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편지> 2006년
하지만 지금 내게는 직장도 돈도 없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살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정월에 떡을 사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츠요시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동생 나오키가 걱정없이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게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츠요시는 이런 공상을 했다. 우선 은행에 목돈을 정기예금으로 넣는다. 그걸 나오키에게 보여준다. 너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저축을 해놓았어. 이것만 있으면 입시 전형료건 입학금이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동생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P12)
온 세상이 불경기라고 하지만, 츠요시가 보기에는 자기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풍족해 보였다. 물건을 싸게 파는 가게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지만 싸구려건 뭐건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다. 요즘 건강식품이 인기를 끄는 건 결국 그만큼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여유 가운데 몇 분의 일이라도 나와 동생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끼.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탄식하고 기도를 해봐야 돈이 솟아나올 리 없다. 그렇다면 내 손으로 뭔가 할 수밖에 없다.
그 할머니의 온화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할머니는 돈이 넉넉할 테니 조금 훔친다고 해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훔친 자가 자기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용서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자기가 훔쳤다는 걸 알게 할 수는 없지만. (P13-14)
장갑을 벗고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드라이버로 찌를 때였는지 뽑을 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가 튀어 얼굴에 묻은 모양이다. 조금 전 그 여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 공원 저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다. 둘 다 경찰복 차림이었다.
츠요시는 점퍼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폐 뭉치는 들어 있지만 텐진 군밤 봉투는 없었다. 어디다 떨어뜨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P26)
나오키, 잘 지내니?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낸단다.
그저께부터 선반을 다루는 작업장으로 옮겼다. 처음 쓰는 기계라 약간 긴장했지만 익숙해지니 뜻밖에 쉽게 다룰 수 있더구나. 일이 잘 되었을 때는 아주 기쁘단다.
네가 보낸 편지 읽었다. 고등학교만이라도 무사히 졸업해서 다행이구나. 대학에 갔으면 좋았을 텐데. 대학에 보내고 싶어서, 그래서 돈이 필요해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그 때문에 네가 대학에 갈 수 없게 되었다니. 난 정말 바보였다.
나 때문에 네가 마음이 괴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파트에서도 쫓겨나고, 아마 무척 힘들었겠지. 난 바보다. 살 가치가 없는 바보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부족할 거다. 난 바보다.
바보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수행할 거다. 열심히 하면 편지 같은 것도 자주 보낼 수 있게 될 것 같구나. (P29)
뉴스 캐스터의 말투나 신문 기사의 뉘앙스는 다케시마 츠요시를 냉혹한 살인마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나오키가 보기엔 형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런 보도에 잘못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정확하지 않았던 점이라면 범행 동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여러 뉴스나 기사에서는 ‘직장을 잃고 생활비가 궁해서’라는 표현을 썼다. 경찰이 자세하게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을 뿐이지 잘못된 내용은 아니었다.
몇 번째인가 경찰서에 나가 조사를 받을 때 수사관에게서 들은 ‘진짜 동기’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나오키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생의 대학 진학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왜 그런 바보 같은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형이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정신이 나갔다면 그 원인은 하나뿐일 것이다. 동생을 위해서.
“알았지? 대학은 제발 가라. 딴소리하지 말고.” (P36)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은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어머니가 일했던 직장 몇 군데를 찾아가 대신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고용주들은 형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머니처럼 요리를 할 수는 없었지만 독신자 기숙사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했다. 슈퍼마켓에서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대신 창고에서 짐을 날랐다.
말을 한 적은 없지만 형은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려 했다. 동생을 먹여 살리고, 대학까지 보내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 형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오키는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 지역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들이 가는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대학 진학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다는 것을 나오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해 조금이라도 형의 부담을 줄여주고 싶었지만 형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넌 공부만 하면 돼. 쓸데없는 신경쓰지 마.”
그 말투가 웬지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P40-41)
죽은 할머니의 아들과 손녀가 틀림없다.
유족에게 사죄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마침 잘됐다는 마음이 들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와 딸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어머니를 갑작스런 사건으로 여윈 사람이 지닌 특유의 슬픔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슬픈 분위기는 나오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걸음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계속 움직였다. 아버지와 딸이 힐끔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버지와 딸도 나오키에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길로 나왔다.
나오키는 두 사람을 스쳐 지났다. 오가타 씨 집 앞을 그냥 지나쳤다.
나는 도망치고 있다. 도망쳐버렸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나오키는 계속 걸었다. (P54-55)
무기징역이 구형되었다. 잘은 몰라도 살인강도의 경우에는 무기징역이나 사형이 구형되는 게 당연한 모양이었다.
나오키도 증언대에 섰다. 범죄에 이른 정황을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형이 저를 키웠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육체노동뿐이었습니다. 형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일을 했습니다. 형의 몸이 망가진 것이나 걷기 힘들 정도로 허리가 아픈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형은 이미 육체노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은 어떻게 해서든 저를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이었고, 형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대학에 가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형은 그걸 고민했습니다. 사건 당시 형의 머릿속은 그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겁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좀 더 일찍 진학을 포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형과 의논을 했어야 합니다. 형이 그런 짓을 하게 만든 원인은 제게 있습니다. 형만 고생시킨 제 잘못입니다. 앞으로 저는 형과 함께 죄를 갚아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정상 참작해주시기 바랍니다.” (P87)
시라이시 유미코가 나오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을 끝내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뒤따라온 그녀가 나오키의 등을 툭 쳤다.
"연하장 받았어?“
여전히 간사이 사투리를 썼다. 둥근 뺨에 여드름 하나.
“아, 고마워.”
답장을 안 쓴 이유를 뭐라고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오키의 팔꿈치를 잡았다.
“잠깐만 이리로. 이리 와봐.”
그러면서 나오키를 잡아당겼다.
곁길로 꺾어져 전봇대 뒤까지 데리고 갔다.
“뭐야, 대체?”
나오키가 물었다. 그녀는 짠, 하는 소리를 내며 더플코트 안에서 파란색 종이봉투를 꺼냈다. 핑크빛 스티커로 주둥이를 오므린 봉투였다.
“자, 이거.”
나오키에게 그걸 내밀었다.
그게 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텔레비전 같은 데서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어댔다. 하지만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라이시 유미코가 이런 날 선물을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한테?”
“그래.”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또 봐, 하며 돌아서려 했다.
“잠깐,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녀는 빙글 돌아서더니 방긋 웃었다.
“계절노동자들이 있는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전에 이야기했잖아.”
“그렇지만 방 호수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과연 어떻게 알아냈을까?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생각해봐.”
바이 바이, 하고 손을 흔들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P134-135)
3월 말, 필요한 서류를 데이토대학 통신교육부에 보냈다. 남은 일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보낸 서류 가운데 츠요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자칫 대학 쪽에서 알게 되어,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싶어 초조했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4월이 시작된 어느 날,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나오키는 그날 바로 입학금과 기타 비용을 입금하러 갔다. 몇 달에 걸쳐 모은 돈이었다. 은행을 나오자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에서 교재와 자료를 보내왔다. 그걸 받은 나오키는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을 맛보았다. 자기 얼굴 사진이 붙은 학생증을 몇 번이나 꺼내보았다.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때까지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 혹시 곤란해하면 그만둘 작정이었는데, 사장인 후쿠모토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좋은 결심을 했군. 특별히 뭘 해줄 수는 없지만 편의를 봐줘야 할 때는 최대한 배려하겠네.”
게다가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시작한 이상 꽁무니 빼지 마. 통신교육부가 왜 입학시험이 없는지를 생각해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졸업할수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지. 일반 학생들처럼 놀면서 공부할 수는 없을 거야.”
나오키는 잘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4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 일이 끝난 뒤 기숙사에서 숙제를 하고 그것을 대학에 보냈다. 지도 결과가 온 날은 밤늦게까지 열심히 복습을 했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 그 결과를 평가받는다는 기쁨을 태어나서 처음 맛본 것 같았다.
나오키를 그 이상으로 흥분시킨 것은 야간 스쿨링이었다. 일주일에 몇 번은 학교에 가서 실제 강의를 받았다. 계단식으로 된 교실의 길고 가느다란 책상이 나오키의 눈에는 신선해 보였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교수가 칠판에 백묵으로 뭔가를 적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거기 적힌 내용이 모두 다 소중하기만 했다. (P140-141)
나오키가 음악에 흠뻑 빠져드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데라오 유스케 밴드의 라이브를 본 며칠 뒤, 그는 렌털 CD숍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CD를 들을 도구가 없어 기숙사 근처 전당포에서 결코 새것이라 할 수 없는 CD 워크맨을 구입했다.
저녁까지 일한 뒤 기숙사에 돌아와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음악의 종류는 가리지 않았다. 아니, 가리지 않았다기보다 자세한 장르 구분을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오키의 새로운 즐거움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준 것은 물론 데라오 유스케였다. (P145)
“네 이야기는 충분히 알아들었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딱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형 문제가 너하고 무슨 관계지? 그런 건 밴드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아.”
“말은 고맙지만 동정 받고 싶진 않아.”
“동정하는 게 아니야. 네가 교도소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 널 왜 동정해? 형이 교도소에 있으면 동생은 음악을 해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거야? 그런 건 없어. 신경 쓸 거 없잖아?”
나오키는 발끈해서 말하는 데라오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렇게 이야기해줘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다. 지금까지 다들 그래 왔으니까.
그 사건 뒤에도 따뜻하게 대해준 친구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다들 떠나갔다. 그들이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은 소중하니까. 골치 아픈 인간과 얽히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다. (P153-154)
“너에 대해서도 조사했대. 네 형 문제도 알고 있더군.”
어떻게 알아낸 걸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곤란하다.... 고 하더군.”
고타가 더듬더듬 말했다.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다시 숙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겠지, 하고 말했다. 억지로 허세를 부려본 것이다.
“데뷔하고 나서 만약에 인기가 오르면 반드시 멤버들에 대해 이것저것 파헤치는 녀석들이 나올 거야. 그 바닥은 서로 발목을 잡아댄다고 하니까.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거래. 그러면 밴드의 이미지도 떨어지고 활동하기도 힘들어질 테고, 회사 쪽에서도 투자를 할 수 없게 될 거다. 그래서.....”
“현재 상태로는 데뷔시킬 수 없다는 거야?”
“그런 이야기지.”
나오키는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에 전기스토브 켜는 걸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없으면 데뷔시켜주겠대?”
나오키는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네즈 씨는 유스케 혼자 보컬을 해도 괜찮대. 너랑 함께 가지 못해 정말 괴롭다고 하더군.”
네즈는 나오키를 빼고 가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다.
“그래? 그래서 셋이 날 설득하러 온 거야?”
시선을 고타에게서 아쓰시와 겐이치에게로 옮겼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나오키, 이해해줘.”
고타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우린 데뷔하고 싶어. 데뷔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왔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아.” (P179-180)
편지 좀 그만 보내면 좋을 텐데. 나오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답장을 안 하는 게 자기를 피하기 때문이라는 걸 왜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자기가 보내는 편지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에 동생을 옭아매는 쇠사슬이란 걸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웬 연근튀김 타령. 속 편한 소리다. 게다가 옛날을 미화하려 하고 있다. 벚꽃놀이를 갔던 날은 나오키도 기억한다. 그 버려진 고양이도 기억한다. 다음 날 공원에 갔더니 그 고양이는 상자 안에서 죽어 있었다. 그때 츠요시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걸 잊어버린 건가?
하지만 형 말이 맞다. 나오키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이걸 얻으려면 저걸 얻을 수 없다. 인생이란 뭔가를 선택하는 대신 다른 뭔가를 버리는 일의 반복이다.
그래서 난 형을 버릴 거야. 내겐 원래 형 같은 건 없었어. 나는 내내,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P239)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생각 끝에 나오키가 연락한 사람은 시라이시 유미코였다.
“넌 내 편이라고 했지?”
유미코의 방에서 나오키가 물었다.
“날 좀 도와줘.”
“부잣집 아가씨를 손에 넣는 걸 도와달라고?”
유미코가 물었다. 나오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반대야.”
나오키는 사정 이야기를 했다.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유미코뿐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유미코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오키는 유미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윽고 유미코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심하네.”
“뭐가?”
“모두 다.” (P301)
형이 보낸 편지를 대충 훑어보고 나오키는 입술을 깨물며 편지지를 찢었다.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주소를 가르쳐준 우메무라 선생을 원망하며 담임에게 새 주소를 알려준 걸 후회했다.
츠요시하고는 관계를 끊을 작정이었다. 물론 핏줄이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인생에서 형이란 존재를 말소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사한 곳을 알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인연을 끊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쓸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었다. 츠요시가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기를 대학에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동생이 인연을 끊자는 편지를 보낸다면, 츠요시의 심정이 어떨까. 너무 잔인한 짓이다.
하긴 이사를 하면서 알리지 않은 것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오키는 형이 부디 지금 자신의 처지나 심정을 이해해주길 바랐다.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지고 싶을 때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라는 건 나오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P317-318)
“지금까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
나오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습니다, 여러 모로.”
“그랬겠지. 그때마다 괴로웠겠지. 차별에 대해 분노하기도 했을 테고.”
긍정하는 대신 나오키는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거렸다.
“차별은 당연한 거야.”
히라노 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나오키는 눈을 크게 떴다. 차별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요?”
사장이 말했다.
“당연하지. 사람들은 대부분 범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네. 사소한 관계 때문에 이상한 일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범죄자나 범죄자에 가까운 사람을 배척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행윌세. 자기방어 본능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 저처럼 가족 중에 범죄자가 있는 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P360)
“친척들이 좀 도와주기는 했지만 모래밭에 물 붓기였지. 결국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나왔어. 그다음엔 개인파산 판정을 받을 때까지 숨을 숙이고 지냈지. 나는 친척 집에 맡겨졌고, 그럭저럭 고등학교는 졸업했는데, 이번엔 회사에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었어. 아버지 문제가 들통 나면 취직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아버지는 지금......?”
“빌딩청소회사에서 일해. 어머니도 파트타임으로 일을 나가지. 하지만 벌써 몇 년이나 만나지 못했어. 아버지는 우릴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유미코가 나오키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
나오키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유미코에게 그런 아픈 과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언제나 자기를 격려해주었기에 아마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었다.
“항상 도망 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에 이제 도망치는 건 싫어. 다른 사람이 도망 다니는 것도 싫어. 그래서 너도 도망치지 않았으면 했어. 그뿐이야.”
유미코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나오키가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유미코가 그의 손을 자기 두 손으로 꼭 감쌌다. (P381-382)
“미키도 자전거에 타고 있었어?”
유미코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부딪쳐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지금 응급실에 있어.”
“뭐라고.........?”
나오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놀이방에 데리러 갔다 돌아오면서 은행에 들렀어. 그리고 나와서 조금 가다가 갑자기......”
아내가 고개를 숙였다. 옆에 검은 숄더백이 놓여 있었다.
아내가 늘 갖고 다니는 백이다. 소매치기는 그걸 빼앗으려고 했을 것이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날치기를 당할 때 얼른 백을 놓으면 되는데 엉겁결에 꼭 붙들고 놔주지 않다가 넘어지는 거죠.”
안도 형사가 설명했다.
“날치기도 자전거를 타고 있었어?”
나오키는 아내에게 물었다.
“오토바이였어. 내가 약간 속도를 늦춘 사이에 갑자기...... 백을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P427)
나오키는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벅벅 긁었다. 그 손을 멈추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미키와 당신이 받은 상처를 지워줄 순 없어. 그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너무 괴로웠어. 숨이 막힐 것 같았어. 난 그때 깨달았어.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이해했어.”
“무슨 얘기야?”
“정정당당하면 그만이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란 거지. 그건 자기만족일 뿐이야. 사실은 더 힘든 길을 선택해야 했던 거야.”
그날 밤 나오키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P438)
“형하고는 어때?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아?”
나오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형하고는 인연을 끊었어. 이젠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아. 지금 사는 집 주소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래.......?”
데라오가 약간 당황한 모양이다.
“지금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형에 대해 몰라. 이웃이나 미키가 다니는 놀이방 사람들도 우리가 살인강도범의 가족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않고 있지. 그래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어. 미키가 밝아진 것도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하고 나서야.”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이매진>이야.”
나오키의 말에 뭐? 하며 데라오가 눈을 크게 떴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 그런 건 상상에 불과해. 인간이란 차별과 편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이지.” (P448)
동생 말이 맞습니다. 저는 편지 같은 걸 써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습니다. 오가타 씨에게 보낸 편지도 아마 틀림없이 오가타 씨에게는 범인의 자기 만족에 불과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을 거란 사실을. 그걸 사죄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삼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케시마 츠요시 올림
추신: 동생에게도 사과 편지를 쓰고 싶지만 이제는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 편지를 읽었을 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편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냉혹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형도 틀림없이 불만스러웠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형의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저는 편지 같은 걸 써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게 아니야, 형.’이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편지가 오지 않으면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테지만 길을 모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P473-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