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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니콜스의 <원 데이>

영화 <원 데이> 2012년

by 노용헌

2006년 7월 15일. 영화는 수영을 마친 엠마 몰리(앤 해서웨이 분)가 자전거를 타고 분주하게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과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시간은 곧 그로부터 18년 전인 1988년 7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졸업식 날. 엠마와 덱스터 메이휴(짐 스터게스 분)는 친구들과 어울리다 우연히 마주친다. 엠마는 그를 알고 있었지만 덱스터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운명은 그날 이후 두 사람을 아주 긴밀한 친구 사이가 되도록 만든다. 원 데이〉는 바로 그날 이후 20년간 돌아오는 스무 번의 7월 15일을 짚으며 두 남녀의 사이를 관객들과 함께 관찰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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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소녀 엠마에게는 사진 몽타주를 향한 열정도 있나 보군.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대학 친구와 가족들의 사진이 샤갈이나 베르메르, 칸딘스키 등의 작품과 뒤섞여 있었다. 여긴 중립이란 게 없군. 모든 게 맹세고, 어느 관점의 표현이었다. 방 자체가 하나의 선언문이었다. 덱스터는 탄식과 함께 엠마가 ‘부르주아’란 말을 비난의 표현으로 쓰는 여자애들 중 하나인 걸 깨달았다. 그는 ‘파시스트’란 말이 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부르주아’란 말에 담긴 모든 내용들은 그저 좋기만 했다. 무사함, 여행, 좋은 음식, 깍듯한 예절, 야심.... 이런 걸 갖는 게 왜 미안해 해야 할 일이란 말인가?

꼬불꼬불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지켜보다 말고, 침대 옆의 재떨이를 찾으려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등에 금이 쭉 간 곳을 펴보니 이 소설의 ‘에로틱’한 부분이었다. 이처럼 맹렬 개인주의에 젖은 여자애들의 문제는 그들이 죄다 모조리 예외 없이 똑같다는 것이다. 다른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내>, 저런 머저리를 봤나, 그는 생각했다. 자기라면 절대 그런 착각 따윈 안 할 거라고 확신하며.

나이 스물 셋, 덱스터 메이휴의 미래 구상 또한 엠마 몰리의 그것에 비해 맹쾌할 게 하나도 없었다.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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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에겐 이따금씩 덱스터 메이휴가 있었다. 졸업 후 며칠 계속된 따듯했던 그 여름 동안, 그녀는 옥스퍼드셔의 아름다운 집으로 덱스터의 가족들을 방문했다. 음, 그건 그냥 집이 아니라 저택이었다. 빛바랜 양탄자, 커다란 추상화 액자, 얼음을 띄운 술잔 등이 그 1920년대풍 대저택의 풍경이었다.

허브향 은은한 거대한 정원에서 둘은 수영장과 테니스코트를 오가며 길고 게으른 하루를 즐겼다. 지방정부가 지은 공공주택만 봐온 그녀에게 사실 그 집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고리버들 의자에 앉아 진토닉을 마시고 경치를 음미하며 그녀는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렸다. 물론 그녀가 순순했을 리 없다. 잔뜩 긴장한 저녁 자리에서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그녀는, 온화하고 점잖으며 완벽하게 합리적인 덱스터의 아버지에게 니카라과 얘기를 하다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그런 황당한 엠마의 모습을 쳐다보는 덱스터의 눈에는 애정과 실망이 교차했다. 마치 양탄자에 얼룩을 묻히는 강아지를 쳐다보듯, ‘엠마가 지금 우리 집 식탁에 앉아서, 우리 집 음식을 먹으며, 우리 아버지를 파시스트라고 부르고 있는 거 맞아?’

그날 밤 엠마는 손님용 침실에 누워 멍하니 죄책감에 취해, 결코 오지 않을 덱스터가 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 낭만적인 꿈을, 전혀 기뻐하지도 않을 산디니스타를 너무 열렬히 옹호하다 날려 버린 것이다.

둘은 4월에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 둘의 친구인 캘럼의 스물세번째 생일파티에서였다. (P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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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작가 기질도 없었고, 정치는 거의 몰랐으며, 형편없는 레스토랑 프랑스어만 웅얼거리는 정도였다. 무슨 전문가 자격증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여권이 있었고, 열대 나라의 천장 선풍기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 자신의 모습이나 찌그러진 니콘 카메라, 침대 옆의 위스키 병 정도가 거기에 곁들여질 이미지였다.

물론 그가 진정 원하는 미래는 사진가였다. 열여섯 때 그는 ‘질감’이란 이름의 사진 프로젝트 하나를 만들어낸 적이 있었다. 나무 껍질이나 조가비 등을 접사로 찍은 흑백사진 모음집이었는데, 그 작품들을 본 예술 과목 담당 선생은 틀림없이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있는 눈치였다. 그 뒤로 찍은 사진들은 ‘질감’이나 창문에 낀 성에나 집 앞 진입로의 자갈들을 하이 콘트라스트로 뽑은 사진들만큼의 성과와 만족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저널리즘이야 글이나 아이디어 같은 복잡한 것들과 씨름해야 하는 일일 테지만, 덱스터는 자기한테 훌륭한 사진가로서의 소질은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뭔가가 어떨 때 근사하게 보이는지는 육감적으로 잘 알았으니까 말이다.

대학 졸업 후 1년, 지금의 그에게 직업을 선택하는 가장 주된 기준은, 바에서 한 여인의 귀에다 자기 일을 외쳐야 할 때 얼마나 근사하게 들릴 것인지였다. 그런 점에서 “난 전문 포토그래퍼예요.”는 그럴싸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교전지역 취재해요.” 혹은 “사실 전 다큐멘터리 만들어요.” 등과 더불어 비교적 상위권에 속할 만했던 것이다.

“언론 쪽도 가능하긴 하죠.” (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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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스터는 그 한복판에 누워 텔레비전 꿈을 꾸었다.

전문 포토그래퍼의 꿈은 별 노력 없이 접어 버렸다. 아마추어로서는 꽤 쓸 만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지만, 카르티에-브레송이나 카파, 브랜트 같은 남다른 사진가가 되려면 온갖 고생과 시련, 피땀이 필요했다. 하지만 덱스터는 자신이 피땀을 흘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반면 텔레비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덱스터를 필요로 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성장기 내내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그걸 보는 게 뭔가 불건전한 일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라났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난 9개월 동안에 텔레비전이 그의 삶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는 텔레비전의 세계로 돌아온 개종자처럼, 드디어 영혼의 거처를 찾아냈다는 듯 새 광신도의 열정으로써 그 매체에 대한 깊은 정을 키워 갔다.

물론 사진의 예술적 눈부심이나 교전지역 취재의 위신 따위에 비길 바는 못 되었지만, 텔레비전은 중요한 매체였고 텔레비전이 미래였다. 사람들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여론을 형성하며,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 아무도 보지 않는 연극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선동하고 즐겁게 하고 파고든다는 점에서 텔레비전은 실생활 속의 민주주의라고 할 만했다.

“나는 보수당이 싫어요.”라고 엠마는 말하지만 -- 덱스터도 보수당 팬은 아니었다. 단 그는 당의 이념보다는 그 스타일이 맘에 안 들었던 거지만 -- 그들은 확실히 미디어산업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이제껏 방송은 거만한 양반들의 따분한 일이었다. 공룡 노조, 우중충한 관료주의, 바퀴 달린 찻잔 운반대를 밀고 다니는 털보 평생직장인들과 공상적 사회개량주의자들, 노인네들의 놀이터였다. 공무원 조직의 연예 분과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반면, 레드라이트 프로덕션은 새로운 붐의 선두에 있었다.

리스가 만들어낸 시대에 뒤처지고 낡은 공룡(즉 BBC)으로부터 생산수단을 떼어낸 민간 소유 기업으로서, 젊음의 활기가 넘치는 회사였다. 미디어에는 돈이 있었다. 원색으로 칠해진 개방형 평면의 사무실에는 최첨단 컴퓨터 시설과 어마어마하게 큰 공용 냉장고들이 즐비했다.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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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당장 엠마의 기분을 풀게 하고 사기를 북돋워 그녀의 자신감이 크게 일어나도록 할 게 뭐 없을까?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덱스터는 엠마의 손을 잡고 장엄하게 선언했다.

“있잖아, 엠. 네가 마흔인데도 아직 싱글이라면 난 너랑 결혼하겠어.”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노골적인 혐오가 이글거렸다. “덱스, 지금 그걸 프로포즈라고 한 거니?”

“지금은 아니지, 언젠가, 우리 둘 다 가망 없는 상태가 되면, 그때.”

엠마가 쓰게 웃었다.

“대체 내가 너랑 결혼하고 싶어하리란 생각이 왜 든 거니?”

“글쎄, 그냥 그렇게 될 거 같은데.” (P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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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라디오가 연신 딸깍거리며 재촉했지만 엠마는 침대에 좀 더 누워 뉴스 헤드라인을 들었다. 존 스미스가 노조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뉴스에 엠마의 가슴이 저려 왔다. 그는 존 스미스가 너무 좋았다. 그녀에게 이 노정치인은 불의와 절대 타협할 것 같지 않은 현명한 교장선생님 같았다. 심지어 그의 이름에서도 ‘민중의 벗’(man of the people)이라는 견고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노동당 가입 문제를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그렇게 하면 핵군축시민행동(CND) 멤버십이 소멸되게 내버려 둔 데 따른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단지 다자간 군축을 요구하는 게 이젠 너무 나이브해 보였던 것이다. 그건 마치 누구에게나 친절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 않은가.

‘스물일곱. 내가 늙어 가는 걸까?’ 엠마는 생각했다. 그녀는 논쟁의 양쪽 견해 모두를 살펴야 한다는 데 반기를 드는 자신이 뿌듯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더 모호하고 복잡함을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그 다음의 두 뉴스는 그녀에게도 이해 불가였다.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문제였다. 자기 의견을 갖고, 한쪽 편을 들고서 다른 쪽에 반대해야 하는 거 아닐까? 문제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라면 어느 쪽에 설지 금세 판가름이 났을 텐데, 막상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그 전쟁을 막고자 그녀는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P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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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롭기 짝이 없는 아마추어 코미디언의 연기가 끝없이 이어질 것임에 낙담한 엠마는 한 명의 멋진 남자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요란법석도 피우지 않고 쓱 메뉴를 본 뒤, 겸손하면서도 권위를 갖추어 주문을 할 것이다.

“...... 훈제 베이컨 스낵 맛에다 촉촉한 기린의 여운이.....”

제가 날 웃겨서 혼수상태로 만들려고 저러나, 그녀는 생각했다. 마구 조롱해 줘 버릴까, 롤빵을 확 던져 버릴까, 어렵쇼. 그럴 줄 알고 벌써 다 먹어치웠군. 그녀는 다른 테이블을 보았다. 거기서도 남자들의 연기가 한창이었다. 결국 다 이렇게 되고 마는 거였나? 로맨틱한 사랑이란 거, 결국은 장기자랑 쇼에 불과한 건가? 밥 먹고, 같이 자고, 나랑 사랑에 빠져 다오, 그러면 나, 당신에게 이런 멋진 쇼를 평생 펼쳐 드리오리다?

“..... 라거 맥주를 이렇게 판다고 생각해 봐?” 이제 글래스고우 악센트의 연기였다. “우리 집 특산 맥주는 입맛을 묵직하게 자극하죠. 강렬한 시영아파트 맛에다 꾀죄죄한 쇼핑 카트랑 몰락한 도시의 기운을 곁들였어요. 가정폭력이랑 같이 마시면 특히 좋아요!”

재미있는 남자가 최고라는 오류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폭풍의 언덕>에서 캐시가 히스클리프를 그토록 그리워하는 게 그가 너무 웃겨서라니, 당치 않은 소리다. 게다가 이 쏟아지는 수다가 더 괴로운 건, 사실 그녀가 이언을 꽤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본다 싶어서 가슴도 부풀었고 약간 흥분도 했건만, 그런데도 이 남자는 줄창 떠벌리기만 하다니..... (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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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악단의 파이프 연주, 저글링 하는 광대들, 억지 재미 등으로 얼룩진 코벤트가든을 엠마는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그럴듯했다. 자신에게 늘 잘해 주고 관심을 기울여 준 이 남자의 팔을 잡고 걷는 게 참 근사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윗도리를 볼썽사납게 목깃의 조그만 고리에다 걸어 어깨에 덜렁덜렁 걸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올려다보니 그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왜 그러셔?” 엠마가 그의 팔을 꾹 누르며 물었다.

“그냥. 있잖아. 내가 막 다 엉망으로 만든 것 같아서 말야. 잔뜩 긴장해서, 너무 오버하고, 미친 듯 떠들어대고,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살아서 제일 안 좋은 게 뭔지 알아?”

“옷이지, 옷?”

“사람들이 늘 나한테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거야. 그래서 난 또 만날 웃기려는 궁리만 하고.” (P237)

엠마가 전화를 끊었다. 당장 전화를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전술적으로 보아 조금만 더 골난 척하는 게 좋을 듯했다. 둘은 또 싸웠다. 엠마는 덱스터가 자기 남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역정을 냈고, 아무리 그가 열렬히 부인해도 그가 이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노력했다. 정말로 노력했다. 셋이서 극장에 같이 가기도 했고, 싸구려 레스토랑이나 침침한 낡은 술집에 같이 앉아 있기도 했다. 이언이 엠마의 목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덱스터는 엠마와 눈을 맞추며 승낙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맥주 두어 병 마셨으니, 그 정도 연인들의 젊은 꿈이야, 뭐.

엠마의 조그만 얼스코트 아파트의 코딱지만 한 식탁에 앉아 ‘사소한 추격’이라는 게임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 게임은 어찌나 공공연히 적대적인지, 마치 맨손권투를 하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소니코트로닉스에서 일하는 젊은이들과 같이 모트레이크의 ‘웃음공작소’까지 가서 이언의 시사 코미디를 지켜보기도 했다. 엠마는 그의 옆을 초조하게 지키며 웃어야 할 때마다 옆구리를 쿡쿡 찔러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덱스터가 가장 공손할 때조차도,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둘 사이엔 늘 적의가 이글거렸다.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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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나 힘이 남은 저녁 시간이면 엠마는 글을 썼다. 소설 두 편을 시작했고(하나는 강제수용소가 무대였고, 다른 건 묵시록 이후의 미래가 배경이었다), 자기가 직접 일러스트를 그린 어린이용 그림책 한 편은 목이 짧은 기린 이야기였다.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의 잔뜩 찌푸린 TV드라마용 극본 하나는 ‘거친 녀석’이라 불리는 사회복지사들이 주인공이었다. 20대 주인공들의 삶 속에서 복잡한 격정을 다루는 독립 연극 한 편, 사악한 로봇 선생들을 등장시킨 10대용 판타지 소설 한 편, 죽어 가는 한 여성 참정권론자가 읽어 주는 라디오용 의식의 흐름 연극 한 편, 네 컷 만화 하나, 소네트 하나도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완성된 건 없었다. 14행짜리 소네트조차도 미완인 상태였다.

모니터 위의 그 단어들은 가장 최근에 그녀가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상업적이면서도 신중한 페미니스트 범죄소설 연작이었다. 그녀는 열한 살 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모조리 읽었고, 챈들러나 제임스 M 케인의 작품도 많이 읽었다. 그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만한 작품을 그녀라고 못 쓸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천지 차이임을 그녀는 다시금 깨달았다. 흠뻑 빨아들였다가 도로 짜낸다고 그게 작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엠마는 탄탄한 줄거리는 고사하고 여주인공 형사의 이름 하나도 지어내질 못했다. 그녀의 필명마저도 가관이었다. 엠마 T 와일드라니? (P29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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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안해. 같이 점심 못해서. 다른 클라이언트 만나러.....”

“알았어. 고마워. 아론.”

“다음번에 같이 해, 덱시, 왜 그래? 풀이 다 죽어서는.”

“아니, 됐어. 좀 신경이 쓰여서 그래.”

“뭐가?”

“알면서 그래. 신경 쓰이지. 미래가. 내 경력이,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거든.”

“절대 아니지, 미래, 그것 땜에 그렇게 돼지게 짜릿짜릿한 거 아니겠어 자, 힘을 내. 당신에 관한 내 나름대로의 이론이 하나 있는데 말야, 들어 볼래?”

“그래, 말해 봐.”

“사람들은 당신 사랑해. 덱스. 정말 좋아하지. 그런데 문제는 말야, 그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건, 빈정대고 놀리면서 좋아하는 거. 미워하려고 좋아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이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만들어야 해.....” (P38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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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물결‘은 20대 중반에 닥쳤다. 여전히 장난기와 소박함이 거기 묻어 있었다. 피로연은 동네 회관이나 부모님 댁 정원에서 열렸고, 직접 작성한 결혼서약은 엄격하게 세속적이었으며, 누군가는 꼭 “그토록 작은 손을 가진 빗줄기” 운운하는 시를 낭송했다. 하지만 프로페셔널리즘의 냉정하고 모진 예물이 이때부터 모습을 드러냈으니, ’웨딩리스트‘라는 발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만간 어느 시점에는 ‘제4의 물결’이 닥칠 것이었다. 바로 재혼의 물결이다. 쓰고도 달콤한, 약간은 미안해 하는 듯한 그 행사는 아이들을 배려해 대개 9시 30분이면 끝이 났다. “별 거 아냐, 이 핑계로 파티나 한번 하자는 거지.” 초대의 말도 고작 그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올해는 ‘제3의 물결’의 해였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스펙터클하며, 가장 충격적인 결혼 행렬들이 바로 이 ‘제3의 물결’을 이루었다. 30대 초중반에 이른 이 사람들의 결혼식에서는 그 누구도 웃지를 않았다.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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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에 스며들어 온 새벽 햇빛, 낮은 싱글 침대, 허리까지 밀려 올라가 있던 그녀의 치마, 두 팔을 올려 나비잠을 자던 모습까지, 그 후로 뭐가 바뀐 거지? 거의 변한 게 없군. 엠마는 웃을 때 입가에 생기는 라인은 그대로였다. 다만 조금 더 깊어졌을 뿐, 밝고 빈틈없어 보이는 눈도 그대로였고, 여전히 큰 입을 꾹 다문 채 무슨 비밀을 삼키려는 듯 웃었다. 여러 면세서 그녀는 스물두 살의 그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기 머리를 스스로 자르는 만행을 그만두었고, 도서관 소녀의 창백함도, 신발 끝만 바라보던 사나운 심술과 무뚝뚝함도 털어 버렸다.

그는 문득 궁금했다. 지금 처음으로 저 얼굴을 봤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가 만약 24번 테이블에 배정 받아서 거기 앉아 둘이 서로 소개의 인사를 나눴다면? 그는 오늘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그녀하고만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일어나서 엠마한테 가려고 잔을 집었다.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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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프 씨 내외는 당신을 저희 딸 실비와 덱스터 메이휴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네 결혼식 초대장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 정말 안 믿긴다. 9월 14일, 토요일? 아니, 그럼 겨우......”

“7주 남았지.”

그는 계속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에게 말했을 때 그 멋진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7주? 난 이런 건 몇 년씩 걸리는 줄 알았더니?”

“그래,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이 경우는 이른바 속도위반 결혼이라는 거야.”

엠마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슨 말인가 갸우뚱했다.

“예상 하객 350명. 케일리 악단도 와.”

“그럼 너.....?”

“실비가 임신 같은 걸 해서,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임신이야. 그래 임신, 애를 가졌어.”

“오, 덱스터.” 한 번 더 그녀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와서 닿았다.

“아빠가 누군지는 아니? 농담, 농담! 축하해, 덱스, 맙소사, 폭탄 좀 듬성듬성 떨어뜨려라, 그렇게 확 퍼붓지 말고.”

그녀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거머쥐고 쳐다보았다.

“네가 결혼을 하다니?”

“그래!”

“그리고, 세상에, 네가 아빠가 된단 말이지?”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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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는 텔레비전 산업에 몸담던 사람들이 늙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했었는데, 이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수습 에디터나 카메라맨은 대개 스물네다섯이었으며, 그는 프로듀서 경험이 없었다. 그의 독립 프로덕션인 메이업TV사는 기업이라기보다는 그가 아무 일도 안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알리바이에 더 가까웠다. 매년 돌아오는 납세 신고 기한이 되면 회계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회사는 폐업 상태가 되었고, 멋지게 인쇄된 서식용지 스무 덩이는 안타깝게도 다락방에 처박아 두어야 했다.

그러나 좋아진 일 하나는 엠마와 다시 어울리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예르지와 레흐한테서 시멘트 풀 개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에 살짝 빠져나가 엠마와 영화 구경을 하곤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화요일 오후에 극장을 나와 훤한 햇볕을 다시 마주할 때의 그 처연한 느낌은 점점 견디기가 어려웠다. 완벽한 아빠가 되겠다던 그의 서약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았다. 6월 초, 그는 마침내 마음을 접고 캘럼 오닐을 만나러 갔고, ‘내츄럴 스터프’ 체인의 일원이 되었다. (P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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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민, 너나 나나 모두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 텔레비전 앞에서 음식을 펼쳐 놓고 먹었지만, 악을 쓰며 우는 애를 무시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통제된 울음’ 얘기들을 하지만, 그는 통제력을 잃고 울고 싶어졌다. 그러자 아내에 대해 빅토리아 시대 사내처럼 분통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애를 아빠한테 맡기다니, 정말 무책임한 갈보 년이 아닌가? 어떻게 감히? 텔레비전을 켜고 포도주를 더 따르려고 갔는데, 놀랍게도 이미 빈 병이었다.

걱정할 건 없나니, 세상 모든 육아문제는 우유만 타서 던져 주면 풀리는 일 아니던가. 그는 유동식을 좀 더 만들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머리가 약간 몽롱했고, 귓속에선 맥박이 전화벨처럼 울려댔다. 그가 우유병을 손에 쥐어 주자 재스민의 찌푸렸던 조그만 얼굴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앗, 뚜껑 닫는 걸 깜박했구나! (P487)

“작가의 다락방.”

덱스터의 여행을 위하여 엠마는 경치 좋은 길을 미리 외워 두웠다. 파리 북동부의 소음과 차량 행렬을 피해 그나마 경치가 좋은 길들로.

“나 이번 여름 파리로 집을 옮길 거야. 거기서 글을 쓰려고.”

지난 4월만 해도, 그녀는 파리에 가서 사는 걸 황당하고 정신나간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한 커플들이 그녀에게 “넌 언제든 파리로 갈 수 있겠구나.”라고 어지나 지겹게 노래를 불러댔는지, 그녀는 급기야 ‘그래, 파리로 가버리자.’는 맘을 먹기에 이르렀다.

런던은 거대한 탁아소 같았다. 그래, 다른 사람들 애들로부터 한동안 벗어나는 거다. 모험 한번 하는 거다, 싶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베케트와 프루스트의 도시가 아닌가. 비록 상업적 성공을 거둔 틴에이저 소설 작가이긴 해도, 그녀 또한 작가로서 파리에 갈 이유가 충분한 듯했다. 그런 파리행을 조금이라도 덜 진부해 보이기 하기 위해 그녀는 관광객들의 파리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데 거처를 정했다. 그곳이 바로 노동자 밀집지역인 19구의 벨빌과 메니몽땅 경계 근처였다. 아무 관광 명소도 없고, 눈에 띄는 건물도 없는 곳..... (P517-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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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어떻게 지냈어?”

“아, 아주 좋아. 9월에 이혼 수속이 진행되었지. 결혼기념일 직전에 딱 마무리되더라. 결혼의 기쁨은 만 2년 만에 끝장이 났지.”

“그녀랑 얘기 충분히 했어?”

“가능하면 안 했지, 그러니까, 서로에게 욕 퍼붓고 물건 집어던지고 하는 걸 관뒀다는 소리야. 그저 그래, 아니, 안녕, 잘 가, 그런 말들만 나눈다고. 돌아보니 결혼생활 내내 나눈 얘기란 게 고작 그런 것들이었어. 들었니? 그 여자 벌써 캘럼이랑 같이 산다는 거? 같이 디너파티 하러 가곤 했던 머스웰힐의 그 우스꽝스런 대저택으로 들어갔다는 거지....”

“응, 들었어.”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P523)


요즘 실비가 전남편을 볼 때마다 그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꼭 무슨 컬트 집단의 맹신도처럼 자신의 행복을 선전하려는 듯 펑펑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스민을 하늘로 던졌고, 애한테 목말을 태웠고, 틈만 나면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아빠가 되었는지 보여 주려 했다. 저 엠마라는 사람도 그랬다. 재스민은 만날 엠마가 이거 했고, 엠마가 저거 했고 타령이었다. 엠마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이다. 재스민이 집에 돌아올 때 색종이 파스타 붙인 걸 들고 오기에 그게 뭐냐고 물으면 “이거 엠마랑 만든 거야”부터 시작해서 둘이 같이 동물원에 가서 벌어진 일 등 온갖 엠마 얘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아마 동물원 가족입장권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나, 그 둘, 덱스와 엠, 엠과 덱스. 두 사람 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으스댄다니까. 덱스터한테 있는 건 그 보잘것없는 동네 모퉁이 가게 하나이고..--캘럼은 물론 이제 48개의 내츄럴 스터프 지점을 거느리고 있었다-- 엠마한데 있는 건 그 자전거와 갈수록 두꺼워지는 허리, 학생 같은 태도, 그 꼴 보기 싫은 쓴웃음뿐이었다. 게다가 엠마는 재스민의 대모였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계모라니, 엠마는 어쩌면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가 언제 파고 들지를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정말 주도면밀하고 음흉하지 않은가. 빠져 죽지 말라고? 건방진 것.

옆자리의 캘럼은 이제 메릴본로드의 교통 혼잡에 욕을 퍼붓고 있었다. 실비는 불끈 화가 났다. 남들의 행복도 보기 싫었고, 자신은 또 팀을 잘못 만났다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슬프기도 했다. 사실 그런 생각은 얼마나 추하고, 무례하고, 저열한 것들인가. 결국, 덱스터를 떠난 것도, 그래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도 그녀였으니까. (P569-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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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함께 앉아 신문을 읽었다. 엠마는 시사면, 덱스터는 스포츠면을 읽었지만, 두 사람 모두 팽팽하게 긴강해 있었다. 엠마는 혀를 차며 화가 날 때 가끔씩 보이곤 하던 방식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라크 참전 결정에 관한 버틀러위원회의 활동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곧 정치 문제를 꺼내 얘기할 것임을 짐작했지만, 그래도 애써 윔블던 뉴스만 보려고 했다. 하지만, 드디어!

“이상하지 않아? 이런 전쟁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아무런 반대가 없지? 무슨 행진이나 반대 시위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응?”

그 목소리의 음색은 그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그의 기억 속 20년 전 엠마의 목소리였다. 도덕적 우월함과 ‘내가 옳아’ 주의가 느껴지는, 덱스터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면서 그저 논쟁을 피했으면 하는 맘으로 살짝 소리를 내기만 했다. 시간이 흘렀고, 엠마가 다음 면으로 신문을 넘겼다.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잖아. 베트남전 반대 운동 같은 게 일어나야 한느데, 아무 일도 없어. 딱 한 번 행진하더니, 다들 어깨 으쓱하곤 집으로 돌아가 버렸어. 학생들조차도 반대를 안 해!”

“학생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게?”

덱스터가 제법 신중하고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그건 전통이잖아. 학생들이 정치에 적극적인 거. 우리가 아직 학생이라면 우리도 시위를 했을 거 아냐.” 그녀가 다시 신문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난 했을 거야.”

그녀가 시비를 걸자 덱스터도 냉큼 응수했다. “그런데 왜 안 해?”

그녀가 매셥게 그를 쳐다보았다. “뭘?”

“반대 말야.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왜 안 해?”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마 나도 해야겠지! 내 견해는 딱 그래! 뭔가 단결된 운동이 일어난다면....” (P585-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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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군가에게 밥 딜런이나 T.S 엘리오트, 맙소사, 브레히트를 인용해 말을 걸어 보라. 그들은 친절한 웃음을 머금은 채 슬슬 뒤로 물러날 거다. 누가 그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나이 서른여덟에 노래 한 곳,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 인생을 바꾸리라고 기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래, 이제 모든 게 가지런하고 차분하게 정착된 것이다.

인생은 편안함과 만족감, 익숙함의 콧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차분히 흘러가고 있다. 정신없이 요란한 고기압과 저기압 사이의 출렁거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지금의 친구들이나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의 친구들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극적으로 부유해지는 것도, 극적으로 가난해지는 것도 그들은 기대하지 않는다. 건강하게 좀 더 오래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의 기대다. 중간에 낀 그들. 중간계급에 중년인, 너무 행복하지 않은 게 행복한 그들.

마침내,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보답으로 그녀도 사랑받고 있음을 아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씩 파티에서 사람들이 그녀와 남편이 어떻게 만났나를 물으면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우린 함게 자랐어요.” (P597-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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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자전거 헬멧 쓴 모습, 진짜 웃기는데.... 그런데 그녀를 굽어보는 사람들 표정에 공포가 가득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대는 것이었다. 그중 한 명은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괜찮지 않음을 깨달았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이제 그녀는 엄청 늦을 게 분명했다. 덱스터가 많이 기다리겠구나.

머릿속에 두 가지가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첫 모습은 바닷가에서 빨간 수영복을 입고 찍은 아홉 살 적 자신의 사진이었다. 거기가 파일리였던가, 스카보로였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를 카메라 쪽으로 번쩍 들어 올리던 사진 속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다음 모습은 덱스터였다. 새 집 계단에서 비를 피하면서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조바심을 내는 덱스터. 내가 어딨나, 궁금하겠네. 그녀는 생각했다. 덱스터가 걱정하겠다.

그리고 엠마 메이휴는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고 느끼던 모든 것이 사라져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P601)


그는 거울에 머리를 대고 숨을 내쉬었다. 엠마와 함께하던 시간동안 그는 종종 우두커니 상상해 보곤 했다. 만약 그녀가 내 주변에 없었다면 사는 게 어떨까? 마음에 병이 나는 그런 것 말고, 정말 실생활에 있어서, 대체 그녀가 없으면 그는 어떤 꼴일까를 곰곰 생각해 본 것이었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 그런 걸 궁금해 하지 않나? 자, 그 대답이 지금 이 거울 속에 있구나.

그녀가 사라지면서 그에게 위풍당당한 비통함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멍청하고 통속적인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는 노력도 안 하고, 가치도 목적도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후회와 창피함으로 중독된, 초라하고 외로운 중년의 주정뱅이가 된 것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그날 아침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P63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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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슬픔은 언 강을 걷는 것과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안전하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언제나 밑으로 쑥 꺼지고 말 위험이 도사렸다. 지금 그의 발밑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느낌에 전전긍긍하다 그는 기어이 일어나 얼굴을 움켜쥐고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숨을 내쉬던 덱스터는 후다닥 부엌으로 가서 지저분한 그릇들을 개수통에 와락 집어던졌다. 갑자기 뭔가를 마셔야겠다. 계속 마셔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와락 일어났다. 그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왜 그래요?”

매디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갑자기 조금 무서워져서.”

“정말 혼자 있으려는 거예요? 그래도 되겠어요?”

“이젠 괜찮아졌어.” (P649-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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