”

“뭐라고요?”

“아, 당신도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귀찮아도 나한테 물어봤더라면 말이요, 클라크. 딱 한 번만 이 소위 즐거운 소풍 계획에 대해 나와 의논을 했더라면, 말을 해줬을 거요. 나는 말을 싫어하고, 경마도 싫어한다고. 옛날부터 싫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한번 물어보지도 않았지. 그쪽이 나한테 시키고 싶은 일을 혼자 정하고 강행했잖소.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내 대신 결정을 해줬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럴 생각이 아니......”

“하지만 결국은 그랬어요.”

그는 휠체어를 빙글 돌려 나를 등졌고, 그렇게 1~2분간 침묵이 지속되자 나는 그게 나가라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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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큼 지독한 속물은 처음 봤어요, 클라크.”

“뭐예요? 내가?”

“혼자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정해놓고 온갖 경험들을 아예 막아놓고 있잖아요.”

“하지만 진짜 아닌 걸요.”

“어떻게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해보고, 아무 데도 안 가봤는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길이 없었는데?”

이 남자가 어떻게 나 같은 사람 기분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줄 수 있을까? 아예 이해도 해주지 않으려는 그가 서운하고 원망스러워서 삐치고 싶었다.

“해봐요. 마음을 열어요.”

“싫어요.”

“왜?”

“불편할 테니까. 왠지…… 왠지…… 사람들이 다 알 것 같단 말이에요.”

“누가? 뭘 알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챌 거예요.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내 기분은 어떨 것 같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클라크, 요즘 나는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다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쳐다봐요.”

음악이 시작되자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윌의 아버지는 복도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고 한 풀 꺾인 웃음소리가 아득히 먼 데서 들리는 것처럼 별채로 스며들어왔다. “장애인 출입문은 저쪽입니다.” 경마장의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꼭 그가 별종의 인류인 것처럼.

나는 CD 커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이 가주면 갈게요.”

“하지만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절대로.”

그가 이 말을 곱씹는 사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빌어먹을, 당신은 진짜 사람 귀찮게 만드는 데 뭐가 있어.”

“그거야 그쪽한테 날마다 듣는 말이라서.” (P225~226)


그래서 한번 읽어 보았다. 진짜 유전학에 무슨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안 읽으면 윌이 계속 물고 늘어질 거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즘 그런 식이었다. 원래 사람을 윽박지르는 데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진짜 짜증나는 건, 내용을 꼬치꼬치 따져 물어본다는 사실이다. 순전히 내가 진짜로 읽는지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아니, 그쪽이 내 선생도 아니잖아요.”

“천만 다행이지 뭡니까.”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 책은 (사실 꽤 읽을 만해서 깜짝 놀랐다) 전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들이 남자를 고르는 건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종이든 암컷은 자손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가장 강력한 수컷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건 암컷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자연의 법칙이 원래 그럴 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논증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저자의 설득에는 불편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 이 저자의 눈으로 보면 윌은 육체적으로 약하고 훼손된 존재였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였다. 그의 삶은 무가치할 터였다.

오후 내내 하도 그 얘기를 줄창 떠들어대기에 내가 못 참고 말대꾸를 해버렸다. “이 매트 리들리라는 작자가 고려하지 않은 요소가 하나 있다구요.” 내가 말했다.

윌은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하, 그래요?”

“유전적으로 우월한 수컷이 사실 알고 보면 머저리 천치면 어떡하고요?”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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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줘요.”

나는 거리를 슬쩍 살피고 돌아서서 골반에 붙은 반창고를 살짝 떼었다.

“멋진데요. 꼬마 꿀벌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

“이제 평생 부모님 앞에서 돌아다닐 때는 배바지를 입어야 돼요.” 나는 그가 휠체어를 타고 트랩에 오르는 걸 도와주고 높이를 올렸다.

“진짜 조심해야 돼요. 그쪽 어머님이 당신도 문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공영주택단지 출신의 여자 때문에 탈선했다고 일러줘야지.”

“좋아요. 그럼. 트레이너, 당신 것도 보여줘요.”

그는 반쯤 미소를 짓고 나를 그냥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집에 가면 어차피 당신이 반창고를 갈아줘야 할 텐데.”

“암요. 그게 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어서요. 보여줄 때까지 운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내 셔츠 걷어봐요. 오른편, 당신 쪽에서 오른편.”

나는 앞좌석 사이로 몸을 뻗어 그의 셔츠를 걷고 그 밑의 작은 거즈를 떼어냈다. 거기, 그의 하얀 피부에 도드라지는 까만색으로, 흑백 줄무늬의 먹물 사각형이 있었다. 하도 작아서 거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아보려고 두 번쯤 들여다봐야 했다.

Best before: 19 March 2007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은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이거 혹시.....”

“내가 사고 당한 날짜 맞아요.” 그는 눈길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미치겠네. 제발 감상 따위 집어치워요, 클라크. 웃자고 한 거니까.”

“웃겨요. 되게 거지 같이 웃겨요.”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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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면 날마다, 그가 TV를 보거나 다른 일에 몰두해 있을 때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윌을 행복하게 만들’ 마술 같은 이벤트를 생각해내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못하는 일들, 우리가 갈 수 없는 곳들의 목록이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내가 믿는 것들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못 하는 일들의 목록이 할 수 있는 일보다 길어지던 날. 나는 다시 채팅방으로 들어가서 조언을 구했다.

하! 리치가 말했다. 우리 세상에 들어온 걸 환영해요, 꿀벌 양.

그 후로 이어진 대화들 속에서 나는 휠체어에서 술에 취하게 되면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카테터 대 참사도 있고 도로 연석에서 떨어지기, 그리고 다른 술 취한 사람들이 남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일도 있었다. 어딜 가나 사지마비환자가 아닌 사람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고, 특히 파리는 지상에서 휠체어에 가장 적대적인 도시라고 했다. 이 사실은 정말 실망스러웠는데, 내 마음 속 아주 작은, 낙관적인 한 자락은 여전히 언젠가 우리가 그곳에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P320)


간병인 일에서 가장 나쁜 점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들어 올리고 청소를 하는 일도 아니고, 아득하지만 항상 코 끝에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도 아니었다. 심지어 다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질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조차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하루 종일 누군가와 딱 달라붙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 기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기분이나.

윌은 내가 처음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준 이후 오전 내내 나와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삼자가 딱 짚어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 농담도 적어지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 대화마저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는 조간신문 내용에 대해서도 내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예요?” 눈빛은 흔들렸지만 표정은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P331)


그는 잠깐 휠체어를 정지시키고 빙글 돌려 초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게 놀라워요.” 그가 말했다. “어렸을 때 말이에요. 우리 삶의 궤적도 어디쯤에서는 겹쳤을 텐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는 사실 비슷한 무리에서 활동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어차피 그쪽이 장검을 휘두르며 유모차를 타던 시절에 나는 아마 갓난아기였을 거예요.”

“아. 자꾸 잊어버리네. 난 당신한테 대면 완전 영감탱이지.”

“여덟 살 연상이면 분명히 ‘나이 많은 남자’ 축에 들 자격이 있죠.” 내가 말했다. “심지어 10대 때도 우리 아빠는 ‘나이 많은 남자’와는 절대 데이트를 못하게 했어요.”

“자기 소유의 성이 있어도?”

“뭐, 물론 그렇다면야 상황이 좀 달라지겠죠?”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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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결국 어떻게 될까 나는 정말로, 정말로 겁이 나고는 해요.”

그는 그 말이 우리 사이 공기 중에 새겨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처럼 사는 게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혼자 숨을 쉴 수도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고, 말도 못 하게 될지도 몰라요. 순환계에 문제가 생기면, 팔다리를 잘라내야 한다는 뜻이죠. 무한정 입원하게 될 수도 있어요. 지금도 사실 산다고 하기엔 형편없는 삶이지만, 클라크,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생각하면..... 어떤 날 밤에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진짜로 숨이 안 쉬어지기도 해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런 거 알아요?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거. 아무도 두렵다든가, 아프다든가, 무슨 멍청하고 뜬금없는 감염으로 죽게 될까봐 무섭다는 얘기는 원치 않아요. 다시는 섹스를 할 수 없고 자기 손으로 만든 요리를 다시는 먹을 수 없고 절대 자기 자식을 안아볼 수 없게 되면 기분이 어떨지.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휠체어에 이렇게 앉아 있다보면 가끔 죽도록 답답해져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싶어진다는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실날 같은 희망에 매달려 살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아버지를 사랑하는 내가 용서가 안 돼요. 동생은 이번에도 또 나 때문에 자기가 뒷전이 됐다는 사실 때문에 날 원망하고 있지만...... 내가 불구가 됐다는 얘기는, 어렸을 때부터 죽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제대로 미워할 수도 없다는 뜻이죠. 우리 아버지는 그냥 싹 다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은 다 밝은 면만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야 하는 거고.”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재앙에도 밝은 면이라는 게 있다는 믿음이 꼭 필요한 거죠.” (P358-359)


“혹시 이런 거 알아요?”

밤새도록 그렇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어도 좋았다. 특유의 눈가에 잔주름이 지는 웃음. 목이 어깨로 이어지는 그 지점.

“뭔데요?”

“가끔은 말이에요, 클라크. 이 세상에서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거.”

“그러면 우리 어디론가 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미처 찾기도 전에, 입 밖으로 그 말이 새어 나와버렸다.

“뭐라고요?”

“어디로 떠나요, 우리. 일주일 동안 아무 생각없이 즐겨요. 당신하고 나하고, 아무도 없는 데서, 이런......”

그는 기다렸다. “머저리 천치들?”

“........ 머저리 천치들이 하나도 없는 데서, 좋다고 말해줘요. 윌, 어서요.”

그의 시선이 마주한 내 눈을 떠나지 않았다.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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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날 아침 네이선에게 계획을 보여주었다. 우리 둘은 부엌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뭔가 철저히 비밀스러운 일을 꾸미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잔뜩 숙이고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그는 내가 인쇄해 온 문서를 휙휙 넘기며 훑어보았다.

“스카이다이빙 건에 대해서는 다른 사지마비환자들과 상의를 했어요. 의학적으로는 못할 이유가 없대요. 그리고 번지점프도요. 경추에 가해질 수 있는 압력을 경감하는 특별 장치가 준비되어 있대요.”

나는 초조하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윌의 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네이선이 내 능력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계획이 네이선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곳은 우리가 필요로 할 만한 것들을 다 갖추고 있어요. 미리 전화를 하고 의사의 처방전을 갖고 오면, 웬만한 일반의약품은 다 구할 수 있대요. 혹시라도 약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그는 미간을 모았다.

“좋아 보이는데.” 마침내 그가 말했다. “정말 잘했어요.”

“윌이 좋아할까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짐작도 못 하겠네요. 하지만.....” 그는 내게 문서를 건네주었다. “지금까지 우리를 계속 놀라게 했잖아요. 루.” 그의 미소는 한쪽 얼굴을 슬며시 일그러뜨리며 짓궂게 퍼졌다. “이번에도 못 해낸다는 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날 밤 퇴근하기 전에 트레이너 부인에게도 보여주었다. (P408)


“여기서 자다 보면 그 친구가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여전히 걸어 다니고 스키를 타고 별별 걸 다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 친구의 심리적 방어막이 걷히고 진심이 다 드러나서, 말 그대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거기 내가 같이 앉아 있어도, 어차피 아무것도 나아질 리 없으니까 해줄 말이 하나도 없어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패를 쥐고 사는 친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압니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목이 메어 숨쉬기가 답답해졌다.

“그렇지만..... 그건 예전의 이야기잖아요. 모두들 내가 오고 나서 달라졌다고 했잖아요. 이제는 달라졌다구요. 나와 같이 있을 때는 다르잖아요, 안 그래요?”

“그야 물론이죠, 하지만......”

“하지만 우리조차 그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심지어 더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지 못하면 어떻게 그가 자기 미래에도 좋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겠어요?”

네이선은 머그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 그는 건강해질 수 없어요.”

“그건 모르잖아요.”

“알아요. 줄기세포 연구에 획기적인 성과가 난다면 모를까. 윌은 저 휠체어에서 10년은 더 살아야 해요. 그것도 최소한. 식구들은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당사자는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문제의 절반에 불과해요. 부인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윌을 살려두고 싶어 하죠. 트레이너 씨는 결국 아들에게 선택을 맡길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P44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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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선택했을 만한 길은 아니지만,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난 알아요. 그리고 나 이 말만은 할 수 있어요. 당신 덕분에..... 덕분에 내가 꿈꿔보지도 못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당신이 아무리 지독하게 못되게 굴어도, 나 당신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요. 당신은 자신이 초라하게 쭈그러들었다고 느낄지 몰라도. 난 세상 그 누구보다 그런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내 손을 쥔 그의 손에 아주 살짝 더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자, 용기가 솟아났다.

“내가 피고용인이라는 상황이 이상하면 나 그만두고 다른 데 가서 일할게요. 말해주고 싶었어요. 대학 과정에 지원했다고. 인터넷에서 조사도 굉장히 많이 해봤어요. 다른 사지마비환자들과 간병인들하고 얘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굉장히, 굉장히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관계가 잘 될 수 있는지를. 난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냥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알겠어요? 내가 다 생각해놓고, 다 찾아놨다고요. 이제 내가 이런 사람이 됐다고요. 다 당신 책임이잖아요. 날 딴판으로 바꿔놨으니까.”

나는 반쯤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당신이 날 내 동생 같은 여자로 만들어버렸어요. 물론 옷 입는 센스는 훨씬 낫지만요.”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의 양손을 잡아 올려 입에 갖다 대고 키스했다. 내 살에 닿는 그의 살을 느끼고 예전에는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이렇게 그를 보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떻게 하실래요?” 내가 속삭였다.

그의 눈이라면 영원히 들여다보고 있으라고 해도 좋았다.

그 대답이 너무 조용해서, 한 순간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뭐라고요?”

“안 돼요, 클라크.”

“안 된다고요?”

“미안해요. 내겐 충분하지 않아.” (P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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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여기서 끝내야만 해요. 더는 휠체어도 싫고, 폐렴도 싫고, 타는 듯한 팔다리도 싫습니다. 통증이나 피로감도, 아침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잠을 깨는 것도 이젠 싫어요. 우리가 돌아가면, 난 스위스로 갈 겁니다. 그리고 날 사랑한다면, 클라크, 당신 말처럼 날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가준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거예요.”

난 홱 머리를 젖혔다.

“뭐라고 했어요?”

“나는 지금보다 절대 더 나아지지 못해요. 오히려 점점 악화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죠. 그리고 내 삶은, 지금도 이렇게 축소되었는데, 더 작아질 거예요. 의사들이 그 정도 얘기는 해줬어요. 벌써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한 병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다 느껴져요. 이젠 더는 통증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 이 물건에 묶여 있는 것도 싫고, 남한테 의존하는 것도, 두려워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예요. 당신 말처럼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러면, 해줘요. 나와 함께 있어요. 내가 바라는 끝을 줘요.”

공포에 질려 그를 바라보았다. 귓전에서 혈류가 쿵쿵 뛰는 소리가 다 들렸다. 차마 그 말을 실감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부탁을 나한테 할 수가 있어요?”

“알아요. 내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당신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는데, 같이 가서 자살하는 꼴을 지켜봐 달라고요?”

“미안해요.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려는 뜻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게는 사치스러운 시간 여유가 없어요.”

“뭐, 뭐라고요? 아니, 벌써 예약을 다 해놓은 거예요? 어기면 큰일 나는 약속이라도 잡아놨냐고요?”

호텔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는 걸, 어쩌면 높아진 우리 언성까지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걸 눈치챘지만 상관없었다.

“그래요.” 윌은 잠시 조용하더니 말했다. (P474-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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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엄마, 윌이 결정한 일이에요. 이 모든 일의 핵심은 윌을 지지해준다는 거예요.”

“윌을 지지해? 그런 쓰레기 같은 소리는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구나. 너는 어린애야, 루이자.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어. 그리고 이 일로 네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몰라.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걸 도와주고 나서 대체 어떻게 밤에 잠을 편히 잔단 말이니? 한 사람이 ‘죽는’ 걸 돕겠다는 거야. 정말로 이해하고 하는 말이니? 윌을 돕는다는 거야. 그 사랑스럽고 영특한 젊은이가 ‘죽는’ 걸 돕는다는 거잖아.”

“윌은 자기한테 옳은 일이 뭔지 잘 알고 있다고 믿으니까. 나는 밤에 달게 잘 수 있어요. 그리고 그에게 있어 최악의 일이란 단 하나의 결정도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되는 거고. 자기 스스로 어떤 일도 못하게 되는 거니까......” 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그들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요. 사랑하니까, 혼자 두고 떠나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리고 거기 있어주지 못하고 그 사람이..... 뭘..... 이렇게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말을 삼켰다. “그래서 그래요, 나 갈 거예요. 두 분이 내 앞날을 알아서 챙겨주시거나 이해해주실 필요도 없어요. 내가 다 알아서 감당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스위스로 가요. 두 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좁은 복도가 고요해졌다. 엄마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한 발 엄마에게 다가서며, 제발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엄마? 내가 윌한테 진 빚이 있어요. 그 빚을 갚으려면 가야만 해요. 누구 때문에 내가 대학에 지원했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내 인생에서 의미를 찾도록, 새상 밖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야심을 갖도록 용기를 줬다고 생각하세요? 모든 걸 바라보는 내 생각을 바꿔놓은 사람이 누구 같아요?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라졌는데? 다 윌 덕분이라고요. 저는 내 평생의 27년 세월보다 지난 6개월 동안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스위스에 와달라고 하면, 그래요, 난 갈 거예요. 결과가 어떻든.” (P5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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