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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새커리의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영화 <배리 린든Barry Lyndon> 1975년

by 노용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가장 과소평가 받은 작품인 「배리 린든」은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1844년 피카레스크 소설 <배리 린든 본인이 이야기하는 회고록>을 각색한 것으로 「시계태엽 오렌지」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미래를 표현한 방식으로 과거를 표현했다. 완벽한 세트와 의상과 촬영으로 지극히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상승과 몰락을 담아낸 것이다.


촬영은 희미한 빛이 완벽하게 비치는 ‘마법의 시간’에 거의 다 이루어졌으며, 실내 장면에는 촛불 조명을 사용하여 매혹적인 화면을 연출했다. 그 탁월한 이미지는 겉으로는 얼어붙은 듯 보이는 인물들의 내적인 혼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큐브릭은 지나치게 감정표현을 억제한다는 비난을 받지만 이 영화에서는 배리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장면이나 그의 아내가 고통 속에서 광기로 빠져드는 장면, 그의 의붓아들이 결투에서 제자리에 나가 서기도 전에 구토를 하는 장면 등에서 그런 자제가 오히려 더 감동적인 효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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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시대로부터 이 세상에서 벌어진 나쁜 사건 가운데 여자가 연루되지 않은 일은 거의 없다. 우리 집안이 시작된 이래로(모두가 알다시피 배리 가문이 얼마나 저명하고 고귀하고 유서 깊은 집안인지, 그 뿌리가 거의 아담의 시대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여자들은 우리 일족의 운명에서도 막대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길림이나 도지에의 문장학(紋章學) 책에 실리지 못한 가문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아일랜드 왕국 배리오그 지방의 배리 가문에 대해 유럽의 신사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천하의 사나이로서, 내 구두나 닦는 하인보다 나을 것이 없는 가문 출신 주제에 높은 혈통을 타고난 척 젠체하는 작자들의 주장을 진심으로 경멸하도록 배워오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이 아일랜드 왕의 후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 동네 수많은 촌뜨기의 떠벌림이나 고작 돼지 한 마리 먹일 정도의 영지가 공국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행태를 전적으로 비웃는 사람이긴 하지만, 진실에 따라 나 역시 우리 가문이 이 섬나라에서, 아니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일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은 전쟁으로, 반역으로, 허송세월로, 조상들의 사치로, 한물간 신앙과 군주를 옹호하다가 우리 손에서 다 빠져나가서 허룩해졌지만, 예전에 아일랜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번영을 누리던 시절에는 우리 가문의 재산도 여러 주에 펼쳐져 있어서 정말 굉장했다. 귀족의 표식을 함부로 달고 다니며 흔해빠진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젠체하는 어리석은 작자들이 그렇게 많지만 않았어도, 내 문장에 새겨진 그 아일랜드 왕관은 분명 내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한 여자 때문에 초래된 실패만 아니었어도 지금 내가 그 왕관을 쓰고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P7-8)

살인마 악당인 올리버 크롬웰에 맞서는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있었다면 우리는 잉글랜드의 손아귀에서 영원히 벗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강탈자에게 저항하는 현장에는 배리 가문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나의 선조 시몬 드 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군주 리처드 2세를 따라 아일랜드에 침입해 전투 중에 먼스터 왕의 아들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는 그 딸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크롬웰의 시대는 배리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이 살인마 양조업자에 대항해 함성 소리를 드높이기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땅의 왕자가 아니었다. 불행한 우리 일족은 그보다 이미 한 세기전에 가장 수치스러운 반역죄로 재산을 몽땅 다 잃은 상황이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종종 들어서, 그리고 우리가 살던 배리빌 집 ‘노란색 응접실’에 걸려 있던, 털실로 짠 우리 집 족보에 새겨져 있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잉들랜드의 린든 가문이 아일랜뜨에 소유하고 있는 그 영지가 예전에는 바로 우리 일족의 재산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배리오그의 로리 배리가 그 땅은 물론 먼스터 지방의 절반 정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 내내 배리 가문은 오마호니 가문과 앙숙이었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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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를 꼽아보면 우선, 모두가 다 아는 대로 나는 지독한 가난뱅이었다. 그런데도 자존심은 또 지독히 강했는데 그건 순전히 다 선량한 우리 어머니 잘못이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 가문, 우리 집의 호화로운 마차, 정원, 식품 저장고, 가축 따위를 자랑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내 진짜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아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랬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상대가 소년들이어서 녀석들이 감히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면, 나는 녀석들을 두들겨 팼고, 사생결단으로 덤벼들었다. 녀석들 중 한두 놈을 거의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패다가 집으로 끌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랬느냐고 물으면 나는 “가문 때문에 싸웠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그 성녀 같은 어머니도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 잘했다. 레디, 피를 흘려서라도 가문의 이름은 지켜야지.” 어머니가 나였더라도 어머니 자신부터가 똑같이 목청을 높여서, 아니, 이와 손톱을 동원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덤볐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나한테 이런저런 이유로 맞아보지 않은 녀석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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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대가 누구였든 개의치 말라, 그래봐야 그 결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니, 대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참으로 현명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우연이다. 십중팔구 그 상대는 보잘것없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사랑이 이루어졌다면 그 만족감이 가엾은 남자를 평생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항상 적절한 때가 되어야만 남자의 심장에서 연애 감정이 본능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남자란 본래 새가 노래하고 장미꽃이 피는 때가 오면 그걸 견디지 못해 사랑에 빠지는 존재인 것 같다. (P39-40)

퀸 대위와 노라가 함께 통로를 거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악당 놈이 그 혐오스러운 조끼 위에 살포시 얹어져 있는 그녀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애무하고 있었다.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는 킬웽건 연대의 페이건 대위가 노라의 여동생 미시아에게 열심히 구애를 하고 있었다.

나는 원래 사람이든 유령이든 무서운 것이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자 두 무릎이 어찌나 격렬하게 떨리던지, 병이 다시 확 도지는 것 같아서 기대서 있던 나무 밑 풀밭에 실신하듯 주저앉았고, 한 1,2분 동안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산책 중인 커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칼집에 넣어 늘 몸에 차고 다니던 은제 손잡이가 달린 작은 검을 풀었다. 그 양아치 연놈의 몸뚱이를 칼로 찌르고 한 쌍의 비둘기 같은 그것들한테 침을 뱉어줄 작정이었다. 그 순간 분노 말고 또 다른 감정들이 나를 꿰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지독히 공허한 실망감이었는지, 아니면 미친 듯 치밀어 오르는 절망감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발밑에서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는지, 그 감정의 정확한 정체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확신하건대 독자들도 여자한테 차인 적이 여러 번 있을 테니, 처음으로 실연의 충격에 빠진 그 순간 기분이 어땠는지 각자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보시길.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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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슴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검을 움켜잡았고, 그 순간 노라는 두려움의 고통에 그를 향해 몸을 내던지며 이렇게 외쳤다. “에우제니오! 퀸 대위님! 제발 아이를 살려주세요. 고작해야 젓비린내 나는 어린애일 뿐이잖아요!”

“그렇다면 버릇없는 짓을 했으니 매를 맞아야겠군요. 하지만 브래디 양. 난 저 녀석한테 손대지 않을 거니까 겁먹을 거 없소.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저 아이는 나로부터 안전할 거요.” 대위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숙여 아까 내가 던진 리본 뭉치를 노라의 발치에서 집어 들더니 그것을 노라에게 건네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여인이 한 남자한테 정표를 준다면 말이오. 그때는 다른 남자가 물러나야 하는 거요.”

“맙소사, 퀸! 저 아인 아직 어린애라니까요.” 노라가 외쳤다.

“난 사나이야. 그리고 그걸 입증해 보이겠어.” 내가 으르렁거렸다.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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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퀸에게 내던졌던 리본이 뭉쳐진채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일랜드 땅에 나보다 더 비참한 사내는 아무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 세상은 그 얼마나 변화무쌍한 곳인가! 우리의 그 대단한 슬픔이 겉에서는 어때 보였는지,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하찮은 감정인지, 또 어떤 식으로 우리가 그 슬픔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러고는 그 슬픔을 얼마나 순식간에 잊는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대관절 무슨 연유로 ‘시간’은 결국 우리에게 약이 되어주는 것일까? 온갖 모험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도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누군가를 흠모하게 되더라도 매번 그 대상을 재깍재깍 깨끗이 잊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더라면 나 역시 그녀를 영원히 사랑했을 텐데. (P68)


나는 나의 미래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나처럼 인성, 자질, 용기를 타고난 사람이라면 어디에서나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주머니에는 20기니의 금화가 있었고, (내 계산이 틀리기는 했지만) 그 돈은 계산상 적어도 넉 달은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는데, 넉 달이면 재산을 벌어들이는 데 필요한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타고 길을 가면서 혼자 콧노래를 부르거나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길을 따라가면서 만는 아가씨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멋진 신사분을 보내주시다니, 주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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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그 유명 인사들과 더없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마치 공작만큼이나 부유한 것처럼 내 영지와 재산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동안 어머니한테서 들어온 온갖 귀족들 이야기도 주워섬겼는데 심지어 그 가운데 몇몇 이야기는 내가 꾸며낸 것이었다. 내 말이 횡설수설 늘어놓은 허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그때쯤에는 그 집 주인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러나 젊음이란 본디 귀가 몹시 얇은 법이다. 얼마 안 가 나는 지금껏 내가 피츠시먼스 대위와 그 부인처럼 알아두면 좋을 사람들과 교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모험이 시작된 첫 순간부터 이렇게 저명한 부부를 알게 된 나의 엄청난 행운을 진심으로 자축하며 침실로 갔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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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라뇨? 나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고귀한 신사란 말이오.”

“이 애송이가. 사기꾼, 모리배, 협잡꾼 주제에!” 대위가 소리쳤다.

“그 말 다시 한번 해보시지. 그럼 단칼에 몸뚱이를 베어줄 테니까.” 내가 대꾸했다.

“쯧쯧쯧. 나도 자네만큼 펜싱을 잘한다는 걸 아셔야지. 레드먼드 배리 씨. 저런! 안색이 변하시는군. 왜, 큰 비밀이라도 탄로, 난 모양이지? 아무 죄 없는 가정의 한복판에 마치 독사처럼 참 잘도 숨어드셨군. 게다가 내 친구인 레드먼드 성의 레드먼드 가문 상속자라고 사칭까지 하고 말이야. 이런 놈을 내가 이 도시의 귀족과 젠트리들에게 소개하다니.” (대위의 억양은 억셌고, 무엇보다도 말이 너무 장황했다.) “내가 네 놈을 내 단골 가게에 데려갔고, 그 친구들이 네놈한테 외상으로 물건을 줬지. 그런데 내가 뭘 알아냈는지 알아? 네놈이 그 장사꾼들 상점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이미 전당포에 저당 잡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말씀이야.”

“그자들한테는 내 어음을 끊어줬소, 선생.” 나는 위엄 있는 태도로 말했다.

“어떤 이름으로요? 이런 딱한 젊은이를 봤나, 대체 어떤 이름으로요?” 피츠시먼스 부인이 소리쳤다. 정말로 그제야 내가 모든 서류에 레드먼드 배리가 아닌 배리 레드먼드라는 이름으로 서명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아예 다른 이름을 쓰는 것은 어머니도 반대하시지 않았던가? (P110)


리사 전투에 대한 소문이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일랜드의 우리 동네에까지 돌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 사건을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의명분을 지킨 승리로 여긴 우리는 횃불을 밝히고 모닥불을 피웠으며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심지어 해마다 프로이센 왕의 생일까지 기렸다. 그날이 되면 우리 외삼촌은 건수가 있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와 함께 입대한 신분이 낮은 동료들은 물론 대부분 구교도였지만 (영국 군대는 실패를 모르는 우리 아일랜드 출신의 이런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프리드리히와 함께 프로테스탄티즘을 표방한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구교도 부대는 물론, 스웨덴과 작센 왕국의 신교도와도 모조리 맞서고 있었다. 영국이 외인부대를 고용한 것은 원래 구교도들과 싸우기 위해서였고, 어떤 형태의 싸움이든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겠다고 으르렁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P1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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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리드리히 2세를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부름으로써 그에게, 그리고 그의 철학과 자유분방함과 천재적인 용병술에 존경심을 표하지만, 그의 군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다시 말해 역사의 위대한 한 장면을 장식한 그 풍경 뒤편에 서 있던 나는, 그 장면을 보면 오직 공포만을 느낄 뿐이다. 범죄, 빈곤, 굴종 등이 합쳐져서 영광을 빚어내는 항목들이 인간의 삶 속에 어디 한두 가지던가!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민덴 전투가 끝나고 3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을, 우리 몇 명이 몰려 들어갔던 어떤 농가를, 바들바들 떨면서 우리에게 포도주까지 대접하던 농부의 아낙과 딸들을, 우리가 모조리 마셔버린 그 술을, 그리고 얼마 안 가 화염 속에 휩싸인 그 집을, 그리고 나중에 처자식과 집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와 그 상것이 느꼈을 비통함을!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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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호자 페이건 대위가 죽은 뒤로 내가 훈련에서나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나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고백부터 해야겠다. 거친 병사는 절대로 자신이 속한 연대의 장교들한테 총애를 받을 수 없다. 잉글랜드인이 종종 그러듯, 장교들은 아일랜드인들을 경멸했고 상스럽게 막 지껄이는 아일랜드인의 태도와 억양을 조롱했다. 나는 일찍이 장교 두어 명한테 무례하게 군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도 처벌을 받지 않은 까닭은 오로지 페이건의 중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교들 중에서도 유난히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페이건의 후임 로손은 그런 이유로 민덴 전투 이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자기 중대 하사관 자리에 다른 병사를 앉혔다. 그런 부당한 처사 때문에 군 복무는 내게 점점 더 괴로운 일이 되어갔다. 나는 상관이 내게 반감을 품는 이유를 알아내 극복하고 바람직한 행동으로 호감을 사려고 애쓰는 대신, 그저 어떻게 하면 요령껏 내 위치를 더욱 편하게 만들 수 있을까만 궁리했고 내 권한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단 한 가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은 이쪽저쪽에서 끊임없이 군세를 뜯기는 사람들과 적군이 눈앞에 있는 외국이었기 때문에, 평화 시라면 어림도 없었을 변칙들이 부대 안에서 수도 없이 용인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하사관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오락에 끼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안타깝지만 음주와 도박은 그 당시 우리의 주된 소일거리였다. 나는 너무나 손쉽게 그들의 방식에 빠져들었고 고작 열일곱 살의 어린 사내였음에도 그들이 저지르는 대담한 악행은 모조리 내가 주관했다. 단언컨대 그들 중에는 온갖 도락이라는 과학 분야에 한 획을 그은 자가 여럿 있었는데도 그랬다. 만약 그 부대에 더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는 헌병대 사령관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일어난 어떤 사건 덕분에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나는 영국 군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P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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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전투에서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 생각이지만, 인류 전체에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전쟁의 광기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세. 실은 아말리아랑 결혼하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어. 무릇 사내란 인간 존재의 전제 조건이자 인간 교육의 임무를 담당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한 사나이가 되는 법 아니겠는가. 아말리아는 틀림없이 날 기다려줄 걸세. 그녀는 나의 소중한 후견인의 부인, 그러니까 나센브룸 대학 교목 사모님한테 요리를 해주고 있어서 가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거든. 나는 남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적은 책 한두 권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 한 권을 늘 마음속에 품고 다닌다네. 학업을 더 이어갈 수 있는 날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내 존재가 끝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불평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다른 사람한테 모욕을 준 적도, 세속적인 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 것 같아. 혹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디에서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되겠지. 이미 말했다시피 내가 배우기를 갈망했던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면, 어차피 그 무엇도 배울 수 없는 처지가 될 텐데, 한낱 인간의 영혼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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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슈발리에드 발리바리는 다름 아닌 바로 밸리배리의 배리 씨, 로마 가톨릭이라는 미신에 고집스럽게 매달린 결과 자신의 영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아버지의 형이라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마차 보관소에 들러 그의 마차를 살펴보았다. 그곳에 배리 가문의 문장이 있었을까? 그랬다. 그곳에, 가리비 모양 네 개가 그려져 있고 붉은색 사선을 띠처럼 두른 은색 문장, 조상 대대로 우리 집에 걸려 있던 그 문장이 있었다. 멋지게 도금된 잘 빠진 그 마차 안에 놓인 내 모자만 한 크기의 방패에 바로 그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화관 하나, 문장을 떠받들고 있는 여덟 명 남짓의 큐피드와 ‘풍요의 뿔’, 꽃바구니 따위가, 조금 기묘해 보이기는 해도 그 시절 유행하던 방식대로 그려져 있었다. 백부님이 틀림없어! 계단을 오르는 내내 현기증이 났다. 백부님 앞에 하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다니!

“자네가 무슈 드 시바크가 추천한 그 젊은이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대위님이 내게 엄선해준 그 신사 이름으로 된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P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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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화려한 신사의 옷차림을 완성해주는 모자였다. 키는 나랑 비슷해서 184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나랑 아주 닮았지만 굉장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외모였다. 그러나 한쪽 눈은 검은색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얼굴에는 흰색과 붉은색 화장품이 엷게 발라져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그것이 특별한 화장 방식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입술 위에는 한 쌍의 콧수염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밑에는 수염에 가려진 입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상당히 불쾌한 인상을 주는 입이었다. 턱수염을 밀었을 때 보니 윗니가 보기 흉할 정도로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백부님의 얼굴에는 유령처럼 굳은 미소가 장착되어 있었는데 그다지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매우 경솔한 짓이었지만, 백부님의 화려한 외모, 고상한 태도를 보고 나자, 그분을 계속 속이는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부님이, “어, 그러니까 자네는 헝가리인이란 말이지, 알겠네!”라고 말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각하, 저는 아일랜드인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밸리배리의 레드먼드 배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6년 동안이나 친척이나 피붙이라고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기에 내 심장이 누군가를 못 견디게 그리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P205)


그는 내게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진 채무자가 되고 말았다. 그 액수를 여기에서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한마디로 젊은이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될 만큼 큰 액수였다.

흠, 그런데 그런 게임을 왜 한 것이냐고? 딱 봐도 다른 데서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그저 빈털터리에 불과한 작자랑 은밀히 게임을 하느라 며칠을 허비한 것이냐고? 까놓고 말해서 그 이유는 이것이었다. 내가 무슈 드 마니한테서 따고 싶었던 것은 돈이 아니라 약혼녀 아이다 여백작이었던 것이다. 내게는 사랑이란 문제에 그 어떤 책략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모두들 사랑을 논하겠는가? 나는 그 아가씨의 부유함을 원했다. 그리고 마니만큼 나도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얼굴을 붉히며 일흔 먹은 늙은 영주한테 시집가는 저기 저 열일곱 살 처녀가 자기 남편한테 느끼는 사랑만큼, 나도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결혼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터라 그 문제만큼은 나 역시 세상 관례를 따랐던 것이다.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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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심에 빠져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앞의 내용만 봐도 내가 그때 어떤 도박을 하고 있었는지 명백히 설명이 될 것이다. 일부 엄격한 도덕주의자들은 합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감히 말하는데 사랑이란 문제에 관한 한 이 세상에 정당하지 못한 것은 없다. 특히 나처럼 너무나 가난한 사람은 출세를 향한 수단을 이것저것 까다롭게 가려 고를 처지가 못 된다.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들은 환영 인파에 둘러싸여 웃으며 세상 속 웅장한 계단을 오른다. 그러나 야심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벽을 타든다, 건물 뒤편 계단을 밀면서 낑낑대며 오르든가, 그것도 아니면 집 꼭대기로 이어져 있기만 하다면 아무리 악취가 나고 비좁은 곳이라 해도 정말로 배기관 속을 기어가든가 해야만 한다. 명성을 달성할 가치가 없는 것인 양 치부하고 그것을 얻으려는 분투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스스로를 철학자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야망 없는 게으름뱅이들이다. 나는 그런 자들을 정신이 빈곤한 겁쟁이라고 부른다.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잘 살아야 할까? 명예란 참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획득해야만 한다. (P264)


마니의 죽음은 이틀 뒤 <왕실 관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어요. 관보는 무슈 드 M의 죽음을 이렇게 기술했답니다. 유대인을 살해하려고 시도했던 행동에 극심한 회한을 느낀 나머지 감옥에서 독을 이용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노라고. 그 기사에는 네덜란드 지방의 젊은 귀족이라면 모두 도박이라는 무시무시한 죄악을 피하라는 경고까지 덧붙여져 있었어요. 그 젊은이를 파멸로 몰아넣은 것도, 대공 전하의 신하 가운데 가장 명예롭고 고귀한 백발노인을 돌이킬 수 없는 슬픔에 빠뜨린 것도 모두 도박이라면서요.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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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린도니라가 자네한테는 아무 짓도 안 할테니까. 그녀는 아일랜드 케리주 억양보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억양을 더 좋아하거든. 아내 말이, 여자들 모임에 도저히 들일 수 없을 정도로 자네한테서 마구간 냄새가 심하게 난다고 하더군. 2주 전엔가 일요일에는 인사를 하러 와서 나한테 이런 말도 했다네. ‘이봐요, 찰스 린든 경, 도대체 왜 전하의 대사까지 지낸 신사 양반께서 비천한 아일랜드 훼방꾼이랑 노름판, 술판을 벌여 스스로 위신을 떨어뜨리는 건지 궁금하네요!’ 그렇게 분노에 차서 펄쩍 뛸 필요 없네. 나는 장애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린도니라라네.”

그 말에 몹시 기분이 상한 나는 레이디 린든과 친분을 쌓기로 결심했다. 린든 가문이 부당하게 취한 재산의 원래 소유주인 배리 가문의 후손은 그 어떤 아가씨에게도 자격이 부족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귀부인 마님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계속 그런 식으로 몹시 도도하게 굴 테니까. 더욱이 내 친구인 그 기사 양반은 죽어가고 있었으므로 그의 부인은 곧 세 개 왕국을 통틀어 가장 값비싼 상품이 될 터였다. 그러니 내가 그녀를 얻어내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녀를 얻는 동시에 내 재능과 성향이 바라는 형태의 출세 수단까지 함께 얻어내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기독교권에 살고 있는 그 어떤 린든 가문 사람에게도 혈통과 교육이라는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오만한 여자를 굴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뭐든 내가 일단 마음만 먹으면 사실 그 일은 다 된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백부님과 그 문제를 상의했고, 우리는 린든 성의 그 위풍당당한 여인에게 접근할 방법을 신속히 강구해냈다. (P331-332)


부의 소유가 인간을 얼마나 후덕하게 만드는지, 아니 부의 소유가 인간의 미덕에 얼마나 훌륭한 광택제나 윤활유가 되어주는지, 혹은 가난이라는 냉혹한 회색 대기 속에 서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할 방식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광태와 색채를 낳는지 생각해보면 놀랍다. 단언하는데, 나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최상류층 멋쟁이 신사가 되었다. 팰 멜가의 커피하우스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가장 잘나가는 클럽에서까지 상당히 큰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나의 스타일, 마차, 우아한 접대 태도 등이 모든 사람의 입에 회자되었고 모든 조간신문 기사에 오르내렸다. 그 결과 레이디 린든의 친척들 가운데 처지가 좀더 옹색한 자들, 그리고 그동안 팁토프 노인의 참을 수 없는 거드름에 마음이 상했던 자들이 우리 가문의 무도회와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내 친척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런던과 아일랜드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신 많은 사촌, 모두 나와 가까운 사이라고 주장하는 사촌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물론 (내가 별다른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내 고국의 토박이들도 있어서 나는 템플바 주변에서 거들먹대는 허름한 사내 서너 명의 방문을 받기도 했는데, 색 바랜 레이스를 매고 티퍼레리 사투리를 쓰는 그들은 런던의 술집으로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휴양지에서 알게 된 도박판 투기꾼 몇 명도 나를 찾아왔고, 나는 곧바로 그들로 하여금 제 분수를 알게 만들어줬다.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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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칫덩이 아내는 재앙이며, 이 말은 진실이다. 골칫덩이 아내를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절망스러운 일인지, 한 해 한 해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아내가 얼마나 점점 더 짜증스러워지는지, 그런 아내를 감당해야겠다는 용기가 얼마나 점점 더 약해지는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결혼 첫해에는 가볍고 사소해 보이던 문제들도 10년이 지나면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전에 등장하는 고전주의 시대 사내 한 명이 송아지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해 매일 그 일을 반복했는데, 그 동물이 자라 커다란 황소가 된 뒤에도 사내는 그동안 함께 튼튼해졌기 때문에 어깨에 얹힌 동물을 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길. 미혼의 젊은 신사들이여, 아내라는 동물은 등에 지면 스미스필드에서 가장 우람한 암송아지보다도 훨씬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독자들 중 단 한 명의 결혼만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나는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을 힘들여 쓴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쨍쨍거리며 바가지를 긁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어떻게든 그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겁쟁이에 툭하면 넋두리를 늘어놓는 우울한 여자였는데 나는 그 편이 훨씬 더 끔찍했다. 아무리 그녀를 기쁘게 해줄 만한 일을 해도 나는 도저히 그녀를 행복하게, 혹은 기분 좋게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면 곧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아주 자연스러운 내 방식대로 불쾌감만 주는 가정을 떠나서 즐거움과 벗을 찾아 해외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그 많은 결점 위에 야비하고 가증스러운 질투까지 갖추게 되었다. (P458-459)


그즈음 나는 매우 가난했고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무명이긴 해도 얼굴과 발목이 매우 아름다웠던 프랑스인 오페라 배우 겸 무용수 로즈몽이 다이아몬드와 마차와 가구 청구서로 나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도박판에서도 불운이 이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천하의 수치스러운 희생양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대부업자에게 바침으로써, (우아함이라고는 없는 앙큼한 로즈몽이 감언이설로 나를 꾀어 빼내오게 만든) 레이디 린든의 다이아몬드의 일부를 저당 잡힘으로써,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천 가지나 세움으로써 간신히 그 손실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관계 속에 아직 명예가 남아 있을 때 로즈몽의 부름으로부터 영영 뒷걸음치는 모습으로 발견되지 않았던가? 배리 린든의 베팅만 했을 뿐 지불하지도 않은 판돈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P490-491)


대중은 이런 이야기에 교훈이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한다고 앞으로도 계속 주장할 테니, 이 자리를 빌려 신사 배리 린든의 이야기에서도 도덕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정중하게 밝혀드리는 바이다. 그 교훈은 세속적 성공이 미덕의 중요성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피핀 왕은 착한 소년이라서 금 마차를 타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덕은 보상되기 마련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면, 우리는 미덕과 금 마차에 똑같이 엄청나게 비싼 액면가를 매기게 된다. 참으로 터무니없고 비도덕적인 결론이다. 결국 금 마차를 굉장히 가치 있는 보상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우리는 금 마차를 지나치게 존중하게 되고 매일 무의식중에 금 마차를 향해 수천 가지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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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의 교활한 계략은 대단히 골치 아픈 적수가 될 수 있다. 내 생각에, 설사 마키아벨리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여자의 계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 앞에서 서술한, 그녀의 기질적 기만과 나에 대한 증오심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 증거는 충분히 드러났지만(나를 배신하려던 아내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나의 선견지명과 아내가 직접 쓴 손 편지였다), 내가 온갖 예방조치를 취하고 내 편인 우리 어머니가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도, 실제로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든 나를 속이고 있었다. 내가 만약 먼 곳에서까지 내게 위험의 낌새를 알려온 그 선량한 여인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아내가 나를 위해 마련해둔 그 덫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것은 정말로 간단하지만 오히려 성공 확률은 그만큼 더 높을 수밖에 없게 쳐져 있던 덫이었다.

레이디 린든과 나의 관계는 독특한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나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교대로 나타나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끔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내가 그녀와 사이가 좋을 때면, 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더 이상 내 비위를 맞추려고 들지 않고 모순된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는 터무니없이 격렬하게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다가, 다음 순간에는 곧바로 나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 보이곤 했던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편은 유약하고 만만한 남편이 아니다. 내 생각에, 여자들은 성격이 약간 폭력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엄격하게 행사하는 남편을 더 나쁜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일찍이 내 아내를 나에 대한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은 덕분에 미소 한 번만으로 그녀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손짓 한 번에 그녀는 개처럼 꼬리를 치며 아양을 떨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 학교에 다닌 날은 며칠 되지도 않지만, 학교 선생님의 농담에 큰 소리로 웃어대던 얍삽하고 비겁한 녀석들이 떠올랐다. 그건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사관이 사병을 괴롭히는 행위는 언제든 장본인인 신병만 빼고 모두를 웃게 만드는 농담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명하고 단호한 남편은 이런 훈육 원칙에 맞게 아내를 길들인다. (P53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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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의라니! 인간의 삶이 그 정도로 정의를 잘 보여준단 말인가? 금 마차를 타는 사람은 항상 옳고, 구빈원(救貧院)에 일을 다니는 사람은 항상 그르단 말인가? 유능한 사람보다 협잡꾼이 환영받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세상은 언제나 가치 있는 것만 보상할뿐, 위선적인 행동을 숭배하는 짓도, 평범한 인간을 탁월한 존재로 추앙하는 짓도 절대 저지르지 않는단 말인가? 군중이 설교단에서 들려오는 당나귀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도, 바보가 쓴 책의 10쇄 판을 사 읽는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 반대의 경우는 가끔씩 일어난다. 바보와 현자, 악인과 선인이 차례로 골고루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정직이 ‘최고의 전략이냐 아니냐’는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진리라면, 그 진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기술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거나 기쁨을 느끼려는 사람과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삶을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현실 그대로 그리려고 애쓸 의무가 분명히 있다. 모형이 인간 본성의 묘사인 양 대중을 속여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발랄하고 유쾌한 참형, 장미유를 뿌린 살인마, 품위 있는 전세 마차 마부, 로돌프스 왕자 등등,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유형의 삶을 인간의 대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베끼는 것이 의무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러려는 노력은 당연히 해보아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물론 흉측한 것 역시 충실하게 묘사해야만, 그 두 가지가 최대한 자연 상태와 비슷한 비율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미인을 바라보는 것과 곱사등이를 바라보는 것은 같은 것이다. 보는 것이 같다면 기술하는 것 역시 같은 것이다. 물론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본래의 자연보다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해낼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옛날 자연에서 새로운 세계를 끌어냈던 몰리에르와 필딩의 문체가 다시 유행하게 될지, 그리하여 그 문체가 이제 끔찍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언제나 고상함만 추구하는 난감한 문체를 대신해 선풍적 인기를 누리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러면 가짜 인물을 내세우는 가짜 도덕도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가짜 인물이나 가짜 도덕이나 둘 다 역겨운 사기인 것은 매한가지다. 나는 내 나름의 관점에서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호가스의 그림 <결혼식 풍속>이 웨스트의 거대한 영웅 그림이나 안젤리카 카우프만의 더없이 우아한 풍자화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훨씬 더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믿는다! (P55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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