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게임 체인저> 2015년
영화 <게임 체인저Concussion>(2015)는 미국의 전기 스포츠 드라마 영화이다. 감독과 각본은 피터 랜즈먼이며, 진 메리 라스카스의 〈GQ〉 기사 <Game Brain>을 원작으로 한다.
미국의 고교 풋볼 선수 애시는 경기 도중 뇌진탕을 일으킨 뒤로 평소와 다른 이상한 감각을 느낀다. 교통신호등의 정지신호가 빨간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고, 그다음 경기에서 또 뇌진탕을 일으킨 뒤 깨어나자 이번엔 서민이었던 부모가 갑자기 큰 부자가 돼 있다. 뇌진탕을 겪을 때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애시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세상을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의 SF 작가 닐 셔스터먼의 신작 '게임 체인저'는 고교 미식축구 선수인 주인공이 우주의 중심으로 지목되면서 겪는 좌충우돌을 유쾌한 톤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다 보고 들었다. 다만…… 나는 그 이상을 안다. 뉴스나 과학자들이 추적할 수 없는, 지구상 누구도 모를 천지개벽할 일들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내 이야기를 전혀 믿지 못한다 해도 좋다. 사실, 안 믿는 편이 더 낫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 여기고 당신이 친 거미줄 한복판에 앉아 파리나 좀 잡으면서, 그렇게 꿈속에서 계속 살아가시라. (P9~10)
이 이야기는 비록 풋볼로 시작하고 끝나지만, 핵심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샌드위치 속에 들어 있는 정체불명의 고기와 비슷하다. 소화하기는커녕 삼키기도 어려울 거다. 우유라도 마셔라. 속을 달래 줄 테니.
풋볼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내 인생 대부분은 풋볼을 중심으로 굴러갔다. 어릴 때 시작해서 지금은 우리 고등학교 팀, 티버츠빌 추나미스에서 선발로 뛰고 있다. 꼬투리 잡지 마라. 내가 지은 게 아니니까. 원래 팀명은 블루 디먼스(Blue Demons)였는데 몇 년 전 학교 이사회의 어느 고결하신 분께서 불건전하다며 걸고 넘어졌다. 그리하여 해맑고 무해한 파란 악마였던 우리 팀 마스코트는 동남아시아에서 8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가고 일본에서 방사능에 절인 초밥을 탄생시킨 사나운 파도로 바뀌었다. 이편이 더 순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다. 그나마 헬멧 디자인이라도 멋져서 다행이지. (P11)
나는 거의 모두와 친했고, 우리는 툭하면 서로 가벼운 인종 농담을 주고받았다.
“네가 조금만 더 하얬다면 전쟁터에서 백기로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마테오 수니나가 나에게 에스파냐어 발음을 가르치려다 실패하고서 말했다. 마테오는 카운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필드 골 키커였다. 비록 내 발음 교정에는 별 도움이 안 됐지만 미각을 키우는 데는 꽤 큰 역할을 했다. 마테오의 엄마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 영적 체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야식으로 만들어 주시는 포솔레는 경이로웠다.
그 당시 나는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한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듯이, 늘 <피부색은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와 <문제가 아니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몰라보는 게 바로 특권이다. (P15)
“이 나라는 선의의 무지로 가득 차 있어.” 리오가 말했다. “그건 감염병이고, 넌 보균자야.”
결국 리오와 나는 일주일 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다 자연스레 예전으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리오는 내 단짝이었다. 고작 인종 갈등 따위가 우릴 갈라놓게 놔둘 수 없었다. 얼마 뒤 나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만든 팻말을 들고 리오와 함께 흑인 인권 시위에 참여했다. 그만하면 내가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다는 걸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난 다르게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여섯 명이 버거를 먹고 있었다. 우리는 승리의 쾌감과 스포츠가 주는 아드레날린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래 깔린 묘하게 불안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예감이 아니라 여운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아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감각이었으니까. 아직 그게 뭔지 모를 뿐.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건가? 아니면 내 주변에서? 둘 다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그 느낌을 머리가 이상하게 띵하다고밖에 해석하지 못했다. (P22-23)
“괜찮아, 애시?”
“어어, 괜찮아. 잠깐 어지러워서.”
그러자 레이턴이 케이티를 따라 날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너 피가 다 어디 갔어? 발가락으로 갔냐? 얼굴이 거의 시첸데? 토할 거 같아?”
“아냐, 그렇진 않아.”
케이티가 나에게 자기 물컵을 내밀었다. “아마 탈수증일거야.”
“고마워.” 나는 물을 몇 모금 마셨다. 레이턴이 감염병일수도 있으니 그 컵을 나 혼자 쓰라고 했다.
현기증은 옅어졌다가도 고개를 빨리 움직일 때면 되돌아왔다. 뇌진탕인가? 전에도 자잘한 뇌진탕을 겪었지만, 이건 달랐다. 왜, 장기를 이식받으면 신체가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는가? 적응시키려면 약물을 써야 하고, 그게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느낌에 가장 가까웠다. 몸이 뇌를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그 안의 내용물을 거부한달까? 마치 내 정신이 침입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당시엔 터무니없다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 생각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신통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모르는 척 무시하려 했다. 어쩌겠나? 털고 일어나야지. 망할, 털고 일어나야지. (P24-25)
“웃지 마.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야!”
바로 그 순간 내가 우리 두 사람을 죽일 뻔했다.
인생을 바꿀 만한 일(세상을 바꿀 만한 일)은 대개 경고 없이 찾아온다. 교차로의 18륜 트럭처럼 옆을 들이받는다. 풋볼에서는 클리핑이라고 한다. 엄하게 단속하는 심각한 반칙, 하지만 우주는 아무런 규칙 없이 플레이한다. 아니면 시간과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 따로 있거나.
문제의 트럭은 내 차가 떡하니 들어선 교차로로 돌진했다. 트럭은 경적을 울렸고, 난 여기서 브레이크를 밟았다가는 피범벅 티본스테이크가 될 걸 직감하고 그대로 액셀을 때려 앞으로 튀어 나갔다. 트럭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우릴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교차로를 쌩 가로질러 갔다.
그제야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P26)
「엄마,」 나는 신중히 말을 고르며 물었다. 「정지 신호가 정확히 무슨 색이지?」
엄마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더니, 딱 노리스처럼, 무슨 말장난인지 가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파란색, 그냥…… 평범한 파란색.」
「다른 색도 있지 않아?」 내가 유도했다. 「뭐…… 빨간색이라든지?」
엄마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문득 불길한 징조를 읽은 것처럼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어디 안 좋니, 애시?」 (P28~29)
빨강은 피의 색이다. 위험의 색, 그러니까, 나한테 직관이란 게 있다면 사방이 빨갛게 보였어야 했다.
월요일 점심시간은 학교 도서관에서 도로 표지판의 역사를 알아보며 보냈다. 이쯤 되니 집착에 이르렀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포기하면 쉬울 텐데. 난 포기는커녕 도가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도로 표지판의 역사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보아하니 파란색은 두 가지 이유로 빨간색 대신 채택된 듯했다. 첫째는 적록 색맹을 고려해서, 둘째는 빨강이 포유류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색이라서다. 투우사들이 황소 앞에서 빨간 천을 펄럭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멈춰 서 있지 않도록, 달려들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빨간 등과 표지판도 운전자들의 분노를 자극하리라고 추론되었다. 1954년에 미국 교통관제 시설 편람은 파란색을 정지의 보편적인 색으로 채택했다. 내가 빨간색 정지 표지판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하와이였다. 그것도 개인 소유 도로에서만. 하와이 법에 따르면 공식적인 파란색 표지판은 공공 도로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이었다.
모두 그럴듯한 논리가 있었다. 단지 그 논리가 나와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계를 따돌리는 듯했을 뿐이다. (P31-32)
“잠깐, 저건 무슨 팀이야?”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 다음 플레이를 준비하는 보라색 팀을 가리키며 물었다.
“콜츠 말고 또 있어?”
“콜츠는 파란색이잖아. 청색, 흰색.”
리오가 날 이상한 눈으로 봤다. “아니, 청색, 흰색은 제츠지.”
“제츠는 녹색, 흰색이고!”
“바이킹스랑 착각했냐?”
나는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이킹스가 보라색이잖아!”
일어서자마자 머리가 핑 돌고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에 머리를 묻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리오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애시, 괜찮아?”
괜찮지 않았지만, 리오를 끌어들일 순 없었다. 우리의 우정은 거친 바다에 우뚝 선 섬과 같았다. 나는 그 섬이 필요했고, 리오까지 물속으로 끌어내리고 싶지 않았다. 리오는 내가 뇌 손상이라도 입은 듯이 바라봤다. 손상, 의사들이 심각한 뇌진탕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마치 회복세만 잘 타면 괜찮을 거라는 듯이. (P42)
이런 삶을 살아온 내 반쪽은 이 모든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반쪽은 그 반쪽을 흠씬 때려눕히고 싶어 했다.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더러운 이중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이드의 만행을 알게 된 지킬 박사의 심정이었
다. 〈이 대체 현실 속의 나는 내가 아니야!〉 나는 계속 자기 암시를 걸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았고,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래, 이건 내가 맞다. 그래도 거부하고픈 마음이 희망을 줬다. 원래의 내가 더 우세하다는 뜻이니까. 내 본질은 온전했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P59)
나라는 존재는 정말로 누구일까? 과학은 우리가 그저 경험의 총합일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라고 한다. 종교는 우리를 삶의 우여곡절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불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 가끔 야심한 밤에 친구들이 죄다 형이상학자가 되어서 이 우주가 더 큰 우주의 밑바닥에 깔린 벌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떠들 때도 끼어들지 않았다. 나는 항상 어차피 파악할 수 없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문제라고 보는 쪽이었다. 그 시큰둥한 태도는 형이상학적 위기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지금의 나에게 분명 불리했다.
나는 어떤 버전의 나도 여전히 나다울 거라 믿었다. 착각이었다. 이 세상의 나는 내가 질색하던 부류의 저속한 인간 이었고, 그 사실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전의 내가 완벽했다는 건 아니다. 시험에서 커닝한 적도,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알던 나는 결코 마약 거래를 할 리 없었다. 절대, 결코, 1백만 년 후에도, 단짝 친구의 뒤에서 그 동생과 붙어먹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천성 대 환경>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얼마만큼 선천적이고, 또 얼마만큼 후천적일까? 애초에 상황이 달랐더라면, 우리 아빠가 오래전에 장학금을 받았다면, 그래, 나는 이런 놈이 됐을 것이다. 그 싹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적어도 그 싹을 억누를 만큼 심지가 굳지 않았다. 내가 환경에 따라 어떤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똑똑히 보고 나니 겸허해지는 한편 소름 끼쳤다. 물론 이전의 내가 아직 건재하니, 거부할 수는 있다. 긍정적인 변화들을 이뤄 내서 나름 떳떳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게 산업 폐기물 같은 놈이 될 자질이 있다는 건 여전했다. 구역질이 났다. 복숭아를 한 입 깨물고 나서야 그 안에 득실거리는 구더기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P70-71)
<어쩌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음을 졸이며 산다. 잘못될 수도 있는 모든 일. 대개 절대 오지 않을 끔찍한 내일들을 걱정하느라.
그런가 하면 어제에 발목 잡힌 사람들이 있다. <했더라면>과 기회를 놓치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거기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되돌릴 수 없는 어제를 다시 사느라 에너지를 끌어다 쓴다.
그리고 나 같은 부류가 있다. 나는 현재를 살려고 한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인생이 펼쳐지는 대로 경험하는 것. 매일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 하지만 여기에도 단점이 있다. 그렇게 살면 딱히 생각이란 걸 안 한다.
어떤 도인들은 생각이 독이라고 말한다. 자기 치유를 한다는 어떤 인간은 장장 2년 동안 공원 나무 아래 앉아 생각을 비우는 데만 몰두했다고 한다. 인간보다 수풀에 가까워지려는 양. 물론 생각이 후회나 불안으로 치달으면 독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를 수풀이나 민달팽이와 구별하는 요소다.
수풀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생각은 우리의 힘이다. 우리가 생각을 부려야지. 생각이 우리를 부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내 삶에서, 아니 판이 뒤집히기 전의 내 삶에서 나는 생각하기보다 행동하는 편이었고, 따라서 내 뇌는 평범한 3차원의 너머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93-94)
내가 아는 바는 이러하다. 1950년대에 일명 <브라운 대 교육 위원회>라는 대법원 재판이 있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비슷한 소송 다섯 건을 합쳐 판결했다. 사회 시험 문제라서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토록 중요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이때껏 내 머릿속에서 달랑 인덱스카드 한 장으로 남아 있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 판례는 당시엔 합법이던 인종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남부에서는 이른바 분리 평등 원칙에 따라 백인 애들은 백인 학교에 다니고 흑인 애들은 흑인 학교에 다녔는데, 물론 그 어디에도 평등은 없었다.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인종 차별이 위헌이며 따라서 이 원칙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그렇게 만장일치가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이뤄 냈고, 법은 바뀌었다.
물론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반발했다. 앨라배마 주지사는 흑인 학생 두 명의 수업 등록을 막으려고 학교 교문을 막아섰다. 버지니아주의 한 카운티는 공립 학교를 통합하는 대신 장장 5년 동안 폐쇄했다. 실화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과거가 내 현실 속에 존재했다. 내 원래 현실에, 하지만 그 모든 반발에도 인종차별을 철폐한 대법원의 결정은 끝없는 전쟁에서 중요한 승리였다.
여기선 대체 무슨 일이 그걸 다 망쳤을까?
알고 보니, 이 새로운 세상에서 대법원 판결은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3대 5, 다섯 명의 대법관이 분리를 지지한 것이다.
그 판결이 모든 걸 바꿨다.
역사는 방향을 틀었다. 인종 차별은 여전히 국법으로 남았다. 그리고 분평이라는 그 표현? 그건 알고 보니 <그쪽> 동네에 살고 <그쪽>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분리하된 평등하면 된다>의 줄임말.
정신력이 꽤 강한 나조차도 멘털이 무너졌다. 내가 알던 미국도 이미 충분히 어두운 시대와 싸우고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든 횃불이 다 쓴 전구처럼 깜빡이는 시대. 하지만 <이> 미국에서 그 횃불은 진작 물벼락을 맞고 완전히 꺼져 있었다. (P106-107)
우리의 인지 능력은 몹시 제한적이다. 종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하나의 개체로서도 그렇다. 저마다의 욕망과 두려움에 눈이 멀어서,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악의 맹시(盲視)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앤절라와의 그날 밤 일이 일어난 적 없는 세상을 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세상에 떨어졌다. 나는 리오가 가진 모든 게 부러웠다. 혹시 내 질투심이 우릴 여기로 떠밀고 리오에게서 모든 걸 앗아 가는 데 한몫한 걸까?
흔히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그거 아는가? 말조심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제 우리는 함부로 욕망하고 얻어 내는 모든 것에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121)
우주의 중심, 누구나 내심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상상할 거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얼마간 그렇게 느끼기 마련이다. 아기일 때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세상 만물은 그저 자신의 일부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다리나 제대로 쥐지 못하는 손처럼 비협조적인 부속물, 그러다 걷고 말하는 걸 배우면서 자기 몸 밖에 있는 것들의 이질성을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느낀다. 그 시기를 끝내 넘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나이를 먹고 철이 든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척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렇다고 믿을 거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복권을 사거나 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모든 논리와 수학적으로 증명된 확률에도 불구하고 행운이 제 앞으로 굴러오리라 믿는다. 은연중에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33)
은신처는 그리 깔끔하지 않았다. 패스트푸드 포장지가 그곳에 널려 있었다. 더블디는 내 표정을 보고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문제 있어?”
“그런 건 아닌데, 쓰레기도 제대로 못 치우는 존재들이 어떻게 우주의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거지?”
“쓰레기 아니거든. 이 우주에 쓰레기처럼 투영될 뿐이지.”
그러면서도 더블디는 주섬주섬 쓰레기를 주웠다.
그동안 에디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더니 게임 컨트롤러처럼 보이는 물건을 붙잡고 비디오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말로는 비디오 게임이 아니라 양자 차원 간 조사 도구, 줄여서 쿼트라고 했다. “쿼트가 널 현재 우주의 중심이라고 지목했어.” 에드가 말했다. “전문 용어로는 주관적 중심부. 줄여서 주심, 넌 주심인 동안 현실을 재정의하고 <그런> 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지, 아니면 적어도 네가 그렇게 만들기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말이야.”
“그렇다면...... 내 강력 태클은 이 세상의 리모컨을 누르는 거네.”
“그래.” 더블디가 말했다. “네 가차 없는 몸통 박치기가 바로 메커니즘이야. 주심이 지닌 재주에 따라 다르지.” 그는 마치 나의 그 재주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더블디는 곧바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놈이 되었다. (P136)
풋볼 훈련은 영혼이 무뎌질 만큼 고됐다. 피니시스에 패배한 것에 대한 벌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영혼을 좀 마비시킬 필요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수비 훈련은 따로 진행해서 공격 선수들과 마주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레이턴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사실 레이턴은 내 친구라고 할 수 없었다. 단지 풋볼 팀원이고 우리의 주장 격인 쿼터백이었기에 존중할 뿐이었다. 나는 여간해서 사람을 미워하지 않지만, 솔직히 말해 내 인생에서 레이턴보다 싫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나를 모욕하고 위협해서만이 아니라, 케이티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도 그랬다. 케이티는 비록 배신감을 안겼으나 유일하게 날 도와주려 한 친구였다. (P157)
1초 사이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난 그것을 늘렸다. 시간을 앞으로 가게 하는 대신 옆으로 가게 했다.
그러자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웬 구덩이가 있었다. 그 가장자리에서 내가 미끄러지듯 달리는데 자꾸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안에 빠지면 끝이란 걸 알았다. 나건, 내 세상이건, 둘 다건.
날 둘러싼 풍경은 치즈버거나 이모티콘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형체 없이 고동치는 것들이 자리다툼을 벌였다. 각각의 잠재 현실들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 존재하려고 기를 쓰는 것이었다.
일부는 사악하고 일부는 유순했다. 나는 익숙한 것들을 감지했지만 그것들은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그것들에 가닿으려면 다른 것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구덩이에 빠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다른 것들이 문어처럼 나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함과 동시에 실제로 그렇게 됐다. 수많은 문어가 날 향해 발을 뻗고 나를 사로잡고, 옭아맸다.
그때 한 현실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쁘지도, 좋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 궁금해했다. 실재하게 되면 어떨지 절실히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 현실이 크고 심오한 변화를 불러오리란 걸 직감했다. 어떤 변화일지는 몰라도, 인과응보식 현실은 아니었다. 내가 알던 세계로부터 나를 훨씬 더 멀리 데려갈 현실이었다. (P189)
나는 이전과 다른 세상을 마주한 게 아니었다. 안 그런가? 이 세상은 이전 그대로 참혹했다. 이번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다. 이 새로운 렌즈로 내 삶을 돌아보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했던 모든 거짓말, 내가 쓴 모든 가면, 그리고 수치심을 게이라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부끄러웠다. 떳떳하게 말할 용기가 없어서.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될 거야.” 언젠가 폴이 말했다. “적당한 때가 올 거야. 괜찮아. 커밍아웃은 모두 자기 방식대로 해야 해.” 그러고는 덧붙였다. “네가 하면, 나도 할게.”
그 말은 내가 폴을 붙잡고 있다는 자각에 힘을 실었다. 비록 폴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겠지만. (P199)
맙소사, 이 기억들! 나는 거실에 앉아 폴이 내려오길 기다리며 혼자 웃다가, 움츠리다가, 또 웃었다. 나는 이 세상의 조각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폴과 관련된 것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인생 자체가 머릿속에 휘돌았다. 거의 같으면서도 생판 달랐다. 같은 사건을 겪고, 같은 파티에 참석했는데 기억하는 내용이 딴판이었다. 뇌리에 깊이 박힐 만큼 내게 타격을 준 것들이 떠올랐다. 어떤 대화, 어떤 표정. 그 모든 걸 떠올리고 나니 내가 나를, 나라는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보호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놓칠까 봐 쿼터백처럼 꽉 붙들고 있었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뽁뽁이로 겹겹이 싼 채. 아무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랐고 깨뜨릴 수도 없었다. 폴? 폴은 그 뽁뽁이의 공기 주머니를 한 알씩 터뜨리는 짓궂은 손이었다. 나는 공기 주머니가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이렇게 해서 이전의 나와 더 이전의 내가 새로운 나를 알게 됐다. 에드워드 쌍둥이들이 계속 분열하는 동안 나는 그 반대로 해야 했다. 여러 자아를 하나의 <나>로 합쳐야 했다. 물론 억누르고 진압해야 할 자아도 있었다. 마약을 거래하고 남들을 업신여기던 자아 말이다. 하지만 이 자아, 성 소수자 자아는 딱히 잠재우고 싶지 않았다. 무지개 위에서 뛰놀고 싶은 건 아니어도, 그를 알아 가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 모습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새로운 나는 원래의 나보다 입체적인 모습이었다. (P213)
“애시, 넌 절대 벽장에서 못 나올 거야. 너도 알잖아. 앞으로도 넌 비밀스러운 단짝을 두고 겉으론 평범하게 살아가겠지. 그게 네가 선택한 삶이라면, 비난할 생각 없어. 네가 결정할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강렬한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그런 감정을 느낀 게 언제였더라? 그건 바로 상실감이었다. 너무나 중요한 걸 잃어버렸을 때, 그 속은 이루 말할수 없다. 내가 폴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나? 누가 누굴 속여? 나는 폴을 사랑했다. 나는 폴을 사랑한다.
“난 성 소수자 단체에 가입할 거야.” 폴이 말했다. “가입하고, 공개할 거야. 네가 알아 둬야 할 것 같았어. 그 전에 먼저 나랑 거리를 두라고.”
눈물이 차올랐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너랑 거리를 두고 싶어 하겠어?”
내 눈물이 폴의 눈물을 촉발했다. 하지만 폴은 얼른 눈가를 훔쳤다.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마, 애시.”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 내 머리는 이미 탈출 경로를 짜고 있었다. 폴이 커밍아웃을 했을 때 나에게 닿을 의심의 눈초리를 막기 위해 어떻게 연막을 칠지. 일단 폴을 전적으로 지지하겠지. 그게 옳은 일이니까. 다만 멀찌감치 떨어져 지지를 보낼 거였다.
폴은 날 간파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왜냐면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내 안 어딘가에서 분출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다중 우주를 거치면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P219-220)
결국, 에드워드 쌍둥이들은 그 일을 <범차원적 제명>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고, 그것만으로 약간 홀가분해 보였다. 또다시 의사들이 연상됐다. 한때 우리 이모는 혈소판에 무슨 이상이 있어서 다리에 희한한 보라색 반점이 생겼다. 의료진은 이모에게 특발 혈소판 감소 자색반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몹시 어렵고 전문적으로 들리지만, 따져 보면 그냥 <이유를 알 수 없는 보라색 반점>이라는 뜻이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잔뜩 부은 얼굴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두들겨 맞았던 세상을 제거했다면 상처와 멍도 사라져야 하지 않나?
“네 기억 같은 거야.” 에드가 내 물음에 답했다. “너에게 남은 흔적들이지.”
“세상이 합리적 설명을 찾아낼 거야.” 테디가 장담했다.
하지만 그게 내가 한 일을 지워 주진 않았다. 난 완전 범죄를 저질렀다.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피해자도 없었다.
“만약 내가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세상을 삭제했다면, 내가 있었던 세상, 내 원래 세상은?” 내가 말했다. (P249)
2분 경고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제 고작 몇 번의 플레이 밖에 안 남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저 여섯 꾸러미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아까 경기장에 막 나왔을 때 느낀 것처럼 상충하는 희망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모든 걸 머릿속에서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폴을 떠올렸다. 내가 원래의 나로 돌아간다면, 우린 끝이었다. 폴은 내게 수학 과외 선생님에 지나지 않을 거다. 나는 폴을 잃을 마음의 준비가 됐나? 잃는다면 다시 케이티에게 감정이 생길 터였다. 그런데 리오를 정상 궤도에 되돌려 놓지 못하고 앤절라를 무덤에서 다시 데려올 수 없다면, 내 개인적 문제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관중석에서 펄럭이는 저 깃발들은? <이> 현실 속 사람들은 나에게서 무언가를 원했다.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이 세상을 지우는 건 비겁한 짓일까? 난 그냥 도망치는 걸까?
플레이가 재개됐다. 나는 공격 라인을 뚫고 달렸다. 심판이 노란 깃발을 들고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쿼터백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그는 아직 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이 스냅되기도 전이었다. 상관 안 했다. 나는 그를 세차게 들이받아 쓰러뜨렸다.
하지만 내가 이른 곳은 그저 맨땅이었다. (P262-263)
2016년 올랜도의 펄스라는 게이 나이트클럽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괴한에 의해 거의 50명이 사망했다. 1998년 매슈 셰퍼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한 뒤 울타리에 묶인 채 방치되어 죽었다. 단지 게이라는 이유로.
그리 생소한 이야기가 아닐 거다. 나도 내 원래 세상에서 간혹 들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끔찍하긴 하지만 내 문제는 아님>이라는 큰 상자에 분류됐다. 인정하건 안 하건 우린 모두 그 상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나에게 그런 사건들은 그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이 당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당한 일이었다. <내가> 고문당하고, <내가> 구타당하고, <내가> 총에 맞은 거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전히 나는 당사자였다. 왜냐면 동성애자가 보고 듣는 모든 비열한 동성애 혐오 행위는 자신을 향한 폭력이니까. (P268)
이번에도 한 기자가 나에게 다른 게이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하루아침에 무슨 무지개 리그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해 본 적 없었지만, 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었다.
“공개했다면, 당당히 어깨 펴고 다니세요. 안 했다면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숨기기로 했다면 그 선택은 스스로 준비됐을 때 바뀔 수 있고, 바뀔 거라는 걸 기억하세요. 언젠가 자기 안팎으로 떳떳해질 수 있을 겁니다.”
기자들은 딱히 감명받은 기색이 아니었지만, 솔직히, 나도 내 발언에 조금 놀랐다. 별로 머저리 같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거의 유창했다.
“이제 뭘 할 건가요, 애시?”
예로부터 스포츠 선수들이 그 질문을 받을 때 흔히 하는 대답은 <디즈니랜드에 가려고요.>다. 미안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미안해하지 않는 삶을 살 거예요. 누구든 거기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엿이나 먹으라죠.”
마지막 부분은 뉴스에서 삐 소리로 처리될 게 뻔했다. 내 유창한 웅변도 여기까지였다. (P270)
우리가 흔히 쓰는 격언들이 있다. 삶의 중심을 찾도록 돕는 보편적 지혜들. 하지만 그런 근사한 말은 대개 겉으로는 그럴싸하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틀렸다. 애초에 태산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수두룩하다. 하루에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필요 없다? 그래, 결국 병들어 죽을 때까지는.
그냥 툴툴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왜냐면 이어진 주에 삶의 모든 쉬운 해답과 지혜에 대한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착각 1: 공짜 선물에 트집 잡지 마라.
나쁜 격언이다. 왜냐면 선물처럼 보이는 것에 때로는 복잡한 조건이나 함정이 숨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들이 떼로 매복해 있던 트로이아의 목마처럼. (P288)
해왕성의 궤도 너머에는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혜성과 소행성,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니라서 반인반수의 이름을 따 켄타우로스로 불리는 천체들.
명왕성도 거기 떠돌고 있다. 그 바윗덩어리는 안타깝게도 2006년에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실제로 제9행성이 우리 모르게 숨어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그들은 그걸 행성으로 여겼다.
몇 년 전, 제9행성이 빅뱅이 남긴 원시 블랙홀이라는 이론이 나왔다. 내가 지어낸 게 아니다. 진짜다. 물론 우리는 블랙홀을 볼 수 없다. 그저 주변 천체 궤도에 미치는 영향으로 그 존재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어둠의 중심에는 지구 질량의 열다섯 배나 되는 초고밀도의 바윗덩어리가 있다고 한다. 고작 야구공만 한 크기의.
천문학자들은 이를 우주의 장엄한 측면으로 본다. 하지만 그들이 뭘 모르는 거다. 그것의 본질을 ........ 나는 안다.
그 천체의 신비를 다룬 기사가 목요일 아침에 내 SNS 피드에 떴다. <돈세탁으로 기소된 상원 의원 셋>과 <바보 같아 더 귀여운 강아지 모음> 사이에 끼어 있었다. 헤드라인은 <원시 블랙홀은 처음 보고된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였다. 하지만 그 기사는 내가 클릭하기도 전에 피드에서 사라졌다. 그럴 때가 있다. 어떤 기사는 한번 사라지면 아무리 검색해도 못 찾는다.
<원시 블랙홀은 처음 보고된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오늘은 그저 과학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한 낚시성 기사였다. 내일을 사상 최악의 과소평가가 될지도 몰랐다. (P303-304)
무지개 깃발이 꽤 많이 보였다. <네 인생을 살아라> 티셔츠도 단순히 경기를 보러 온 관중이 대다수였지만 특별히 나를 응원하러 온 사람도 꽤 많았다. 난 그게 힘이 되기보다 거슬렸다. 이들은 내가 그저 라인맨인 걸 모르나? 라인맨은 관심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원치 않는 일이다. 그게 우리가 라인에 있는 이유다. 그러다 나는 문득 이게 공동 근접 효과 같은 게 아닌가 싶어졌다. 어쩌면 모두가 이유도 모른 채 이 경기의 <중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더 나은 세상을 가져다주길 응원하는 거라고.
그래, 오만하게 들린다는 거 안다. 내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기를 휘두르려면 스스로 휘두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아서왕도 내심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지 않았다면 바위에 박힌 전설의 검에 손도 대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주심은 무기를 휘두르는 존재를 의미했다. 나는 이미 그 무기를 사용해 세 사람을 제거했다. 이제 나는 그 힘을 이용해 더 나은 세상을 얻어서 그간의 잘못을 만회해야 했다. (P317)
1백분의 73초. 0.73초. 안정 상태의 심장이 한 번 뛰는 시간이다. 그 순간의 차이로 교차로를 질주하는 트럭에 치여 죽을 수도, 그 트럭이 몇 인치 비켜 지나가 살 수도 있다. 내가 첫 현실 이동 후 노리스와 함께 죽었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도, 더 나쁜 곳도 아니었을 거다. 그저 정지 신호가 파란색일 뿐,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을까? 아마 아닐 거다. <다른> 사람이 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도 그 차이를 모를 거다. 죽은 당사자라면 알아챘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죽었다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0.73초. 그건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곧 세상의 모든 차이를 의미할 터였다.
필드에서 나를 박은 건 트럭이 아니라 치타였다. 상대편 하프백이 나에게 심각한 반칙인 클리핑을 먹였던 거다. 놈은 빠르게 라인을 돌파하는 나를 포착하고 내가 쿼터백을 쓰러뜨리기 전에 내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가슴 보호대 아래로 세게, 갈비뼈에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얼음장 같은 추위와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또다시 미끄러지고 있었다. <다른 어딘가>로. (P320-321)
인류 역사에서 서로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경계는 결코 메울 수 없는 틈일까?
우리는 다른 이들의 다른 점은 비방하고 우리 사이의 다른 점은 미화한다. 우리는 <그들>을 한 상자에 넣고 나서 <우리>만의 상자들을 만든다. 규정되기 전에 우리를 스스로 규정한다. 우리 부류를 찾아 다른 부류로부터 방어한다.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 욕구는 예로부터 양날의 검이었다. 모래에 선을 그으면 그을수록 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구치소 직원이 속한 유구한 상자가 있다. 바로 개자식 상자. 그만큼 무차별적인 상자도 없다. 온갖 인종, 신념, 정당, 지향의 사람들이 거기 들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을 모실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동시에 추수 감사절 식탁에서 칠면조와 밥 삼촌 사이에 놓일 수 있을 만큼 조그맣다. 정말이지 위험한 상자다. 많은 것으로 위장할 수 있기에 내가 뭘 상대로 싸우는지 확신할 수 없다.
문제는 그 개자식 상자가 인종 차별주의자 상자 안에 너무나 편안하게 자리 잡는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그건 아주 잘 먹인 기생충이 된다.
슬프게도 난 그 구치소 개자식이 모든 세상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에게 욕을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분풀이야 되겠지만 그가 세상에서 없어지지는 않을 거다. 우리가 먹이를 주지 않더라도 그 혐오스러운 기생충은 늘 다른 먹이 공급원을 찾을 거다. 그것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가차 없이 빛을 쏘아서 숨을 그림자를 찾지 못하게 하는 거다. 그러면 그것이 별수 없이 제 정체를 드러내겠지. 우리가 관심을 줄 가치조차 없는 작고 하찮은 생물이라는 정체를. (P362-363)
이제껏 현실을 번번이 휘청거리게 한 것은 강력한 들이받기였지만, 나는 더 이상 디펜시브 태클이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주심이 되는 게 체격과 근육의 문제일 리는 없었다. 단순히 신체적인 힘이 다가 아니었으니까. 세상을 바꾸는 건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의지가 균형을 깨뜨리고 현실을 바꾼 힘이었다. 벽에 몸을 던지거나 손으로 서랍장을 내려지는 건 소용없었다. 믿어도 좋다. 이미 시도해 봤으니까. 그 일로 내 몸은 이미 그랬던 것보다 더 멍들고 욱신거리게 됐다. 심지어 반대의 경로도 시도했다. 뜨거운 두통 완하 욕조에 몸을 푹 담근 채 긴장을 풀어서 <다른 어딘가>에 접속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는 내 지긋지긋한 두통조차 완화해주지 못했다. (P373)
살면서 누구나 승산 없는 게임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능성은 희박하고 남은 것은 오로지 완수를 향한 의지뿐일 때, 풋볼에서는 <헤일 메리>라고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최후의 플레이. 하늘에 실어 나를 날개 하나 없는 절박한 기도, 요동치는 북극광 빛 아래. 나는 에드워드 쌍둥이들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멈춰? 거기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할 거야? 어떻게 멈추냐고!” 내가 따졌다.
“넌 아마 못 할 거야.” 에드가 말했다.
“레이턴이 널 죽였다면 멈췄을지도 모르지.” 더블디가 말했다. “이제 너무 늦었어.”
“어차피 얼마 안 남았어.” 에디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에드와도가 말했다. “순식간이고 고통도 없을 거야. 진정한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모두가 동시에 사라질 거야.”
“딱히 드문 일은 아니야.” 테디가 말했다.
“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드가 말을 맺었다.
그러고서 나를 혼자 남겨 둔 채 하나둘씩 돌아서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세상이 숨을 거두기 전에 탈출하는 것이었다. (P382-383)
내가 아는 바는 이러하다.
10월 28일 월요일. 레이턴 밴던붐이 풋볼 훈련 뒤 나를 집에 태워다 주고 있었다. 내 구닥다리 도지가 학교 주차장에서 먹통이 됐기 때문이다. 차 라디오에서 커닙션의 곡이 흘러나왔다. 레이턴은 커닙션이 과대평가됐다고 투덜거리면서 시선을 내려 채널을 돌렸다. 그 바람에 빨간불을 못 보고 달렸다. 우리는 옆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들이받혔다.
나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피해는 막심했다. 경막밑 출혈이 있어 머리를 열어 피를 빼야 했다. 여기저기 출혈이 심했고 갈비뼈도 몇 대 부러졌다. 한쪽 다리는...... 보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우주가 얼마나 깔끔하게 자기 상처들을 치료했는지였다. 톱니바퀴는 모두 완벽하게 맞물리고 태엽 장치는 제대로 돌아갔다. 모든 결과에는 논리적인 원인과 영향이 있었다. 모든 게 설명됐다.
며칠간 문병객이 꽤 많았는데, 약 기운에 몽롱해서 누가 언제 왔는지 뒤죽박죽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겠다. (P389)
내가 겪은 일로 내가 더 현명해졌는지는 직접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겸손해졌다는 건 안다. 나 자신의 무지가 날 가르쳤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현실의 깊이를 이해해야 세상을 망치는 오만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결국 중요한 건 그런 관점이다. 겸손해져야만 위대해지길 바랄 수 있다.
또 나는 인간성 자체와 마찬가지로, 내 여러 자아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메울 수는 없고 다리만 놓을 수 있는 틈새. 엔지니어라면 알겠지만, 다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케이블의 장력이다. 합쳐질 수 없는 것 사이의 긴장감을 믿어야 그 사이의 협곡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달이 구름 뒤로 숨었지만 병실 안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작은 불이라도. 늘 켜져 있었다. 눈을 감았다. 몸이 아팠지만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나는 왼쪽 다리의 공허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다. 적응할 거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니까. 우리는 적응하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나는 조만간 죽을 생각이 없다. 내가 살아갈 이 놀라운 삶을 두고서는 결코.
자,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두 번 다시는 수비 라인에 설 수 없겠지만, 괜찮다. 나는 이제 훨씬 더 흥미로운 경기를 뛸 자격을 얻었으니까. 세상이 나에게 뭘 던지든 들이받을 준비가 됐다.
그러니 어디 덤벼 보시라지. (P4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