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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베 세이코의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4년

by 노용헌

애니메이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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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바다다!”

조제는 너무 좋아서 숨을 헐떡이며 외친다. 조제는 금방 호흡이 가빠진다. 너무 웃거나 센 맞바람을 받으면 호흡 곤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호흡할 공기를 빼앗겨버리는 것 같다. 아마도 하반신 마비와 관계 있는 것 같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어릴 적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지만, 뇌성마비 특유의 증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을 부정하는 의사도 있어서, 결국 원인도 모른 채 조제는 ‘뇌성마비’ 환자가 되고 말았다. 벌써 스물다섯 살이나 되었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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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말이야, 지금부터 내 이름, 조제로 할래.”

“왜 네가 조제야?”

츠네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없어. 그냥 조제가 내게 꼭 어울리니까. 구미코라는 내 이름, 이제부터 안 쓸래.”

“그렇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바꾸면 안 돼. 시청에서 허락 해주지 않을걸.”

“시청 따위가 아무렴 어때. 내가 그냥 나를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자기, 앞으로 조제라고 안 부르면, 대답하지 않을 거야.”

츠네오는 슬그머니 그 이름을 지은 연유를 물어보았다. 소설을 좋아하는 조제는 시청에서 운영하는 순회부인문고에서 소설책을 자주 빌려 읽는데(장애인은 무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추리소설인 줄 알고 빌렸는데,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몇 권이나 빌려 보게 되었다.

그 프랑수아즈라는 여류작가는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을 조제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제는 이 작가의 소설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야마무라 구미코라는 이름보다, 야마무라 조제가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아니, 분명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조제라는 이름이 그런 행운을 가져다 준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란, 그녀 앞에 츠네오가 나타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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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휠체어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충격으로 넘어졌고, 덕분에 휠체어는 넘어지지 않고 멈춰 섰다.

“괜찮아요?”

남자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조제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제는 흥분하면 호흡이 가빠져서 숨을 고르기에도 정신이 없어진다.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축 늘어져 있는 걸 본 남자는 당황하여 뭐라고 큰 소리로 말을 걸었는데, 조제에게는 시끄러운 잡음처럼 들렸을 뿐이다. 할머니가 달려오고,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조제는 겨우 숨을 고르고 제정신을 차렸다.

“정말 나쁜 놈이네.”

남자는 격분하다가, 이 부근에 있으면 또 위험할지 모르니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하면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바로 츠네오다. 근처 연립주택의 단칸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대학생이었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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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츠네오는 조제의 고압적인 태도에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모른다. 츠네오는 복지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전공이라서 장애인을 위한 활동에는 참여해본 적이 없지만, 양호 자원봉사를 하는 친구로부터 가끔씩 이야기를 듣곤 했다. 장애인 가운데는 차별에 대한 투쟁의식이 유독 강한 이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살면서 저도 모르게 모난 성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츠네오가 보기에 조제는 그런 유형에 속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조제는 여럿이서 함께 하는 일을 싫어해서 모여서 데모를 하거나 집회를 열어 행정기관에 쳐들어가는 집단에서는 멀리 떨어진 채,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조제를 바깥에 내보내려 하지 않은 탓도 있었던 것 같다. 수금원이나 시청 직원과도 만나게 하지 않았다.

츠네오가 바깥바람을 몰고 오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츠네오는 멀리 떨어진 대중목욕탕으로 조제를 데리고 가서(그곳만이 열한시경에 조제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준다) 마룻바닥을 기어오는 조제를 안아 휠체어를 태운다. 기왕 온 참에, 하고 츠네오가 남탕에서 목욕을 하면, 조제는 기다리고 있다가.

“뭘 하고 있어. 추운데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있어. 몸이 다 식어버렸잖아!” 하고 고압적으로 츠네오를 나무란다.

“내가 왜 이런 야단을 맞으면서 이 짓을 해야 해.”

츠네오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휠체어를 밀고 돌아온다. (P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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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압적인 태도와 날카로운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조제의 아름다운 얼굴은 언제나 츠네오에게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보는 여자애들은 모두 건강한 암호랑이처럼 위풍당당하고 섹시해 보이지만, 성적인 냄새라고는 전혀 없는 조제에게서는 마치 오래된 집의 창고에서 훔친 헌 인형을 휠체어에 싣고 옮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그녀에게는 고압적인 말투가 잘 어울린다.

그 즈음, 조제네 집 부근은 모두 구식 변소였는데, 시의 지원금으로 하수도 정비를 하면서 구식 변소를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조제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변기 주변에 보조대와 손잡이도 달게 되었다. 그 설계에 대해 일일이 자신의 의견을 내는 조제의 주문을 업자에게 전하는 것은 츠네오의 임무였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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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는 동물원에 가고 싶어했다. 시설에 있을 때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지만, 시간 제한 때문에 새와 원숭이, 코끼리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다. 동물원은 장애인들이 빠른 시간에 다 둘러보기에는 너무 넓었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츠네오는 맹수 우리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오랜만에 봄날다운 날씨라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상상했던 그대로라며 좋아했다. 맹수 특유의 몸짓으로 우리 속을 열심히 오가는 호랑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억제된 흉포한 힘을 느끼게 하는 호랑이의 광기 어린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조제는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도 무서운 것을 보려고 하는 호기심은 누구보다 강한 듯하다.

호랑이는 어슬렁거리며 우리 안을 오가다가 갑자기 조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조제는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호랑이는 일격에 코끼리라도 쓰러뜨릴 것 같은 튼튼한 앞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치고 몸을 비틀면서 포효한다.

노랑과 검정이 만들어낸 강렬한 얼룩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번득인다. 조제는 호랑이의 포효에 기절할 만큼 놀라 츠네오의 옷자락을 잡는다.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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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주위에 밝은 불빛이 들어왔다. 휠체어에 조제를 태워주고 벨보이가 돌아가자, 해저에는 츠네오와 조제. 둘 만 남았다. 바닥을 제외하면 온통 유리 세계에 파란 바닷물이 들어왔다. 해조가 물결에 흔들리고, 그 물 속에서 코발트색 물고기들이 줄무늬를 그리며 헤엄치고, 빨간 물고기가 그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간다.

바닥의 모래에는 곰치와 게, 새우, 거북이 등이 있었다. 츠네오의 발 소리와 휠체어 구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다른 손님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은색과 청색의 커다란 물고기가 눈앞을 헤엄치며 지나간다. 방어였다.

산호초에 배를 스치며 지나가는 것은 잿방어와 감성돔, 능성어, 상어들이다.

물고기의 눈은 말간 게 사람의 얼굴과 많이 닮았다.

“야, 멀리서 보러 온 보람이 있네. 정말 멋져.”

츠네오는 그냥 즐거웠지만, 조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저에 있으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마냥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조제는 공포와는 다른 어떤 도취에 빠져, 끝도 없이 그 안을 뱅뱅 돌았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죽을 때까지 그 안을 돌아다닐 것 같았다. 결국, 참다못한 츠네오에게 야단을 맞고, 수족관 매표소의 여직원에게 부탁해 벨보이를 부르고, 그의 등에 업힌 채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계단을 다 오를 무렵부터 츠네오는 숨을 헐떡거렸다. 지상에는 밝은 여름 햇살과 선물 가게가 있고, 바다 냄새가 가득했다. 두 사람은 파라솔 그늘 아래서 커피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다. 식사는 특별히 부탁해서 방으로 가져오게 했다.

깊은 밤에 조제는 눈을 뜨고, 커튼을 열어젖혔다. 달빛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고, 마치 해저 동굴의 수족관 같았다.

조제도 츠네오도 물고기가 되었다.

죽음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죽은 거야.’

츠네오는 그후로도 조제와 같이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부라고 생각하지만, 호적 신고도 하지 않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피로연도 하지 않았고, 츠네오의 가족 친지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종이 상자 속에 담긴 할머니의 유골도 여전히 그대로다.

조제는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간을 잘 맞춘 음식을 츠네오에게 먹이고, 천천히 세탁을 해서 츠네오에게 늘 깨끗한 옷을 입힌다. 아껴 모은 돈으로 일년에 한 번 여행도 떠난다.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죽은 존재란, 사체다.

물고기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조제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그런 생각을 할 때, 조제는 행복하다. 조제는 츠네오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몸을 맡기고, 인형처럼 가늘고 아름답고 힘없는 두 다리를 나란히 한 채 편안히 잠들어 있다. (P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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