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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마의 산>

영화 <마의 산> 1982년

by 노용헌

스위스의 한 폐결핵 요양소를 무대로 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내적으로 열병을 앓고 있는 서구의 정신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풍부한 성찰과 반어로써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연금술적·신화적 요소 등을 도입한 상징적이고 정교한 구성으로 20세기 소설 양식의 발전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의학계의 비난과 소설 이론상의 이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 더 큐어와, 러시아의 영화 엔지니어링 레드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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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을 떠나 이틀만 지나면 사람은 —삶에 아직 굳건히 뿌리를 박지 않은 젊은이가 특히 그렇듯이— 의무, 이해관계, 근심과 희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즉 일상생활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것도 역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어쩌면 자신이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멀어지게 된다. 여행자와 고향 사이에서 돌고 날면서 굴러가는 공간은 보통 시간만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 공간도 시시각각 시간과 마찬가지로 내적변화를 일으키는 데, 어떤 의미에선 시간을 훨씬 능가하는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 주며, 인간을 자유로운 원래 그대로의 상태로 옮겨 놓으면서 그러한 망각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잠깐 사이에 방랑자와 같은 인간으로 바꾸어 버린다. 사람들은 시간을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의 공기도 그러한 종류의 음료수이다. 그리고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의 효력보다 더 빠르게 나타난다. (P14-15)


「아, 그래, 너는 벌써 집으로 다시 돌아갈 궁리를 하는 모양이구나.」요아힘이 대답했다.「좀 기다려 봐, 너는 이제 막 도착했잖아. 물론 여기 산 위의 우리들에게 3주란 아무것도 아닌 셈이야. 하지만 이곳에 찾아와서 3주간만 머물겠다는 너에게는 꽤 긴 시간이겠지. 무엇보다 먼저 이곳 기후에 적응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아. 이제 알게 될 거야. 우리들에게 별난 것은 기후뿐만이 아니야. 넌 이곳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알게 될 거야. 주의해서 지켜보라고! 그리고 너는 내 얘기를 했는데, 그것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야. [3주 후에 집으로 간다]는 말은 저 아래 세상의 생각이야. 물론 나는 얼굴이 검게 탔어. 하지만 이것은 주로 눈에 그을려서이고, 베렌스가 늘 말하듯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지난번에 실시한 종합 검진에서 베렌스는 앞으로 반년은 족히 걸릴 거라고 말했어.」

「앞으로 반년이라고? 너 돌았어?」한스 카스토르프가 소리쳤다. (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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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는 친구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넌 아무래도 믿지 않겠지만 말이야. 3주란 이들에겐 하루와 같은 거야.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모든 것을 배우게 될 거라고.” 이렇게 말하고 그는 덧붙였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개념도 변해버려.” (P21)


죽음에는 경건하고 명상적이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속성, 즉 종교적 속성이 있지만, 이와 동시에 전혀 다른, 이와는 반대되는 속성, 즉 지극히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속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지도 명상적이지도 경건하지도 않으며 단지 슬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다. 엄숙하고 종교적인 속성은 시신을 관대 위에 화려하게 안치해 둔 것에서도 표현되었고, 꽃의 화려함에서, 또 하늘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 종려나무 가지에서도 표현되었다. 더 나아가 가장 분명하게는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십자가에서, 관의 머리맡에 놓이 토르발센의 축복하는 그리스도상에서 표현되었고, 또 이럴 때 역시 종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리스도상 좌우에 세워진 촛대에서도 표현되었다. 이런 모든 물품은 할아버지가 이제 영원히 본연의 진짜 모습으로 되돌아갔음을 보다 자세하고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비록 어린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런 물품들은 모조리, 특히 많은 양의 꽃다발, 이들 중에 특히 많았던 만향옥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와 냉정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죽음이 지니고 있는 속성 중에 다른 속성인 아름답지도 않고, 사실 슬프지도 않으며 오히려 거의 상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저급하게 육체적인 속성을 미화해, 그것을 잊게 하거나 또는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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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개별적 존재로서 자신의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가 사는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보편적이고 비개인적인 토대를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에 대해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량한 한스 카스토르프가 실제로 그랬듯 그러한 토대에 결함이 있을 경우 자신의 정신적 건강이 이로 인해 막연히 침해받는다고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은 여러 가지 개인적인 목표와 목적, 희망과 전망이 눈앞에 떠다니고 있어 이러한 것들 때문에 더욱 노력하고 행동으로 몰고 가겠다는 원동력을 얻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주위의 비개인적인 것, 즉 시대 그 자체가 외견상 매우 활기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희망이나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면, 또 시대가 우리에게 희망도 없고 전망도 없으며 해결책도 없다는 것을 남몰래 인식시켜 주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시대에 대한 어떤 형태의 질문 —즉 우리의 모든 노력과 활동이 지닌, 개인적인 의미 이상의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해 공허한 침묵을 계속 지키고 있다면, 그러한 사태로 인한 모종의 마비 작용을 보다 솔직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거의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비 작용은 개인의 정서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으로부터 곧장 육체적이고 유기체적인 부분으로 파급될지 모른다.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에 시대가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데도, 현재 주어진 정도를 넘어서는 중대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지니려면, 흔히 볼 수 없는 영웅적 속성의 정신적 고독과 자주성이나 식을 줄 모르는 활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스 카스토르프의 경우에는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도 역시, 정말 존경할 만한 의미에서이지만, 그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었다. (P67-68)


“시간에는 결코 <사실>이라는 것이 없어. 시간이란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거야.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길고 짧은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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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가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라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이 완전히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라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느껴지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버린 것처럼 될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는 것 혹은 적어도 희미해지는 것이다. 청춘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느껴지고, 그후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역시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함이 틀림없다. (P203)


물론 시간 감각의 쇄신은 여행이라는 막간극이 끝난 후에도 효력이 남아 일상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더욱 새롭게 효력을 발휘한다. 기분 전환을 한 후 집에서 보내는 며칠간은 역시 다시 새로워지고, 폭넓고, 발랄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하지만 이런 효력은 며칠뿐이다. 일상의 규칙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일상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P204)


「34호실이군요.」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특유의 꽥꽥거리는 소리로 말했다.「틀림없군요. 댁이 감기에 걸렸다면서요?」이 말을 그녀는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그다음에는 영어와 러시아어로, 맨 마지막에는 독일어로 말했다.「어느 나라 말로 해야 하나요? 독일어로 해야겠지요. 아, 젊은 침센의 손님이지요, 이미 알고 있어요. 나는 수술실에 가봐야 해요.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콩 샐러드를 먹은 환자예요. 정말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어요……. 그런데 댁은, 여기에서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지요?」 (P321)


“감기라고요?” 고문관이 대답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생기겠습니까? 당신에게 이야기해 드리겠어요. 카스토르프 군. 잘 들어보세요, 내가 아는 한, 당신의 뇌에는 상당히 많은 주름이 잡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는 이곳 공기는 병을 낫게 하는 데 좋아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사실 그렇기도 해요. 하지만 이곳 공기는 병에 걸리게 하는 데에도 좋단 말입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어요? 공기가 우선 병을 촉진시키고, 몸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 다음에 잠재하고 있는 병을 폭발하게 합니다. 그렇게 폭발된 것이,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당신이 걸린 감기라는 겁니다. 당신이 평지에 있을 때부터 이미 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좌우간 이 위에 오자마자 첫날부터 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기 때문에 열이 생긴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견해를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P35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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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따르기 마련인 자연스러운 잔혹성이 독일 사회 내에서 특수한 현상이라는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변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잔혹성을 비난하는 것은 꽤나 감상적으로 들립니다. 당신도 고향 독일에 있다면,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비난을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비난은 모름지기 인생의 기피자에게 가하는 것이 정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그런 잔혹성을 비난한다면 어떤 소외에 관해 증언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소외가 심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삶이 잔혹하다고 비난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삶으로부터, 자신이 태어난 삶의 형태로부터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엔지니어 양반, <삶에서 사라져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나야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지요. 여기서는 매일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 올라오는 젊은 사람은 (더욱이 이곳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거의 젊은이들 뿐입니다.) 늦어도 반년만 지나면 시시덕거리며 아양 떠는 것과 체온 외에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늦어도 1년만 지나면 다른 생각은 전혀 품을 수 없게 되고, 다른 생각은 모두 <잔혹하다>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류나 무지라고 느끼게 됩니다. 당신은 실화(實話)를 좋아하니 —내가 당신의 희망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곳에 11개월 체류했던 어떤 남자 이야기로,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었지요. 그 사람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었는데, 당신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꽤 많았을지도 모르지요. 의사는 그가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생각하고 시험 삼아 퇴원하게 해,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냈어요. 그의 경우는 당신처럼 외삼촌들의 품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내의 품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하루 종일 체온계를 입에 물고 누워 있을 뿐,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당신들은 모른다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기 위해서는 저 위에서 살아 보아야 해요. 이 아래에서는 기본 개념이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결정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다시 올라가도록 해라. 우리로서는 너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구나.> 그래서 그는 이 위로 올라왔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여기에 한번 살아 본 사람은 이곳을 <고향>이라 부른답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서도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는 <기본 개념>이 결여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그 잘난 고향에서 뜻이 맞는 <기본 개념>을 지닌 여성 동지를 찾아, 다시는 아래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P385-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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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주십시오. 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십시오. 엔지니어 양반, 아무쪼록 마음에 새겨 두기 바랍니다. 죽음을 관찰하는 강하고 고귀한 방식은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덧붙여 말하겠습니다— 게다가 종교적이기도 한 유일한 방식은, 말하자면 죽음을 삶의 일부분이자 그 부속물, 삶의 성스러운 조건으로 파악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고귀하고, 합리적이고, 종교적인 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삶과 떼어놓고 삶과 대립시키며, 심지어 구역질나게도 삶을 천하게 하고 죽음을 높이려는 관찰 방식이 아닙니다. 고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석관(石棺)을 삶과 생식의 상징뿐 아니라 심지어 외설적인 상징으로 장식했습니다. 고대인의 신앙심에서, 성스러운 것이란 종종 외설적인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죽음을 존경할 줄 알았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람으로서, 갱신(更新)의 모태로서 존경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삶과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죽음은 유령이자 추한 얼굴 —그리고 더 한층 고약한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정신적으로 독립한 힘으로서의 죽음은 극히 방종한 힘이며, 그 힘의 사악한 매력이 아주 큰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힘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 정신의 가장 비참한 각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P38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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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다르면 풍습도 다르다는 말이 있다. 여행객이 여행지의 민족이 지닌 풍습이나 가치 기준을 비웃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교양 없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어떤 민족에게든 다른 민족을 능가하는 이런저런 장점이 있는 법이다. (P398)


“당신은 정신 분석에 대해 부정적입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반대이기도 하고 절대적으로 찬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양쪽 다에 해당됩니다, 엔지니어 양반.”

“그건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정신 분석은 계몽과 문명의 수단으로서는 좋습니다. 우매한 확신을 뒤흔들고, 자연스러운 편견을 해소하고, 권위를 전복시킨다는 점에서는 좋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해방시키고, 순화하고, 인간화하고, 노예가 자유를 얻도록 해줄 때는 좋은 것입니다. 반면에 행동을 방해하고, 생명을 잉태할 능력이 없어 생명의 근원을 손상시키는 경우에는 아주 나쁩니다. 정신 분석은 아주 역겨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죽음에 속하고 있어서, 마치 죽음처럼 역겨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덤과 그것의 추잡한 해부와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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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이 <네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서구인이 <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셨나요? 이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무관심은 이들 나라의 땅덩어리가 야만의 상태로 광활하다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간이 많은 곳에서는 시간도 많은 법이지요 —그러니까 이들은 시간이 많아서 기다릴 수 있는 민족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우리 유럽인들은 그럴 수가 없지요. 섬세하게 나뉜 우리의 고상한 대륙에 공간이 부족한 것처럼 우리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P472-473)


<정신 분석의 어떤 점이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당신은 물었습니다.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석이 교화와 해방, 진보를 지향하는 한 말입니다. 분석이 무덤의 추악한 썩은 냄새를 동반할 때는 좋지 않습니다. 육체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해방과 아름다움, 관능의 자유, 행복과 쾌락을 추구할 때 육체는 존중되고 옹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둔중함과 나태의 원칙이 되어 광명으로 가는 움직임을 방해할 때 육체는 멸시되어야 합니다. 육체가 병과 죽음을 대변할 때, 육체의 특수한 정신이 전도(顚倒)의 정신이면서, 또 부패와 욕정과 치욕의 정신일 때, 그럴 때 육체는 경멸받아야 합니다..... (P488-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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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눈이 멈추었고, 하늘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회청색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자, 주위의 풍경은 푸르게 물들었다. 그러다가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야말로 혹한의 청명한 날씨. 11월 중순의 맑고 화사한 안정된 겨울 날씨였다. 그리고 발코니의 아치 뒤편으로 보이는 전경, 눈으로 화장을 한 숲. 눈으로 부드럽게 채워진 협곡, 푸르게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희고 밝게 비치는 골짜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특히 밤이 되어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모습을 드러내면, 세상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너무도 아름다웠다. 온 하늘 가득 별들이 수정처럼 가물거리고 다이아몬드처럼 깜박거렸다. 눈에 보이는 숲은 모두 흑백의 대조가 선명했다. 달에서 멀리 떨어진 하늘은 어두워 보였지만, 온 하늘 가득 수놓은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실물보다 더 진짜 같고 의미심장해 보이는 선명하고, 정확하며, 짙은 그림자는 휘황하게 빛을 뿜는 눈밭 위의 집들, 나무들과 전신주들을 뒤덮고 있었다. 해가 지고 두세 시간이 지나면, 날씨는 영하 7~8도의 강추위가 되었다. 세상은 얼음처럼 찬 순수함에 매료된 것 같았으며, 세상 본래의 더러움은 환상적인 죽음의 마법이라는 꿈속에 덮이고 얼어붙은 것 같았다. (P45)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생명은 시작된 순간부터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기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자극을 느낀다는 의미의 의식은 생명 발생의 가장 낮고 발달이 안 된 단계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눈뜨고 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의식 현상의 최초 발현을 생명의 일반적 혹은 개별적인 역사의 어떤 시점에 결부시켜, 신경 계통의 출현을 의식의 선행 조건으로 규정짓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하등 동물은 신경 계통이 없다. 하물며 대뇌 같은 것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자극을 감지하는 능력이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는 없었다. 또한 우리는 생명을 형성하는 자극 감성의 특수한 기관, 가령 신경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도 마비시킬 수 있었다. 식물계와 동물계에서 생명을 부여받은 모든 물질의 감성 능력을 잠시 제거할 수 있으며, 난자와 정충은 클로로포름, 포수(泡水) 클로랄, 모르핀 등으로 마비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생명 자체의 의식이란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능은 더욱 강해짐에 따라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생명에 대항하여, 자신을 낳은 이 생명 현상을 규명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생명이 자신을 인식하려 하는 희망에 찬 노력이면서도 덧없는 노력이고, 자연의 자기 발굴을 위한 노력이지만, 결국은 헛된 노력이었다. 자연이란 인식되는 것이 아니며, 생명이라는 것 역시 결국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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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 양자의 중간물로서, 마치 폭포수 위에 걸린 무지개나 불길처럼 물질에 의해 생기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생명이란 비록 물질은 아니지만 쾌감과 혐오감이 들 정도로 관능적이고,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해진 물질의 뻔뻔스러움이며, 존재의 음탕한 형식이었다. (P54)


유기체가 무기적 화합물에서 생기는 것처럼 물질이 생겨나게 하는 비물질 화합물, 즉 비물질의 화학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원자는 물질의 원생류와 단충류라는 성질로 보아 —물질적이면서 아직 물질이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작다고조차 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고 보면 기준이 없어져 버리는데, <작다고조차 할 수 없는>이란 이미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래서 원자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극도로 불길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최후까지 분해하고 쪼개어 나누는 순간 갑자기 천문학적 우주가 눈앞에 전개되기 때문이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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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이 입은 제복은 단정하고 말쑥하며 또 칼라가 빳빳하지. 그것 때문에 자네들이 예의 바르게 보이는 거야. 그리고 자네들에겐 계급과 복종의 의무가 있어서, 서로에게 깍뜻하게 경의를 표하는데, 이것은 스페인식 정신, 즉 경건함 때문이지. 사실 나도 그런 것이 싫지는 않아. 우리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정신은 더욱 북돋아져야 해. 내 생각에 이 세상과 인생이란 보통 검은 옷을 입고, 자네들의 깃 대신에 풀먹인 목 칼라를 하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진지하고 차분히 예의 바르게 교제하는 데 딱 어울리는 것 같아— 그것은 내 기분에 꼭 들어맞기도 하고, 또 도덕적일지도 몰라. (P88)


여성이란 처참한 정열에 사로잡힌 남자를 보고서도 결코 연민을 보이거나 걱정을 하지 않는 법이다— 여성은, 날 때부터 그런 정열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보다 정열과 훨씬 더 친숙한 편이어서, 그런 남성을 보면 조롱과 조소를 금치 못하는 법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남성으로서도 그 일로 여성에게 그런 연민과 걱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물론 사양하겠지만 말이다..... (P162)


“우린 댁의 사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정말이지 댁들은 약간 시민적이에요. 댁들은 자유보다 질서를 더 사랑하지요. 이것은 온 유럽이 다 아는 사실이에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정말이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군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지요.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듯이 말입니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얼마 전부터.” 그는 말을 이었다. “가끔 자유에 대해 생각했지요. 그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생각한 것을 프랑스어로 말해 보지요. 유럽 전체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들이 질서를 요구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무척 옹졸하고 무척 시민적인 것입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지요!”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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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말이에요? 댁은 그런 데도 관심이 있나요? 좋아요,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도덕이란 미덕 가운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에요. 즉 이성, 규율, 미풍양속이나 소위 말하는 예의 바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것, 요컨대 죄악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해롭고 우리를 파멸시키는 위험한 것에 몸을 던져서 찾아야 한다고요.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을 손상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이 더욱 도덕적이라고 생각해요. 위대한 도덕가는 도덕군자인 체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의, 악습의 모험가이지요. 즉 그리스도 정신으로 죄악과 곤경에 순응하도록 가르쳐 주는 위대한 죄인이란 말이에요. 이런 생각은 댁의 마음에는 들지 않겠지요, 그렇지요?”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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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이란.... 육체, 사랑, 죽음, 이 세 가지는 원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병과 쾌락이며, 육체야말로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사랑과 죽음, 이 둘은 모두 육체적인 것으로, 거기에 이 둘의 무서움과 위대한 마술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죽음은 미심쩍고 파렴치하며, 얼굴을 붉히게도 하는 한편, 아주 장엄하고 존엄한 힘이며 —돈을 벌고 흥에 겨워 희희낙락하는 삶보다 훨씬 더 고귀합니다— 시간에 대해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진보보다 훨씬 더 존경할 만한 것이지요 —죽음은 역사적인 것이고, 고상함이고 경건함이며, 영원함이고 신성함으로, 우리가 모자를 벗고 발끝으로 조심조심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체도, 육체에 대한 사람도 음란하고 난처한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여, 그 바깥 피부를 붉게 물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육체는 숭배한 만한 위대한 영화(榮華)이고, 유기 생명의 놀라운 형상이며, 형태와 아름다움의 불가사의한 신성함입니다. 이것에 대한 사랑, 인체에 대한 사랑은, 이 사랑 역시 아주 인문적인 관심이며, 세상의 어떤 교육학보다 더 교육적인 힘인 것입니다....! 아, 이 매혹적인 유기체의 아름다움은 화구(畫具)나 돌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부패성 물질로 되어 있고, 생명과 부패라는 열성(熱性)의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체 조직의 멋진 균형을 보십시오. 놀라운 대칭 구조를 말입니다! 양 어깨와 허리, 양 가슴의 꽃 같은 봉긋한 젖꼭지, 그리고 쌍을 이루어 나란히 달린 갈비뼈, 완성된 시체 한가운데의 배꼽, 허벅지 사이의 검은 성기, 등의 매끄러운 피부 아래에서 견갑골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십시오! 그리고 싱싱하고 풍만한 두 엉덩이를 향해 내려가는 등뼈의 모양, 혈관과 신경의 굵은 가지가 몸 기둥에서 겨드랑이를 통해 사지로 뻗어 나가는 모양, 두 팔이 두 다리의 구조에 대응하는 이 모양을 보십시오! 아, 팔꿈치와 무릎 관절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 아, 그 살의 쿠션에 쌓인 그 부분에 담긴 수많은 유기체적 정교함! 인체의 이 감미로운 부분을 애무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끊임없고 멋진 희열일까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희열! 아, 댁의 무릎의 피부 냄새를 맡게 해주십시오! 정교한 관절 주머니가 지방을 분비하고 있는 무릎 말입니다. 아, 댁의 허벅지에서 율동하고, 훨씬 아래에서 두 개의 경부 동맥으로 나뉘는 대퇴부 동맥에 경건하게 내 입술이 닿게 해주십시오! 댁의 털구멍에서 나오는 분비물의 냄새를 맡고, 댁의 부드러운 털을 애무하게 해주십시오! 물과 단백질로 이루어져 무덤 속에서 분해될 운명을 지닌 인간의 형상이여, 댁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댄 채로 나를 영원히 죽게 해주십시오!” (P18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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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수수께끼이다 —실체가 없으면서도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 물체의 존재와 그 물체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되어 있는 하나의 운동인 것이다. 그럼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걸까? 무엇이든 물어보라! 시간은 공간이 행하는 기능 중 하나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또는 두 개가 동일한 것일까? 얼마든지 물어보라!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무엇인가를 <야기한다>. 그럼 시간은 무엇을 야기하는 것일까?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당시가 아니고, 여기는 이미 저곳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측정하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 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과거는 부단히 지금 현재 속에, 저곳은 쉬지 않고 이곳 속에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또한 유한한 시간과 제한된 공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필연적으로 노력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시간은 영원하고 공간은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이미 결정을 보았다 —물론 이것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분명 제대로 된 것이라는 생각, 즉 이것이 좀 더 나을거라는 믿음에서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계산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것 속에 전후가, 무한한 것 속에 좌우가 있을 수 있을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감정적인 가정과, 거리와 운동, 변화, 그리고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들의 존재와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가 있을까? 그런 것들에 관해 얼마든지 물어보라! (P185-186)


“인간은 누군가 어느 정도 일반적인 성질을 띤 종합적인 표현을 하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자아를 담아 자신의 삶의 근본 주제와 근본 문제를 어떻게든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습니다. 방금 당신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엔지니어 양반, 당신이 방금 한 말은 당신의 인격 밑바탕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 또한 당신 인격의 상황도 시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실험 상태에 있습니다......”

“실험 채택(Placet experiri) 이지요!” 한스 카스트로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이탈리아 어투로 c를 발음했다.

“그렇습니다 —이때 그 실험은 세상 실험, 즉 인생을 음미하려는 존경할 만한 열정에서 나와야지 무절제한 기분에서 우러나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오만>에 관해 말했습니다. 즉 <오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어두운 힘에 맞서는 인간 이성의 오만은 가장 숭고한 인간성의 표현입니다. 그로 인해 질투심이 강한 신들의 복수를 초래하여 호화로운 방주가 암초에 부딪쳐 바닷속 저 밑으로 가라앉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파멸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행위도 오만한 행동이었고, 스키타이의 암벽 위에서 그가 당한 고난도 우리들에게는 아주 신성한 순교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 반면에 다른 종류의 오만은 어떠할까요? 인류에 맞서는 반이성적이고 적대적인 힘을 이용해 음탕한 실험을 하다가 파멸하는 오만 말입니다. 그것은 명예로울까요? 거기에 명예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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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언제나 그래. 무슨 일이든 토론하고 의견을 내세울 때는 혼란만 생긴다는 것쯤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내 말은 모름지기 누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인가 여부가 중요하다는 거야. 가장 좋은 것은, 견해 같은 것은 없이 그저 묵묵히 자기가 할 일, 즉 요양에 매진하는 거야.”

“그래, 자네야 용병이자 순전히 형식적인 존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내 경우는 사정이 달라. 나는 민간인으로서 어느 정도 책임을 느끼고 있다네. 그래서 말이야, 난 그런 혼란을 보면 흥분이 돼. 한 사람은 시민적 세계 공화국을 역설하고, 원칙적으로는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지나치게 애국적이어서 어떻게 하든 브레너 경계선을 확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문명 전쟁도 감수하겠다고 하지,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국가를 악마의 작품이라 간주하며, 지상과 천상이 접촉하는 지평선에 있는 인류의 보편적 통합을 외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자연적 본능의 권리를 옹호하고 평화 회의를 조롱하고 있단 말이야.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를 반드시 찾아가야 해.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은 더 현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라고 자네는 말했지. 하지만 건강해지는 것과 현명해지는 것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넨 세계의 분할을 추구하는 셈이 되는 거야. 그리고 또 한번 말해 두지만, 그런 짓은 언제나 크나큰 실수라네.” (P266-267)

“정신은 주권자이며, 정신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정신은 윤리적 세계를 규정합니다. 정신이 죽음과 삶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면, 바로 그 죽음은 이러한 정신의 의지로 말미암아 사실상 실제가 되는데, 정말로 실제적으로 됩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지요, 죽음이 삶에 대립되는 독자적인 힘, 적대적 원칙, 커다란 유혹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나라는 음탕한 나라입니다. 왜 음탕한 나라인지 묻고 싶겠지요? 대답해 드리죠. 죽음은 분해되어 해방되기 때문이며, 죽음은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사악한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사악한 해방입니다. 죽음은 윤리와 도덕을 해체하고, 기율과 절도로부터 해방하여 음탕함을 품도록 자유를 줍니다. 내가 본의 아니게 소개하고 말았지만 이 인물에 대해 당신들에게 경고하고, 그와 교제하고 대화를 나눌때에는 반드시 비판 정신을 지니고 이중 삼중으로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도 모두 그의 사상이 음탕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상들은, 내가 언젠가 한번 말했듯이, 방종하기 이를데 없는 힘인 죽음의 보호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때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회를 보아 말한, 중요하고 적절한 표현이 늘 기억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엔지니어 양반— 죽음은 풍속, 진보, 일, 삶에 대립되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자의 가장 고상한 의무는, 바로 이러한 악마의 숨결로부터 젊은이의 영혼을 지키는 것입니다.” (P315)


“이곳 공기는 강렬한 특성이 있습니다. 온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하지만, 몸에 단백질이 붙게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병을 고치는 힘도 지니고 있지만, 처음에는 일단 그 병을 강하게 촉진하고, 또 전반적으로 유기체를 자극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병을 화려하게 폭발시킨다는 것입니다.”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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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여러 <사단>으로 나누어 종교적이며 군대적인 예절을 본분으로 지키도록 가르쳤으니, 이것이 바로 사관 학교가 아니었겠는가? —말하자면 군인의 <딱딱한 칼라>와 성직자의 <스페인식 장식깃>의 결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아힘의 신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명예와 출중함이라는 이념은— 나프타가 유감스럽게도 병 탓에 높이 올라가지 못한 성직자 신분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겠는가! 하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생각했다. 나프타의 말에 따르면 예수회는 공명심으로 불타는 사관생도들의 집합소였다. 이들은 근무를 할 때 머릿속에 오로지 남들보다 뛰어나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고 한다(라틴어로는 이를 <인시그네스 에세(insgnes esse)>라고 했다). 예수회 창시자이자 초대 총대장인 스페인의 로욜라의 가르침과 규정에 따라, 이들은 건전한 분별력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일을 수행했고, 더 훌륭한 일을 수행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의 직무를 <의무 이상으로(exsuperogatione)> 수행했는데, 특히 평균적으로 건전한 분별력을 지닌 인간도 이런 일이라면 할 수 있듯이, <육체의 반란(rebellioni carnis)>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허용되어 있는 일들인 관능과 이기심, 세속적 집착의 경향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저항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거슬러 행하라(agere contra)>라고 하는 것, 즉 공격하는 것은 <방어하는 것(resistere)>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적을 약화시키고 분쇄하라!>는 수칙이 야전 근무 규정에도 있듯이, 그 저자인 스페인의 로욜라는 그 점에서도 요아힘의 총대장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 수칙인 <돌격! 돌격!>, <적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라!>, <언제나 공격하라!> 등과 완전히 같은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나프타의 세계와 요아힘의 세계가 무엇보다도 공통된 점은 피에 대한 두 사람의 관계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두 세계 예수회와 군대는 완전히 일치했고, 평화의 자식인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는 나프카가 중세의 호전적인 수도사 유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 유형의 수도사들은 피로와 쇠약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금욕적이고, 그러면서 종교적인 정복욕에 불타서 신정 국가, 초자연계의 세계 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수도사들의 한 유형인 신전 기사단은 침대에서 죽는 것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싸우다가 죽는 것을 더 칭찬할 만하다고 평가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템브리니 씨가 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늘 하던 대로 손풍금장이 역할을 자처해 이를 방해하면서 평화를 주창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템브리니 씨는 당시 빈을 타도하려는 신성한 민족 전쟁과 문명 전쟁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정열과 약점 때문에 이제 나프타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어쨌든 그 이탈리아인 세템브리니가 민족적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프타는 기독교적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워 어떤 나라도 조국이라 부르려 하지 않고, 니켈이라는 예수회의 총대장의 말을 인용해 <조국애는 페시스트이고 기독교적 사랑의 가장 확실한 죽음>이라는 말을 단호하게 거듭하는 것이었다. (P386-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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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이나 건강은 사실 종교적 상태가 결코 아닙니다.” 나프타가 단호하게 말했다. “종교가 이성이나 도덕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대체로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일부는 인식론에, 일부는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여러 가지 조건과 토대 위에서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인식론에 속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인과율이라고 부르고,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윤리와 이성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모두 종교적 본질과 낯설고 무관할뿐더러 심지어 적대적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사실 삶을, 소위 말하는 건강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속물적인 것과 가장 시민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종교적인 세계는 건강과 절대적으로 정반대의 것, 더구나 절대적으로 천재적인 정반대의 것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의 영역에 천재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기념비적으로 우직한 삶의 시민성이 존재하니까요. 그리고 그 우직한 삶의 시민성이 뒷짐 지고 가슴을 내민 채 두 발을 벌리고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이 비종교적인 확신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해도 좋을 속물적 존엄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P413-414)


한스 카스토르프는 눈(雪)을 잔뜩 묻힌 두 다리로, 어딘지 모를 흐릿한 산꼭대기를 향해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불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그 산꼭대기는 테라스를 이루며 계단식으로 조금씩 높아져 갔는데, 어디로 올라가는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의 위쪽은 안개처럼 흰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도 보이지 않았고, 모두가 희미한 무(無)이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안개에 덮인 무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는 세계, 즉 사람 사는 골짜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닫히고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곳에선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고독감, 아니 버림받은 느낌이 더 어울리는 외로움은 부지불식간에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의 깊이가 되어 공포를 느낄 정도까지 되었다. 이 공포야말로 용기의 원천이었다. …… 그는 계속해서 위로,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P44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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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지독하게 아름답고, 지독하게 무서운 꿈이었어. 나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이 모든 건 내가 지어낸 거야 —활엽수의 푸른 공원, 기분 좋은 습기, 그 밖의 것, 아름다운 것, 무서운 것, 난 이 모든 것을 거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지어내고, 그렇게 행복해하고 무서워할 수 있었을까? 저 섬이 있는 아름다운 만을, 또 홀로 서 있던 멋진 소년이 눈짓으로 가르쳐 준 신전구역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으로만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형태는 다를지라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익명이자 공동으로 꿈을 꾸기도 한다는 거야.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영혼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그 영혼은 남몰래 항상 꿈꾸어 오던 대상에 관해, 희망에 관해, 행복과 평화에 관해..... 그리고 그 영혼의 피의 향연에 관해 꿈꾸는 거야. 나는 돌기둥 곁에 누워 내 꿈의 실제 흔적을 음미하고 있어. 피비린내 나는 향연의 오싹한 공포, 그 이전의 황홀한 기쁨, 태양의 자식들의 행복과 경건한 예절에 대한 기쁨 말이야. 나는 여기에 누워 그런 꿈을 꿀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난 이 위의 사람들에게 무모한 모험과 이성에 관해 많은 것을 경험했어. 나프타와 세템브리니와 함께 아주 위험한 산악지대를 돌아다녔어. 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인간의 살과 피를 맛보았고, 병든 클라브디아 쇼사에게 프리비슬프 히페의 연필을 돌려주었어. 유게(살)와 생명(피)을 맛본 자는 죽음도 맛본 것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부가 아니고 —교육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시작에 불과해. 거기에다 다른 절반을 덧붙여야 하지. 정반대되는 것 말이야. 왜냐하면 죽음과 병에 대한 온갖 관심은 삶에 대한 관심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의학이라는 인문주의적 분과가 증명하듯이 말이야. 언제나 아주 우아하게 삶과 그 병에게 라틴어로 말하는 의학은, 커다랗고 아주 절실한 관심의 한 형태에 불과해. 그러한 관심사에 전적으로 공감해 말해 본다면, 그건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과 인간에 관한 것이고, 인간의 위치나 상태에 관한 거야.... 나는 인간에 관해 아는 것이 적지 않으며, 이 위의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 평지에서 이 위로 내몰린 나 같은 불쌍한 사람으로서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이제 이렇게 돌기둥 아래서 그리 나쁘지 않은 전망을 갖게 되었어...... 신전에서는 끔찍한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는 인간의 위치와 예의 바르고 분별력 있는 공손한 공동체에 관해 꿈꾸었어. 태양의 자식들은 뒤에서 바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토록 예의 바르고 매력적으로 굴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로 우아하고 훌륭한 결론을 끄집어냈다고 할 수 있어! 마음속으로 이 태양의 자식들과 생각을 함께 나누도록 하자. 나프타의 견해에는 —세템브리니의 견해에도 마찬가지로— 물들지 않도록 하자. 이들은 둘 다 수다쟁이에 불과해. 한 사람은 음탕하고 불경스러우며,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이성의 호각이나 불면서 미친 사람들도 각성하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그건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소리야. 오히려 속물근성이고, 단순한 윤리이며, 비종교적인 것에 불과해. 그건 틀림없어. 또한 난 키 작은 나프타에게도 동조할 수 없어. 신과 악마, 선과 악이 온통 뒤범벅이 된 그의 종교에도 당연히 동조할 수 없고 말이야. 사실 그 종교는 개인이 거꾸로 추락하여, 공동체 속으로 신비롭게 침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저 두 사람의 교육자! 저들의 논쟁과 대립 그 자체가 뒤범벅에 지나지 않고, 싸움터의 혼란한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으로, 머릿속이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마음이 경건한 자라면 아무도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을 거야. 귀족성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 고귀함에 대한 토론! 죽음과 삶 —병과 건강— 정신과 자연, 이런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나는 묻고 싶어. 과연 문제가 되는 것인지 말이야. 아니야,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어느 것이 고귀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며, 그런 모험이 없는 삶이라면 이미 삶이 아닐 거야. 그리고 인간의 상태가 신비스러운 공동체와 미덥지 못한 개별 존재 사이에 있듯이, 신의 아들인 인간의 위치는 그 한가운데에 —모험과 이성의 한가운데—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이 돌기둥 아래서 하고 있는 거야. 이러한 한가운데라는 위치에서 인간은 우아하고 정중하며, 친절하고 공손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해 —인간만이 고귀한 것이며, 대립된 생각이 고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인간은 대립을 지배하는 주인이고, 대립이란 인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한 거야. 인간은 죽음보다 더 고귀하며, 이러한 죽음에 비하면 너무나 고귀한 존재이다— 그것이 인간 두뇌의 자유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삶보다 더 고귀하며, 이러한 삶에 비하면 너무나 고귀한 존재이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의 경건함인 것이다. 이렇게 나는 하나의 시를 썼다. 인간에 관한 꿈과 같은 시를. 나는 이것을 늘 생각할 것이며, 착한 마음씨를 가지도록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게 양보하지 않으리라! 착한 마음씨와 인간애가 그것을 의미하며, 다른 어느 것도 그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지. 죽음은 위대한 힘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자를 벗고, 발끝으로 걷고 몸을 흔들며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은 과거 어떤 것의 위엄을 나타내는 장식깃을 달고 있으며, 인간 자신은 죽음에 경의를 표하여 엄숙하게 검은 옷을 입는다. 이성은 죽음 앞에서는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덕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은 자유와 방종, 모험, 무형식, 쾌락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쾌락이지 사랑은 아니라고 나의 꿈은 말한다. 죽음과 사랑 —이것은 맞지 않는 운(韻), 얼토당토않고, 완전히 잘못된 운인 것이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량한 생각을 갖게 한다. 형식 역시 사랑과 착한 마음씨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즉 분별력 있고 우정 어린 공동체의 형식과 예절, 인간의 아름다운 나라의 형식과 예절은 피의 향연을 은밀히 생각함으로서 (사랑과 선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아, 이렇게 나는 분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것을 늘 생각할 것이다. 마음속으로 죽음에 대해 늘 성실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선(善)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내 꿈은 끝났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난 이 말을 찾고 있었어. 히페가 나에게 모습을 나타낸 장소에서, 나의 발코니에서, 그 밖의 어느 곳에서도. 바로 그 말을 찾기 위해서 이 눈 덮인 산속에 들어왔던 거야. 그렇게 하여 나는 결국 찾아냈어. 게다가 내 꿈이 그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제시해 주어서, 이젠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그래, 그 말을 찾았기 때문에 기뻐서 몸이 완전히 따뜻해졌구나. 내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는 거야. 꿈에서 찾아냈던 그 말은 —포도주나 흑맥주보다 더 달콤한— 음료수야. 그 음료수는 사랑이나 생명처럼 혈관을 타고 흘러 날 잠과 꿈에서 깨어나게 하지. 이 잠과 꿈이 내 젊은 생명에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물론 익히 알고 있어...... 일어나라, 일어나! 눈을 떠라! 너의 팔과 다리가 여기 눈 속에 빠져 있어! 팔과 다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나라! 자, 보아라— 정말 좋은 날씨야!> (P47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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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은 한스 카스토르프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는 흙을 바라보듯 눈을 땅에 떨어뜨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걸어가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했고, 언제나처럼 외모와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러면서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우리들은 모두 조만간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하지만 그토록 젊은 나이에, 군기 밑에서 근무하기를 그토록 열렬하게 갈망하는데도 얼마 안 있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혹한 일이었다. 이것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본인보다도 그것을 알면서 나란히 걸어가야 하는 한스 카스토르프 자신에게 더욱 괴롭고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연하게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은 비현실적인 성질을 띠고 있어, 요아힘 자신에게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요컨대 그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죽는 본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인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기지에 찬 현자가 했던 이런 말은 어쨌든 완전히 정신적으로 타당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우주와 저연과 어느 정도 관계할 뿐이다 —그 때문에 모든 생물체는 죽음을 아주 태연하게, 무관심하게, 무책임하게, 이기적인 순진함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최근 몇 주 사이에 요아힘의 태도에서 이러한 순진성과 무책임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의연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죽는다는 것에 대한 그의 내적인 관계가 절박하지 않고 관념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그것이 실제로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긴 하지만 건전한 예의(禮意) 의식에 의해 조절되고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생각했다. 그러한 의식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수많은 상스러운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으며, 생명과 관련된 갖가지 상스러운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의를 지키고 비밀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P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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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 모험가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들을 우리들은 평지의 성실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한단 말인가? 현기증 날 것 같은 동일성이라는 척도가 점점 커져 갔다. 좀 더 관대하게 말한다면 오늘의 지금을 어제, 그제, 그끄제의 지금과 구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달걀처럼 다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한 달 전, 1년 전의 현재와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그것과 하나로 뭉뚱그려 <영원한 현재>로 용해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과 <다시>와 <장차>라는 윤리적인 의식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는 한에는, <오늘>을 과거와 미래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상대적인 명칭인 <어제>와 <내일>의 의미를 넓혀, 그것을 좀 더 커다란 상황에 적용하고 싶은 유혹이 생겨난다. 지극히 미세한 시간 단위 속에 살고 있는 지극히 <짧은> 일생을 통해 볼 때, 우리들 초침의 바쁜 총총걸음을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침처럼 생각하는 생물체가 지구보다 작은 혹성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생물체도 상상해볼 수 있다. 즉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엄청나게 커다란 폭으로 된 시간이 흐르고 있어서, <방금>, <조금 뒤에>, <어제>, <내일>이라는 구분 개념이 그들의 체험에 엄청나게 확대된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는 생물체 말이다. 그러한 상상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관대한 상대주의의 정신으로 판단해 보거나 <고장이 다르면 풍속도 다르다>라는 명제에 따라 판단해 보아도, 올바르고 건전하며 존중할 만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지구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하루, 일주일, 한 달, 한 학기라는 시간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그러한 시간 단위가 인생에서 많은 변화와 진보를 가져다주는 연령의 사람이, 어느 날 <1년 전>을 <어제>로, <1년 후>를 <내일>로 말하는 좋지 않은 습관에 빠진다든가, 또는 가끔 그러한 기분에 젖는다면, 우리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 현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착오와 혼란>이라고 명해야 옳을 것이며, 따라서 지극히 걱정스럽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P98-100)


두 사람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세템브리니는 교회의 역사적인 권력을 오로지 음울한 침체와 보수의 수호자로 보았고, 변혁과 혁신을 옹호라는 삶과 미래에 대한 모든 친근성은 고대의 양이 부활한 빛나는 시대에 탄생한 계몽, 과학, 진보라는 상반된 원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하며, 이러한 주장을 아주 아름다운 말과 몸짓으로 뒷받침했다. 이에 반해 레오 나프타는 세템브리니 씨의 논설에 맞서 지극히 혁명적인 교회의 본질을 옹호했다. 나프타는 선선히 나서서 냉정하고도 날카롭게 응수했는데, 그의 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할 정도의 눈부시고 화려한 항변이었다. 나프타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는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이념을 구현하려는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존속하려는 것, 즉 세속적 교양이며 국가의 법질서를 편들고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날부터 지극히 급진적인 변혁을 근본적인 목표로 삼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 낙오자, 비겁자, 보수주의자, 시민, 이런 자들이 보존하려고 하는 모든 것, 즉 국가와 가족, 세속적인 예술과 학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종교적인 이념에 대해, 즉 교회에 대해 본래적인 성향과 그 부동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세속적 질서를 해체하고 이상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신정 국가를 모범으로 삼으면서 사회를 재편성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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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해, 지극히 경건한 사랑에서부터 지극히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위대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랑은 애매모호하면서도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아무리 경건한 사랑이라 해도 육체적이 아닐 수 없으며, 아무리 육체적인 사랑이라 해도 경건함이 결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교활한 친근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든 간에,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유기적인 것에 대한 공감이며, 부패의 운명을 지닌 육체를 감동적일 정도로 관능적으로 포옹하는 것이다— 아무리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열정이란, 또 아무리 미쳐 날뛰는 열정이라도, 그 속에는 기독교적인 사랑이 담겨있음에 틀림없다. 의미가 애매하다고? 그렇다고 해도 사랑의 의미는 제발 애매한 그대로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애매모호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는 삶과 인간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가 애매하다고 염려하는 것은 <교활함>이 지나치게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P212-213)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특히 남자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여자는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해 주었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 무조건적인 순종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니면 자신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에, 그 남자는 훌륭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아요.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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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것, 악마적인 것밖에 없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망각한 생활, 아무런 걱정도 희망도 없는 생활, 겉으로는 분주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정체되어 있는 무절제한 생활, 죽어 있는 생활이었다. (P272)

그래서 우리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정신적인 대상, 다시 말해 중요한 대상은 사실 자신을 뛰어넘어 먼 곳을 가리키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고, 또 보다 보편적이고 정신적인 세계, 즉 감정과 신념의 세계 전체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그러한 대상 속에서 다소간 완전한 상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상징하는 정도에 따라 그 대상의 중요도가 정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대상에 대한 사랑 역시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러한 사랑은 그것을 품고 있는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암시해 준다. 또 그러한 사랑은 그 대상이 대표하는 세계이자, 대상 속에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함께 사랑받는 세계, 즉 보편적인 세계와 대상과의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다. (P319-320)


10분 후에 박사는 세 여자를 동반하고 옆방에서 돌아왔다. 엘렌 소녀의 겉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원래 입던 자기 옷이 아니라 교령(交靈)용 의상, 즉 일종의 모임용 의상이라 할 수 있는 하얀 생사(生絲)로 짠 잠옷 같은 옷을 입고, 허리에는 노끈처럼 보이는 허리띠를 두른 채 가느다란 두 팔을 하얗게 드러내고 있었다. 처녀다운 가슴의 곡선이 옷감에 부드럽고 선연하게 드러나 있는 걸 보면, 옷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모두들 흥분하여 활기차게 그녀를 맞이했다. 「야, 엘렌! 정말 매력적으로 보이는걸! 마치 선녀 같아! 잘해 봐, 귀여운 나의 천사야!」 자신의 옷차림이 스스로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아는 듯, 엘렌은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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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물질 속에서 실현하려고 애쓴느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나프타는 말했다. 그것으로 인해 무엇이 생긴다는 말인가? 허튼 소리 내지 찌푸린 얼굴뿐이라는 것이다! 찬미되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의 현실적인 산물이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국가라고들 말하고 있다 —정말 멋진 선물이다! 이 선물은 세상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한 괴물을 전 세계에 퍼뜨릴 뿐이다. 세계 공화국, 그것은 행운일 것이다. 분명 그렇겠지! 진보라고? 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몸의 위치를 바꾸면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여, 누운 자세를 계속 바꾸는 유명한 환자의 이야기다. 터놓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은밀하게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전쟁 욕구는 이러한 소망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자들이 약속하는 것과는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아무튼 전쟁 발발은 좋은 것이다. 나프타는 이런 식으로 안전 제일주의의 시민 국가들을 경멸했다. 그가 이 말을 입 밖에 낼 기회를 잡았던 것은, 어느 가을날 모두들 함께 큰 거리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우산을 펴들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이런 태도를 비겁함과 흔히 보이는 연약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함과 연약함은 문명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같은 돌발 사건이자 재앙의 징후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지만, 사실상 후련한 느낌도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교통> 수단의 안전을 강화하라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안전>이 조금이라도 위협을 받게 되면, 언제나 예외 없이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정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일로서, 시민 국가의 인도적인 해이함은 시민 국가가 공공연하게 행하고 있는 경제 전쟁의 탐욕스러운 야만성이나 비열함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전쟁, 바로 전쟁이다! 그는 전쟁에 찬성한다고 했다. 또 온 세상에 전쟁의 열기가 감도는 것은 자기가 볼 때는 비교적 존중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P399-400)

시간, 그것은 역에 걸린 시계처럼 긴 바늘, 즉 장침이 5분 마다 생각난 듯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늘의 움직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시계의 아주 작은 움직임과 같은 것이다. 또는 풀이 은밀하게 자라지만 누구의 눈에도 자라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날 비로소 확연히 모양을 드러내듯, 그런 식으로 걸음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시간이란 연장이 없는 점만으로 구성된 선과 같다(이렇게 표현한다면, 불행하게 고인이 된 나프타가 연장이 없는 점으로 이루어진 것이 어떻게 길이가 있는 선이 될 수 있느냐고 분명 물어 오겠지만). 그러므로 시간은 살금살금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그래도 활동을 계속하며 변화를 낳고 있었다. (P43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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