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년

by 노용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은 제임스 아이보리가 각본을 쓰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연출한 2017년 영화다. 90회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작으로 안드레 애치먼이 감각적인 언어로 피아노 연주와 책이 삶의 전부인 열일곱 소년 엘리오와 스물넷의 미국인 철학교수 올리버, 두 남자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또한, 안드레 애치먼의 2007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아이 엠 러브>(2009)와 <비거 스플래쉬>(2015)를 잇는 구아다니노의 "욕망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1983년 북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17세의 엘리오 펄먼(티모시 샬라메)와 그의 아버지를 돕는 24세의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의 관계를 그리며, 마이클 스툴바그, 아미라 카사르, 에스테르 가렐, 빅투아르 뒤 부아가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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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손님>은 집주인 부부의 아들인 열일곱 살 소년 엘리오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보자마자 마음이 움직이고 괴로워지고 결국은 푹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 올리버에게 얼마나 강렬하게 끌리는지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마지못해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올리버에게 화가 나죠. 아버지의 연구를 도와주기로 한 여름 손님이지만 엘리오에게는 침입자나 마찬가지니까요. 엘리오는 올리버를 싫어할 이유를 부지런히 찾아내려 합니다. 올리버는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이니까. 엘리오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홀로 책을 읽거나 클래식 음악을 편곡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올리버는 학자로 지내는 낮과 달리 밤에는 엘리오네 가족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생활을 합니다. 자신감 넘치고 활발하고 사교적이고 약간 거만하며 습관처럼 내뱉는 “나중에!”라는 말이 남을 무시하는 듯 보이기도 하죠. 게다가 올리버는 엘리오를 의식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오는 그런 올리버를 싫어하려고 애쓰지만 이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P7)


“나중에요!” 이렇게 말하는 특유의 목소리와 태도.

헤어질 때 “나중에!”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굳이 다시 만나거나 연락하고 싶지 않다는 무심함을 가린 냉정하고 퉁명스러우며 어쩌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를 생각하면 떠오른ㄴ 첫 번째 기억이 바로 이 말이다.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나중에요!

눈을 감고 따라 말하는 순간, 오래전의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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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도착하여 평상시처럼 늘어지는 점심 식탁에서 내 옆에 앉았을 때, 그해 여름 우리 집으로 오기 전 시칠리아에 잠깐 머무느라 살이 약간 탔지만 손바닥은 부드러운 발바닥과 목, 팔처럼 태양에 별로 노출되지 않아서 창백한 빛깔임을 깨달았을 때 말이다. 밝은 분홍빛에 도마뱀의 배처럼 번들거리고 부드러웠다. 운동선수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처럼 혹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지나고 찾아온 새벽처럼 은밀하고 순수하고 풋내가 났다.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를 둘러싼 것들을 말해 주었다.

어쩌면 점심 식사 후 다들 수영복 차림으로 집 안팎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할 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들 여기저기 널브러져 시간을 죽이다가 수영하러 가자는 누군가의 말에 암초로 향했다. 친척, 사촌, 이웃, 친구, 친구의 친구, 동료, 테니스장을 써도 되느냐고 물으러 온 사람 등 누구나 환대를 받으며 휴식을 취하고 수영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좀 오래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별채를 내주었다. (P14)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여름을 눈보라 속으로 가져가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P24)


다음 날 우리는 테니스 복식 경기를 했다. 쉬는 시간에 그가 마팔다의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한 팔을 내 어깨에 걸치고 친근한 포옹 마사지를 하듯 엄지와 검지로 살짝 꼬집었다. 정말 다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법에 홀린 듯 완전히 정신을 빼앗겨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대로 있다가는 큰 태엽을 만지는 순간 불구의 몸이 허물어져 버리는 작은 목각 인형처럼 속수무책일 것 같았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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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일기에도 그 감정에 대해 적었다. 나는 그 감정을 “까무러칠 정도의 황홀함‘이라고 불렀다. 왜 까무러칠 정도의 황홀함을 느꼈을까? 그게 그토록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나를 만지기만 해도 의지를 잃고 허물어질까? 사르르 녹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나는 사르르 녹는 모습을 왜 그에게 보여 주지 못할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가 나를 비웃고 사람들에게 말할까 봐? 내가 너무 어려서 잘 모르고 하는 행동이라며 없는 일로 할까 봐? 그가 내 마음을 눈치 챘다면(눈치 챘을 정도라면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겠지)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유혹 때문일까? 나는 그가 행동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 둘 사이의 이 탁구 같은 게임을 계속하면서 평생 그리워하기만 바라는가? 몰랐다가, 모르는 게 아니었다가, 모르는 게 아닌 게 아니었다가 하는 게임. 그냥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예스‘라고 할 수 없으면 ’노‘라고 하는 대신 ’나중에‘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스‘일 때 ’어쩌면‘이라고 대답하고 상대방은 ’노‘라고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걸까? 진짜 속마음은 ’제발 한 번만 더 물어봐 줘. 그다음에 한 번만 더 물어봐 줘‘이면서?

그해 여름을 돌아보면 ‘불’과 ‘까무러칠 정도의 황활함’을 감수하려고 무던히 애써야 했지만 여전히 삶은 행복한 순간을 가져다주었다. (P28-29)


그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B에 발을 들여놓은 유일한 유대인이었다. 우리와 가르게 그는 처음부터 유대인임을 드러냈다. 우리 가족은 눈에 띄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도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그러듯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셔츠 아래에, 숨기지는 않고 밀어 넣고 살았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중한 유대인’이었다. 올리버가 목에서부터 유대인임을 드러내는 걸 봤을 때, 그가 셔츠를 풀어헤친 채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갔을 때 우리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몇 번인가 그를 흉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로커룸에서 알몸으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려고 하다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에 혼자 흥분해 버리는 사람처럼 스스로 의식하고 말았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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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라우코스, 그는 디오메데스였다. 나는 인간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추종이라는 이름 아래 그의 청동을 대가로 내 황금 갑옷을 주었다. 공평한 교환이다. 둘 다 흥정도 하지 않고 절약이나 사치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우정’이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전에서 정의하는 우정은 생경하고 침잠 상태의 것이라 관심이 없었다. 그가 택시를 내린 순간부터 로마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가지 내가 원한 건 어쩌면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원하는 것,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서 먼저 나와야만 했다. 그래야 이어서 내게서도 나올 수 있었다.

내가 푹 빠지면 상대방도 푹 빠진다는 법칙이 어딘가에 있다. Amor ch's null'amato amar perdona(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지옥>편에서 프란체스카는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게 된느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자, 나는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영원히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P45)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가 첼란에 대해 나눈 대화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주 오랜만에 행복해졌다. 말 한 마디, 시선 하나, 내가 닿는 모든 곳에 행복감이 퍼졌다.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행복의 근원을 찾으면 타인에게 의존할 필요 없이 다음에도 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

야곱이 라헬에게 물을 달라고 한 뒤 그녀에게 예언이 된 말을 듣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우물가 땅에 입 맞추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유대인, 첼란도 유대인, 올리버도 유대인이고, 우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세상에서 절반은 유대인 거주지, 절반은 오아시스에 있었다. 이방인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갑자기 멈추고 마음을 잘못 읽는 일도, 남들에게 오해받는 일도 없으며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아서 친밀함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유대인 추방이나 마찬가지인 곳. 그렇다면 그는 내게 귀향을 의미하는 존재인가? 올리버, 당신은 내게 귀향이에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 이상 원할 게 없어요. 당신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만들어요. 세상에 진실이 존재한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 하는 순간에 존재할 거예요. 언젠가 용기를 내어 내 진실을 당신에게 전한다면 감사의 의미로 로마의 모든 제단에 촛불을 밝히라고 해 주세요.

그의 한마디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쉽게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불행해지고 싶지 않으면 그런 작은 행복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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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시간에는 두려움이 조여 왔다. 두려움은 음울한 망령 혹은 이 작은 도시에 갇혀 버린 길 잃은 낯선 새 같았다. 그 거무스름한 날개가 모든 생명체에 절대로 씻어지지 않는 그림자의 얼룩을 묻히는, 나는 무엇이 두려운지도, 왜 그렇게 걱정되는 지도 몰랐다. 극심한 공포가 때로는 희망처럼 느껴지는 까닭도 알 수 없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현실 같지 않은 기쁨, 올가미로 뒤덮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희망 말이다.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 두려우면서도 흥분되었다. 그가 언제 나타날지 두려웠다. 나타나지 않아도 두려웠고 나를 쳐다봐도 두려웠다. 쳐다보지 않으면 더욱 두려워졌다. 결국 고뇌가 나를 완전히 지치게 했고 피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오후면 그냥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을 꾸면서도 누가 거실에 있고 까치발로 오가는지, 누가 서서 나를 얼마나 쳐다보는지,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오늘 자 신문을 보다 포기하는지, 누가 오늘 상영 영화를 확인하고 나를 깨워야 할까 고민하는지 다 알았다.

두려움은 절대로 가시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을 의식했고 아침에 그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래층으로 내려와 함께 아침을 먹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가 커피를 마시지 않고 곧장 정원으로 나가 버리면 기쁨이 얼어붙었다. (P81)


나도 모르게 입고 있던 수영복을 벗고 그의 수영복을 입기 시작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홀감에 빠진 나머지 감히 술에 취해도 하지 않을 과감한 행동을 하고 싶었다. 그의 수영복 안에 사정하여 그가 나중에 발견하게 만들고 싶었다. 다음 순간 더욱 무모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침대로 올라가 수영복을 벗은 뒤 이불과 겹쳐 놓고 껴안았다. 벌거벗은 채로, 그가 나를 봤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대처할 거야. 침대의 익숙한 느낌이 다가왔다. 내 침대, 하지만 그의 향기로 가득했다. 욤 키푸르의 신전에서 옆에 서 있던 낯선 노인이 자신의 탈리스를 내 어깨에 올려놓았을 때의 낯선 향기처럼 건전하고 너그러웠다. 내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영원히 흩어졌지만, 똑같은 천 조각으로 서로를 감싸면서 하나가 되는 국가와 합쳐졌다. 얼굴에 그의 베개를 대고 미친 듯 키스하면서 두 다리로 휘감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용기가 없다고 고백하며 무엇을 원하는지도 말했다. 다 말하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밀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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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그의 흥미를 붙잡아 두기 위한 서막으로 운을 떴다. “모네가 그림을 그리러 온 장소예요.”

성장을 저해당한 작은 나무와 울퉁불퉁한 올리브나무가 잡목림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들을 쭉 따라가면 벼랑 끝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에 아름드리 소나무에 일부 가려진 언덕이 나왔다. 내가 나무에 자전거를 대자 그도 똑같이 했다.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을 안내했다.

“이제 구경해요.” 나는 그 어떤 말보다 나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드러내 줄 무언가를 공개하는 것처럼 잔뜩 흡족해하면서 말했다.

바로 아래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고요한 작은 만이 있었다. 주변에는 집도, 부두도, 고깃배도, 문명의 흔적을 나타내는 그 무엇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 N의 윤곽, 우리 집과 이웃집처럼 보이는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미니가 사는 집, 올리버와 잤을 두 딸이 있는 모레스키네 집, 둘이 따로 잤을 수도 있고 셋이 같이 잤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 상관 없었다.

“여기는 내 공간이에요. 나만의 공간, 책을 읽으러 와요. 여기서 몇 권이나 읽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넌 혼자 있는 게 좋아?”

“아뇨,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난 그걸 견디는 법을 배웠죠.”

“넌 항상 그렇게 지혜로우니?”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밖에 나가서 친구 좀 사귀라고, 사귄 친구들한테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설교를 시작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과 의사 겸 가족 친구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신호일까? 아니면 내가 또 그를 완전히 잘못 읽은 걸까? (P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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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의 빛, 내 눈의 빛, 당신은 세상의 빛, 내 인생의 빛 같은 사람이에요. 내 눈의 빛 같은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고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의아했지만 말도 안 되는 그런 표현에도 눈물이 나왔다. 그의 베개와 수영복에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그가 혀끝으로 닦아서 슬픔이 사라지게 만들어 줬으면 했다.

그가 내 발을 만진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추파를 던진 걸까? 아니면 다정한 포옹 마사지처럼 좋은 의도로 보내는 연대감이나 동지애의 표시일까? 더 이상 성관계를 맺지는 않지만 친구로 지내면서 가끔 영화를 보러 가는 연인 사이의 가벼운 쿡 찌르기 같은 걸까? 아니면 아직도 기억나는 그 말, 아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언제나 우리 사이에 감정이 남아 있을 거라는 뜻인가?

집을 떠나고 싶었다. 빨리 가을이 되어 먼 곳에 있고 싶었다. 바보 같은 레 단징과 정신이 멀쩡히 박혀 있다면 아무도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을 바보 같은 청년이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항상 나와 경쟁하는 부모님과 사촌들, 조카들 그리고 불가사의한 학문 프로젝트를 추천하고 내가 사용하는 화장실을 전세 내는 끔찍한 여름 손님들을 떠나고 싶었다.

그를 다시 보면 어떻게 될까? 또 피를 흘리고 울고 반바지에 사정할까? 자주 그러듯 한밤중에 레 단징 근처에서 누군가와 한가로이 걷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그게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면?

그를 피하고 모든 연결점을 하나씩 끊어 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P111)


“내가 그렇게 좋아, 엘리오?”

“당신을 좋아하냐고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리기를 바랐다. 어떻게 그걸 의심할 수 있느냐는 듯이. 그래도 어조를 부드럽게 낮춰서 ‘당연하죠’를 ‘그럴 수도요’라고 의미심장하게 얼버무리며 대답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혀가 풀려 버렸다. “당신을 좋아하냐고요, 올리버? 난 당신을 숭배해요.” 말해 버렸다. 그가 깜짝 놀라서 뺨을 맞은 것처럼 느끼기를 바랐다. 그 맞은 뺨에 곧바로 나른한 애무가 이어지도록, 숭배하는데 좋아한다는 말이다 뭐란 말인가, 또한 내가 사용한 숭배한다는 동사에 설득의 녹아웃 펀치가 들어 있기를 바랐다. 나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직접 듣는 게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가 ‘00가 널 숭배해’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숭배’는 그 어떤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어두컴컴한 표현이었다. 가슴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는 동시에 도가 지나쳤을 경우를 대비해 곧장 물러날 수 있는 구멍을 찾은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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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그가 여전히 이 책을 가지고 있다면 보고 가슴 아프기를 바랐다. 그보다는 언젠가 그의 책을 살펴보던 누군가가 이 작은 <아르망스>를 발견하고 1980년대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누가 침묵 속에서 쓴 글인지 물어본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때 그가 슬픔처럼 확 솟구치되 애석함보다는 덜 강렬한 감정을 느꼈으면 했다. 어쩌면 나에 대한 연민이라도, 그날 서점에서 그의 연민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줄 수 있는 게 연민뿐이라면, 연민이 그가 나를 한 팔로 감싸게 만들 수 있다면, 밀려드는 연민과 애석함 속에 오래전부터 시작된 모호하고 에로틱한 암류가 맴돌고 있다면, 그날 아침 모네의 언덕에서 내가 한 키스를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로 키스했을 때 그의 입 안에 침을 넣었던 것을 기억해 주기를, 내 것과 그의 것이 섞이기를 아주 간절히 원했기에.

그는 그해 받은 선물 중에서 최고라고 좋아했다. 나는 형식적인 감사를 그냥 넘기려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다시 말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P136)


“넌 책이 그렇게 좋아?” 어둠 속에서 광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마르지아가 물었다. 음악이나 빵, 소금 들어간 버터나 잘 익은 여름 복숭아를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 나도 책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진 않아.” 마침내 독서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는구나 싶었다. 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지 물었다. “몰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거나 답하기 전에 얼버무릴 때 마르지아가 즐겨 하는 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어. 자신을 숨기거든.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

“너도 자신을 숨겨?”

“나? 아마도 그럴걸.” 나는 평상시라면 절대로 용기가 나지 않았을 질문을 던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한테도 숨기니?” (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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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팔은 나를 쓰다듬지도 않았고 꽉 껴안지도 않았다. 이 순간에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동료애였다. 그를 껴안은 채로 힘을 조금 풀고 두 팔 모두 그의 헐렁한 셔츠 안으로 가져가서 다시 곡 안았다. 그의 살에 닿고 싶었다.

“정말 이걸 원해?” 그는 지금껏 계속 머뭇거리는 이유가 의구심 때문이라도 되는 듯 물었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이 없었다. 내가 언제까지 그를 포옹하고 있을지, 나나 그가 언제 싫증낼지 궁금해졌다. 곧? 조금 있다가? 지금?

“우린 아직 얘길 안 했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들고 모네의 언덕에서처럼 똑바로 응시했다. 이미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둘 다 알기에 이번에는 더욱 강렬한 시선이었다. “키스해도 돼?” 언덕에서 키스해 놓고 그런 질문이라니? 우리 둘. 지난일은 다 지워 버리고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건가? (P168)


난생처음 어딘지 무척 소중한 곳에 도착한 느낌,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원히 나이기를 바라는 느낌, 두 팔이 후들거릴 때마다 완전히 낯설지만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닌 무언가를 찾은 듯한 느낌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내 삶의 일부였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지 못한 것을 그가 찾도록 도와준 느낌이었다. 꿈이 맞았다. 마침내 집에 온 느낌이었다.

그동안 난 어디에 있었던 거지? 올리버. 내가 어릴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이게 없는 삶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끝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라고 말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나인 이유였다. 그것은 내 꿈과 환상, 그와 나, 그의 입에서 내 입으로, 다시 그의 입으로 입에서 입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욕망의 말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내가 외설스러운 말을 시작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따라 하다가 말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태어나 처음 해 본 일이었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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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후 올리버는 교정한 원고를 밀라나에게 전해 주러 다시 시내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재빨리 내 쪽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를 보고 벌써 떠날 채비를 했다. 와인을 두 잔 마셨더니 얼른 낮잠을 자고 싶었다. 테이블에서 큼지막한 복숭아 두 개를 집어 들고 가면서 어머니에게 키스했다. 복숭아를 가져가 나중에 먹을 거라고 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 복숭아를 대리석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고는 옷을 다 벗었다. 깨끗하고 차갑고 빳빳하게 풀 먹여 햇빛에 말린 이불이 침대에 펼쳐져 있었다. 마팔다는 정말 최고였다. 나는 혼자 있고 싶었을까? 그렇다. 지난밤에는 이 사람이었다가 새벽에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또 달라졌다. 햇빛 가득한 여름 오후의 생생한 해바라기처럼 행복해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잠들려고 하는 지금 나는 혼자라서 기뻤을까? 그렇다, 아니, 아니다. 그렇다,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나는 행복했다. 다른 사람하고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행복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P185-186)


자리에서 일어나 복숭아 하나를 집어 들고 양쪽 엄지로 반을 갈랐다. 씨앗을 빼서 책상에 올려놓은 뒤 보송보송하고 붉은 복숭아를 아랫도리로 가져가 누르기 시작했다. 갈라진 복숭아가 성기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매일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복숭아로 이런 짓을 한다는 걸 안키세스가 알면 뭐라고 할까. 안키세스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굳은살 박인 손으로 매일 바싹 마른 땅에서 잡초를 뽑았다. 그의 복숭아는 복숭아보다는 좀 더 크고 과즙이 풍부한 살구에 가까웠다. 동물계는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이제 식물계로 넘어가는 거야. 다음은 광물계가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려고 했다. 성기에 온통 복숭아 과즙이 흘러내렸다. 지금 올리버가 들어온다면 아침에 그런 것처럼 내 성기를 빨게 할 것이고, 마르지아가 들어온다면 내가 하던 일을 마저 해 달라고 할 것이다. 복숭아는 부드럽고도 단단해서 가운데 붉은 부분을 보니 엉덩이뿐만 아니라 질도 떠올랐다. 두 쪽으로 갈라진 복숭아를 성기에 대고 단단히 잡은 뒤 문지르기 시작했다. 굳이 누구를 떠올리지 않으면서도 모두 다 떠올렸다. 지금 뭘 하는 건지 영문도 모를 복숭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복숭아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고 결국 쾌락을 느낄 것이다. 복숭아가 ‘날 가져, 엘리오. 더 세게 해 줘!’라고 말하는 듯했다. 잠시 후에는 ‘더 세게 해 달라니까!’라고 했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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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작은 것들을 조금씩 아껴 두었다. 먼 훗날 힘들 때 과거의 희미한 불빛이 온기를 전해 주기를 바라면서, 내키지 않은 듯 미래에 내가 물어야 할 빚을 현재에서 조금씩 훔쳐 내 갚기 시작했다. 햇살 가득한 날 덧문을 닫는 것만큼이나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신에 의지하는 마팔다의 세상처럼 최악을 기대하는 것이 최악을 막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 밤 산책 중에 그가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내 선견지명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개달았다. 폭탄은 절대로 같은 곳에 떨어진다고 생각했건만, 예감은 완전히 빗나가서 내 은신처로 정확히 떨어졌다. (P207)


저녁 공기를 향해 몸을 기울인 그 순간, 우리에게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어깨가 닿은 채로 담배를 피우고 신선한 무화과를 먹으며 장엄한 도시 풍경을 훑던 그도 같은 생각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기억할 만한 뭔가를 하고 싶었다. (P213)


우리 사이에 그 어떤 비밀도 칸막이도 없었으면 했다. ‘내 육체가 곧 네 육체’라고 맹세할 때마다 우리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 주는 솔직함을 즐길 때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수치심의 자그만 불꽃이 다시 불붙는 것을 즐기고 있음은 알지 못했다. 어두운 게 낫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정확히 빛을 비춰 주었다. 외설이 소비되고 우리의 육체에 더 이상 교묘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아도 친밀함이 계속 남을 수 있을까?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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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다 불을 밝힌 거리의 텅 빈 미로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시인의 산클레멘테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인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간을 따라 움직이고 시간도 우리를 따라 움직이며 우리는 변화를 거듭하다가 똑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늙을 때까지 무엇 하나 배우지 못해도 이것만은 배운다. 이것이 시인의 가르침이라고 추측했다. 한 달 후든 언제든 로마를 다시 찾는다면 오늘 일이 완전히 다른 나에게 일어난 일인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또한 3년 전 식료품점 직원이 삼류 영화관에 가자고 제안했을 때 생겨난 내 바람은 지금부터 3개월 후에도 3년 전과 똑같이 충족되지 않은 듯 느껴질 것이다. 그는 왔다 갔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도 바뀌지 않았다. 세상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똑같지 않을 것이다. 꿈을 만드는 것과 낯선 추억만 남았다. (P249-250)


나는 올리버가 내 복숭아를 삼킨 날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끝까지 인정하지 못했다. 물론 감동을 받고 잘난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를 걸고 말하건대 네 몸의 세포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 만약 죽어야 한다면 내 몸 안에서 죽게 해 줘’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는 살짝 열어 놓은 발코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우리가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지 않을 때였다. 그는 들어가도 되는지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들어오지 말라고 할까?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를 맞이했고 더 이상 토라지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이불을 들어 그가 침대로 들어오게 했다. 매미 소리 사이에서 숫돌에 칼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일어나든지 계속 자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꿈을 꾸건 잠을 자건 똑같았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할 것이다. (P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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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담배를 끄려고 재떨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다가 내 손을 만졌다.

“앞으로 아주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버지는 어조를 바꿔서 입을 열었다. ‘다 얘기하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서로 모르는 척은 하지 말자구나.’ 하는 듯한 말투였다.

모호하게 말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시간이 올 거야. 적어도 나는 오기를 바란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올 거다. 자연은 교활하게도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찾아내거든. 이것만 기억해라. 난 항상 여기 있다. 지금은 네가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느낌이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대상이 내가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네가 한 일을 느껴 보려고 하려무나.”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막 그러려는 찰나였다.

“얘야.”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잔혹하게 대하지 마라. 밤에 잠 못 이루게 하는 자기 안으로 침잠은 끔찍하지. 타인이 너무 일찍 나를 잊는 것 또한 마찬가지야.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

나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할 수도 없었다. 놀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P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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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으로 가서 가족을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이유를 그나 나 자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올리버의 아내, 올리버의 아들, 올리버의 반려동물, 올리버의 서재, 책상, 책, 세계, 삶, 난 무엇을 기대했을까? 포옹, 악수, 형식적인 재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나중에’라는 말?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경각심이 일었다. 너무 사실적이고 갑작스럽고 공공연한 일이었다. 리허설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를 영원한 과거 속에 넣어 두었다. 과거완료 시제의 연인으로 정지시켜 놓고 얼음에 올려 기억과 좀약으로 가득 채웠다. 내 수많은 저녁의 망령과 잡담을 나누는 저주받은 장식품처럼, 가끔 그를 털어내고 다시 벽난로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는 더 이상 지상에도 삶에도 속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실감 나는 것은 서로가 택한 길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실감할 상실감의 정도였다.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정면으로 마주하면 아플 터였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향수가 아프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P291)


밖은 어둠이 빠르게 깔리고 있었다. 산꼭대기의 희미한 저녁놀과 어스레한 강이 있는 시골의 평화와 적막이 마음에 들었다. 올리버의 동네, 라고 생각했다. 반대편의 얼룩진 불빛이 강물에 어른거리는 모습은 고흐의 을 연상시켰다. 가을 분위기, 새로운 학기의 시작, 인디언 서머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인디언 서머의 해 질 녘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의 일과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 여름이 몇 달 남은 것 같은 착각이 합쳐져 해가 지자마자 저절로 닳아 버린다.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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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신을 내던진 그해 여름의 몇 주 동안 우리의 삶은 거의 닿지 않았지만 우리는 강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시간이 멈추고 하늘이 땅에 닿아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것이던 신성한 걸 내어 주는 그곳으로. 우리는 반대편을 보았다.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확인되었을 뿐. 우리는 한때 별을 찾았다. 나와 당신. 일생에 한 번만 주어지는 일이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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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은 어제이고 어제는 좀 더 이른 오늘 아침일 뿐이다. 아침이 오려면 까마득했다.

“나도 너와 같아. 나도 전부 다 기억해.”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당신이 전부 다 기억한다면, 정말로 나와 같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택시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삶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장난으로도 좋고 나중에 불현 듯 생각나서라도 좋아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를 돌아보고 얼굴을 보고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 (P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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