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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의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영화 <밀레니엄: 제2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2012년

by 노용헌

그는 차창을 내린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동차로 뛰어가 열린 창틈으로 휘발유를 붓고 성냥을 긋는다.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다. 순식간에 화염이 일어난다. 그는 괴로움에 몸을 뒤틀고, 그녀의 귀에는 공포와 고통에 찬 그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살 타는 냄새, 그리고 자동차 내부의 플라스틱과 시트가 타들어가며 한층 더 매캐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찌른다.

그러다 잠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에는 완전히 깨어 있었다. 입구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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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나다는 과거 전 세계에 무수히 흩어져 있던 영국의 소규모 식민지 중 하나였다. 1795년에는 정치적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쥘리앵 프동이라는 해방된 흑인 노예가 프랑스대혁명을 전범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영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수많은 반군을 도륙하거나 총살하고, 교수형에 처하거나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식민 정권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해 일부 가난한 백인들까지 신분과 인종을 뛰어넘어 쥘리앵 프동의 반군에 합류했었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그는 잡히지 않았다. 그랜드에탕 고지대로 도망가 그 지역의 로빈 후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난 1979년, 변호사 모리스 비숍이 다시 혁명을 일으킨다. 관광안내서는 그의 혁명이 쿠바와 니카라과의 공산 독재 체제를 지향했다고 설명하지만, 리스베트는 지역 교수이자 도서관 사서이자 침례교 전도사이기도 한 필립 캠벨을 통해 전혀 다른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섬에 도착한 처음 며칠간 교수의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그에 따르면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던 지도자 모리스 비숍은, UFO에 심취해 얼마 되지도 않는 국가재정을 비행접시 사냥에 쏟아부은 미친 독재자를 쫓아낸 인물이다. 그는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했고, 이 나라 최초로 남녀평등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1983년 암살당했다. (P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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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크리스마스 연휴에 미카엘은 산드함에 있는 자신의 방갈로로 리스베트를 초대했다. 둘은 오랜 시간 해변을 산책하며 그간 자신들이 겪었던 극적인 사건들과 그 여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카엘 스스로도 일생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명예훼손죄로 감옥에서 몇 달을 보냈으며, 발행인 자리를 내놓고 다리 사이에 꼬리를 감춘 개처럼 도망치듯 <밀레니엄>을 빠져나왔다. 그때만 해도 그의 기자 경력은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모든 게 극적으로 변했다. 기업가 헨리크 방에르에게 자서전을 집필해달라는 청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말도 안 되게 큰 보수에 끌려 시작한 일이 어느새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 추격전에서 리스베트를 만나게 되었다. 미카엘은 살인마의 올가미가 귀밑에 남긴 상흔을 어루만졌다. 리스베트는 그를 도와 살인범을 추적한 것만이 아니라 그의 목숨까지 구해준 여자였다. (P25)


다른 수학자들은 즉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실제 수들을 하나하나 대입해보는 방법으로 페르마의 주장을 반박할 값을 찾을 수 없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우주가 멸망하는 날까지 계속한다 해도 존재하는 모든 수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하고, 미처 실험해보지 못한 수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무효화하지 않을 거라고 확언할 수도 없었다. 수학에서 하나의 주장은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하며 일반적이고도 과학적으로 올바른 형식으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수학자는 강단에 올라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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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무능해 남의 손아귀에 맡겨진 난잡한 성인 여자....... 그렇다.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이상적인 장난감이었다.

닐스 비우르만이 이처럼 고객을 학대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과 직업적으로 관계를 맺은 누군가를 성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특별한 성적 욕구를 배출하고 싶을 때는 주로 성매매를 했다. 은밀하고도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그 일에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이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들의 행위는 연극에 불과했다. 그가 돈을 지불하면 여자들은 신음하고 비명을 질러대며 애써 연기를 했지만 그 모든 결과는 거장의 모사화만큼이나 참담할 뿐이었다.

결혼 후에는 아내를 지배하려고 시도해봤지만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녀 역시 협조해줬지만 연극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그에게 리스베트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여인인 셈이었다. 그녀에게는 방어수단이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완벽하게 취약한 존재이자 진정한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기회가 도둑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그를 짓뭉개버렸다.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힘과 결의로 반격해왔다. 도리어 그를 능멸하고 고문했다. 한마디로 그를 부숴버렸다. (P51-52)


문제의 핵심은 단 하나, 바로 그 걸림돌이었다.

리스베트가 가지고 있는 영상. 그녀를 강간하는 자신의 모습을 몰래 촬영한 그 구십 분짜리 영상 말이다. 그는 이미 그걸 보았다. 아무리 봐도 좋게 해석해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 테이프가 검사의 손에 들어간다면, 아니 더 고약하게는 언론의 탐욕스러운 발톱 안에 들어간다면 그의 삶과 경력을 비롯해 모든 자유가 거기서 끝장이었다. 변호사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특수 강간, 의존적 개인에 대한 약취, 폭행과 특수 상해, 이 모든 죄목을 합치면 징역 6년까지 구형될 수 있었다. 독한 검사를 만나면 더 골치 아플 터였다. 영상을 본다면 살인미수를 적용할 수도 있는 일이므로.

닐스는 그녀를 강간하는 와중에 얼굴을 베개로 눌러 거의 질식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그때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게 그렇게 후회스러웠다. 지금 이런 골치 아픈 상황에 비하면 그녀의 시체를 치우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들은 이해 못할 거야. 그년이 시종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 그년이 일부러 날 도발한 거야. 어린애 같은 순진한 눈으로, 열두 살 계집애 같은 몸으로 날 유혹했어. 그년이 강간하게 만든 거라고. 모든 건 그년 잘못이야! 하지만 그들은 전혀 이해 못하겠지. 이 모든 게 그년이 꾸민 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든 게 그년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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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베트는 그들이 리처드 포브스와 제럴딘 포브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날 리처드 혼자서 왔다갔다한 그 장소에 서 있었다.

한번 더 섬광이 번쩍했을 때 그가 저항하는 아내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모든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로 맞춰졌다. 아내에 대한 경제적 의존, 재단공금 유용 혐의, 불안스러운 방황, 그리고 터틀백 레스토랑에서 꼼짝 않고 골똘히 고민하던 모습.....

아내를 죽일 작정이었어. 4천만 달러가 걸려 있으니까. 허리케인이 모든 걸 덮어줄 테니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겠군.

리스베트는 호텔 입구 안으로 조지를 밀어넣은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간 경비원이 쓰던 삐걱거리는 나무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호텔 안으로 들여놓는 걸 깜빡한 게 분명했다. 우선 의자를 들어 있는 힘을 다해 벽에 대고 후려쳤다. 산산조각이 난 의자 다리 하나를 집어들어 무장한 그녀는 경악하며 소리치는 소년을 뒤로하고 해변으로 내달렸다. (P82)


“특집호 주제가 뭔데?” 미카엘이 물었다.

“지난주에 여기 계신 다그 씨가 주제를 하나 가지고 날 찾아왔어요. 그래서 오늘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한 거고요. 지금부턴 다그 씨가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그녀가 다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여성인신매매입니다.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죠. 제가 주로 다루는 사건은 발트 연안국과 동유럽 국가 출신 여성들에 관한 겁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주제로 책을 한 권 쓰고 있고, 그래서 에리카 씨를 찾게 됐습니다. <밀레니엄>은 잡지사이면서 출판사이기도 하니까요.”

이 말에 회의 참석자들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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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논문과 다그가 쓰고 있는 책은 분명히 구별해야 해요.” 미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다그의 책은 여성인신매매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 이를테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데 목적이 있죠. 반면 내 논문은 통계 수치, 현장 연구, 관련법,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 및 법정의 행태 분석 등으로 이뤄져 있어요.”

“여기서 희생자들은 물론 소녀들을 말하는 거겠죠?”

“그래요.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열다섯에서 스무 살 사이의 어린 소녀들이죠. 대부분 문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다양한 경로로 성폭행에 희생된 경우가 적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우연히 스웨덴으로 오는 경우는 드물죠. 그들 뒤에서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 작자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섹스 장사꾼들이지.”

“내 논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바로 남성과 여성의 차별성이에요. 사실 이 논문만큼 성역할을 명확하게 규정지은 경우도 드물 거예요.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여자들은 희생자, 남자들은 범죄자니까요. 물론 성매매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죠. 이런 형태의 범죄에서는 남녀의 차별화된 역할이 범죄의 필수 여건을 구성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이처럼 사회가 묵인해주면서 종지부를 찍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범죄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스웨덴은 여성인신매매와 성매매에 대해 아주 엄격한 법제를 갖추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에리카가 말했다.

“농담 마세요. 매년 소녀들 수백 명이 --아직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지만-- 성판매 여성으로, 다시 말해 체계적인 강간산업의 희생양이 되기 위해 스웨덴으로 운반되고 있어요. 여성인신매매 관련법이 발효되기는 했지만 사법부가 실제로 처벌한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첫 번째 케이스가 2003년에 있었죠. 기소된 사람은 늙은 트랜스젠더 포주였는데 물론 무혐의 처리됐어요.”

“잠깐만요. 그 여자는 유죄판결 받은 걸로 아는데요?”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다는 죄목으로요. 하지만 여성인신매매 혐의는 풀렸죠. 증인으로 나서야 할 희생자들이 발트해에 있는 고국으로 돌아갔거든요. 당국이 그들을 법정에 소환하려고 애썼고 인터폴까지 가담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간 그녀들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어요. 몇 개월을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대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P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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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에서는 ‘이사회’의 모범을 보고 있는 기분이에요.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문제들만 논의하는데다 전부 투명하게 처리해 수긍할 수 있어요. 물론 기업은 이익을 남겨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니까요. 하지만 <밀레니엄>에는 다른 차원의 목적도 있잖아요. 바로 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말이에요.”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에리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제게는 약간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정당도 아니고 노조도 아니죠.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게 없고요. 덕분에 사회의 결함들을 겨냥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 없이 엿을 먹일 수도 있죠. 때로는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해요. 겉으로는 냉소주의자나 허무주의자인 척하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확고한 윤리가 있어서 오직 그것만을 따라 잡지를 이끌어가고 있고, 나 역시 그 특별한 윤리정신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죠.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밀레니엄>에는 어떤 영혼이 있어요. 결론적으로 이곳은 내가 긍지를 느끼는 유일한 이사회예요.” (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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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신 지는 얼마나 됐어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뇌출혈을 겪은 후라 말도 어눌하고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이해력만은 온전했다. 그의 레이더는 즉각 리스베트 목소리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해냈다. 여러 해 리스베트를 만나면서 깨달은 건 그녀는 절대 대놓고 거짓말 하지 않지만 전적으로 솔직하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상대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일, 그것이 그녀가 거짓말하는 방식이었다. 새 후견인과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에겐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는 격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동료인 닐스 비우르만에게 연락해 리스베트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무력감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매번 포기하고 말았다. 왜 아직 자신에게 힘이 있을 때 그녀의 후견 체제를 끝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계속 만나고 싶었던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는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괴상한 소녀를 사랑했다. 한 번도 자식을 가져본 적 없는 그에게 딸 같은 존재였기에 그녀와 계속 접촉할 구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그녀를 찾는 일이 그에겐 너무도 어려웠다. 이렇게 요양원에서 헌 가방처럼 축 늘어져 있는 주제에, 화장실에 가서 바지 지퍼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찾아나선단 말인가. 오히려 자신이 리스베트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여전히 살아남았구나. 하긴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능력 있는 아이였지. (P187-188)


살라라는 이름은 미아가 지난 몇 년간 수집해온 자료에서 네 차례 등장했지만 매번 우연히 언급될 뿐이어서 그저 유령처럼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어떤 소녀들은 마치 매를 때리는 아버지처럼 그를 언급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베일에 싸인 괴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그는 살라를 더 캐보려고 일주일을 할애해 경찰과 기자, 그리고 성매매 사업과 관련해 그가 찾아냈던 정보제공자들을 탐문했다. 그렇게 접촉한 사람 하나가 페르오케 산스트룀 기자였다. 그런데 처음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다 불어버릴 듯하던 그가 막상 구체적인 질문에 들어가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오히려 다그에게 자기를 좀 봐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는 돈을 줄 테니 눈감아달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다그에게는 그런 작자를 동정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엔 당국에 그를 고발할 수도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최대한 정보를 빼낼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페르오케는 섹스 마피아들과 은밀하게 어울려온 썩어빠진 개자식이었지만 살라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자신과 전화 통화를 몇 번 했으니 실존하는 인물일 거라고, 하지만 전화번호는 모른다고 했다. 누가 먼저 연락을 취했는지도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그 순간 다그는 깨달았다. 페르오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부패하고 파렴치한 기자로 당국에 고발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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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주 미세한 변화 하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매달 초 평균 네 시간씩 걸려 월례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정확히 20일에 후견위원회로 발송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3월 중순인데도 보고서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일을 잠시 소홀히 하는 걸까? 무슨 일로 늦어지는 거지? 바쁜 일이 있어서? 아니면 무언가 수상쩍은 일을 벌이는 걸까? 그녀의 이마에 깊은 주름 하나가 잡혔다.

결국은 노트북을 끄고 창가 구석에 앉아 밈미가 준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그녀는 바깥의 어둠을 응시했다. 문득 닐스를 통제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개자식! 하이에나보다 더 교활한 인간!

깊은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보기 싫은 인간들이 줄줄이 나타나는군. 빌어먹을 칼레 블롬크비스트에 이어 살라가 나타나더니 이제는 닐스 개자식까지 깝죽대다니. 게다가 약을 잔뜩 처먹어서 거인 같은 수컷놈하고 너절한 폭주족 패거리는 또 뭐냐고! 그동안 리스베트가 애써 정돈해온 삶이 며칠 사이에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P221)


무슨 일이죠? 사람이 다쳤나요?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 모든 소리가 마치 터널에서 흘러나오는 듯 기이하게만 들렸다.

미카엘은 온몸이 마비된 양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이 쇼크 상태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다그와 미아가 살해당했어.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총을 쏜 거야. 살해범은 아직 저 안에 있을 수 있어...... 아냐, 그럼 내가 봤겠지. 크지도 않은 아파트인데. 몸의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그는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라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처참하게 부서진 미아의 얼굴이 아직도 그의 망막에 맺혀 있었다.

마치 볼륨을 올린 듯 갑자기 청각이 회복됐다. 미카엘은 벌떡 일어나 갈색 가운을 입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여기 좀 서 계시면서 집안으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지금 경찰과 구급차가 오고 있습니다. 전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겠습니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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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셰데 살인 사건 때문에요.”

“벌써 결과가 나왔나요?”

“오늘 아침에 총기를 받아서 아직 분석이 끝나진 않았지만 흥미로운 정보를 하나 찾았습니다.”

“그게 뭡니까?” 얀은 조급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총기는 콜트 45 매그넘입니다. 1981년 미국에서 제조됐고요.”

“그렇군요.”

“거기서 지문을 몇 개 채취했는데, 어쩌면 DNA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정확히 분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요. 탄환도 검사해보니 예상했던 대로 같은 총기에서 나온 겁니다. 범죄 현장에서 계단 같은 곳에 무기를 버리는 경우는 흔하죠. 총알 하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났었는데 다행히 조그만 조각 하나를 건질 수 있었어요. 역시 같은 총기에서 발사됐고요.”

“아마 불법무기겠죠? 일련번호는 확인됐나요?”

“완전히 합법적인 무기였어요. 소유자는 닐스 에리크 비우르만이라는 변호사입니다. 1983년에 구입했고요. 경찰 사격 클럽 회원이더군요. 주소는 오덴플란 근차 우플란스가탄 가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런데 무기에 지문이 여러 개였어요. 적어도 두 사람이요.”

“그렇습니까?”

“그중 하나는 닐스 변호사겠죠. 무기를 도난당했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았다면요. 아직까지 그런 흔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단서를 하나 찾은 셈이군요.”

“그런데 두 번째 지문이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있더군요. 오른손 엄지와 검지요.”

“그게 누구죠?”

“1978년 4월 30일생 여자. 1995년 감라스탄 전철역에서 폭행죄로 체포됐었어요. 그때 채취한 지문이네요.”

“이름도 있습니까?”

“네, 리스베트 살란데르입니다.”

일명 부블라는 눈썹을 꿈틀 치켜세우며 책상 위에 수첩을 펼치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받아적었다. (P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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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전 지금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올 때만 해도 제가 상상한 리스베트는 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데다 정신적 문제까지 있어서 후견을 받는 여자였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건 영 딴판이군요. 꽤 유능한 조사원이면서 프리랜서로 일했고, 돈도 많아 세계 일주를 하며 일 년짜리 휴가를 즐겼다..... 그런데도 후견인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만.”

“그녀에겐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그것 말고도 아주 많습니다.”

“한 가지 여쭤볼게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드라간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지금껏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뻣뻣했죠. 그래요, 사람을 좀 화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요.”

“뻣뻣하다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안 해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죠. 반면 실력 하나는 엄청납니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죠.”

“미쳤다는 건가요?”

“‘미쳤다’는 말의 정의가 뭐죠?”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사람 둘을 죽일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드라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군요. 제가 좀 비관적인 사람이라, 굳이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타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이나 증오 때문에, 혹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진 않는다는 뜻이군요.”

“리스베트는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를 죽였다면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대체 왜 그녀가 이 살인 사건에 얽혀 있다고 혐의를 두는 겁니까?”

얀은 잠시 머뭇거리다 드라간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건 우리끼리 얘기입니다.”

“물론입니다.”

“범행에 쓰인 무기가 그녀의 후견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 무기에 그녀의 지문이 남아 있었고요.”

드라간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야말로 심각한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P31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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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녀가 이 모든 걸 계획했을 수도 있겠어요.”

“뭘? 삼중살인을?” 얀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 정말 거름통 속에 빠진 기분이야. 리샤르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기자회견을 열었어. 이제 한동안 매체들이 우리 등뒤에서 난리를 칠 거야..... 그래, 뭐 찾아낸 거라도 있어?”

“침실에 있는 닐스의 시체 말고는,..... 아, 빈 콜트 매그넘 권총상자를 발견했어요. 이미 지문 분석에 들어갔죠. 닐스가 후견위원회에 보냈던 리스베트의 월례보고서 사본을 모아둔 문서철도 하나 있었고요. 그런데 보고서에는 리스베트가 그야말로 천사처럼 묘사되어 있던데요.”

“뭐야, 후견인까지?” 얀이 외쳤다.

“뭐가요?”

“리스베트 예찬론자가 또 한 사람 나타났단 말이군!”

얀은 드라간과 미카엘을 만나 들은 얘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소니아는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손가락을 빗 삼아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두 눈을 비볐다.

“정말 희한한 얘기들을 하고 있군요.”

얀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며 아랫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소니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렇잖아도 울퉁불퉁한 얼굴이 마치 원시인처럼 변했다. 얀은 고민이 있거나 곤혹스러운 일에 빠질 때면 복어처럼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입을 삐죽 내민 채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때 보면 ‘부블라’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렸다. 소니아는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도 없고, 그가 왜 이런 별명을 얻었는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 꼭 들어맞는 별명이었다.

“오케이, 그런데 그녀가 진범인 건 확실한가요?” (P356-357)


미카엘은 노트북을 끄고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밤 11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몸을 일으켜 커피머신을 켰다. 그리고 CD 플레이어를 켜서 데비 해리가 부르는 <마리아>를 들었다. 몸에 담요를 두르고 거실 소파 위에 앉은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리스베트를 생각했다.

난 그녀에 대해 과연 무얼 알고 있을까? 사실 거의 없지 않은가.

그녀는 사진기억력을 지녔고 악마가 부러워할 정도로 유능한 해커였다. 자신에 대해선 결코 이야기하는 법이 없는 특이하고도 내성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공권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극도로 난폭해질 수도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녀가 후견을 받고 있었고 십대 때 정신병원에서 지낸 적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는 이제 한쪽을 택해야 했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마침내 그의 마음은 리스베트를 향해 기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다그와 미아를 살해했다는 경찰의 결론을 결코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을 내리기 전에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 새벽 4시에 소파 위에서 깼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가 쓰러져서는 곧바로 다시 잠들었다. (P36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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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셰데 살인 사건을 두고 동시에 세 군데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얀 형사가 지휘하는 수사팀에는 국가의 권위라는 이점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용의자가 있고 그녀와 연관된 범행 무기까지 확보되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첫 번째 희생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고, 다른 희생자들과도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라는 고리를 통해 연결되고 있었다. 이제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찾아내 크로노베리의 유치장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드라간의 수사팀은 형식적으로 경찰의 공식수사에 부속됐으나 드라간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가급적 리스베트를 보호하려는 게 그의 개인적인 의도였다. 즉 진실을 알아낸 후 정상참작이 될 만한 사실들을 찾아낼 심산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막막한 수사팀은 <밀레니엄>이었다. 이 작은 잡지사에 경찰이나 밀톤 시큐리티처럼 막강한 수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미카엘은 경찰이나 드라간과는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리스베트가 엔셰데 커플을 살해한 동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이야기 자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리스베트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면 분명 경찰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기를 잡은 진범이 따로 있거나 아니면 리스베트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P396-397)


“쿠르트, 지인들에 대해서 뭐 알아온 거라도 있나?”

“거의 없습니다. 열여덟 살 이후로는 경찰 심문을 받은 적이 없어서 기록 역시 없거든요. 뭐, 드라간이나 미카엘과 아는 사이란 건 다들 아실 테고, 미리암 우하고도 친구죠. 술집 풍차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준 소식통 말로는 예전에 어떤 여자들 무리하고 같이 몰려다녔다고 합니다. ‘이블 핑거스’라나 뭐라나.”

“이블 핑거스? 그게 뭐지?” 얀이 호기심에 차 물었다.

“오컬트 집단 같은 거겠죠, 뭐. 종종 그 술집에 모여서 질펀하게 파티를 벌인답니다.”

“설마 리스베트가 빌어먹을 사탄주의자는 아니겠지?” 얀이 되물었다. “그런 말이라도 나오면 기자들이 아주 환장을 할걸.”

“‘사탄주의 레즈비언 그룹’, 이런 제목은 어떻습니까?” 한스가 또 거들었다.

“한스, 정말이지 당신은 중세적인 여성관에서 못 벗어나고 있군요.” 소니아가 쏘아붙였다. “그 이블 핑거스는 나도 들어서 아는 이름이라고요.”

“어, 그래?” 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1990년대에 활동한 여성 록그룹이죠. 톱스타 그룹은 아니었지만 한때는 그래도 알려진 이름이었다고요.”

“그럼 하드록을 하는 사탄주의 레즈비언들이군.” 한스가 비꼬았다. (P406-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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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경, 하리에트가 미카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얘기 좀 해도 돼?”

“그래, 길게는 못하고.”

“경찰이 찾는 용의자..... 자기가 날 찾을 때 도와준 아가씨 맞지?”

하리에트와 리스베트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맞아, 미안해. 자기에게도 전화로 알렸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그녀야.”

“이 일이 내게는 뭘 의미하지?”

“자기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녀가 내 모든 과거와 이 년 전 일을 알고 있잖아.”

“맞아, 모든 걸 알고 있지.”

수화기 너머에서 하리에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하리에트..... 난 그녀가 결백하다고 생각해. 왜냐면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신뢰하니까.”

“하지만 신문에 떠드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걸 믿어선 안 돼. 신문들은 흑백논리에 따라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본다고. 리스베트는 네 비밀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난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어. 내가 아는 한 자신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야.”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모르겠어. 어쨌든 하리에트,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알아낼 작정이야.” (P41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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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개월 전 닐스를 만났던 일을 떠올려봤다. 둘은 스톡홀름 구시가에서 만났다. 그날 오후 닐스가 그의 사무실로 전화해 맥주나 한잔 마시자고 한 참이었다. 둘은 권총사격을 비롯해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지만 닐스가 그를 불러낸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부탁할 게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가 살라첸코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군나르는 일어나서 주방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날 그는 술을 약간 마셨다. 아니, 사실은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때 닐스가 무엇을 물었더라?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사건을 하나 맡고 있는데 아는 이름이 하나 다시 튀어나와서.....”

“그렇소? 누군데 그럽니까?”

“알렉산데르 살라첸코, 그 사람, 기억합니까?”

“물론이요. 쉽게 잊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니지.”

“그 사람 지금 어떻게 됐죠?”

엄밀히 말하자면 살라첸코는 닐스와 전혀 관계없는 문제였다. 만일 다른 사람이 살라첸코에 대해 물어왔다면 그 순간 경계심을 품었을 터였다. 하지만 리스베트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알고 있으려니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갔었다. 닐스는 옛날 보고서가 하나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난 그에게 그걸 주었어.....

군나르는 엄청난 실수를 범해버렸다. 그는 닐스가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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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업무상 비밀을 공개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어떤 특별한 환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죠. 다만 다음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특별한 치료를 요하는 매우 복잡한 경우였습니다. 따라서 전 그녀를 적절한 시설에 수용해 필요한 보살핌을 제공해야 한다고 권고했죠. 하지만 법원은 이를 무시하고 후견인을 붙여 사회에 내보냈습니다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러한 법원의 실수로 무고한 시민 셋이 희생된 일을 개탄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지난 수십 년간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해온 정신치료기관에 대한 예산삭감 정책까지 신랄하게 비난했다.

여기서 리스베트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박사가 이끄는 소아정신병원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치료법이 ‘과민한 중증 환자들’을 이른바 ‘모든 자극에 제거된’ 독방에 가두는 것임을 밝힌 신문은 하나도 없는 게 아닌가. 그 방에는 가죽끈이 달린 좁다란 간이 침대가 있었다. 박사가 내세운 의학적 설명에 따르면, ‘자극’이 발작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과민한 아동들은 이를 피해야만 했다.

나중엔 이러한 치료법을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감각 박탈..... 전쟁 포로를 감각 박탈 상황에 노출시키는 것은 이미 제네바협약 때 비인도적 행위로 분류됐다. 역대 독재 정권들이 이른바 ‘뇌 세탁’실험을 할 때 즐겨 썼던 방법이기도 했다. 또 어떤 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모스크바를 휩쓴 스탈린 대숙청 때 정치범이 겪었던 기상천외한 고문 가운데 이 잔혹한 ‘요법’이 있었다고 한다.

화면에서 페테르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은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아직도 그 구역질나는 애프터셰이브 로션을 바르는지 궁금했다. 당시 리스베트에게 그 요법을 쓴 장본인이 바로 페테르였다. 그땐 그들이 무얼 하려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리스베트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려고 요법을 쓰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른바 ‘괴민한 중증 환자’란 페테르의 생각이나 지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환자를 의미한다는 사실이었다. (P484-485)


미카엘의 편지를 열어본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화면을 응시했다. 그녀의 내부에서 상반된 감정들이 뒤얽혔다. 지금까지는 스웨덴 전체가 자신의 적이었다. 그녀로서도 별반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합군이 한 명 튀어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결백을 믿는다고 단언하는 잠재적 연합군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합군은 그녀가 스웨덴에서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유일한 남자였다. 리스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여전히 순진하기 짝이 없는 빌어먹을 착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은 어떤가? 열 살 이후로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죄 없는 사람? 그딴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책임지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

닐스가 죽은 건 자신이 부과한 규칙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신을 해치려고 웬 빌어먹을 고릴라를 고용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칼레 블롬크비스트를 완전히 무시해버릴 수도 없었다. 그는 쓸모가 있을 터였다.

미카엘은 수수께끼 푸는 일에 재능이 있는데다 지독하게 끈질긴 사람이었다. 헤데스타드에서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치 불도그처럼 한번 입에 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남자...... 얼마나 순진한 인간인지! 그는 자신이 이 나라를 조용히 뜰 때까지 이용해먹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 조만간 이 나라를 떠나야 할 테다.

하지만 불행히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본인 의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윤리적인 동기가 있어야만 행동했다.

반대로 말하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리스베트는 잠시 생각해본 다음 새 파일을 하나 만들어 ‘미크블롬에게’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거기에 한 단어를 썼다.

살라. (P496-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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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첸코,

염병할 놈의 뱀처럼 언제나 미끌미끌 손에서 빠져나가던 인간.

살라......

자신이 보고서에 적어놓은 그의 별명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 별명을 알았는지는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수정처럼 명백했다. ‘살라’는 흩어진 세 가지 항에 모두 연결되었다. 엔셰데, 닐스, 그리고 리스베트.

군나르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대체 이 모든 퍼즐 조각들은 정확히 어떤 관계일까?’ 하지만 리스베트가 엔셰데에 찾아간 이유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다그와 미아가 협조하기를 거부했거나 혹은 도발해오자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리스베트가 그 둘을 쏘아 죽이는 장면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에겐 동기가 있었다. 군나르 자신을 포함해 이 나라에서 단 두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동기가.

완전히 미친년이지, 경찰이 체포할 때 아예 사살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년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년이 입을 연다면 그 모든 이야기가 만천하에 가발려진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미카엘이었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그의 입을 막느냐였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내가 익명의 정보제공자가 되겠다고 하자..... 그 염병할 창녀들하고 장난 몇 번 친 것도 좀 덮어달라고 하고...... 어떻게 놈을 구슬리지? 아, 리스베트가 미카엘의 머리통까지 날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살라첸코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전화를 하는 게 좋은가. 안 하는 게 좋은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P52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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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오늘 아침에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답니다.” 소니아가 미솔르 지으며 수긍했다.

“어떻게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일이에요.”

“좋아요. 매체가 신뢰도를 유지하려면 공권력과는 명확하게 거리를 둬야 하는 법이죠. 경찰서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수사에 협조하는 기자들은 결국 경찰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니까요.”

“나도 그런 기자들을 본 적 있어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잖아요? 신문사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경찰관들 말이에요.”

에리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밀레니엄>은 그런 경찰관들을 고용할 만큼 주머니가 넉넉하지는 못하답니다...... 자, 본론으로 돌아가보죠. 지금 경찰이 원하는 게 우리 <밀레이엄> 직원들을 심문하는건 아니잖아요. 그런 거라면 얼마드니 협조할 수 있죠. 당신들은 우리 언론이 보유한 자료를 다 내놓고 경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어요, 아닌가요?” (P615)


나는 가학증 걸린 돼지요, 개자식이요, 강간범입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동정심마저 일었다. 알고 보니 참으로 가련하고도 멍청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부수적인 감정들로 실제 작업을 그르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했다. 그는 닐스를 침실로 데려갔다. 침대 앞에 무릎을 꿇게 한 후 총성을 줄이기 위해 베개를 사용했다.

그러고서 오 분가량 집안을 뒤지며 살라의 흔적이 될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봤다. 결국엔 금발 거인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가 찍혀 있는 닐스의 전화기가 전부였다. 끝까지 신중을 기하려면 그 휴대전화를 가지고 가야 했다.

그다음 골칫거리는 다그 스벤손이었다. 닐스의 시체가 발견되면 다그가 경찰에 연락할 터였다. 그리고 닐스가 살해된 게 살라에 대해 그와 통화하고 나서 불과 몇 분 후였음을 말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세상의 관심이 미지의 인물인 살라에게 쏠리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금발 거인은 스스로를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살라의 그 무시무시한 전략적 능력은 더욱 존경할 만했다.

그들이 협력해온 지도 벌써 십이 년째였다. 그동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금발 거인은 살라를 자신의 멘토처럼 존경했다. 살라의 인생교훈은 몇 시간을 듣고 있어도 지겹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약함을 설명해주었고 그러한 지혜를 통해 이익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P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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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알렌산데르 살라첸코요.” 군나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스웨덴 주민등록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 이름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

살라....... 알렉산데르 살라첸코. 드디어 정확한 이름이 나왔군.

“그는 누굽니까? 어떻게 해야 그를 찾을 수 있죠?”

“결코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일 거요.”

“이봐요! 난 그자를 너무도 만나고 싶단 말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건 국가기밀로 분류된 내용들이오. 만일 내가 이걸 누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중형을 받지. 스웨덴 안보 시스템 안에서도 가장 깊이 묻혀 있는 기밀이란 말이오. 정보제공자로서 내 익명성을 왜 보장해줘야 하는지 이해하겠소?”

“그리하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당신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니...... 냉전시대를 기억하겠지?”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서 본론을 꺼내라고!

“알렉산데르 살라첸코는 1940년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스탈린그라드에서 출생했소.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941년은 독일군의 소련 침공이 시작된 해요. 살라의 부모는 전쟁통에 사망했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사실 전쟁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젖먹이인 그가 어떻게 알았겠소?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우랄 지방의 한 고아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오.” (P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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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살라첸코.” 문이 닫히자마자 홀게르가 말했다.

미카엘의 두 눈이 둥그레졌다.

“그 이름을 아십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베트가 내게 그 이름을 말해줬다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소. 내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제 못 일어날 일도 아니지.”

“리스베트가요? 그녀가 어떻게 그를 알죠?”

“살라첸코가 리스베트의 아버지요.”

맨 처음 미카엘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몇 초가 흐른 후에야 각 단어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갔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살라첸코는 1970년대에 스웨덴에 온 사람이오. 일종의 정치망명자였던 것 같소. 사실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오. 알다시피 리스베트가 원래 과묵한데다 그 문제 대해서는 특히 말이 없었소.”

그녀의 출생증명서..... 부친 미상.....

“살라첸코가 리스베트의 아버지였다........” 미카엘이 되뇌듯 말했다.

“그애와 알고 지내는 동안 단 한 번이었소.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얘기했었지. 내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한 달 전쯤에. 내가 들은 바로 살라첸코는 1970년대 중반에 스웨덴에 왔소. 1977년에 리스베트의 모친을 만났고 아이 둘을 낳았지.”

“둘이오?”

“리스베트, 그리고 여동생 카밀라. 쌍둥이지.”

“맙소사! 리스베트 같은 여자가 둘씩이나 있단 말입니까?” (P676)


리스베트는 그 내용을 두 번 읽었다. 칼레 블롬크비스트. 참 열심히도 뛰셨네요! 참 우등생다워요. 빌어먹을 우등생!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인간!

그는 지금 선의로 가득차 있다. 그는 도움을 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어차피 그녀의 삶은 이미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열세 살 때 그녀의 삶은 끝나버렸다.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리스베트는 새 파일을 하나 만든 다음, 그에게 보낼 답신을 써보려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에게 털어놓고 싶은 수많은 상념들이.

사랑에 빠진 리스베트.......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미카엘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자신의 마음을 알고 난 그가 득의에 찬 미소 짓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P699-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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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살라첸코를 없애버리려고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살라첸코가 돌아와 반격을 했다. 그러니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홀게르의 분석이 옳았다. 그녀는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깨달았다. 당국자들에게 호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미카엘은 옆 의자에 올려놓은 노트북 가방에 눈길을 돌렸다. 리스베트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콜트 권총을 가져온 터였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도 분명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거기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이 매우 합리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다.

열차가 오르스타 다리 위를 지날 때,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얀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전화를 받은 얀이 역정 난 목소리로 물었다.

“끝내는 거.”

“끝내다니? 뭘?”

“이 모든 엿 같은 이야기를, 누가 다그와 미아, 그리고 닐스를 죽였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정보를 갖고 있다면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살인자 이름은 로날드 니더만입니다. 파올로와 싸운 금발 거인이죠. 35세의 독일 시민, 일명 ‘살라’라고 하는 알렉산데르 살라첸코, 그 개자식의 부하고요.”

얀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후우우우,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의 귀에는 급하게 종이를 바스락대는 소리에 이어 볼펜을 찰칵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확실한 사실입니까?”

“그래요.”

“좋아요. 그럼 로날드와 그 살라첸코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P732)


리스베트는 숲을 둘러 들어가며 집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150미터를 지나와 다시 한 발을 내디디려다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피에르 드 페르마는 자신이 읽고 있던 <산수론>에 이렇게 갈겨놨었다. 나는 이 명제를 놀라운 방법으로 증명해냈으나 여백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

정사각형은 정육면체로 바뀌었고(x³+y³=z³), 수학자들은 페르마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수백 년 동안 끙끙대왔다. 그리고 20세기말, 앤드루 와일스가 당시의 최첨단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동원해 십년을 고심한 끝에 마침내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불현 듯 그녀는 깨달았다. 해답은 맥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였다. 숫자들이 줄을 서더니 갑자기 떨어져내리며 마치 수수께끼처럼 어떤 간단한 공식을 이루는 유희.

페르마에게는 물론 컴퓨터가 없었다. 그리고 앤드루 와일스의 증명은 페르마가 자신의 명제를 내놓았을 때는 미처 없었던 수학을 기반으로 했다. 따라서 페르마는 앤드루 와일스가 제시한 증명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페르마의 해답은 전혀 다른 그 무엇이었다. (P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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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첸코는 천천히 그녀를 겨냥했다.

세 번째 총알은 왼쪽 귀에서 2센티미터쯤 위에 적중했다. 두개골을 관통했고 그 구멍 주위로 그물 모양 잔 균열이 퍼졌다. 납 탄환은 머릿속을 파고 들어가 대뇌피질 4센티미터 아래의 회백질에 파묻혔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의학용어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총알을 맞고 느낀 것은 거대하고도 즉각적인 트라우마였다. 마지막으로 지각한 건 시뻘건 빛깔의 충격과 그 뒤를 이은 하얀 빛이었다. 그러고는 어둠이 왔다.

클릭.

살라첸코는 다시 한번 방아쇠를 잡아당기려 했지만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겨냥할 수 없었다. 이년이 빠져나갈 뻔했어...... 마침내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떨리는 팔을 내렸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콸콸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자신의 총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는 집에 두고 올 생각이었지만 방에 들어가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나왔었다. 부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이 계집애는 정말 괴물이야. 사내가 둘이었다. 게다가 그중 하나는 시그사우어를 들고 있는 로날드 니더만이었다. 그런데도 이 더러운 년은 거의 빠져나갈 뻔했다고! (P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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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솔레브룬과 노세브로를 연결하는 도로변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벌판에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다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 그는 이렇게 도망쳐 나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녀가 살아났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수를 써서 무덤을 파헤치고 나왔겠지.

살라첸코에게는 자신이 필요했다. 그러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 리스베트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려야 했다.

동시에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런 느낌이 들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다. 닐스가 자신들을 접촉해오면서부터 일이 꼬이고 또 계속 꼬였다. 살라첸코는 리스베트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가 그렇게도 강조하던 신중함의 모든 규칙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로날드는 망설였다.

지금 살라첸코는 의료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다.

아직 그녀가 그를 완전히 죽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아버지의 동업자로 일해왔다. 성공으로 점철된 멋진 세월이었다. 자기 돈도 많이 모았고 살라첸코가 재산을 숨겨둔 곳까지 알고 있었다. 혼자서 이 사업을 계속해나갈 능력과 수단도 충분했다. 이 상황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다. 살라첸코가 자신의 머릿속에 심어준 철칙이 무엇이던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능력을 항상 갖출 것. 이것이 바로 살아남기 위한 기본 법칙이었다. 끝난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라. (P775-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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