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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스타인의 <레이싱 인 더 레인>

영화 <레이싱 인 더 레인> 2019년

by 노용헌

<레이싱 인 더 레인>(The Art of Racing in the Rain)은 미국에서 제작된 사이먼 커티스 감독의 2019년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케빈 코스트너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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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건 몸짓뿐이다. 때로 몸짓은 쓸 만하다. 선을 넘어 신파조 세상에 끼려면, 명확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몸짓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내 요점을 이해시키려면 도리가 없다. 언어에 의존할 수 없는 형편이니.

아쉽게도 납작한 긴 혀가 늘어져 있어서 그렇다. 그런 까닭에 음식을 씹을 때 물고 있지 못한다. 여러 음절로 이루어진 복잡한 소리를 제대로 못 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소리들이 합쳐져야 문장이 되는데 말이지, 해서 난 이렇게 데니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벌써 왔어야 하는데..... 오줌을 질펀하게 싸놓은 차디찬 부엌 타일 바닥에 엎드린 이 꼴이라니.

난 늙었다. 늙는다는 걸 인정하지만 이런 식은 싫다. 부은 관절을 완화시키는 진통제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백내장 때문에 시야가 뿌예지고, 창고엔 애완견용 패드가 쌓인다. 언젠가 데니는 개 보족기를 채워주겠지. 길에서 본 적이 있다. 개의 보행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 몸통 뒤쪽에 매달아 궁둥이를 끌고 걷게 하는 도구. (P7)


나는 늘 인간과 비슷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내겐 다른 개와 다른 뭔가가 있었다. 개의 몸을 입고 있지만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다. 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영혼, 내 영혼은 인간인 것을. 난 이제 인간이 될 준비를 마쳤다. 죽음으로 나의 모든 걸 잃으리란 걸 안다. 기억 전부를, 경험 전부를 잃겠지. 그것들을 안고 다음 생으로 가고 싶지만-스위프트 가족과 겪은 일이 워낙 많아서-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억지로 기억하는 것 외에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는 걸 영혼에 새기려고 애쓸 수밖에.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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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 전에 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 것. 기억하면 현재를 놓치게 된다. 데니는 늘 말했다. “아주 살짝, 페달이 달걀 껍데기인 것처럼 살며시 밟아야 해. 달걀을 깨면 안 되니까. 빗속에서는 그렇게 운전해야 하는 거야.”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목이 항상 맘에 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 전에 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 것. 기억하면 현재를 놓치게 된다. 레이싱에서 성공하고 싶은 드라이버라면 기억해선 안 된다. 데니는 레이싱을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한순간의 일부이며, 그 순간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인식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은 나중에 해야 한다. (P19-20)


한 가지 이론을 말해보겠다.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TV에서 말하듯 침팬지가 아니라 사실은 개다.

내 논리를 살펴보자면,

예1) 며느리 발굽

개의 앞다리에 ‘며느리 발굽’이라는 게 있는데 대개는 어릴 때 잘라주는 경우가 많다. 내 견해로 이것은 엄지손가락의 싹을 자르는 증거다. 더 나아가 난 인간이 ‘품종 개량’이라는 교묘한 과정을 통해 개들의 엄지를 체계적으로 잘라왔다고 믿는다. 개가 손을 잘 쓰게 되어서 ‘위험한’ 포유동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또 인간이 개를 꾸준히 ‘내 집에서’(이런 멍청한 완곡어법이 맘에 든다면) 키우는 건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개가 알아서 진화하게 내버려두면, 엄지가 커지고 혀가 작아지고 인간처럼 직립해서 인간보다 우수해질까 봐 두렵겠지. 인간이야 느리고 거치적거리는 동물이니까. 이런 이유로 개들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감독하에 살아야 하며, 혼자 살다가 발견된 개는 즉시 죽임을 당한다.

데니에게 정부와 그 활동에 대해 들은 바로 볼 때, 이 치사한 계획은 바로 백악관의 골방에서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보나 마나 의심스러운 도덕성과 머리를 가진 대통령의 악마 같은 참모의 아이디어겠지. 모든 개가 혁신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좋아한다는 적절한 평가를 내리고 --아쉽게도 영적 통찰력보다는 편집증적인 태도로 내린 평가-- 그런 정책을 만들었을 것이다.

예2) 늑대 인간

보름달이 뜬다. 전나무의 늘어진 가지에 안개가 낀다. 어두운 숲 구석에서 인간이 나와 자기도 모르게 몸이 변해...... 원숭이가 된다?

아닐 것 같은데. (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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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당일, 출산 예정일이 일주일 이상 남았는데도 진통이 시작되었고, 이브는 급히 산파들을 불러들였다.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이브는 빨간 살덩어리를 낳았다. 아기는 꼼지락대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는 입을 오물대며 이브의 젖꼭지를 찾아 빨기 시작했다. “잠깐만 혼자 있어도 될까요?” 이브가 말했다. “그렇게 해요.” 산파 한 사람이 대답하고 문 쪽으로 갔다. “강아지는 우리랑 나가야지.” 다른 산파가 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아뇨…… 개는 그냥 두세요.” 나는 그냥 있으라고? 이브의 측근에 포함되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산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할 일을 했고, 나는 이브가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P30-31)


‘내가 증명할 것은 앞에 있다.’

운명을 만드는 건 바로 자신이다. 의도하든 안 하든, 알든 모르든 결국 성공과 실패는 자기 자신이 가져온다는 말이지.

그 개념이 나와 이브의 관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따져봤다. 그녀가 우리 생활에 끼어든 게 싫은 건 사실이지. 이브도 그걸 알고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보호했다. 조위가 태어난 후로는 관계가 상당히 변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나는 데니를 TV 앞에 두고 부엌으로 갔다. 이브가 식사 준비를 하다가 내가 들어가자 흘끗 쳐다보았다.

“레이싱이 싫증났구나?”

그녀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사실 그건 아니었다. 레이싱이라면 종일, 다음 날까지도 내리 볼 수 있었다. 나는 뭔가 증명해 보이고 싶었고, 평소 좋아하는 자리인 냉장고 옆에 엎드려 쉬었다.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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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미칠 것 같은 상태를 면할 방법들을 찾았다. 예를 들면 나는 인간의 리듬으로 생활한다. 인간처럼 천천히 음식을 씹어 먹는 연습을 한다. TV에서 행동과 관련된 점들을 공부하고 특정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다. 다음 생에 사람으로 환생하면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 어른이 될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태어날 테니 말이지. 새로 얻은 인간의 몸이 자라서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뛰어난 육체와 지성을 만끽하리라.

데니는 소리를 못 내는 지옥에 갇혀 미칠 듯한 상황을 묵묵히 견디기로 했다. 그에게는 이브의 고통을 없애줄 방법이 없었고, 그런 현실을 알자 그저 다른 일들을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레이스가 한창일 때, 차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잦다. 변속기의 기어가 고장 나면 드라이버는 갑자기 기어를 전부 못 쓰는 상황에 빠진다. 혹은 클러치가 말을 듣지 않는다. 브레이크가 과열되어 헐거워진다. 완충장치가 망가진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미숙한 드라이버는 무너진다. 보통의 드라이버라면 포기한다. 뛰어난 드라이버는 그런 난관 속에서도 달린다. 그들은 레이스를 계속할 방법을 찾아낸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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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전선, 지붕에 까마귀 떼가 앉아서 뭐든 지켜본다. 나쁜 꼬맹이 자식들. 놈들은 상대를 비웃듯이 음흉하게 낄낄대고 계속 깍깍댄다. 우리가 집 안에 있어도, 집 밖에 있어도 어디 있는지 알고, 늘 우리를 기다린다. 갈까마귀의 사촌 동생뻘인 까마귀들은 벌컥벌컥 성을 내고, 사촌들보다 작게 태어난 것을 원통해 한다.

갈까마귀는 진화의 사다리에서 인간 바로 아래 단계라고 한다. 북서해안의 원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갈까마귀가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버펄로 인디언의 민담에서는 까마귀에 해당하는 신이 코요테, 즉 개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우리는 영적인 먹이사슬에서는 다 하나로 뭉개지는 것이다. 그러니 갈까마귀가 인간을 창조했다면 까마귀는 갈까마귀의 사촌이니 어느 자리에 맞을까? (P74)


몽골에서는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무덤을 밟지 못하게 언덕 높이 묻는다. 주인이 개의 귀에 대고 내생에는 사람으로 환생하라는 덕담을 속삭인다. 그런 다음 꼬리를 잘라서 개의 머릿밑에 두고, 넋이 여행하는 동안 버티도록 입에 고기나 기름덩이를 넣어준다. 개가 환생하기에 앞서 영혼은 자유롭게 여행한다. 원하는 기간 동안 높은 사막 지대를 내달린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송한 프로그램에 나온 내용이다. 그러니 사실일 것이다. 모든 개가 인간으로 환생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준비된 개만 돌아온다고 한다.

나는 준비가 됐다.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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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 이리 오렴.” 그녀가 말했다. 나는 꼬리를 흔들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브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모습으로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병원에 가서 더 병을 얻은 것 같았다.

“내가 아파서 엔조가 화났나 보네.” 내 진심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감정이 너무 복잡해 오늘까지도 확실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 옆으로 가서 방석처럼 그녀 앞에 엎드리는 것뿐이었다. “나도 이런 나를 보는 게 싫은걸 뭐.” (P127-128)


힘줄이 없는 아킬레우스는 어떤 사람인가? 데릴라가 없는 삼손은 어떤 사람인가? 부왕을 죽여야 했던 오이디푸스는 어떤 사람인가? 애초에 말을 못하게 타고난 나는 자존심과 이기심에 연연하지 않고 말하는 기술을 연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런 질문들의 답을 안다.

진정한 영웅에게는 흠결이 있다. 진정한 챔피언이라면 승리 자체보다는 승리하기 위해 어떤 장애물을 넘고 극복해왔는지를 보아야 한다. 흠결이 없는 영웅은 사람과 우주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레이싱 역사상 가장 재능이 뛰어난 포뮬러 원 드라이버이자 역자 최다 우승자 마이클 슈마허가 팬들이 좋아하는 챔피언 순위에서 밀려난건 바로 그 때문이다. 슈마허는 아일톤 세나와는 다른 드라이버다. 세나 역시 귀신같은 기술을 구사하는 드라이버였지만, 관중을 향해 매력적인 윙크를 보낼 줄 알기에 슈마허보다 카리스마 넘치고 감성적이라고 평가받는다. 반면 슈마허는 냉정하고 근접할 수 없는 인물로 꼽힌다. 그에게는 흠결이 없다. 최고의 차, 재정이 가장 탄탄한 팀, 최고의 타이어,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드라이버다.

완벽하게 갖춘 그가 승리한들 어느 누가 환호를 보낼 수 있을까?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좋아할 게 뭐 있을까? 태양을 상자에 담아 가두라. 태양이 떠오르기 위해 역경을 극복하게 하라. 그러면 우리들은 환호를 보니리니! 나도 가끔 아름다운 일출 장면에 탄복하지만 단지 떠올랐다는 이유로 태양을 챔피언이라고 보진 않는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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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꼭 붙어 있어.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릴 테니까.” 데니는 가속의 정점에서 운전대를 풀었고, 차는 턴을 빠져나가는 지점을 향했다. 그가 가속페달을 힘껏 밟으면 우리는 코너를 날듯이 빠져나와 다음 턴, 그다음 턴을 향해 내달렸다.

“엔조, 괜찮니?” 데니가 백스트레이트를 시속 180킬로미터로 달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두 번 짖었다. “한 바퀴만 더 돌까?” 그래요, 한 바퀴만 더. 제발 한 바퀴만 더 돌아요! 그 한 바퀴는 보다 극적이었다. 나는 데니가 시키는 대로 눈을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봐.” (P165-166)


데니와 나는 떠났다. 나는 평소와 달리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자지 않았다. 벨레뷰와 메디나에서 불빛이 환하게 빛났다. 정말 아름다웠다. 메디슨 파크와 레쉬의 불빛을 보면서 호수에 떠 있는 다리를 건널 때, 마운트 베이커의 산등성이 뒤로 시내의 건물들이 드러났다. 도시는 날렵하고 사각사각한 느낌을 풍겼다. 더러움과 세월은 어둠에 감추어졌다.

만약 내가 총살을 당한다면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 집행자들과 마주 서서 이브를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한 말을 떠올릴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님을 알거든.’

그날 밤 이브는 죽었다. 난 꿈에서 마지막 숨이 이브의 영혼을 거두어가는 걸 봤다. 이브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혼백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봤다. 이제 그녀에게 욕망이나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육신에서 놓여나 계속 여행했다. 높은 창공으로, 그곳에서는 넋들이 모여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들은 품지 못하는 꿈과 환희를 펼친다. 여기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걸 펼친다. 그것들을 이해하진 못해도 얻기로 선택하면 얻을 수는 있다. 정말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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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까지도 데니는 이브가 운명한 걸 몰랐다. 난 안개가 낀 것 같은 꿈에서 깬 즉시 알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데니는 나를 차에 태우고, 머서섬 동쪽 해안에 있는 루터 버뱅크 파크로 데려갔다. 따스한 봄날에 가볼 만한 개 공원이었다. 데니가 공을 던지면서 내게 말했다. “이브를 집으로 데려올 거야. 조위도. 다 같이 살아야겠어. 이브와 조위가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나는 데니의 발치에 공을 떨어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휴대폰을 받고 있었다. 한참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이브가 죽었어.” 데니는 그렇게 말하더니 큰소리로 흐느꼈다. 그가 몸을 돌리고 팔에 얼굴을 묻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P174-175)


경험상 드라이버는 차가 한계에 가까워지면 어떤 상태인지 금세 느낌으로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드라이버는 극한의 경계에서 운전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낀다. 타이어가 점착력을 잃기 시작하면, 얼른 교정해서 한숨 돌린다. 언제 어디서 좀 더 몰아붙일 수 있을지 본능으로 안다.

압박이 심하고 레이스가 반이나 남았다면 경쟁 차에 줄기차게 추격당하며 앞서 달리기보다는 뒤에서 밀어붙이는 편이 낫다는 걸 안다. 그 경우에는 뒤따라오는 차에 자리를 내주는 게 현명한 대처법이다. 추격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드라이버는 아까 당했던 것처럼 앞차를 밀어붙일 수 있다.

가끔은 상대 차가 앞서가지 못하도록 자리를 지키는 게 유리한 경우도 있다. 레이스 전략상 혹은 심리적인 이유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다. 때로 경쟁자보다 뛰어나다는 걸 입증해야 하니까.

레이싱은 훈련과 지략의 싸움이다. 단순히 누가 더 속도를 잘 내는지 겨루는 경기가 아니다. 마지막에는 늘 현명하게 운전한 드라이버가 승리한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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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그 사람의 영혼을 보여주는 창이다. 레이싱카에서 촬영한 비디오에서 드라이버의 손을 보면 새삼 정말 그걸 알 수 있다. 긴장감 때문에 뻣뻣하게 운전대를 잡은 드라이버는 경직되게 운전한다. 초조하게 자꾸 손을 움직이는 드라이버는 불편한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드라이버의 손은 절대 긴장하지 않고 예민하게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운전대를 통해 많은 정보가 전달된다. 운전대를 꽉 쥐거나 긴장해서 잡으면 정보가 뇌까지 전달되지 못한다.

감각기관은 단독으로 작동되지 않고 뇌의 특정 부위에서 통합된다. 거기서 인체의 그림이 하나로 그려진다. 피부의 감각점은 뇌에 압력, 통증, 온도를 전한다. 관절의 감각기관은 뇌 공간에서 몸의 자세를 전달한다. 귀의 감각기관은 균형을 추적하고, 내장 기관들의 감각기관은 감정 상태를 알아낸다. 드라이버 스스로 정보의 한 채널을 제한하는 건 바보짓이다. 정보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데니의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본인뿐만 아니라 나조차 당황스러웠다. 이브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자주 손을 흘끔대곤 했다. 마치 자기 손이 아닌 것처럼 코앞으로 손을 내밀고는 위로 올려 떨리는 걸 지켜보았다.

데니는 손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손을 살피다 내게 들킬 때마다 ‘신경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스트레스’라고도 했다. 그다음에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보이지 않게 했다. (P214-215)


나는 경악했다. 나 역시 사건들의 우연함을 눈치챘고, 처음부터 의심을 품던 차였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와 맥스웰의 냉담한 말투를 들으니.....

이런 상상을 해보기를, 아내가 갑자기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상상해보라. 그후 처부모가 딸의 양육권을 차지하려고 맹렬히 달려드는 걸 상상해보라.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썼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이 돈이 많아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이 여섯 살 먹은 딸과 접촉을 몇 달이나 원천 봉쇄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이 생활비와 딸을 부양할 돈을 못 벌게 막았다고 상상해보라.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도 그런 입장에 처하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데니는 절대로 섣불리 무릎 꿇을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데니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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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는 데니에게 외조부모와 지내는 게 아이에게 최선일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 필요한 교육비를 착착 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가 어린 시절을 안락하게 보내도록 뒷바라지해줄 거라면서, 또 데니가 딸을 보살피지 않아도 되면 세계적인 레이싱 시리즈에 자주 출전할 수 있고, 레이싱 교육과 드라이빙 일을 더 많이 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아이에게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가정환경도 매우 중요하며, 이왕이면 교외의 고급주택에 살면서 도심의 사립학교 교육을 받으면 아이의 장래에 훨씬 유익할 거라고 지적했다. 그대신 자유롭게 아이를 방문할 수 있는 스케줄을 마련하면 된다며 데니를 설득했다.

데니는 물론이고 나도 그런 논리에는 설득되지 않았다. 물론 카레이서라면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는 점은 이해했다. 어떤 분야든 성공하려면 이기적일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양쪽 다 성공할 수 없으니, 아이보다는 본인의 꿈을 우선해야 한다는 마크의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목적 달성을 위해 타협이 필요하다는 설득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목적을 다 이룰 수는 없으므로 덜 중요한 건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경우 선택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고, 늘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다.

데니는 달랐고 그런 생각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와 카레이싱을 동시에 원했다. 하나 때문에 다른 하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P258-259)


내게는 상상 속의 친구가 있다. 나는 그를 ‘업보대왕’이라고 부른다. 나는 업보가 우주의 힘이라는 걸 믿는다. 쌍둥이 부부 같은 이들은 저지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언젠가 치른다. 우주가 적당하다고 판단할 때 정의가 이루어진다. 어쩌면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 그다음 생에 죄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악마 쌍둥이 부부가 현재는 업보의 힘을 못 느끼겠지만 그들의 영혼은 분명히 알 것이다.

누군가 남에게 비열하게 굴면 업보대왕이 하늘로 솟아올라 욕을 퍼붓는다. 누군가 사람을 때리면, 업보대왕이 골목에서 나와 힘껏 걷어찬다. 잔인하고 약한 자가 있으면, 업보대왕은 합당한 벌을 내린다.

밤에 잠들기 전, 나는 상상의 친구에게 말을 걸고 그를 악마 부부에게 보낸다. 그러면 내 친구는 정의를 실현한다. 별것 아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업보대왕은 밤마다 그들이 야생 개떼에게 무섭게 쫓기는 악몽을 꾸게 만든다. 그들은 놀라 잠에서 깨고 다시는 잠을 못 이룬다. (P263-264)


그가 내게 말했다.

“이젠 널 보살필 형편도 안 돼. 차에 주유할 돈도 없을 지경이야.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엔조.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정말이지 이런 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지가 있다면 그의 셔츠 칼라를 움켜쥘 수 있을 텐데, 내 숨결이 느껴지게 데니를 끌어당기고 따스한 말을 해줄 수 있으련만.

‘이건 위기에 불과해요. 위기는 곧 지나가요! 세월의 무자비한 어둠속에 한 번 처박힌 것뿐이에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당신 아닌가요?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각오가 된 사람들에게는 늘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난다고 가르쳐줬잖아요. 그러면 스스로도 믿어야죠!’

하지만 난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는.

“노력했지만 이젠 정말 힘들다.”

그가 말했다. 내 말을 듣지 못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내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으니, 나는 개니까.

데니가 말했다.

“엔주, 너도 알지? 난 정말 노력했어.”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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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버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본인의 재능, 판단력, 동료들의 판단력, 물리학을 믿어야 한다. 드라이버는 크루, 차, 타이어, 브레이크와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턴의 정점이 틀리게 잡힌다. 평소와 다른 라인을 달린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타이어가 헐거워진다. 트랙이 점점 미끄러워진다. 갑자기 턴의 출구가 나오는데, 트랙은 없고 속도는 너무 빠르다.

자갈 트랙이 나오면 드라이버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한 번의 결정이 레이스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억지로 달리다간 곧 곤란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앞바퀴를 억지로 틀면 차에 스핀이 걸린다. 차체를 드는 것 역시 좋지 않다. 차의 뒷부분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드라이버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판단 착오에 미숙한 결정이 더해지면 위험한 상황에 몰린다. 그 경우 드라이버는 모든 걸 인정하고 트랙에서 나와야 한다.

타이어 두 개를 버려야 될 때가 있고, 네 개를 버려야 되는 때도 있다. 드라이버로서, 경쟁 상대로서도 난감한 기분이 든다. 자갈이 차의 밑 부분에 부딪친다. 진창에서 헤엄치는 기분이다. 그의 차가 트랙을 벗어난 사이, 다른 드라이버들이 추월한다. 그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속 달리는데 그는 느려진다.

이 순간 드라이버는 무지막지한 위기감을 느낀다. 다시 속력을 내야해! 다시 트랙을 달려야 해!

아, 이 어리석음하고는! 운전대를 잘못 꺾거나 상황에 과잉 반응해서 경쟁자들 앞에서 차가 스핀하고 레이스를 접어야 하는 드라이버들을 생각해보기를. 얼마나 진저리나는 상황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지......

진정한 챔피언이라면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진창에서도 계속 달린다. 최선을 다해 라인을 유지하면서, 안전할 때 트랙에 진입할 것이다. 그렇다. 레이스에서 몇 등 뒤로 밀린다. 그렇다.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고, 아직 살아 있다.

레이스는 길다. 너무 빨리 달리다가 중도에서 주저앉느니, 늦더라도 완주하는 쪽이 더 낫다. (P307-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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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내용을 철회하시겠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그러겠습니다.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줘서 정말 미안해요. 철회합니다!” 애니카가 힘없이 말했다. 판사가 말했다.

“놀라운 일입니다! 개가 말을 해 진실을 밝혔습니다. 본 소송 건은 기각합니다. 스위프트 씨는 가셔도 좋고 딸의 양육권을 얻었습니다.” 나는 증인석에서 뛰어 내려와 데니와 조위를 껴안았다. 마침내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다시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P319-320)


나는 준비가 됐다. 그런데… 데니가 너무 슬퍼한다. 그는 나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넌 늘 나와 함께였어. 넌 언제나 내 엔조였지.” 맞다. 그랬다. 그의 말이 옳다. 데니가 내게 말한다. “괜찮아. 이제 가야 한다면 가도 돼.”

나는 고개를 돌린다. 거기, 내 앞에 내 삶이 있다. 내 어린 시절이. 내 세계가. 내 세상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내가 태어난 스팽글 들판 주변, 오르내리는 구릉을 뒤덮은 황금빛 풀이 바람에 흔들려, 그 위를 지나면 배를 간질인다.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또 얼마나 동그란지. 그 들판에서 잠시만 더 놀고 싶다. 다른 존재가 되기 전에 조금만 더 나 자신으로 있고 싶다. (P331-332)

레이싱 인 더 레인 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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