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 2014년
침실이 왠지 낯설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집으로 가야하는 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나는 여자 목소리에 잠을 깼다. 처음에는 여자가 내 옆에 누워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곧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떠보니 나 혼자 있었다. 낯선 방이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드레싱 가운이 옷장 문 뒤에 떨어져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에게 어울릴 법한 옷이다. 짙은색 바지들이 화장대 의자 뒤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다. 누구 바지인지 모르겠다. 자명종이 복잡하게 생겼지만 나는 소리를 멈출 것 같은 버튼을 찾는다. 소리가 멎는다.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몸을 돌린다. 맨살과 검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섞여 있다. 사내다. 왼팔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다. 약지에 금반지가 끼워져 있다. 나는 신음을 삼킨다. ‘나이 든 유부남이구나. 그렇다면 유부남과 관계를 맺었단 말인가, 그것도 이 사내가 아내와 곧잘 살을 섞었을 그의 집 침대에서.’ 나는 도로 눕는다. ‘부끄럽기 짝이 없어.’ (P13-14)
거울 속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있고, 원래 내 머리카락보다 짧다. 볼살과 턱밑 살은 축 늘어지고, 입술은 얇고, 입은 한쪽이 처져 있다. 나는 소리쳤으나 외마디 비명은 튀어나오지 않고 말 없는 헐떡임만 새어 나온다. 나는 눈을 유심히 본다. 눈가에 주름살이 있기는 해도 내 눈이다. 거울 속의 사람은 나이기는 하지만 스무 살이나 더 늙어 보인다. 어쩌면 스물다섯 살. 아니 그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인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다가 세면기 가장자리를 움켜쥔다. 가슴속에서 또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이번엔 질식할 듯한 헐떡임이 튀어나온다. 나는 거울에서 한 발짝 물러난다. 사진을 본 것이다. 내 바로 앞에 있는 벽과 거울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사진들이다. 누른 테이프로 붙여놓은 사진들은 습기에 젖어 있고 구겨져 있다. 메모지가 붙어 있는 것도 있다.
나는 아무거나 하나 고른다. ‘크리스틴’이라고 적혀 있고, 화살표가 나--새로운 나, 옛날의 나--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 속의 나는 어떤 사내랑 부두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둘은 손을 잡은 채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사내는 잘생기고 매력이 넘친다. 자세히 보니 같이 잔 사람, 침대에 놔두고 온 사람이다. 사진 밑에는 ‘벤’이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는 ‘당신 남편’이라고 적혀 있다. (P15)
지금 나는 허전하다. 벤의 말이 맞다. 난 기억을 못 한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 이 집에 있는 것 가운데 전에 본 것은 하나도 없다. 사진도, 거울 주위에 있는 것들도, 내 앞 스크랩북에 있는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를 기억나게 해주는 것들인데도, 오늘 아침 우리가 같이 있었던 것을 빼고는 벤과 같이 있었던 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 마음은 텅 빈 것 같다.
나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에 집중하려고 애쓴다. 아무것이든 좋다. 어제, 지난 크리스마스. 어떤 크리스마스. 내 결혼식.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일어나서 방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마치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벽, 테이블, 가구 뒷면을 손으로 쓸어본다. 그렇다고 실제로 만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카펫, 무늬 양탄자, 벽난로 위의 도자기 입상, 주방 선반의 장식용 접시를 바라본다. (P25)
“닥터 내시입니다. 주치의도 모르십니까?”
내 주치의란다. 또 다시 공포가 밀려든다.
“주치의라고요?” 나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마저 할 줄 모른다.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하는 것 같다.
“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당신 기억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봤는데 아무 이상 없습니다.”
나는 그가 말한 시제에 주목한다. 현재 완료형이었다. 그러니 이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무슨 문제점 말이에요?”
“당신 기억이 호전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당신 기억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했고, 또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럴 듯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벤은 왜 오늘 아침 출근하기 전에 주치의 얘기를 안 했을까?
“어떻게 했는데요? 우리가 무엇을 했지요?”
“우린 지난 몇 달간 계속 만났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제가 가기도 하고 당신이 오기도 했습니다.” (P28)
“기억은 복잡한 겁니다. 1분쯤 사실과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단기 기억 창고도 있지만 장기 기억 창고도 있습니다. 장기 기억 창고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고, 또 장기간 보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뇌의 몇몇 부위가 뇌 전역에 퍼져 있는 뇌신경 연결 고리와 함께 이 두 가지 기능을 컨트롤하는 것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단기 기억을 취하고, 나중에 다시 불러내기 위해 이를 장기 기억으로 암호화하는 일을 맡은 뇌의 부위도 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말한다. 마치 견고한 땅에 서 있는 것 같다. 나도 한때는 저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기억 상실증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억 상실증 환자는 과거의 일들을 불러내지 못하는데, 최근에 있었던 일은 그 정도가 더 심합니다. 예컨대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그 사고나 사고가 나기 며칠 전 일, 혹은 몇 주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고가 나기 6개월 전 일은 죄다 기억하기도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하나는요?”
“다른 하나는 더욱 희귀한 유형입니다. 기억을 단기 저장고에서 장기 저장고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순간을 삽니다. 직전 일만 기억하는데, 그것도 잠시밖에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말을 멈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마치 차례를 정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이 대화를 가끔 연습한 것도 같기도 하다.
“난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나요? 내가 가진 기억을 잃어버렸기도 하고, 새 기억을 형성하지도 못한다는 말이에요?” (P37-38)
왠지 초조하다. 나는 일기 내용을 모른다. 어떤 충격적인 내용, 깜짝 놀랄 만한 내용,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을까? 커피 테이블 위의 스크랩북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는 내 과거가 담겨 있다. 비록 벤이 선택한 과거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일기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을까? 나는 일기를 펼친다.
첫 페이지에는 줄이 그어져 있지 않다. 가운데에 검은 잉크로 내 이름이 적혀 있다. ‘크리스틴 루카스’. 이름 밑에 ‘사적(私的)!’ 또는 ‘손대지 말 것!’이라고 적어놓지 않는 게 신기하다.
무엇인가 덧붙여져 있다. 예기치 않은 말, 끔찍한 말이 덧붙여져 있다. 오늘 본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하다. 내 이름 밑에 세 단어가 있다. 파란 잉크로 쓴 글자, 대문자로 쓴 글자다.
벤을 믿지 마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페이지를 넘긴다.
나는 내 과거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다. (P44)
“몹시 추운 12월 어느 날이었어. 낮에 당신은 직장에 있었어. 그다지 멀지 않은 집으로 퇴근하는 길이었어. 목격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 당신이 길을 무단 횡단했는지 당신을 친 차가 인도로 뛰어들었는지 우린 몰라. 어쨌든 당신은 보닛 위로 튕겨 올라갔어. 당신은 크게 다쳤어. 두 다리가 부러지고 한쪽 팔과 쇄골도 부러졌어.”
그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도시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조용히 뛰고 있었다.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고,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고, 바람이 나무 사이를 솨솨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벤은 내 손을 꼭 쥐었다.
“머리부터 땅에 부딪힌 게 틀림없다고 해. 그래서 당신이 기억을 잃게 된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사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잔잔한 회한, 공허, 기억의 호수 표면을 가로지르는 잔물결이 밀려들었다. (P69)
오후다. 조금 있으면 직장에서 밤샘을 한 벤이 귀가할 것이다. 나는 일기를 펴 들고 앉아 있다. 닥터 내시라는 사람이 점심 때 전화로 일기를 어디 두었냐고 물었다. 전화가 왔을 때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옷장 안의 구두 상자를 보십시오. 일기가 있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내가 살펴보는 동안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일기가 있었다. 그것도 화장지에 둘둘 싸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기를 꺼내고 닥터 내시의 전화를 끊은 다음, 옷장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일기를 읽었다.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나는 왠지 초조했다. 일기는 보면 안 되는 것. 위험한 것으로 느껴졌다. 몰래 숨겨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일기를 몇 번 훑어보고는 밖에서 나는 차 멈추는 소리에 재빨리 일기를 덮고 다시 구두 상자에 넣었다. 지금 나는 평온하다. (P99)
“벤이 말해주지 않던가요? 당신은 기억을 잃었을 때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있었습니다. 첫 소설은 출간되었습니다. 성공작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성공작이었습니다.”
그 말들이 서로 빙빙 맴돌았다. 소설. 성공작. 출간되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내 기억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전화를 끊고, 이걸 기록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 옆의 시계가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벤이 곧 자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침대 가에 앉아서 글을 쓴다. 나는 저녁을 먹은 후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오후 내내 초조히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았다. 그는 왜 이 변변찮은 성공에 대한 증거조차 깡그리 없애버렸을까?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는 무엇을 부끄러워했을까? 무엇 때문에 난처해졌을까? 내가 그에 대해, 그와 같이 산 삶에 대해 썼단 말인가? 이보다 더 고약한 이유라도 있었나? 내가 아직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더 어두운 게 있었나?
그가 집에 왔을 때 나는 다짜고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그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가 거짓말했다고 비난하고 싶었다. (P106-107)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 찾아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슬픔보다 더 나쁘고 단순한 좌절보다 더 해롭고 어쩌면 나를 갈가리 찢어놓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책을 봉투에 집어넣으려고 할 때 안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 번 접은 종이였다. 가장자리가 빳빳했다. 닥터 내시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이 당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리라고 봅니다!’
나는 종이를 펼쳤다. 인쇄된 종이였다. 신문을 오려낸 것이었다. 맨 위에는 내시가 적어놓은 ‘스탠더드, 1988’이라는 글자가 있고, 그 밑에는 인쇄된 기사가, 또 그 밑에는 사진이 있었다. 나는 잠시 이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기사는 내 소설 서평이고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종이를 집어들 때 몸이 떨렸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좋든 나쁘든 이것은 여러 해 전의 것이다. 어떤 영향을 미쳤든지 간에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제는 역사가 되었다. 그 파문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한테는 여전히 중요했다. 당시 내 작품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성공을 거두었을까?
나는 기사를 대충 훑어보았다. 자세한 내용을 분석하기 전에 그 어조라도 대충 파악하기를 바라면서. 단어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대개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심사숙고한, 예민한, 노련한, 인간애, 잔인한.’
그러고 나서 나는 사진을 보았다. 흑백사진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카메라 쪽을 보고 있었다. 왠지 어색해 보였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 또는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웃고 있다. 내 머리카락은 길게 흘러내렸다. 흑백사진이었음에도 내 머리카락은 지금보다 더 검어 보였다. 염색하거나 물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내 뒤에는 미닫이 유리문이 있었고, 그 너머로 나목이 보였다. 사진 밑에는 설명이 붙어 있다. ‘크리스틴 루카스, 런던 북부의 자택에서.’ (P128-129)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무래도 좋았다. 내 아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는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문을 밀었다. 문이 투박한 카펫을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벤은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먹다 남은 비스킷이 든 접시를 무릎에 얹은 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평온하고 태평스럽게 보였다. 표정은 느긋하고 입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달려들어 그를 붙잡고는 그가 사실을 말할 때까지 소리 지르고 싶었다. 왜 내 소설을 숨겨놓았냐고, 왜 내 아들에 대한 증거를 감추었냐고, 내가 잃어버린 것을 깡그리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P134)
“크리스, 우는 거야?”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왜 그래? 나 때문에 속상한 일이라도 있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랴. 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찾고 있는 기억, 다른 기억들의 비밀을 모두 풀어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그 기억이 틀린 것일까? 그가 말한 뺑소니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내 정신이 눈앞의 사태를 수습하려고 할 때 내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꽃, 샴페인, 촛불이 있는 호텔 방. 손으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낯선 사람.
내 소설과 내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벤이 내 기억 상실증의 원인에 대해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나는 알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 큰 소리로 울면서 그를 밀쳐내고 나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침대에서 기어 나와 모든 걸 적어둘 테다. (P188)
“다 왔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면회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내 손을 놓아주고 나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낯선 사람들이 침대 주위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다. 머리카락이 검은 사내와 베레모를 쓴 여자가 보이지만 누군지 알 수 없다. ‘딴 방에 왔어. 뭔가 잘못됐어.’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않는다.
침대 가에 앉아 있던 네다섯 살 난 아이가 일어서더니 뛰어오며 ‘엄마’하고 부른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그 아이가 누군지 알아차린다. ‘애덤’이다. 내가 쭈그리고 앉자 아이는 내 팔에 안겨든다. 나는 아이를 꼭 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킨다.
“당신들 누구예요?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갑자기 사내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베레모 쓴 여자가 일어나서 말한다. “크리스, 크리시, 나야,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러면서 나한테 온다. 여자도 울고 있다.
“몰라요, 몰라! 나가세요! 나가 달란 말이에요!”
나는 방을 나가려고 몸을 돌린다. 거기에도 어떤 여자가 있다. 내 뒤에 서 있던 여자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른다. 나는 울기 시작한다.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내 무릎에 매달린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군지 모른다. 그 아이는 날 보고 ‘엄마’하고 부른다. 자꾸 자꾸 부른다. ‘엄마, 엄마, 엄마.’ 이 아이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왜 나한테 매달려 있는지. (P218-219)
“아니요. 내게도 더 잘된 일인 것 같아요.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건 내가 벤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는 말이거든요.”
“크리스틴, 우리는 끊임없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쉽게 풀리도록, 사태를 우리 마음에 드는 버전에 맞추려고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기억을 꾸며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었다고 자신에게 몇 번 말하면 그걸 믿기 시작하고, 기억으로 받아들입니다. 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난 벤이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병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멋대로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모를 거라고, 내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를 믿지 않아요. 그는 결국 나를 몰아낼 거예요. 닥터 내시, 그는 모든 걸 파괴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기록한 것을 읽고 또 읽었다. 어떻게 그를 신뢰할 것인지에 대한 것을, 왜 그를 신뢰하지 않는지에 대한 것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단어들이었다.
“일기를 쓰고 있다고 그에게 말할 거예요. 당신을 만나고 있다는 것도 말할 거예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무슨 답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반대? 그때 그가 말했다.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P241-242)
“뭔가가 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크리스틴. 당신이 어떻게 지내냐고 니콜이 묻기에 아는 대로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이 다시 벤과 함께 산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물었습니다.”
“알았어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계속 말해주세요.”
“죄송하지만 크리스틴. 잘 들으세요. 니콜은 당신과 벤이 이혼했다고 하더군요.”
방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균형을 잡으려는 듯이 의자 팔을 꽉 붙잡았다.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텔레비전에서 금발의 여자가 나이 지긋한 남자에게 밉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뭐라고요?”
“당신과 벤이 갈라섰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위링 하우스로 옮기고, 2년 뒤에 벤이 당신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갈라섰다고요?” 방이 뒤로 물러나며 작아지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확실해요?”
“예, 확실합니다, 니콜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클레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클레어 때문이라고요?”
“예.” (P254-255)
“벤은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아. 아니, 늘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어. 벤은 나를 보호하려고 해. 내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 말해줘.”
“그럴 리가? 벤은 널 사랑하고 있어. 언제나 널 사랑했어.”
“벤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몰라. 내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걸 몰라. 벤은 애덤 얘기도 안 하고, 나와 헤어졌다는 얘기도 안 해. 네가 세상 반대편에 살고 있다는 얘기는 하면서 말이야. 벤은 내가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날 포기했어. 클레어, 어쨌든 벤은 날 포기했어. 내가 더 나아질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의사 만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아. 하지만 클레어. 난 닥터 내시라는 의사를 몰래 만나고 있어. 벤한테는 말할 수 없어.”
클레어가 고개를 숙였다. 내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그건 옳지 않아. 벤한테 말해야 해. 벤은 널 사랑하고 있어. 널 신뢰하고 있어.”
“그럴 수 없어. 어제 벤은 너와 연락하고 지냈다는 사실도 부인했어.”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가 놀랐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이야.”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벤이 날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게 정직해줬으면 좋겠어.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야. 난 내 과거를 몰라. 벤이 나를 도와주면 좋으련만, 난 벤이 날 도와주기를 원해.”
“그러면 벤한테 말해야 해. 벤을 믿어봐.”
“하지만 어떻게? 나한텐 죄다 거짓말을 하는데 어떻게 믿어?”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크리시, 벤은 널 사랑해. 너도 그건 알잖아. 벤은 널 자기 목숨보다 사랑해. 벤은 언제나 널 사랑했어.” (P309-310)
이제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내가 앉아 있는 이 방은 오늘 아침 눈을 떠서 부엌을 찾으려고. 물 한 잔을 마시려고, 간밤에 있었던 일들을 주워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좌충우돌하던 그 방만큼 낯설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 방은 이제 고통과 슬픔이 묻어 있는 것 같지 않다. 더는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삶을 상징하는 것 같지 않다. 내 어깨 높이에 있는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는 이제 단순히 시간만 나타내지 않는다. 시계는 나한테 ‘안심해도 된다’고 말한다. ‘안심해도 돼. 다가올 일을 받아들여’라고 말한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실수를 했다. 그것도 연거푸, 몇 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 남편은 나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사랑한다. 이제 나는 그를 사랑함을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그를 사랑했다. 다시 매일 그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그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P322-323)
브라이튼 부두.
추워서 떨리는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것을 느낀다. 이윽고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벤은 나를 이곳 브라이튼으로 데리고 왔어. 이유가 뭘까?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 간 마을에 가보면 과거의 일을 더 잘 기억하리라고 생각한 걸까? 누가 나를 이 꼴로 만들었는지 기억해내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닥터 내시가 이곳에 한번 가보자고 할 때 싫다고 했던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와 목소리가 들린다. 키 큰 사내가 벤을 데리고 오는 모양이다. 그들은 함께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와서 층계참에 이를 것이다. 벤이 곧 나타날 것이다.
벤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해야 하나? 여긴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나?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해야 하나? 벤이 도와주려고 하면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문으로 간다. 가방을 들고 오는 것을 도와주고 짐을 정돈해야지. 그러고 나면 우리는 잘 것이고, 내일은......
내일이 되면 또 아무 것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난다. 벤의 손가방에는 사진과 스크랩북이 분명히 들어 있을 거야. 벤은 모든 것을 이용해서 자기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 있는지를 거듭 설명할 거야. (P347-348)
엔진이 꺼지고 차 문이 꽝 닫혔다. 경적이 크게 울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벤이 온 것 같아.”
“젠장, 빨리 대답해. 그 사람 흉터가 있니?”
“흉터라니? 어디?”
“얼굴에 나 있어. 크리시. 왼쪽 뺨에 흉터가 있어. 암벽 등반을 하다가 다친 자국이야.”
나는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드레싱 가운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 나의 남편 사진을 마침내 찾았다. 사진 속의 그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수염만 있을 뿐 뺨에는 흉터가 없었다.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크리스틴! 여보! 나 왔어!”
“아냐, 없어. 흉터는 없어.”
헐떡임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한 소리가 들린다.
“네가 같이 살고 있는 사람. 누군지 모르지만 벤은 아니야.” (P382)
나는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기 시작한다. 거듭 그렇게 하자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우리 두 사람은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 배에 묻은 정액과 머리카락에 묻은 정액이 말라간다. 내가 몸을 돌리자 그는 웃으며 또 키스를 한다. “마이크! 그만해! 난 곧 가야 해. 오늘은 벤이 늦게 와서 애덤을 데리러 가야 해. 그만하라니깐!”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콧수염 난 얼굴을 내 얼굴에 비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고 또 키스를 한다. 내 남편도, 내 아이도 잊은 채.
그 일에 대한 기억이 나는 것을 깨닫고 구역질이 났다. 그날, 나는 남편과 함께 살았던 집의 부엌에 있었다. 나는 내 남편이 아닌 내 애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일 나갔을 때 나와 섹스를 나눈 사내였다. 그게 바로 그가 그날 떠났어야 했던 이유였다.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결혼한 남자가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눈을 뜬다. 나는 호텔 방에 있고, 그는 여전히 내 앞에 웅크리고 있다.
“마이크, 당신 이름은 마이크야.”
“용케 기억해냈군!” 그는 만족해한다. “크리시! 기억해냈어!” (P392)
“우린 이놈의 일기를 없애야 해. 깡그리 그리고 영원히 없애야 해.“
그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9 불을 붙인 다음 상자에서 일기 한 장을 꺼낸다.
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본다.
“안 돼!”
나는 말을 하려고 하지만 끙끙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일기 한 장에 불을 붙여 상자에 넣는다.
“안 돼!”
나는 다시 말하지만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다. 나는 내 이야기가 불에 타서 재가 되고 내 기억들이 탄소로 바뀌는 것을 본다. ‘저 일기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이겼어.’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고 필요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몸을 상자 쪽으로 날린다. 두 손이 묶여 있어 충돌을 면할 수 없다. 쿵 소리와 함께 나는 상자에 부딪힌다. 팔에 통증이 느껴진다. 실신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상자가 넘어져서 불타고 있는 종이가 바닥에 흩어진다.
마이크가 소리를 지르며--외마디 비명이다-- 무릎을 꿇는다. 그는 바닥을 탁탁 쳐서 불을 끄려고 한다. 나는 불붙은 종잇조각이 침대 밑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만 마이크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불꽃이 침대 커버 가장자리를 핥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손이 닿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다. 누운 채 침대 커버에 불이 붙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뿐이다.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는다. 방이 불탈 거야. 마이크도 불탈 거고, 나도 불탈 거야. 여기,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여러 해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내 역사는 재가 되고 억측이 대체할 것이다.
지금 나는 숨을 쉴 수 없다. 목구멍 안에까지 박힌 양말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기침만 해댄다. 나는 질식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들을 생각한다. 이제 아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게 아들이 있다는 것과, 그 아들이 살아 있으며 행복하다는 것은 안 채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 나는 벤을 생각한다. 내가 결혼한 사람, 잊어버린 사람이다. 벤이 보고 싶다. 이제야 기억난다고 벤한테 말해주고 싶다. 옥상 파티에서 벤을 만난 것,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벤이 나한테 프로포즈 한 것이 기억난다. 맨체스터의 한 교회에서 그와 결혼을 하고 빗속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 기억난다.
그렇다. 벤을 사랑한 기억이 난다. 정말 그를 사랑했고 언제나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P410-411)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틴, 그 효과가 일시적인 것임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돼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눈뜰 때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오늘 밤 잠든 후 오늘 가진 기억들이 모두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새 기억들도, 옛 기억들도 모두 사라져버릴 수 있어요.”
“오늘 아침 눈뜰 때와 똑같아질지도 모르겠네요?”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눈을 뜨면 애덤과 벤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일기를 써요. 크리스틴. 아직 일기 가지고 있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놈이 태워버렸어요. 그래서 불이 났어요.”
닥터 내시는 실망한 것 같았다.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크리스틴. 당신은 나을 겁니다. 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당신에게 돌아왔습니다.”
“나도 그들에게 되돌아가고 싶어요. 진심이에요.” 내가 말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P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