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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영화 <스노우맨> 2017년

by 노용헌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아침 11시. 무채색 하늘에서 쏟아지는 함박눈이 외계 행성의 무적함대처럼 로메리케의 언덕과 정원, 잔디밭을 침공했다. 오후 2시. 릴레스트륌 시에서는 제설기가 가동됐다. 2시 반이 되자, 사라 크비네슬란은 콜로바이엔 가의 드문드문 떨어진 집들 사이로 도요타 코롤라 SR5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몰았다. 완만하게 펼쳐진 시골 풍경 위로 11월의 눈이 오리털 이불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낮에 보니 집들이 달라 보인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너무 달라 보여서 하마터면 그의 집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차가 미끄러지면서 뒷좌석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백미러에 아들의 못마땅한 얼굴이 비쳤다.

“엄마 금방 올게, 우리 아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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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니, 뭘?” 그녀는 차 열쇠를 점화 스위치에 밀어 넣고 돌렸다.

“눈사람을요......”

엔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사라는 갑작스런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정확히 뭐가 두려운지는 그녀도 몰랐다.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배터리 수명이 다 됐나?

“눈사람이 어떻게 생겼는데?”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열쇠가 부서져라 돌려댔다.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지만, 엔진의 굉음에 묻혀버렸다.

사라는 급하게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자동차 기어를 올리고, 클러치를 풀었다. 부드럽고 질척한 눈 속에서 바퀴가 회전했지만, 차 뒷부분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닿으면서 앞으로 굴러갔고, 도로에 진입했다.

“아빠가 기다리셔. 서둘러야 해.” 그녀가 말했다.

사라는 라디오를 켜고 음량을 키워, 자신의 음성 아닌 다른 소리로 냉랭한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뉴스 앵커는 간밤에 미국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지미 카터를 눌렀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늘 하루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뉴스였다.

아이가 다시 뭐라고 말하자, 사라는 백미러를 힐끗했다.

“뭐라고 했니?”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는 다시 한 번 말했지만 이번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라디오 소리를 줄이고, 두 개의 음울한 검은색 줄무늬처럼 전원 풍경을 가로지른 주도로와 강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다가 앞좌석 사이로 몸을 내민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들의 목소리는 메마른 속삭임처럼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은 절대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우린 이제 죽을 거라고요.” (P18-19)


이제는 마흔이 되었기에 낮이면 어떤 얼굴이 될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며칠간 악몽에 시달리고 깨어날 때의 그 쫓기는 표정에도 평화가 내려앉고, 찡그렸던 미간도 말끔히 펴질지 아니면 그대로일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피스 가에 있는 작고 간소한 아파트를 나가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의 홀레 반장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거울을 피해 다니기 때문이다. 대신 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그들의 고통, 약점, 악몽, 스스로 속이는 동기와 이유를 찾아내려 했다. 그들의 피곤한 거짓말을 들으며, 이미 마음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미움과 자기혐오의 감옥이 어떤 것인지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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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달라졌다. 아니면 냄새일까? 그는 부엌 문지방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벽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만 해도 밝은색의 꽃무늬 벽지에 플라스터보드가 있었던 곳에 이제는 적갈색 벽돌과 회색 모르타르, 못 구멍이 다닥다닥 뚫린 희끄무레한 노란색 합판에 있었다. 바닥에는 오늘 아침에 왔던 남자의 연장통이 있었고, 작업대에는 내일 다시 오겠다고 적힌 쪽지가 있었다.

해리는 거실로 가서 닐 영의 시디를 집어넣었다. 그러다 15분 후에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꺼내고 대신 라이언 아담스의 음반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났다. 그는 눈을 감고, 피와 완벽한 어둠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응시했다. 다시 그 편지가 생각났다. 첫눈. 투움바.

라이언 아담스의 ‘9번가의 약탈’을 방해하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여자는 자신을 오다라고 소개했다. 토크쇼 <보세>의 관계자인데, 다시 통화하게 돼서 반갑다고 했다. 여자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토크쇼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예전에 연쇄살인범에 대한 토론에 그를 초대하고 싶다며 섭외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었다. 노르웨이 경찰들 가운데 FBI에서 훈련받고 온 사람은 해리가 유일했으며, 실제로 연쇄살인범을 추적한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해리는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다. (P35)

“우린 눈사람 안 만들었어요.”

요나스는 식탁 의자에 올라가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집 앞 잔디밭에 눈사람이 있었다. 엄마의 말처럼 커다란, 대형 눈사람이었다. 눈과 입은 조약돌로 코는 당근으로 만들었다. 모자도, 목도리도 두르지 않은 채 산울타리에서 꺾은 나뭇가지로 만든 듯한, 앙상한 팔 하나만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바라보는 방향이 잘못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사람이란 원래 길가 쪽, 그러니까 열린 공간을 바라보며 서 있는 법인데.

“근데 왜 눈사람이 길을 보고 있지 않아요?”

아무도 요나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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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가 침대에 누웠을 무렵, 아래층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 닫는 소리가 나고, 집 밖에서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더니 엔진 소리가 멀리 사라져 갔다. 다시 그들 모자만 남았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켰다. 요나스는 엄마가 했던 질문을 생각했다. 왜 요즘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니? 요나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이제는 요나스가 슬퍼졌다. 볼 안쪽을 씹었더니 달콤쌉쌀한 통증이 귀까지 번졌다. 천장에 달린, 금속 대롱으로 만든 풍경을 바라보았다. 요나스는 침대에서 나와 발을 질질 끌고 창가로 다가갔다.

정원에 쌓인 눈에서 반사되는 빛 덕분에 창밖의 눈사람이 보였다. 눈사람은 외로워 보였다. 누군가 모자나 목도리를 둘러줘야 한다. 아니면 손에 빗자루라도 쥐어주든가. 순간 구름 뒤에서 달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자, 가지런히 늘어선 눈사람의 새까만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두 눈동자도. 요나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며,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조약돌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눈은 집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요나스의 방을, 요나스는 황급히 커튼을 치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P41)


일을 많이 하는 게 싫은 게 아냐, 해리. 당신은 일에 ‘집착’했어. 당신이 곧 일이었지. 게다가 당신의 원동력은 사랑이나 책임감 같은 게 아니었어. 개인적인 야망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분노였지. 그리고 복수심. 그건 옳지 않아, 해리. 그런 식은 곤란해. 그 결과가 어땠는지 당신도 알잖아.(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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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요나스? 아저씨 이름은 해리야, 사라진 사람들은 대개 무사히 돌아온다는 이야기, 경찰 아저씨들이 해줬니? 어른들은 스스로 어디론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한다는 거 말야.”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야. 우리 한번 맞혀볼까. 엄마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저도 몰라요.”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모른다는 거 알아. 요나스. 지금 당장은 누구도 몰라. 하지만 엄마가 집이나 직장에 없다면 어디에 있을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데가 있니?”

소년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손바닥에 붙은 다이너마이트를 필사적으로 떼어내는 늑대만 바라보았다.

“너희 가족이 즐겨 가는 별장이라든가.”

요나스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혼자 있고 싶을 때 잘 가는 특별한 장소라든가.”

“엄마는 혼자 있고 싶어 하지 않아요.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해요.”

“너하고만?”

소년은 고개를 돌려 해리를 바라보았다. 올레그와 똑같은 갈색 눈동자. 그 안에는 해리가 예상했던 공포가 있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분노도 있었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왜 떠나는 거죠? 나중에 다시 돌아올 거면서?”

똑같은 눈동자, 똑같은 질문이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중요한 질문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 길을 잃은 사람도 있고, 사람들은 아주 여러 가지 이유로 길을 잃는단다. 그냥 좀 쉬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훌쩍 떠나는 사람도 있어.”

현관문이 쾅 닫히자 소년이 움찔했다.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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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곧 돌아오실 거야. 두고 봐라.” 해리는 요나스의 좁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목도리도 두고 가셨잖니. 네 침대에 있는 핑크색 목도리 말이야.”

“눈사람의 목에 둘러져 있던 걸 제가 가져온 거예요.”

“눈사람이 추울까 봐 엄마가 둘러줬나 보구나.”

“엄마가 제일 아끼는 목도리를 눈사람에게 줬을 리가 없어요.”

“그럼 아빠가 그랬겠지.”

“아뇨. 아빠가 나간 후에 누군가 한 짓이에요. 어젯밤에 엄마를 데려간 사람이요.”

“그래..... 눈사람을 누가 만들었지?”

“몰라요.”

해리는 창문 너머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여기 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살을 에는 외풍이 벽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P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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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산으로, 들로.” 라프토는 냉소적으로 그 말을 반복했다. 흘러내린 팬케이크 반죽 같은 얼굴 속에서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 속에 놓인 시신은 상당히 심하게 난도질되어 있었다. 젖가슴이 드러난 덕에 성별을 파악할 수 있어 다행일 정도였다. 시신의 나머지 부분은 작년 아이드스봉네세에서 있었던 교통사고를 연상시켰다. 당시 화물 트럭이 모퉁이를 빨리 도는 바람에 싣고 있던 알루미늄 시트 상당수가 와르르 떨어졌고, 그 시트가 말 그대로 뒤에서 오던 차를 얇게 저며버렸다.

“범인은 여기서 여자를 죽이고 시신을 잘랐군요.” 감식반원 하나가 말했다.

라프토에게는 들을 필요도 없는 정보였다. 시신 주위의 눈에 온통 피가 튀어 있었고, 옆으로 흐르는 굵은 핏줄기로 보건데 아직 심장이 뛰고 있을 때 최소한 동맥 하나를 자른 것이 분명했다. 라프토는 어젯밤, 언제 눈이 그쳤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케이블카는 오후 5시에 내려갔다. 물론 희생자와 범인이 케이블카 아래 구불구불하게 펼쳐진 산길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왔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플뢰옌 산으로 가는 산악철도를 타고 정상으로 가서, 여기까지 걸어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험해서 라프토는 그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왔을 거라 직감했다.

눈에 발자국 두 개가 찍혀 있다. 작은 발자국이 당연히 여자의 발자국이었다. 물론 여자의 신발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또 다른 발자국이 범인의 것이리라. 그 발자국은 길로 이어졌다. (P69-70)


라프토의 앞에 선 사람이 장갑 낀 손의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토템폴을 톡톡 두드렸다. 토템폴 속에 조각된 인물들은 서로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서, 앞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로 피오르 맞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야.” 상대방이 말을 이었다. “그래야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으니까. 하지만 토템폴의 문제는 썩는다는 거지. 썩어야만 해. 그게 바로 토템폴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니까. 토템폴이 사라지면 영혼은 새 집을 찾아야 하지. 가면 속이 될 수도 있고, 거울 속이 될 수도 있어. 새로 태어난 아이의 몸속이 될 수도 있고.”

수족관의 펭귄 우리에서 목 쉰 비명이 새어 나왔다.

“왜 여자를 죽였는지 말해주겠나?” 라프토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게임은 끝났어. 라프토. 즐거웠어.”

“내가 쫓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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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없이 편지를 읽었다.

곧 첫눈이 내리고 그가 다시 나타나리라. 눈사람. 그리고 눈사람이 사라질 때 그는 누군가를 데려갈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누가 눈사람들을 만들지? 누가 무리(Murri)를 낳았지? 눈사람은 모르기 때문이다.”

“시적이군.” 비에른 홀름이 중얼거렸다.

“무리가 뭐죠?” 스카레가 물었다.

대답 대신 프로젝터의 단조로운 웅웅 소리만 들렸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누가 눈사람이냐는 거예요.” 카트리네 브라트가 말했다.

“당연히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겠죠.” 비에른 홀름이 말했다.

스카레의 외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금세 뚝 그쳤다.

“무리는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의 별명이야.” 어둠 속에서 해리가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출신의 아보리진이지. 살아 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의 여자들을 죽이고 다녔어. 정확히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의 본명은 로빈 투움바야.”

팬이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반장님이 죽인 연쇄살인범이군요.” 비에른 홀름이 말했다.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잡으려는 놈도 연쇄살인범이라는 뜻인가요?”

“이 편지를 보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워, 잠깐만요. 좀 진정시죠!” 스카레가 양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반장님이 오스트레일리아의 그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된 후에 연쇄살인범이라고 들먹였다가 허탕친 적이 몇 번이나 되죠?”

“세 번, 최소한 세 번이지.” 해리가 말했다. (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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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비아는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에는 해가 빨리 지는 11월이 싫었지만 오늘은 밤이 더디게 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숲 속 깊은 곳의 어둠을 찾았다. 눈 위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을 지워주고, 그녀를 숨겨줄 어둠을 찾았다. 이곳 지리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농장으로 돌아가거나...... 그것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눈이 내리는 바람에 하룻밤 사이에 풍경이 바뀌어버리고, 길이며 익숙한 바위들이 모두 눈에 뒤덮여 주변의 윤곽선이 평평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거미...... 땅거미가 내리면 어둠이, 그녀의 공포심이 모든 사물을 비틀고 일그러뜨렸다.

쉴비아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숨소리가 꼭 딸들의 도시락을 쌀 때 사용하는 유산지를 찢는 소리 같았다. 쉴비아는 간신히 호흡을 진정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귀에서 울리는 박동 소리와 시냇물이 낮게 졸졸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시냇물! 쉴비아의 가족들은 열매를 따거나, 덫을 설치하거나, 여우가 훔쳐간 닭을 찾아다닐 때 주로 시냇물을 따라갔다. 시냇물은 자갈길로 이어졌고, 자갈길에 있으면 조만간 차가 지나갈 것이다. (P110-111)

쉴비아는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그것은 닭의 머리였다. 아까 그녀가 헛간에서 자른 닭의 머리가 아니라, 남편 롤프가 미끼로 쓰는 닭의 머리. 작년 한 해 동안 여우가 죽인 닭이 열여섯 마리나 된다고 지방의회에 보고했더니, 농장의 일정 반경 내에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제한된 수의 여우 덫(일명 백조 목)을 설치할 수 있다는 허가가 나왔다. 덫을 숨겨놓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냇물 속이었다. 여우가 수면 위로 나와 있는 미끼를 무는 순간, 덫이 철컥 물리면서 목이 부러져 즉사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그녀는 손으로 덫을 만져보았다. 드람멘에 가서 덫을 사오는 길에 그들은 덫의 스프링이 너무 튼튼해서 어른의 다리도 두 동강 나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꽁꽁 언 발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덫에 붙은 가느다란 철사가 만져졌다. 덫을 벌리기 위해서는 지렛대가 필요했는데, 지렛대는 농장의 공구 창고에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반쯤 죽은 여우나 다른 짐승들이 이 값비싼 덫을 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대개 덫에 철사를 연결해 나무에 묶어두기 마련이다. 손으로 철사를 따라가니 시냇물 밖으로 나가 강둑으로 이어져 있었다. 둑에는 규정대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금속 명패가 있었다.

쉴비아의 몸이 굳어졌다. 방금 멀리서 들린 저 소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일까?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자 그녀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렸다. (P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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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끼 주위에 발자국은 전혀 없었다. 펜라이트로 주위를 비춰보니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있었다. 누군가 분명 괴력을 발휘해 도끼를 던진 것이다.

그 순간, 해리는 다시 느꼈다. 아까 저녁에 스펙트럼에서 공연을 볼 때 느꼈던 기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 본능적으로 펜라이트를 끄자, 어둠이 담요처럼 그를 덮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안 돼. 말려들지 마. 악은 존재가 아니야. 날 차지할 수 없어. 오히려 그 반대지. 악은 텅 빈 공간, 선의 부재야. 지금 내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나 자신이야.

해리는 다시 펜라이트를 켜고 숲을 비추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나무들 사이로 등을 곧게 펴고 서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이 크고 게슴츠레한 눈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결혼식의 신부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숲 한가운데인 이곳, 제단 앞에 서 있는 줄 알았다. 펜라이트의 불빛에 그녀가 반짝거렸다. 해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숨을 들이쉬고는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더니 비에른 홀름이 전화를 받았다.

“이 지역 전체를 봉쇄해.” 해리가 말했다. 그의 목구멍은 거칠고 바싹 말라 있었다. “지원 병력을 요청할 거야.”

“무슨 일입니까?”

“여기 눈사람이 있어.”

“그래서요?”

해리는 설명했다.

“마지막 말을 못 들었어요.” 홀름이 외쳤다. “여기 수신 상태가 안 좋아서......”

“눈사람 머리가 쉴비아 오테르센이라고.” 해리가 반복했다. (P135-136)


해리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에스펜 렙스비크의 말을 들으며, 죽은 동료들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수사팀을 꾸린 렙스비크는 해리에게 모든 관련 자료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중이었다.

“IT팀장이 비밀번호를 알려줄 겁니다. 그다음에는 강력반 네트워크에서 ‘스노우맨’이라는 이름의 폴더로 들어가십시오.” 해리가 말했다.

“스노우맨?”

“뭐라고 부르긴 해야 하니까요.”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홀레 반장. 보고는 얼마나 자주 할까요?”

“새로 알아낸 정보가 있을 때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뭡니까?”

“우리 영역에는 발을 들여놓지 마십시오.”

“정확히 어디까지가 당신들 영역인데요?”

“당신 팀은 제보와 증인, 연쇄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전과자들에게만 집중하세요. 그게 당신들이 주력해야 할 분야입니다.”

해리는 노련한 크리포스의 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양가 없는 일이었다.

렙스비크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 실종사건들 간에 연관이 있는 걸로 우리가 합의한 겁니까?”

“합의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직관을 따르면 됩니다.” (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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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의사들에게 자살은 이단인 줄 알았는데요.”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의사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죠. 전 죽음이 삶보다 더 매력적인 순간이 올 때 자살을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말한 제논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제논은 아흔여덟 살 때 엄지발가락이 탈구됐는데, 그 일로 너무 속상한 나머지 집으로 가서 목을 맸죠.”

“당신도 번거롭게 홀멘콜렌 스키 점프대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말고 그냥 목을 매지 그래요?”

“글쎄요. 죽음은 삶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가 되어야죠. 어쨌거나 고백하자면, 그렇게 죽어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유감스럽게도 제 연구는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받지 못해서요.” 빠르게 움직이는 스케이트 날의 쉭쉭 소리가 마티아스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난도질했다. “그건 그렇고, 올레그에게 새 스케이트를 사줘서 미안합니다. 나중에서야 당신이 올레그 생일선물로 스케이트를 사주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상관없어요.” (P176-177)


“스노우맨이 보낸 편지의 분석 결과가 나왔어요.”

“그런데?”

“글씨에 관해서는 특별한 게 없어요. 평범한 레이저 프린터를 썼고요.”

해리는 기다렸다. 홀름이 뭔가 알아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종이가 특별해요. 여기 실험실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종이는 다들 처음 본다고 해서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죠. 일본의 파피루스라고 할 수 있는 삼지닥나무로 만든 종이예요. 냄새로 구별할 수 있죠. 일일이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값이 어마어마해요. 코노 지(紙)라고 한 대요.”

“코노?”

“이런 물건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게에서만 팔아요. 1만 크로네짜리 볼펜이나 고급 잉크, 가죽으로 장정된 노트 같은 걸 파는 가게 있잖아요.”

“난 몰라, 그런 가게.”

“저도 몰라요.” 홀름도 시인했다. “어쨌거나 감레 드람멘스바이엔 가에 코노 지를 파는 가게가 하나 있어요. 거기 물어봤는데 요즘엔 그런 물건 안 판대요. 그러니까 다시 주문할 일도 없죠. 주인 말로는 요즘 사람들은 옛날만큼 질을 따지지 않는다는군요.”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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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손을 고쳐 잡고, 한 발로 계단을 밀면서 냉동고 문을 열었다.

“젠장!”

메마른 툭 소리와 함께 냉동고 문이 활짝 열렸고 해리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플래시가 벽돌로 된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가 났고, 마치 빙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한기가 그를 덮쳤다. 해리가 플래시를 찾으려고 마룻바닥을 더듬거리는데, 카트리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뼛속까지 오싹해지는 비명 소리, 목구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마치 웃는 것 같은 신경질적인 흐느낌으로 변하는 비명 소리였다. 그러더니 2~3초간 정적이 흘렀고, 숨을 들이쉰 카트리네가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아까와 똑같이 길고, 늘여 빼는 비명 소리, 출산을 하는 여성의 고통을 표현한 극사실주의적이고, 엄숙한 노래 같은 비명이었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해리도 상황을 파악했고, 카트리네가 왜 비명을 지르는지 알았다.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냉동고는 여전히 완벽하게 작동했고, 냉동고 안쪽의 불빛이 그 안에 쑤셔 박힌 무언가를 환하게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앞쪽에 나와 있는 팔과 구부러진 무릎, 한쪽에는 억지로 밀어 넣은 머리를, 시체에는 마치 시체를 먹고 사는 하얀 곰팡이 같은 새하얀 성에가 한 꺼풀 덮여 있었다. 그리고 시신의 뒤틀린 모양은 카트리네의 비명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듯했다. 하지만 해리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든 것은 그게 아니었다. 냉동고 문이 열린 몇 분 후. 시신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이마가 냉동고 문 가장자리에 부딪히면서 얼굴을 덮고 있던 성에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덕분에 해리는 그것이 씩 웃고 있는 게르트 라프토의 얼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입이 만들어내는 미소가 아니었다. 그의 입은 삼 같은 거친 실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들쭉날쭉 오가며 꿰매져 있었다. 턱을 가로질러 볼까지 올라간 미소는 볼 안에 박아 넣은 일련의 검은 못들이 만들어낸 미소였다. 특히 해리의 시선을 끈 것은 코였다. 그는 순전히 반항심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우선 코뼈와 연골이 제거됐을 것이다. 당근은 냉동고의 냉기에 색이 바래져 있었다. 완벽한 눈사람이었다. (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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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예전에 데드라인의 어원이 미국 남북전쟁의 전쟁터에서 비롯됐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포로들을 가둬둘 만한 자원이 부족했기에, 포로들을 한데 모아놓고 그들 주위로 땅에 선을 하나 그렸다고 한다. 그게 데드라인이 되었고, 그 선을 넘는 포로는 무조건 총에 맞았다. 지금 경찰청 앞에 모여 있는 저 기자들이 꼭 그 포로들 같았다. 데드라인에 갇혀 있는 전쟁 포로들.

해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회의실로 가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티아스였다.

“내가 남긴 음성 메시지 들었나요?” 마티아스가 물었다.

“못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정신이 없어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하지만 이다르에 관한 겁니다. 이다르가 수배 중이라는 뉴스를 봤거든요.” (P266)


해리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악령은 몰아내야 하고, 통증은 익사시켜야 한다. 해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구불구불한 담배 연기가 얇은 종이로 된 등이 걸린 곳까지 올라갔다.

이다르 베틀레센은 어떤 악령과 싸웠을까? 악령을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아니면 이곳이 성역이나 피난처였을까? 아마 그도 몇 가지 해답은 얻었겠지만, 모든 해답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광기와 악이 전혀 다른 두 개체인지 혹은 더는 파괴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단순히 그걸 광기라고 불러야 하는지 같은 질문의 해답들. 우리는 무고한 민간인이 사는 도시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이해하지만, 런던의 슬럼가에 질병과 도덕적 타락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매춘부들을 토막 내야만 했던 살인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현실이라 부르고, 후자는 광기라 부른다.

맙소사, 정말로 술이 필요했다. 이 고통, 오늘 하루, 오늘 밤을 무디게 해줄 딱 한잔. (P27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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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는 컬링 경기장에서 발견됐을 당시에 찍은 이다르 베틀레센의 사진이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다르는 오른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습니다.” 해리가 말했다. “그가 오른손잡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제 호기심을 자극한 건 그가 신은 부츠였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스크린에는 이다르가 신은 부츠를 확대해서 찍은 사진이 떴다.

“이 부츠만이 우리의 유일한 법의학적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 부츠의 발자국이 쉴비아 오테르센의 헛간 주변에서 발견된 발자국과 일치하니까요. 하지만 신발 끈을 보세요.” 해리가 지시봉으로 신발 끈을 가리켰다. “어제 제가 부츠를 신고 실험을 해봤는데, 저렇게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신발 끈을 반대로 묶어야 합니다. 왼손잡이처럼요.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신발 끈을 매줄 때처럼 신발을 앞에 두고 매야 하죠.”

방 안에 불편한 기운이 퍼져갔다.

“난 오른손잡이지만, 나도 신발 끈을 저렇게 맵니다.” 에스펜 렙스비크의 목소리였다.

“뭐, 이건 그냥 특이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것들이 절.....” 홀레 반장은 단어를 고르기 전에 맛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불편하게 했죠. 그리고 그 불편함은 계속 다른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정말로 이다르 베틀레센의 부츠일까? 이 부츠는 싸구려입니다. 어제 이다르의 집에 가서 그의 신발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죄다 명품이더군요. 단 한 켤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대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끔은 신발 끈을 풀지 않은 채 그냥 벗어던졌더군요. 따라서......” 해리는 지시봉으로 스크린을 탁 쳤다. “이다르 베틀레센이 자기 신발 끈을 이렇게 묶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하겐은 총경의 얼굴을 힐끗했다.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누가 이다르에게 부츠를 신겼느냐는 거겠죠. 이건 쉴비아 오테르센의 살인 현장에서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신었던 것과 같은 부츠입니다. 그 부츠를 이다르에게 신긴 동기는 물론 그를 스노우맨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죠.”

“겨우 신발 끈과 싸구려 부츠 하나만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겁니까?” 렙스비크 팀에 속한 형사 하나가 외쳤다. “그놈은 어린 아이를 상대로 매춘을 하는 정신병자에, 여기 오슬로에서 피해자 둘 모두와 아는 사이이고, 알리바이도 없어요. 반장님의 말은 전부 추측일 뿐이잖습니까?” (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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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도심 서쪽에 자리한 홀멘콜렌 리지의 꼭대기로 차를 몰았다. 스포츠 센터의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홀멘콜렌을 걸어서 올라갔다. 그러고는 스키 점프대 옆,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에 섰다. 해리 말고도 흔치 않은 겨울 관광객 두 세 명이 스키 점프대의 경사면 양쪽으로 텅 빈 미소를 짓고 있는 관람석과 맨 아래의 호수, 그리고 피오르까지 펼쳐진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겨울이라 호수는 말라붙어 있었다. 좋은 전망은 균형 있는 관점을 갖게 해준다고 했던가.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스노우맨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그저 손만 뻗어 체포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스노우맨은 미꾸라지처럼 다시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해리는 늙고, 무겁고, 둔해진 기분이었다. 관광객 한 명이 그를 바라보았다. 주머니에 든 리볼버의 무게 때문에 코트 오른쪽이 아래로 더 쳐졌다. 그리고 시체. 시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암매장한 시체도 결국은 발견되는 법이다. 산(酸)으로 전부 부식시키기라도 했을까?

해리는 체념이 꿈틀대는 걸 느꼈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FBI에서 범인을 잡는 데 10년 이상 걸린 사건들을 분석한 적이 있다. 대개 사건을 해결한 것은 아주 사소한 단서였다. 그러나 사실 사건 해결의 열쇠는 포기를 몰랐던 그들의 집념이었다. 15라운드를 다 뛰고도, 상대가 아직 쓰러지지 않았으면 다시 싸우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근성이었다.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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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손을 보라고.” 트레스코가 말했다.

해리는 팔걸이에 놓인 트레스코의 그을린 손을 보았다.

“움직이질 않는데.” 해리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손을 감추지 않았어. 실력 없는 포커꾼들이 나쁜 패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 카드를 손 뒤로 감추려 한다는 거야. 그런 사람들은 블러핑을 할 때도 입으로 손을 가려서 표정을 감추려고 하지. 그런 자들을 하이더(hider)라고 해. 그런가 하면 등을 똑바로 펴거나, 뒤로 몸을 기대 더 커 보이려고 하면서 블러핑을 과장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들은 블러퍼(bluffer)라고 하지. 스퇴프는 하이더야.”

해리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혹시......?”

“그래, 다 살펴봤어. 그리고 스퇴프의 그런 성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나. 스퇴프는 거짓말을 할 때 양손을 팔걸이에 떼고 오른손을 감추지. 아마 오른손잡이일 거야.”

“내가 눈사람을 만드냐고 물었을 때는 스퇴프의 반응이 어땠어?” 해리는 열띤 어조로 물었다.

“거짓말을 했어.”

“어떤 부분에서? 눈사람을 만든다고 했던 부분이야, 아니면 눈사람을 옥상 테라스에서 만든다고 했던 부분이야?”

트레스코는 짧은 끅끅 소리를 냈고, 해리는 그게 웃음소리임을 깨달았다.

“이건 정확한 과학이 아니야. 말했듯이 스퇴프는 훌륭한 포커꾼이야. 네가 질문한 후의 처음 몇 초 동안은 손을 팔걸이에 올려뒀어. 마치 사실을 말하려는 사람처럼. 동시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콧구멍이 커졌지.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고, 오른손을 가리면서 거짓말을 지어냈어.”

“맞아, 그럼 그건 스퇴프가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야?” (P38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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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DNA 검사 결과 스퇴프가 요나스와 쌍둥이들의 아버지로 밝혀지면, 실종된 다른 여자들의 아이들도 DNA 검사를 할 거야.”

“그렇다면...... 아르베 스퇴프가 노르웨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을 따먹었다는 거예요? 수많은 여자들을 임신시킨 다음, 아이를 낳고 나면 그 여자들을 죽여버렸다?”

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내 가설이 맞는다면 이자는 완전히 미친 거야.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순전히 추측일 뿐이고, 미친 것처럼 보이는 행동 뒤에는 꽤 명쾌한 이론이 있는 경우가 많아. 베르하우스 바다표범에 대해 들어봤어?”

카트리네가 고개를 저었다.

“수컷 베르하우스 바다표범은 냉정하고 이성적이지. 암컷이 새끼를 낳고, 새끼들이 중요한 첫 번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수컷은 암컷을 죽이려고 해. 암컷이 다시는 자신의 새끼를 낳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리고 수컷은 자기 핏줄의 경쟁자들이 많아지는 걸 원치 않아.”

카트리네는 이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미친 거 맞네요. 네, 하지만 뭐가 더 미친 건지 모르겠어요. 바다표범처럼 생각하는 게 미친 건지, 바다표범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미친 건지.”

“말했잖아.” 해리는 무릎에서 빠드득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가설 축에도 못 껴.” (P406)

"플라자 호텔로 갈 거야. 카트리네 브라트가 아까 전화해서 친자 확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봤다는군.“

“오늘 저녁에요?” 비에른 홀름은 발로 액셀러레이터를 누르고, 오른쪽으로 돌아 쇼우스 광장으로 향했다.

“95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친자 확인을 성립하기 위해 예비실험을 하는 중이래. 이 실험이 끝나면 정확도를 99.9퍼센트까지 높일 거라는군.”

“그래서요?”

“지금은 95퍼센트의 정확도로 오테르센 쌍둥이와 요나스 베케르의 아버지가 아르베 스퇴프인 걸로 나왔어.”

“놀랠 노자로군요.”

“카트리네가 자네 말대로 토요일 밤을 보내기로 한 것 같아. 희생양은 아르베 스퇴프고.”

해리가 비상작전 센터에 전화해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동안, 수리를 마친 낡은 엔진의 포효 소리가 밤의 적막이 감도는 그뤼네르 뢰카의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들이 탄 차가 아케르셀바 응급실을 지나, 스토르 가의 트램 선로 옆으로 미끄러져 가는 동안 히터는 정말로 후끈한 열기를 뿜어댔다. (P42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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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자가 그를 욕조로 처넣은 것이다. 난장판을 만들지 않고, 모든 증거를 신속히 인멸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넌 아르베 스퇴프고, 이 여자는 경찰이야.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

“좋아, 고개 들어.” 여자가 말했다.

드디어 가면을 벗겨주려나 보다, 스퇴프는 여자의 말대로 했다. 여자의 손이 그의 이마와 등에 닿았지만, 가면은 그대로였다. 무언가 가느다랗고 단단한 줄이 그의 목을 감쌌다. 이 염병할 줄은 뭐야? 올가미다!

“부탁인데......” 그가 말문을 열었지만 올가미가 숨통을 조이자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수갑이 욕조 바닥을 문지르며 덜컥거렸다.

“네가 그 여자들을 모두 죽였어.” 여자가 올가미를 단단히 조였다. “넌 스노우맨이야. 아르베 스퇴프.”

그래. 바로 이거였군. 뇌에 산소가 부족해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스퇴프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맞아. 네가 스노우맨이야.” 여자가 그렇게 내뱉자, 마치 그의 목이 절단되는 기분이었다. “방금 내가 그렇게 임명했어.” (P434-435)


“카트리네? 하지만 방금 카트리네가 스노우맨이라고 했잖나. 근데 카트리네가 왜.......?”

“제 말은 카트리네는 스퇴프가 스노우맨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는 겁니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죠. 스퇴프 말로는 살인이 일어났던 시간에 자기에게는 알리바이가 없다고 했더니, 카트리네가 ‘잘됐어’라면서 그를 스노우맨으로 임명했답니다. 그러고는 스퇴프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우리 차가 현관문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도망친 겁니다. 원래 계획은 아마도 스퇴프가 자살한 걸로 위장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럼 우린 범인을 잡았다고 믿고 긴장을 풀겠죠. 지난번에 이다르 베틀레센이 죽었을 때처럼요. 그리고 필리프 베케르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카트리네가 그를 쏘려고 했던 것처럼요.”

“뭐라고? 카트리네가 뭘 어째......?”

“카트리네는 공이를 젖힌 상태에서 베케르에게 리볼버를 겨눴습니다. 제가 총구와 일직선에 섰을 때 공이치기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군나르 하겐은 두 눈을 감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알겠네. 하지만 현재로선 이 모든 게 단지 추측일 뿐이잖나?”

“그리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

“스노우맨이 보낸 편지요. 카트리네의 집에 있는 컴퓨터에서 그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스노우맨에 대해 알지 못할 때 작성된 겁니다. 그리고 프린터에 있던 종이도 일치했고요.”

“젠장!” 하겐은 양 팔꿈치로 책상을 세게 내려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경찰이 범인이라니!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해리?”

“음, 대대적인 스캔들이 나겠죠. 경찰 전체의 신뢰가 떨어지고, 윗분들은 해고되고.” (P464-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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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군요.”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에우네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인간의 정신에 관해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은 거의 없지만. 문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런 장애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네. 증상에 기초해서 그런 병에 걸렸다고 추측할 뿐이지.”

“곰팡이처럼요.”

“뭐라고?”

“카트리네 같은 사람을 그렇게 정신적으로 병들게 할 만한 요인이 뭘까요?”

에우네는 신음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 동시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지! 천성과 교육이야.”

“폭력적인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는요?”

“그래, 맞아, 맞아. 그게 90점은 되지. 거기다 정신병 병력이 있는 어머니.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됐던 경험 한두 가지. 그러면 100점 만점이 되는 거야.”

“그랬던 여자가 폭력적인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보다 힘이 세지면, 아버지를 해칠 가능성도 있나요? 죽이거나?”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스톨레 에우네는 말을 멈추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상체를 내밀고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속삭였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해리 홀레는 자신의 손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베르겐 경찰청에서 사진 한 장을 봤어요.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죠. 마치 전에 어딘가에서 본 사람처럼요. 얼마 전에야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가족이라 닮았던 겁니다. 카트리네가 결혼해서 브라트라는 성을 갖기 전에, 그녀의 성은 라프토였어요. 게르트 라프토의 딸이죠.” (P47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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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체크인을 한 다음 손바닥만 한 1인실의 욕실 거울 앞에 서서 해리는 뮐레르 닐센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가 해골처럼 보인다는 말, 그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말, 정말 죽을 뻔했던가? 샤워를 하고 텅 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다음, 다시 방으로 올라가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켜보니 하나같이 쓸데없는 프로그램들뿐이었다. 유일하게 NRK2에서만 <메멘토>가 방영 중이었다. 해리는 전에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뇌 손상을 입어 물고기 수준의 단기 기억력만 가진 남자의 시각에서 풀어 나가는 이야기였다. 한 여자가 살해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살인범의 이름을 잊어버릴 걸 알고, 이름을 적어 폴라로이드로 찍어둔다. 문제는 과연 그가 적어둔 내용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해리는 발로 이불을 걷어찼다. 텔레비전 아래에 갈색 문이 달린 미니바가 있었고, 자물쇠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P489)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 그리고 날 부르려거든, 성으로 불러, 셰르스티.”

“브라트?”

“라프토.”

“알았어요. 하지만 해리 홀레에게 해야 할 말이 뭔지 내게 말해 줄 순 없나요? 그럼 내가 그 사람에게 전해......”

“당신은 몰라. 다 죽을 거야.”

셰르스티는 천천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도 알아요. 왜 다들 죽을 거라고 생각하죠. 카트리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셰르스티 뢰스모엔이 본 것은 그녀의 별장에 보관해둔 모노폴리 게임의 빨간 카드를 연상시켰다. 당신의 집과 호텔이 모두 불에 탔습니다. 라고 적힌 카드.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범인은 내가 아니라고.” 남자 같은 저음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P502)

도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산 닭이든, 죽은 닭이든 닭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벽에는 끝이 뾰족한 삽이 기대어져 있었다. 눈을 치우는 삽이 아니라 땅을 파는 삽이었따. 해리는 연장이 걸린 곳으로 갔다. 손도끼가 있었던 자리의 자국을 보니, 범죄현장에서 시체가 있던 자리에 그리는 하얀 선이 생각났다.

“스노우맨이 여기 와서 세 번째 닭을 죽이고, 그 피를 바닥에 뿌렸다는 게 내 생각이야. 판자를 뒤집을 수 없으니까 대신 바닥을 붉게 칠한 거지.”

“차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붉은 자국을 없애고 싶을 땐 그 자국을 닦아내거나 전부 빨간 색으로 칠해야 하지. 스노우맨은 뭔가를 숨기려고 했어. 단서들.”

“무슨 단서요?”

“뭔가 붉은 것. 방부처리가 되지 않은 나무에 스며들어서 지울 수 없었던 것.”

“혈흔이요? 카트리네가 더 많은 피로 혈흔을 감추려 했다고요? 그게 반장님 생각이에요?”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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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경의 시선이 다시 해리에게 고정됐다. “가미카제가 무슨 뜻인지 아나?”

해리는 다른 쪽 발로 체중을 옮겼다. “세뇌당한 일본 군인들이 비행기로 미국 항공모함을 들이받았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네. 하지만 하겐 경정 말이 정작 일본인들은 그런 단어를 쓴 적이 없다는 거야. 미국인 암호 해독가가 오역한거지. 가미카제는 13세기에 몽골과의 전투에서 일본인들을 구해주었던 태풍의 이름이라네.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신성한 바람’이라는 뜻이지. 꽤나 멋진 이름 아닌가?”

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런 바람이라네.”

해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갔다. “누군가 카트리네 브라트를 경찰청에 임명한 걸 책임지기를 바라십니까? 그녀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내지 못한 책임. 한마디로 이 모든 난장판을 책임지기를요?”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희생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 특히나 그 사람의 희생으로 인해 내 목이 날아가지 않을 때는, 그럴 때는 이 모든 일이 개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하네.” 총경의 시선이 해리에게서 풀려나 다시 도심으로 향했다. “개미둑일세. 해리, 근면, 성실, 충성, 때로는 무의미한 자기부정. 이 모든 걸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개미둑일세.”

해리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배신이었고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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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의사자격증을 딴 닥터 마티아스 룬 헬게센은 베르겐의 하우켈란 병원 정신과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동료들이나 환자들이나 그를 유능하고 사려 깊으며, 특히나 상대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입을 모았다. 마지막 장점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담당한 환자들은 주로 유전질환에 시달려 치료될 가망은 별로 없고, 그저 위안을 얻고자 병원에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경피증 환자가 올 때면, 어김없이 면역학을 전공할까 고려중인 이 상냥한 젊은 의사의 담당이었다. 라일라 오센과 그녀의 남편이 딸을 데리고 마티아스를 찾아온 것은 초가을이었다. 아이의 관절이 굳어져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티아스는 베흐테레프 병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라일라와 남편 모두 자기들 집안에 류머티스 병력이 있다고 했기에, 마티아스는 딸뿐 아니라 두 부부의 혈액까지 모두 채취했다. (P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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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는 온뉘 헤틀란의 이야기를 듣고, 게르트 라프토가 이 사건을 자기 혼자 해결하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 머저리는 옛날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온뉘 헤틀란의 시체처리는 흠잡을 데 없었다. 소음도 아주 적었고, 출혈도 극소량이었다. 또한 효과적으로 빠르게 욕조 안에서 그녀의 시신을 칼로 토막 냈다. 그는 신체의 모든 부위를 비닐로 싼 다음 시신 운반용으로 가져온 큼지막한 배낭과 가방에 시신을 담았다. 라프토의 집에 갔을 때 마티아스는 살인사건에서 경찰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사건 현장 근처에서 목격된 차와 택시라는 걸 배웠다. 그래서 집까지 걸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완벽한 살인을 위한 게르트 라프토의 마지막 지침. 즉 형사를 죽이는 일뿐이었다. (P547)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가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스웨덴의 연구 결과는 그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그 혼자만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더러운 유전자와 간통하는 바람에 잔인하게 요절해야만 하는 사람도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십자군이 되어 그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치우고, 질병과 싸우는 사람은 그 혼자뿐일 것이다. 아무도 그런 그를 고마워하거나 찬양하지 않으리라.(P551)

마티아스의 몸에는 이미 여러 군데 피부가 두꺼워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2004년 가을이 되자 경피증의 다음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나타내는 첫 징후가 발견됐다. 결코 겪고 싶지 않았던 단계. 얼굴의 피부가 조이는 단계였다. 원래 계획은 올해 희생양으로 엘리 크발레를 죽이고, 내년과 내후년에 각각 비르테 베케르와 쉴비아 오테르센을 죽이는 것이었다. 경찰이 이 두 창녀들과 호색가 아르베 스퇴프와의 연관성을 찾아내는지 시험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 일단 통증이 시작되면, 이 일을 그만두겠노라고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티아스는 세 여자를 모두 죽이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라켈과 형사까지 죽여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고. (P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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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켈은 숨이 멎었다. 침실 문간에 서 있던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광기에 소름이 돋았고, 입이 딱 벌어졌으며, 눈이 튀어나왔다.

침대와 다른 가구들은 벽으로 밀쳐졌고, 침실 바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에 잠겨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를 제외하고 수면은 잔잔했다. 하지만 라켈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방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눈사람만 보였다. (P581)


활짝 부릅뜬 라켈의 눈은 새까맸다. 그녀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캄파리 같은 진홍색 원피스. 그녀는 ‘코치닐’이었다. 라켈은 마치 울타리 옆에 서서 그 너머를 보려는 사람처럼 목을 천장 쪽으로 잡아 뺀 상태였다. 그 자세로 아래를, 창밖의 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어깨는 뒤로 젖혀졌고, 팔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등 뒤로 양손이 묶였을 거라고 해리는 짐작했다. 볼은 마치 입 속에 양말이나 행주를 밀어 넣은 것처럼 불룩했다. 그녀는 거대한 눈사람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었다. 맨다리가 눈사람의 가슴 앞에 교차되어 있었다. 해리는 그녀의 긴장된 다리 근육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떨어져서는 안 된다. 사실 떨어질 수가 없었다. 목에 뭔가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 크발레처럼 회색빛의 생기 없는 철사가 아닌, 하얗게 달아오른 원이었다. 마치 자신감과 사랑의 행운, 만수무강을 약속하던 옛날 치약 선전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낸 것 같았다. 전기 올가미의 검은색 손잡이에 달린 철사는 라켈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의 못에 걸려 있었다. 철사는 방의 반대편에 있는 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문의 손잡이까지, 두꺼운 철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길어서 해리가 손잡이를 돌렸을 때 현저히 빽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해리가 문을 열었다면, 손잡이를 곧장 돌려버렸다면, 하얗게 달아오른 금속이 라켈의 목을, 턱 바로 아래를 잘라버렸을 것이다. (P588-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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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측은 마티아스가 정신병자라고 주장할 걸세.” 에우네는 심리학적 전문용어보다 ‘정신병자’라는 통속적인 단어를 선호했다. 더 적절한 표현일 뿐 아니라, 시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보다 더 형편없는 심리학자를 데려다놓아도 그 판정은 받을 수 있을 거야.”

“맞아요. 그래도 어차피 종신형이에요.” 베아테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아기의 담요를 똑바로 펴주었다.

“그 종신형이 제대로 된 종신형이 아닌 게 유감이지.” 에우네가 투덜대며 침대 맡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정신질환이 있든 없든 악은 그냥 악이라는 생각이드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어느 정도 사악한 기질이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행이 정당화될 순 없어. 우린 다들 인격장애 환자들이니까.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증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지.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들 하지만, 인간이 모두 다르니 그 말은 무의미해. 흑사병이 돌 때 배에서 기침하는 선원은 즉각 바다로 던져졌지. 당연한 일이야. 정의란 건 철학에서든 재판에서든 무딘 칼과 같으니까. 우리가 가진 건 운 좋은 혹은 운이 나쁜 의학적 소견뿐이라네.”

“그래도.” 해리는 아직 붕대를 감아놓은 가운뎃손가락의 뿌리를 응시했다. “이 경우에는 종신형을 받을 겁니다.”

“그런가?”

“의학적 소견이 운이 나빴거든요.” (P6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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