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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모모>

영화 <모모Momo> 1989년

by 노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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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다란 도시의 남쪽 끝머리. 밭이 시작되고 갈수록 누추해져 가는 오두막집들이 있는 곳. 빽빽한 소나무 숲에는 무너진 작은 원형극장이 숨어 있었다. 그곳은 저 옛날에도 화려한 극장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극장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곧 모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즈음에 이 폐허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몇 안 되는 고고학 교수들이 이곳을 알고는 있었지만, 더 연구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 폐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은 그 대도시에 있는 다른 유적지와 견줄 만한 대단한 유적지도 못 되었다. 그래서 어쩌다 관광객 몇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 그곳에 와서는, 잡초가 무성한 좌석들 사이를 오르내리고 소란을 떨다가 기념 사진을 찍고 다시 가 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고 나면 이 원형 석조 극장 터에는 다시 고요함이 깃들이고, 여치들은 잠시 중단했던 똑같은 음의 끝없는 노래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P13)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극장터의 무대 밑에는 반쯤 무너져 내린 방이 몇 개 있었다. 그 방들은 바깥 벽에 난 구멍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모모는 이곳을 집처럼 꾸며 놓았다. 어느 날 점심 무렵에 근처에 사는 몇몇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모모를 찾아와 이것저것 캐물었다. 모모는 내쫓길까봐 걱정이 되어 마주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모는 곧 그들이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역시 가난하고,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한 남자가 물었다.

“그래, 여기가 마음에 드니?”

모모는 대답했다.

“예.”

“그러면 여기서 계속 살 작정이니?”

“예.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없어요.”

“내 말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모모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여기가 제 집이에요.”

“꼬마야, 그럼 넌 어디서 온 거니?”

모모는 손으로 어딘가 저 먼 곳을 가리키는 막연한 흉내를 내 보였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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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 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모모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P22-23)


친구가 아주 많아도, 특히 더 좋고 더 가깝게 느껴지는 친구가 있게 마련이다. 모모 역시 그랬다.

모모에게도 특히 좋아하는 친구가 둘 있었다. 그들은 매일 모모를 찾아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가졌다. 한 사람은 젊은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이었다. 모모에게 둘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나이 든 친구의 이름은 도로 청소부 베포였다. 물론 베포에게는 다른 성이 있었다. 하지만 직업이 도로 청소부였고, 모두들 도로 청소부 베포라고 불렀기 때문에, 베포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P48)


베포는 곰곰이 생각했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 시간은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하루 종일 걸리기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대답을 했다. 그동안 당연히 자기가 뭘 물어 보았는지 잊어 버린 상대방은 베포의 뒤늦은 대답에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모는 달랐다. 모모는 베포가 대답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었고, 또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모모는 베포가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포는, 모든 불행은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거짓말, 그러니까 단지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지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P49)


모모와 가장 친한 또 다른 친구는 젊은 사람이었고, 모든 면에서 도로 청소부 베포와 정반대였다. 잘생긴 외모, 꿈꾸는 듯한 눈,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솜씨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농담과 우스개 소리가 마를 날이 없었고, 어찌나 경쾌하게 웃는지 같이 있는 사람은 그러고 싶지 않아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기롤라모였다. 하지만 누구나 그냥 간단히 기기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이 든 베포를 직업에 따라 불렀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직업이 없긴 하지만 기기도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자, 관광 안내원 기기. 이미 말해듯이 관광 안내원이란 직업은 기기가 기회가 닿으면 갖는 수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식으로 채용된 것도 아니었다.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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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모에게 말했다.

“그런 건 재주라고 할 수 없어. 부자가 되려면 모름지기 재주가 있어야지. 모모, 약간의 편안함을 얻기 위해 인생과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한 번 보렴! 아니, 난 그렇게는 안 하겠어. 커피 한 잔 값 치를 돈이 없다 해도, 기기는 기기인 거야!”

관광 안내원 기기와 도로 청소부 베포처럼 전혀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고 있는 전혀 딴판인 두 사람이 서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다. 묘하게도 기기를 경망스럽다고 탓하지 않는 사람은 나이든 베포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말솜씨 좋은 기기가 비웃지 않는 사람은 괴짜 노인 베포밖에 없었다.

그 이유 역시 꼬마 모모가 두 사람의 말에 귀기울여 듣는 태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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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날에 모모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단다. 공주는 예쁜 옷을 입고 세상의 저 위쪽, 눈 덮인 산꼭대기 무지개색 유리성에서 살고 있었지.

모모 공주는 갖고 싶은 건 모두 가질 수 있었어. 최고급 음식만 먹었고, 최고로 달콤한 포도주만 마셨지. 비단 침대에서 잤고, 상아로 만든 의자에 앉았단다. 그러니까 모든 걸 갖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공주는 완전히 혼자였어.

공주 곁에 있는 모든 것. 그러니까 시중을 드는 하인들과 시녀들. 개와 고양이와 새들. 심지어는 꽃까지 모두 거울에 비친 상이었거든.

모모 공주는 순은으로 만든 커다랗고 둥근 요술 거울을 갖고 있었어. 날마다 공주는 밤에도 낮에도 이 거울을 세상에 내보냈지. 이 커다란 거울은 육지와 바다, 도시와 들판 위에서 둥실 떠다녔어. 거울을 본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저건 달이야’하고 말할 뿐이었지......” (P67)


마녀가 이렇게 대답하면서 어찌나 달콤하게 미소를 지었던지. 가엾은 왕자는 그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단다.

‘하늘을 떠다니는 둥근 은거울을 일년 동안 쳐다보면 안 돼요. 만약 거울을 보면, 그 순간 왕자님은 자기가 뭘 갖고 있는지를 까맣게 잊게 될 거예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고,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 없는 “오늘나라”로 가서 이름 없는 가련한 떠돌이로 살아야 하는 거죠. 어때요, 괜찮으시겠어요?’

기롤라모 왕자는 큰 소리로 대답했지.

‘그것뿐이라면 쉬운 조건이군!’

그런데 그 동안 모모 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왕자는 오지 않았어.

그래서 공주는 세상으로 나가서 직접 왕자를 찾기로 했단다. (P70)

기기가 이야기를 마치자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모모가 물었다.

“훗날 두 사람은 결혼했을까?”

“그랬을 거야. 먼 훗날에.”

“두 사람은 그 동안에 죽었을까?”

기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우연히 알게 됐지만 확실한 얘기야. 요술 거울을 혼자 들여다본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존재가 돼. 하지만 둘이서 거울을 보면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어. 그런데 두 사람은 함께 거울을 보았거든.”

커다란 은빛 달이 컴컴한 소나무 위로 떠올라 폐허의 돌무더기에 신비스러운 빛을 쏟아 부었다. 모모와 기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앉아 달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그 순간이 지속되는 한 자신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임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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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이 진리를 회색 신사들도바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한 시간, 1분, 아니, 단 1초의 가치를 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가 피에 대해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잘 알고 있었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지식에 맞게 행동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대상으로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아주 방대한 계획이었다. (P77)


하지만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P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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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남보다 더 많은 걸 이룬 사람. 더 중요한 일물이 된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우정, 사랑, 명예 따위가 다 그렇지. 자, 넌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했지? 우리 한 번 냉정하게 검토해 보자.”

회색 신사는 담배 연기를 뿜어 허공에 동그라미 몇 개를 만들었다. 모모는 맨발을 치마 속에 감추고, 헐렁한 웃옷 속으로 될 수 있는 대로 깊이 몸을 파묻었다.

회색 신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거다. 네가 있어서 친구들이 얻는 게 뭐지? 친구들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되나? 아니, 그렇지 않아. 친구들이 남보다 앞서 가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인생에서 뭔가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 물론 그렇지 않아. 넌 친구들이 시간을 아끼려고 노력할 때에 도와 주었니? 오히려 그 반대야. 너는 친구들이 하는 일마다 못하게 훼방을 놓고 있어. 길목에 버티고 서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거야! 아마 지금까지 네가 그런다는 걸 몰랐겠지. 하지만, 모모, 너는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친구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어. 그래, 네가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만 넌 네 친구들의 적이야! 그러면서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모모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모는 회색 신사가 혹시 옳은 건 아닐까. 잠시 자신도 없어졌다.

회색 신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네 친구들을 너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거야. 네가 친구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들을 도와야 해. 우린 네 친구들이 무언가를 이루길 바란다. 우리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친구인 거야. 우린 그들이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네가 훼방을 놓는 걸 묵묵히 구경만 할 수는 없어. 우린 네가 그들을 내버려 두도록 조치를 취하기로 했지. 그래서 이 예쁜 물건들을 네게 선물하는 거야.”

모모는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우리’가 누구예요?”

회색 신사는 대답했다.

“우리는 시간 저축 은행에서 나왔다. 난 영업사원 BLW 553 c호지. 난 개인적으로 내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거야. 시간 저축은행은 허튼 장난을 절대 용납하지 않거든.” (P1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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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얼굴을 알고 있는걸. 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

기기는 새로운 생각이 잇따라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다른 수를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회색 신사가 시간 저축 은행에 대해서 말했다고 했잖아. 그건 어떤 건물일 거야. 분명 시내 어딘가에 있겠지. 그러니까 그 건물을 찾아 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걸. 아주 특별한 건물일 테니까. 으스스한 잿빛 건물일 거야. 창문은 하나도 없을걸. 아까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금고같이 생겼을 거야!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건물을 찾아 내서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우리 모두 양 손에 권총을 하나씩 들고 말이지. ‘당장 훔쳐 간 시간을 내놔!’ 난 이렇게 소리칠 거야......”

모모는 걱정스레 말을 잘랐다.

“하지만 우린 권총이 없잖아.”

기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면 권총 없이 하지 뭐. 그렇게 되면 그 자들이 오히려 더 놀라 자빠질 거야. 우리가 나타난 것만 보고도 공포에 질려 버릴 거라니까.”

“우리 셋이 다가 아니라, 우리 편이 좀더 많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도 함께 찾으면 시간 저축 은행을 좀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야.” (P139)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회색 신사들의 힘은 존재가 아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은밀히 일을 하는 데서 나옵니다. 따라서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수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상을 알리는 거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대규모 어린이 시위를 벌이는 겁니다!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들어 거리마다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거죠. 그리고 전 도시 사람들을 여기 우리가 있는 옛 원형극장으로 초대해서 진상을 깨우쳐 주는 겁니다. 아마 엄청난 소동이 일어나겠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이리로 몰려올 겁니다! 끝간 데 없이 많은 군중이 모이면, 우리는 무서운 비밀을 털어 놓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은 단번에 변할 거예요! 그들은 어느 누구한테서도 더 이상 시간을 훔칠 수는 없을 거예요. 누구나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갖게 될 거구요. 이제부터 시간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뜻을 모으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대답으로 열렬한 환호성이 터졌다. (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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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처음에는 어스름한 새벽 햇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이상한 빛은 갑자기, 정확히 말하면 모모와 거북이 그 거리로 접어든 순간 비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밤도 아니고, 그렇다고 낮도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빛은 새벽 햇살 같지도 않고, 저녁 햇살 같지도 않았다. 그 빛은 모든 사물의 윤곽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빛이 나오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사방에서 동시에 빛이 나온다고 해야 할 듯했다. 도로의 아주 작은 돌멩이까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림자들은 모두 제가끔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 나무는 왼쪽에서, 이 집은 오른쪽에서, 그리고 저 위쪽의 기념비는 앞쪽에서 빛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기념비는 모양이 아주 이상했다. 까만 돌로 된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받침대 위에 거대한 하얀 달걀이 놓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집들도 모모가 지금까지 보았던 집들과는 달랐다. 눈이 부실 듯한 하얀색 일색이었던 것이다. 창문 안쪽으로는 컴컴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서 안에 누가 살긴 하는지 어떤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모는 이 집들이 거주용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어떤 목적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은 물론 강아지나 새,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듯했다. 마치 유리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모모는, 거북이 오히려 전보다 더 느리게 가는 듯한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놀랍기만 했다. (P178-179)

“아, 카시오페이아. 돌아왔구나! 헌데 꼬마 모는 안 데리고 왔니?”

모모가 돌아보니, 모래시계 사이에 난 좁은 길 위에 머리가 하얀 자그만 체구의 노인이 서서 허리를 굽혀 발 아래 바닥에 있는 거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금실로 수놓은 기다란 웃옷에 푸른 비단 반바지를 입고, 하얀 양말에 커다란 황금 버클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양 손목과 목덜미에는 레이스가 물결쳤고, 하얀 머리칼은 머리 뒤쪽에 조그맣게 묶여 있었다. 모모는 그런 차림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모처럼 상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옷차림이 2백 년 전에 유행했던 차림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으리라.

노인은 여전히 거북 쪽으로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뭐라고? 그 애가 벌써 왔다고? 대체 어디 있지?”

노인은 작은 안경을 꺼내 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베포 할아버지의 안경처럼 조그마했지만, 금으로 만들어진 점이 달랐다.

“여기 있어요!”

모모가 소리치자 노인은 반가운 미소를 머금고 두 팔을 버리며 모모에게 다가왔다.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노인은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바로 앞에까지 와서 모모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드는 노인은 모모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환영한다! 아무 데도 없는 집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해. 모모야. 나를 소개해도 되겠지. 난 호라,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라고 한단다.” (P197-198)


“그런데 왜 얼굴이 잿빛이에요?”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 가기 때문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 간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때만 살아 있지.”

“그럼 회색 신사들은 사람이 아녜요?”

“아니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 뭐예요?”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어디서 온 거예요?”

“그들은 사람들이 생겨날 기회를 주면 생겨난단다. 기회만 주어지면, 금세 생겨나는 게야.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기들을 좌지우지할 기회까지 주고 있어.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그들은 벌써 사람들을 좌지우지한단다.”

“만약 시간을 더 이상 훔칠 수 없게 되면요?”

“그럼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무(無)로 돌아가야 하지.”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서 안경을 벗겨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박사는 잠시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P208)

모모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미래다!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그건 미래예요?”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이건 과거예요!”

호라 박사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모모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어려워요. 셋째는 대체 뭘까요? 셋 중의 막내라고 했어요. 하지만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둘도 없다고 하잖아요. 또 셋 중 유일하게 있다고 하구요!”

모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쑥 소리쳤다.

“그건 현재예요! 이 순간요! 과거란 지나간 순간이고, 미래란 앞으로 올 순간이에요! 그러니까 현재가 없다면, 다른 둘은 있을 수 없는 거죠. 맞아요. 그래요!:

모모의 뺨은 열기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현재는 미래가 과거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잇다는 말이군요!”

모모는 놀라워하며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현재란 처음부터 없는 거고. 과거랑 미래만 있는 건가요? 예컨대 지금 이 순간은 제가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벌써 과거가 되어 있는 거죠! 아하, 이제 알겠어요. ‘셋째를 보려고 하면, 다른 두 형 중의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라는 구절의 뜻을요. 이제 나머지도 다 이해가 돼요. 우리는 세 형제 중의 하나만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현재만 있다고 생각하든가, 아니면 과거나 미래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현재, 과거, 미래는 저마다 다른 둘이 있어야만 있을 수 있으니까요! 머리가 핑글핑글 도네요!”

“헌데 수수께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셋이 함께 다스리는 커다란 왕국은 뭘까? 셋이 왕국 자체이기도 하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이고?”

모모는 어쩔 줄 모르고 박사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게 뭘까?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합하면 뭐가 될까?

모모는 커다란 홀을 둘러보았다. 수천, 수만 개의 시계를 훑어 보던 모모의 눈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났다. 모모는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시간이에요! 예, 그런 시간이에요! 시간요!”

모모는 기쁨에 겨워 팔짝팔짝 뛰었다. 호라 박사는 재촉했다.

“그럼 세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은 뭔지 말해 보렴!”

“그건 세상이에요.” (P213-215)

영화 모모 10.jpg

문득 ‘언제나 없는 거리’를 지나올 때에 모든 것이 뒷걸음치는 듯했던 일이 생각났다. 모모는 입을 떼어 물었다.

“박사님은 죽음인가요?”

호라 박사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박사가 대답했다.

“죽음이 뭐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게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람들의 인생을 훔칠 수 없지.”

모모는 제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럼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며 매 시간마다 진실을 말해 주지. 허나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란다. 사람들은 오히려 두려움을 불어 넣는 자들을 더 믿고 싶은 모양이야. 정말 수수께끼야.”

“저는 두렵지 않아요.”

호라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모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었다.

“시간이 어디서 오는지 보고 싶니?”

모모는 나직이 대답했다.

“예.”

“내가 데려가 주마, 허나 그곳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해.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니?”

모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P218-219)


그동안 몇 개월이 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모에게는 전에 겪었던 그 어떤 시간보다 긴 시간이었다. 사실 진정한 시간이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한 외로움은 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법이다. 아마 이 한 마디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호라 박사에게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면 --실제로 모모는 여러 번 그 길을 찾으려고 해 보았다-- 모모는 이렇게 사정했으리라. “저에게 더 이상 시간을 나누어 주지 마세요!” 라고. 혹은 이렇게 애원했으리라. “‘아무 데도 없는 집’에서 영원히 박사님과 같이 살게 해 주세요”라고.

하지만 카시오페이아가 없는 모모로서는 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카시오페이아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오래 전에 호라 박사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르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카시오페이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모모는 시내에서 항상 자기를 찾아오던 아이들 셋을 만났다. 파올로와 프랑코, 그리고 언제나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왔던 소녀 마리아였다. 세 아이는 전혀 딴판이 되어 있었다. (P291)

드디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음성은 다른 방향에서 들려 왔지만, 마찬가지로 잿빛이었다.

“그럼 툭 터놓고 말해 보자. 불쌍한 꼬마야. 넌 혼자야. 친구들은 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이제 네 시간을 너와 나누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꾸민 일이지. 이제 우리가 얼마나 막강한지 알겠지? 우리에게 반항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 수많은 외로운 시간들. 그게 대체 지금 네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너를 짓누르는 저주이고, 숨통을 누르는 무거운 짐이며, 너를 빠뜨려 죽일 것 같은 드넓은 바다, 까맣게 태워 죽일 듯한 쓰라린 고통일 뿐이야. 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거야.”

모모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귀기울여 들었다.

음성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야. 내일, 아니면 일주일 뒤, 아니 일년 뒷일지 모르지. 언제라도 상관없어. 우리야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우리는 언젠가는 네가 네발로 기어와 이렇게 말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다만 이 무거운 짐에서 나를 풀어 주세요!’ 하고 말이야. 혹시 벌써 그런 건 아니냐? 그러면 그렇다고 말만 해.”

모모는 고개를 저었다.

음성이 싸늘하게 물었다.

“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거냐?” (P305-306)

영화 모모 11.jpg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거야.”

거북은 아까보다도 더욱 느릿느릿 기어갔다. 전에도 그랬듯이 모모는 느리게 감으로써 더 빨리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발 밑의 거리가 스스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았다. 느리게 가면 느리게 갈수록 더욱 빨리 갈 수 있었다.

느릿느릿 갈수록 더욱 빨리 갈 수 있으며,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욱 천천히 갈 뿐이라는 것은 하얀색 구역의 비밀이었다. 전에 석 대의 자동차로 모모의 뒤를 쫓았던 회색 신사들은 그 비밀을 몰랐고, 그래서 모모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 그들은 소녀와 거북을 따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소녀와 거북 뒤를 똑같이 천천히 따라갈 뿐이었다. 마침내 그들도 비밀을 간파하게 되었다. 모모와 카시오페이아 등 뒤의 하얀 길은 회색 신사들의 무리로 천천히 채워졌다. 그곳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방법을 터득한 그들은 심지어는 거북보다도 느릿느릿 걸었다. 그들은 점점 간격을 좁혀 와, 더욱 더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거꾸로 된 경주, 누가 더 느린지 내기하는 경주 같았다.

길은, 이 꿈의 거리를 꼬불꼬불 지나 하얀 구역 내부 깊숙이로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없는 거리’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이르렀다.

카시오페이아는 이미 그 거리로 들어서 ‘아무 데도 없는 집’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모모는 그 거리에서는 몸을 돌려 뒷걸음질을 쳐야만 비로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그 순간, 모모는 어찌나 놀랐던지 심장이 멎어 버릴 뻔했다.

시간 도둑들이, 움직이는 회색 담장인 양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깨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꽉 메우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 행렬은 끝간 데 없이 길었다.

모모는 소리를 질렀지만,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모모는 뒤따라오는 회색 신사들의 무리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면서, 뒷걸음질을 쳐서 ‘언제나 없는 거리’로 뛰어 들어섰다.

그러자 또 다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맨 앞에 섰던 추적자 몇 명이 ‘언제나 없는 거리’로 들어서려 했을 때였다. 그 순간, 그들은 모모의 눈앞에서 말 그대로 무(無)로 해체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앞으로 뻗친 두 팔이 사라졌고, 다음에는 두 다리와 몸뚱이가 사라졌다. 끝으로 경악과 공포에 질린 얼굴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모모만이 아니었다. 뒤따라오던 회색 신사들 역시 그 광경을 보았다. 앞에 섰던 회색 신사들이 버티고 서서 뒤를 따르던 무리를 막았다. 그들 사이에서 잠시 치고 박고 싸우는, 격렬한 싸움 같은 장면이 벌어졌다. 모모는 그들의 성난 얼굴과 위협적으로 흔들어 대는 주먹을 보았다. 하지만 감히 모모를 따라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모모는 ‘아무 데도 없는 집’에 다다랐다. 금속으로 된, 육중하고 커다란 초록색 대문이 스르르 열렸다. 모모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석상들이 있는 복도를 지나서 반대편 끝에 있는 아주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허겁지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가 있는 홀을 지나, 추시계들 사이에 있는 작은 방으로 달려가 아담한 소파에 몸을 던지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는 듯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P317-319)


“시간의 꽃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 때 내가 말했잖니.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을 갖고 있기에 그런 황금빛 시간의 사원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원에 회색 신사들을 들이게 되면, 회색인들은 시간의 꽃을 야금야금 빼앗을 수 있게 된단다. 허나 그렇게 해서 사람의 가슴에서 뽑힌 시간의 꽃은 죽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그 시간은 진짜 흘러간 것이 아니거든, 허나 진짜 주인에게서 떼어 내졌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지. 시간의 꽃은 전심 전력으로 제 진짜 주인에게 돌아가려고 애를 쓴단다.”

모모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모모야, 악(惡)도 나름대로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회색 신사들이 훔친 시간의 꽃들을 어디다 보관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자신들의 냉기로 꽃들을 유리컵처럼 딱딱하게 얼린다는 것만 알고 있지. 그렇게 해서 꽃들이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야. 아마 땅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얼린 시간들을 모두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가 있을 게다. 허나 그곳에서도 시간의 꽃은 여전히 살아 있단다.” (P327)

영화 모모 12.jpg

이 추격적 와중에 몇 명의 회색 신사들이 시간의 꽃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제정신을 잃고 시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들은 차례차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단 두 명이 남게 되었다.

모모는 기다란 테이블이 있는 커다란 홀로 다시 돌아갔다. 두 신사가 테이블을 돌아 모모를 쫓아왔다. 그래도 잡지 못하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모모는 홀 한구석에 몰려 겁에 질린 얼굴로 두 명의 추적자를 바라보았다. 모모는 꽃을 꼭 안았다. 꽃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꽃잎이 단 석 장 달려 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추적자가 꽃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두 번째 추적자가 그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안 돼, 그 꽃은 내 거야! 내 거!”

두 신사는 서로를 떼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첫 번째 신사의 공격으로 두 번째 신사의 입에서 시가가 떨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 신사는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마지막 남은 회색 신사가 모모에게 다가왔다. 입에 문 바싹 탄 꽁초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 꽃 이리 내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입에서 꽁초가 떨어져 주르르 굴러갔다. 회색 신사는 꽁초를 잡으려고 바닥에 몸을 던져 팔을 쭉 뻗었지만 허사였다. 그는 모모에게 잿빛 얼굴을 돌리고,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켜 부들부들 떨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제발, 제발, 착하지, 내게 꽃을 다오!”

여전히 한구석에 몰려 선 모모는 꽃을 더욱 꼭 껴안으려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한 마디도 할 기운이 없었다.

최후의 회색 신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좋아,...... 좋아...... 이제,,,,,,,,,, 모든 게....... 끝난....... 거야.........”

그러고 나서 최후의 회색 신사도 사라져 버렸다.

모모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가 쓰러진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자리로 ㅏ시오페이아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거북 등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문을 열어.”

모모는 문으로 다가가, 그 사이에 꽃잎이 단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시간의 꽃으로 다시 문을 살짝 건드려 열었다.

최후의 시간 도둑이 사라지면서 냉기도 사라져 있었다. (P355-357)

영화 모모 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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