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

영화 <종이달> 2014년

by 노용헌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은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은행 공금 횡령 사건을 모티브로 했으며, 주인공의 은행 공금 1억 엔 횡령 사건 이후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이 어떤 식으로 변해가는지를 서술한다. 종이달이란 단어 자체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가짜 달'이란 의미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필름 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거나 그려서 그것을 갖다 놓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대부분 행복한 얼굴로 가족과 연인의 한 때를 사진으로 남겨 '한 때의 가장 행복한 추억'을 의미하는 중의적인 뜻도 있다고 한다.


2014년 1월 7일부터 2월 4일까지 전 5회로 NHK에서 방송되었다. 주연은 하라다 토모요. 한국 드라마는 2023년 4월 10일부터 5월 9일가지 10부작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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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에 있는 와카바 은행 지점에서 마흔한 살의 계약 사원이 약 1억 엔을 횡령했다. 그 뉴스가 흘러나온 것은 봄이었다. 동창의 전화로 행방불명이 된 그 범인과 유코가 아는 가키모토 리카는 비로소 하나로 합쳐졌지만, 합쳐지고 나니 더 현실감이 없다. 1억이라는 숫자에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의자 우메자와 리카는 아직 잡지 못했다. 최근에는 그런 뉴스가 있었던 걸 세상 모두가 잊어버린 듯 텔레비전에도 신문에도 새로운 뉴스만 보도하고 있다. 리카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언론과는 달리, 유코는 날이 갈수록 리카가 생각났다.

리카도 나처럼 특가품을 사러 자전거를 달린 적이 있을까. 리카의 뉴스가 보도되고 바로 발매된 여성주간지에는 결혼 초에는 리카도 전업주부였다고 쓰여 있었다. 리카. 그 무렵에는 평범한 주부로서 절약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아이도 없었던 것 같으니 처음부터 돈을 마음대로 썼을까. (P17)


행방불명된 횡령녀 따위, 텔레비전에서는 이미 까맣게 잊은 듯이 매일 다른 뉴스를 보내주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리카를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리카는 횡령한 돈을 젊은 남자에게 바쳤다고, 주간지에는 나와 있었다. 가즈키는 사실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것도, 남자에게 부추김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리카는 자신을 가리고 있는 안전한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라는 틀을 부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가즈키가 아는 리카는 누구보다 높고 견고한 울타리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렇게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P38-39)


당신들이 일본에 있을 수 없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말이야,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아, 무지개.” 하야마가 말하며 숟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리카는 얼굴을 들었다. 그치지는 않았지만 빗발은 꽤 약해져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누런 강 저 앞, 하늘 높은 곳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하야마는 무지개를 올려다보면서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리카는 튀어나온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다, 이 아이에게 내 사정을 얘기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시선을 느낀 하야마가 리카를 보아서, 리카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접시에 붙은 가늘고 길쭉한 쌀을 의미도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슬슬 가볼까요.” 리카가 말했다. 여기 있으면 정말로 모든 걸 다 말해버릴 것 같았다. 성밖에 모르는 남자아이에게 온몸을 의지해 버릴 것 같았다. “여긴 내가 낼게요.” 리카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던 손을 멈추었다. 기시감이다. 리카는 순간 생각했지만, 물론 그것이 기시감이 아니라 단순한 기억이란 것을 이내 알았다. 몇 달 전까지의 일을, 이곳에 오기까지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점원에게 내미는 손이 조그맣게 떨렸다. 하야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리카는 그걸 크게 흔들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가격을 말했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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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바야시 고타. 리카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름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고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경찰은 고타에게까지 찾아갔을까. 그는 시키는 대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버티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리카의 마음속에서 히라바야기 고타의 윤곽은 이미 부예져서 또렷한 초점이 없었다.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니, 지금 막 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하야마의 선명한 목젖과 볕에 그을린 손등과 튼 입술과 까칠한 피부가 떠올랐다. 이렇게 사람을 좋아할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급속도로 떨어져가는 것에 리카는 몹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중얼거린 고타의 이름이 방아쇠가 되었는지 남편 마사후미. 엄마, 아버지가 잇따라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은 있다. 화가 났을 테고,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같은 인간 잊어버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버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멍하니 보고 있던 골목에 하야마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스콜로 순간 떨어진 온도가 또 올라가기 시작했다. 치앙마이, 치앙마이에 가자.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결심은 확고해졌다. (P52)


리카는 일을 시작했다. 9시 반에 은행에 가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지정된 단골거래처를 돌았다. 집배금을 갖다 주거나 말고 있던 통장이나 서류를 갖다 주는 것이 주요 업무로, 가끔은 고객 쪽에서 불러서 정기예금이나 보통예금 현금을 맡기는 일도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단골 거래처를 돌 때는 리카보다 조금 연장인 남성 사원이 동행하여 리카는 그다지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거래처에는 연배의 고객이 많았다. 마치 자식이나 손녀가 찾아온 것처럼 남성 사원과 리카를 맞아준다. 차와 과자를 내와서, 용건은 대충 마치고 일상사를 늘어놓는다.

“이 일대에는 소유하고 있던 땅을 팔아서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

한번은 동행한 행원이 슬쩍 말해준 적이 있다. “부자는 싸움을 안 한다는 말이 있잖아. 다른 지점처럼 우리 은행에는 진상 고객도 없고, 자식이 다들 독립한 어른들뿐이어서 우리한테 잘해줘. 우메자와 씨는 특히 인기가 많지만 말이야.”

다른 지점 고객을 모르는 리카로서는 뭐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역시 자신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선물 들어온 거라며 차나 양과자 같은 것까지 들려주는 고객도 있으니.

4시 반에 리카의 일은 끝난다. 1엔 맞지 않는 걸로 큰 소란이 일어서 금액이 맞을 때까지 시간제 사원도 포함하여 전원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진심으로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0만 엔 이상인 것 같아. 하고 사무를 보는 시간제 사원인 주부에게 들었다. 10만 엔 이상의 오차가 있으면 종업원은 전원 남고, 본부에서 행원이 번개같이 날아와서 조사를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소동은 좀처럼 없었다. (P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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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를 준 히라바야시 고조는 70대 중반의 노인으로 리카에게 아주 성가신 고객이었다. 히라바야시 가는 쓰마미노의 주택가에 있다. 100평 남짓한 부지에 기와지붕을 올린 2층짜리 주택과 어수선한 정원이 있다. 고조는 이 집에서 혼자 산다. 고조의 아내는 10년쯤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지만, 각각 결혼해서 지방에 산다고 했다.

담당하는 대부분의 고령자들은 리카를 마음에 들어 해서 사무적인 용건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했지만, 그래도 역시 은행과 고객이라는 선이 있었다. 2,3만 엔을 보통예금에 넣어달라고 하는 사소한 용무로 리카를 불러내는 일은 있었지만, 볼일도 없이 차 마시러 오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전구를 갈아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있어도 휴일에 놀자고 불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조는 달랐다. 얼른 와달라고 전화해서 달려가면 이렇다할 용건도 없으면서 밑도 끝도 없이 얘기 상대나 하게 했다. 휴일에 식사하러 가자고 조르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리카의 생일에 원피스를 사줄 테니 백화점에 가자고 끈질기게 말한 적도 있었다. 딸이나 아들 가족이 온 것을 본 적이 없다. 리카도 처음에는 자식과도 왕래가 없고, 얘기 상대도 없어서 외롭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제 사원 시절에는 동행한 행원이 있으니 직접 말하지 않고, 리카가 은행에 돌아갔을 시간을 재서 전화를 걸어왔다. 물론 리카는 부재중인 척하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서 고조는 ‘구로짱’이라고 불렀다. 진상 고객을 가리키는 지점 내의 은어다. 리카가 종일제 근무로 바뀌며, 사쿠라의 동행 없이 히라바야시 가를 방문하게 되자 그는 걸핏하면 리카를 유혹했다. 외로워서 그렇겠지, 하는 동정도 성가심으로 바뀌어, 리카는 담당을 바꿔 달라고 상사에게 요청했지만, 점잖게 거절당했다. 고조는 리카가 담당을 맡은 뒤로 다른 은행의 예금을 모두 와카바로 돌렸고, 본인 소유의 맨션과 토지 임대료를 매달 정기 입금하고 있어서 은행으로서는 고객 중의 고객이다. (P110-111)


“아, 리카 씨, 손자, 손자.” 고조가 다다미방에서 목만 내밀고 기쁜 듯이 말했다. “어이, 너, 소개해야지.” 고조의 재촉으로, “아, 저기, 히라바야시입니다.” 하고 젊은 남자는 머리를 숙였다.

“와카바 은행의 우메자와입니다. 할아버님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이 집에서 고조의 근친을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생각하면서 리카도 머리를 숙였다.

“너도 이리 와서 차라도 마셔라.”

고조는 큰 소리로 말했지만, 젊은 남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조는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서 리카를 상대로 얘기를 계속했다. 고타라고 하는데, 저래 봬도 부모를 닮지 않아 공부는 잘해서 일류 고등학교에서도 전교권이었다. 아쉽게 국공립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톱6 대학 중에 하나를 바로 합격했으니 장해, 하고 손자 자랑을 펼치더니 언제까지고 그칠 줄 몰랐다. 한 시간 뒤, 오늘도 얘기 상대로 끝나는가 생각하면서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상사한테 혼난다고 말하며 리카가 일어서려 하자, 고조도 아쉬운 몸짓으로 갈색 봉투를 탁자에 올리며 말했다. 달러 예금으로 해둬, 라고.

돌아오는 길, 아직도 군데군데 논밭이 남은 주택가를 걸어가다가 저 앞에 아까 본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메모지인지 뭔지를 보면서 천천히 걷고 있어서, 리카가 걸음을 늦추지 않으면 추월하게 된다. 잠자코 뒤를 따라 걸어가는 것도 부자연스러워서 딱히 나눌 말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일단 리카가 앞서 가며 “아까는 반가웠습니다.” 하고 말을 걸었다. (P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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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어째서 나하고? 친구. 많잖아요, 학생이니까.” 리카가 또 한 번 물었다.

“귀찮으면 안 하겠지만요.” 쀼루퉁해져서 말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문 채, 청바지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놓고 리카 옆을 걸어갔다. 리카는 마치 엄마한테 혼난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리카는 어쩐지 자기보다 열두 살이나 연하인 이 청년은 놀리는 것도 아니고, 빈말도 아니고, 자신에게 뭔가 매력을 느낀 것 같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하필, 지루한 얘기밖에 못하는데, 공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하는 수많은 의문을 지금만큼은 의식적으로 옆으로 치워두기로 했다. 기뻤다. 3등급이었던 성적이 2등급으로 오른 것 같은, 선발팀으로 뽑힌 것 같은,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것 같은 기쁨이었다.

“고마워요.”

리카는 멈춰 서서 고타에게 머리를 숙였다. 기쁨에 대한 인사였다. 고타는 놀란 듯이 큰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말하고 자기도 얼른 머리를 숙였다. 머리를 든 고타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P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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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후미의 전근이 결정된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아직 타진한 것뿐이지만, 내년에는 전근이 확실하다고 한다. 그래도 상하이와 베이징에 식품 가공 공장을 짓게 되어, 상품개발부로 이동하게 되는 마사후미는 연수라는 명목으로 국내 출장뿐만 아니라, 해외 출장도 명령받게 되었다. 고타가 부탁한 학생영화에 출연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10월 말부터 연말에 걸쳐 주말에 몇 번인가 촬영 현장에 간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마사후미의 부재는 나가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혹은 고타의 유혹에 어울리라는 뭔가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P145)


“이제 만나주지 않는 거 아니죠?”

리카는 돌아보았다. 까치집을 지은 터벅한 머리에 껑충하게 큰 남자아이가 조심스럽게 리카를 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내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란 걸 어떤 식으로 깨닫게 해줄까. 리카는 생각했다. 불안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고타와 마주 서 있자, 마치 리카는 자신이 이 아이에게 간단히 뭔가를 빼앗을 여자처럼 느껴졌다. 자존심이며 자신감이며 허세며, 그런 것을 한순간에 빼앗을 것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것을 빼앗을 사람이 절대 아닌데.

“다음에 또 봐.” 리카가 웃으며 말하자, 고타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얼굴이 환해졌다.

얼마나 무방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아이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지만 울고 싶어졌다. 리카는 얼른 고타에게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P155)


리카의 생활은 그날을 경계로 달라졌다. 그때 리카는 그렇게 뚜렷이 의식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훗날 돌이켜 보면 확실히 그날 아침 이후,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변화의 계기는 고타와의 섹스가 아니라, 그날 아침의 정체 모를 만능감이었던 것 같다. 리카는 일을 마친 뒤 반드시 샛길로 샜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주로 다마 플라자나 아오바다이의 백화점이었지만, 마사후미의 귀가가 늦어진다는 걸 아는 날은 후타코다마가와나 시부야까지 나갔다. 옷과 액세서리를 사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리카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조감이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고타는 나의 정체를 간파하지 않을까. 내가 자존심이나 자신감을 빼앗을 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라, 한낱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주부란 걸 간파하지 않을까. 그리고 어째서 이런 아줌마를 안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게 아닐까.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터질 듯이 탱탱한 피부를 가진 여자아이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설령 그것이 싸구려여도, 하찮은 것이어도 옷을 사고 액세서리를 사고 화장품을 하나 사면 그 초조함은 덜해졌다. (P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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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죄책감은 있었다.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러나 리카에게 그것이 범죄라는 의식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조는 고타의 가족이고, 고타의 말대로 그 예금 총액에서 보면 고타가 빌린 액수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만 빌려서 이자를 붙여 돌려놓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고타가 반년 이내에 갚지 못하면 자신이 대신 갚아주면 된다고조차 생각했다.

“이쪽이 증서입니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보관해주세요.”

리카는 정기예금증서를 책상에 올려놓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조를 물끄러미 보았다. (P168-169)


“이게 뭔데요?” 봉투를 든 고타는 내용물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뭔데요, 이게” 하고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요전에 말했던 소비자금융의 빚. 일단 그걸로 한꺼번에 갚아. 이봐, 매달 5만 엔이라고 하지만, 그러고 있으면 이자만 늘어나. 그러니까 일단 그걸로 전액 갚고, 대신 내게 5만 엔씩 보내줘.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까.”

고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봉투와 리카를 번갈아 보다가, “마음은 고맙지만, 됐어요. 이런 것” 하고 봉투를 리카에게 되밀며 커피를 들이켰다.

“나쁜 소리 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싫어요. 그렇지만 이걸 리카 씨한테 빌린다 해도 언 발에 오줌 누기예요.”

“무슨 소리야?” 리카가 테이블로 몸을 내밀며 물었다.

고타는 리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자조하듯 미소를 짓더니 “리카 씨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에요.”라고 했다. (P174)


“리카, 친정도 잘살고 결혼도 했잖아? 남편은 평범한 회사원 같았지만, 집도 있고, 돈이 곤란할 리 없었을 텐데.”

“그래도 그런 사건은 돈이 궁하고 안 궁하고 한 것과 관계없는 것 아냐?”

“그럼 뭐하고 관계있는 거야?”

“그야 역시 남자 아닐까. 옛날에도 있었잖아. 비슷한 사건, 그것도 남자한테 퍼다 바친 거였잖아.”

“그럼 리카도 남자한테 퍼다 바쳤다는 거야?”

“거기까진 모르지. 그렇지만 주간지에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니?”

“어머, 너 주간지 같은 것 읽었어?”

“미용실에 있기에 봤지. 솔직히 궁금하지 않니, 리카 얘기.”

“거기엔 뭐라고 쓰여 있었어?”

“그러니까 남자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돈과 관련된 여자의 범죄에 남자가 얽히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도망도 누군가가 협력했을 게 분명하다고 쓰여 있었어.” (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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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에는 아무 예정도 없었다. 마사후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일본 연휴가 상하이에서도 휴일일 리는 없다는 걸 4월 중순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가족끼리 캠프를 가네, 남편은 버려두고 여자 친구들과 훗카이도를 가네, 철도를 좋아하는 아이한테 시달려서 지방 열차를 타러 가네, 탈의실에서 오가는 시간제 사원 동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리카는 자신도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일. 28일과 30일부터 2일까지 휴가를 받으면 10일 연휴가 된다. 행원 중에도 시간제 사원 중에도 그러는 사람이 있었다. 10일 동안, 고타와 함께 줄곧 있을 수 있다면 리카는 몽상했다.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었다. 상상한 적도 없어서 열흘이나 같이 있고 싶은지 어떤지 모르겠다. 무엇을 하며 보내면 좋을지도, 하지만 마사후미가 부재중인 지금, 그것이 가능하다.

“리카씨는 뭐할 거야?” 여자들이 물었다.

“남편도 없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잠이나 잘까봐.” 리카는 웃었다.

“남편이 없을 때, 마음껏 날개를 펼치면 되지.” (P146)


그렇게 생각한 리카는 그래서 출근을 위해 역에 갈 때나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붐비는 전철을 탈 때면, 주위에 자각 없이 뿌려진 채 방치된 악의에 새삼 놀랐다. 먼저 가기 위해 노인을 밀치고 가는 여자가 있고, 그 인간 뒈졌으면 좋겠어 하고 깔깔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금발의 여자아이들이 있고, 가방에 손을 찔러 넣고 정액권을 찾는 리카에게 혀를 차며 어깨를 부딪치고 가는 젊은 남자가 있고, 할머니를 밀어내고 빈자리에 앉는 중년 남자가 있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잔돈을 던지는 역내 매점의 판매원이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 토사물이 펼쳐져 있고, 약국 계산대에는 긴 줄이 있고, 번화가 보도에는 시끄러운 음악이 큰 소리로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안정이 되지 않아 열심히 익숙한 척했던 스위트룸에 도착하면, 진심으로 안도하게 된 것은 체크인한 지 사흘째였다. 청결하고, 안전하고, 선의로 둘러싸여 있고, 사랑하는 남자가 아이처럼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가 하고 리카는 생각했다.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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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한 장의 위증서가 완성된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리카는 세 시간 정도만 자고서 목욕도 하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고, 페트병 물만 마시며 작업에 몰두했다. 오전에는 마치다에 있는 화방에 가서 증서와 비슷한 두께의 종이를 여러 종류 사고, 지점장 노무라 히로시의 도장을 새겼다. 그의 아내인 것처럼 도장가게에서 복제를 주문했다.

리카는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서재에서 겨우 제대로 완성된 정기예금 증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진짜와 비교하면 복사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티가 났다. 글씨도 부옇게 망가지고, 너무나도 값싸 보인다. 하지만 은행에서는 이 증서를 은행명과 일러스트가 들어간 물색 봉투에 넣어서 건넨다. 그 봉투에는 두 군데 길고 좁은 창이 있고, ‘정기예금증서’라는 글씨와 고객의 이름이 보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리카는 어떤 고객이 통장의 담보 명세에 대한 기재뿐만 아니라 증서를 달라고 하는지 파악하고 있듯이 어느 고객이 증서를 꼼꼼하게 보지 않는지도 파악했다.

인감은 4일 후에 완성되었다. 리카는 그걸 우선 히라바야시 고조에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죄의식은 전혀 없었다. 당연하다. 손자 여행비용인걸, 말로 하지 않아도 리카에게는 그런 의식이 확실히 있었다. 처음에 부정을 저질렀을 때와 완전히 똑같이.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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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 이후, 리카가 가짜 정기예금증서를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은 단순히 매달 카드 사용액이 월급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가짜 증서를 남발한 건 아니었다. 담당하는 고객 가운데, 정기증서를 만들어도 그 정기증서 자체를 잘 확인하지 않는 사람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런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증서가 든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는 사람. 열어봐도 금액만 대충 보고 끝내는 사람. 리카는 누군가에게 속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해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유복함으로 둘러싸여 선의만 맛보고 살아온 듯한 사람들.

리카는 점점 통장에 인자하는 게 아니라 증서 만들기를 권하게 되었다. “통장 하나에 정기예금 내용을 전부 인자하면 만에 하나 통장을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았을 경우, 한꺼번에 저축 금액을 파악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최근 다른 은행에서는 단순히 작업을 간략화하기 위해서 통장에 인자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설명하지만, 저는 인자되지 않은 증서를 만들어 갖고 계시기를 권합니다.” 하고, 능청스러운 얼굴로 설명했다. 젊은 고객이든 연장자든 의심이 많거나 금리 변동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고객은 당연히 피했다. 리카가 증서를 권한 사람들 대부분은 리카의 말에 따라 전환했다. 그것을 거부한 사람의 이유는 단지 ‘귀찮아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전환한 고객들에게는 리카의 위조 증서를 나누어주었다. 그것과 바꾸어 그들에게 받은 금액은 50만 엔이나 70만 엔으로 그 돈은 모두 리카의 계좌로 들어가서 카드대금 자동이체일에 정산되었다. 리카는 노트에 가짜 정기예금을 건넨 고객의 이름, 금액, 이자, 만기일을 세밀하게 적었다. 그리고 리카는 그들 고객에게 거래보고서가 우송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손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P267-268)


“있지.” 불꽃놀이를 보면서 리카가 말했다.

“만약 내가 빈털터리가 되어서 이 집 임대료도 내지 못하고, 여름 여행도 갈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귀에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 울려퍼졌다. 리카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실감이 없었다.

“그건 혹시 이혼을 생각한다는 말?”

펑. 하는 파열음이 사라진 뒤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엉뚱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리카가 잠자코 있자, 고타가 말했다.

“리카 씨, 나를 무시하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불꽃을 쏘아 올리는 소리에 지워졌지만, 리카의 귀에는 들렸다.

“돈이 있어서 같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P295)


리카는 고타 옆에 서서 푹푹 찌는 밤공기를 맞으면서 자신들이 보내온 시간을 생각했다. 앞으로 지내게 될 미래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사랑이나 연애 때문이 아니다. 지금 막 고타가 뜨겁게 얘기한 것처럼 뭔가 모호한 것으로 맺어져 있는 게 아니다. 마사후미와 혼인 신고할 때 제출한 혼인신고서보다 훨씬 무겁고 훨씬 강한 것으로 맺어져 있다.

네온사인과 불꽃이 어슴푸레하게 물든 밤하늘이 펑펑하는 굉음과 함께 덮쳐와, 천천히 자신을 짓누르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카는 얼른 고타의 손을 잡았다. 고타는 리카에게 손을 잡혔지만, 맞잡지 않았다.

“불꽃 너머에 달이 있어요.” 고타가 불쑥 말했다. 정말로 깎은 손톱처럼 가는 달이 걸려 있었다. 불꽃이 떠오르면 그것은 사라지고, 불꽃의 빛이 빨려들 듯이 사라지면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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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귀가한 리카는 또 인터넷으로 탐정 사무실을 찾았다. 여기 저기에 사무실이 있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도심에만 몇 군데 사무소가 있는 곳. 다음날 점심시간에 고객의 집에서 고객의 집으로 이동하는 도중, 공중전화로 의뢰를 했다. 그러면서 확실히 휴대전화가 있으면 편리할지도 모르겠다고, 리카는 생각했다.

진단결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환자처럼 결국 리카는 세 군데 탐정 사무실과 흥신소에 의뢰했다. 모든 곳으로부터 결과를 받은 것은 8월로 세상이 끝나는 일도 없이 지금까지와 똑같이 계속되었다. 리카는 고객과 은행과 집과 소비자금을 사이를 뛰어다니며 숫자 덩어리를 계속 굴렸고, 마사후미가 부탁하는 대로 식품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심야에 스캐너와 복사기를 돌리며 증권과 정기예금증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 군데 탐정 사무실이 내린 결론은 거의 모든 점에서 일치했다.

히라바야시 고타는 스물두 살의 대학생 니시 마도카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P307)


그리고 9월 8일, 리카는 마사후미와 함께 이른 아침 집을 나와, 나리타공항으로 향했다.

마사후미가 라운지에서 쉬고 있는 동안, 리카는 이노우에 앞으로 보낼 편지를 우편함에 넣고, 공중전화로 고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네 번의 호출음 끝에 “예”하고 고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데.” 리카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 뭔데요?” 하는 고타의 목소리는 전처럼 기쁨에 넘치는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낙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앞으로 만날 수 없게 될 텐데. 저기, 나를 전부 잊어줘. 나하고 만난 것도, 나와 보낸 시간도.”

“예? 뭐라고요?” 고타의 목소리는 드디어 귀찮은 기색을 보였다.

“그 집도 되도록 빨리 내놓는 편이 좋아. 월세는 올해 말까지 자동이체 해놓았지만.”

고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카는 계속했다.

“혹시 누가 찾아와서 우메자와 리카를 아는가 물어도 모른다고 해. 만난 적도 없다고 해. 알겠지?”

우메자와 리카를 아는가.

대체 누가 우메자와 리카를 알고 있다고 할까. 나조차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리카는 고타의 대답을 듣지 않고, 알겠지? 하고 한 번 더 다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방콕을 떠나 리카는 같은 숙소의 청년에게 들은 대로 야간버스를 타고 치앙마이로 향했다. (P336-337)


쏟아지는 빛과 소음 속을 무엇 하나 보지 않고, 무엇 하나 동요하지 않고 걷고 있으면, 리카는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흥분을 느꼈다. 억눌러도, 억눌러도 그것은 모공에서 분출되는 땀처럼 끊임없이 흘러넘쳤다.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아니, 갖고 싶은 것은 이미 모두 이 손 안에 있다. 커다란 자유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에 이른 아침 역의 플랫폼에서 느낀 행복감이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느껴질 만큼, 그 기분은 확고하고 강하고 거대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이 엄청나게 큰 자유는 스스로는 벌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을 쓰고 난 뒤에 얻은 것일까, 아니면 돌아갈 곳도 예금통장도 모두 놓아버린 지금이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P33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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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는 겨우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학이며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몇 시 전철을 탔는지, 그런 세세한 사건 하나하나까지가 자신을 만들어온 거란 걸 이해했다. 나는 내 속의 일부가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믿을 수 없는 부정을 태연히 되풀이할 때까지, 선도 악도 모순도 부조리도 모구 포함하여 나라는 전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모두 내팽개치고 도망친 지금 역시 더 멀리로 도망치려 하는, 도망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나도 역시 나 자신이라고.

가자, 이다음으로.

리카는 생각했다. 이다음에 미지의 내가 있다. 끝까지 도망치면 나는 더 새로운 나를 만난다. 그러니까 가자, 어차피 도망쳤다. 더 멀리 도망치면 된다. 커피숍 의자에서 일어나, 앞치마를 두른 가게 여자아이에게 주스 값을 냈다. 가게를 나오려는 순간,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져 마른 아스팔트에 얼룩을 만들었다. 비가 와요, 하고라도 말하듯이 여자아이는 리카를 보았지만, 리카는 그대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억수 같은 비가 되었다. (P342)


아키는 은행 돈을 착복한 리카를 생각했다. 사건을 알고 난 뒤, 마치 그녀가 내 속에 살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키는 리카를 자주 떠올렸다. 리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리카도 역시 이런 식으로 무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또 리카를 만날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도, 마시다 만 커피도 그대로 두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했다. 만약 리카를 만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물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 물을까, 아니면, 그만큼 큰돈의 대가로 무엇을 놓을 수 있었는지 물을까.

가게를 나왔다. 네온사인으로 밤하늘은 희뿌옇다. 진하지 않은 밤하늘에 달도 별도 뜨지 않았다. 아키는 불빛이 환한 거리를 걸었다. 맨션까지 5분도 안 걸리는데, 부모를 잃어버려 낯선 곳에서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생각하는 사이 눈물까지 났다. 어째서 눌물이, 생각하면서 아키는 뺨을 타고 턱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고 되뇌면서 필사적으로 걸었다.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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