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눈부신 친구> 2018년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나폴리 4부작>의 첫 번째이다. 내용은 ‘릴라’와 ‘레누’의 60년에 걸친 삶과 우정이다. 2부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3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4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이다.
[프롤로그-흔적 지우기]
리노 어머니의 이름은 라파엘라 체룰로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들 그녀를 ‘리나’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라파엘라’라고도 ‘리나’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작스레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는 30년 전부터 내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말은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고 그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릴라는 말 그대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뿔뿔히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P17-18)
나는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릴라는 극단적이었다. 릴라는 흔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저 사라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불현 듯 화가 났다.
‘좋아. 이번엔 누가 이기는지 보자.’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최대한 상세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P20-21)
[유년기-돈 아킬레 이야기]
그날 저녁 돈 아킬레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층계를 난간을 따라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 릴라와 나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든 뜰과 따스한 봄날 저녁 공기에서 느껴지던 다채로운 향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릴라와 나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누가 더 용기 있는 아이인지를 입증하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든 학교 밖에서든 우리는 이 놀이에 푹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릴라가 어두운 맨홀 구멍 속으로 팔을 쑥 집어넣으면, 나도 그녀를 따라 내 팔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럴 때면 바퀴벌레가 살결 위를 스멀스멀 기어다니거나 쥐가 팔을 물어뜯을까봐 두려워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P25)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 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면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P29)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나는 학교 선생님과 교구 신부님의 친절한 태도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아이였는데도 말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여자들이 사내들보다 더 격렬하게 싸웠다.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면서 서로 상처를 입혔다. 타인에게 입히는 상처는 전염병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 눈에 보이질 않을 정도로 작은 생명체들이 밤마다 하수구나 제방에 버려진 고장 난 기차 칸에서, 악취나는 풀숲 사이에서, 두꺼비-도마뱀-파리-돌멩이와 먼지 속에서 기어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와 음식, 공기로 스며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작은 짐승들 때문에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목마른 개처럼 사나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동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심하게 오염됐다. 남자들은 분노하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되찾았지만 여자들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고요한 듯 보이지만 일단 화가 나면 멈추지 않고 분이 풀릴 때까지 갔다. (P40-41)
강렬한 고통을 느꼈지만 릴라와 싸워서 얻게 될 고통은 이보다 더 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두가지 고통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없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고통, 즉 인형을 잃어버려서 느끼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고통, 즉 릴라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었다. (P65)
그날 밤 나는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바다로 가야 했는데 가지 못했다. 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얻어맞았다. 그 과정에서 릴라와 나의 사고방식이 뒤바뀌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비가 와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나는 익숙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느껴본 그 거리감은 모든 걱정과 인간관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반면 릴라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후회했으며 바다를 포기하고 우리 동네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나는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P99)
[사춘기-구두 이야기]
1958년 12월 31일 릴라는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를 경험한다. 경계의 해체는 내 표현이 아니다.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를 극대화해서 릴라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릴라는 사람이나 사물을 구성하는 윤곽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1959년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옥상에 모인 그날 밤, 릴라는 생전 처음 경계의 해체를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때만 해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짓지 못했기에 혼자서만 간직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1980년 11월 어느 날 밤에 이르러서야, 옥상에서 경험했던 현상에 대해 내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둔 36세의 여자가 되어서도 때때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P113)
릴라는 자신이 경계의 해체라고 부르는 현상을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 느낌이 완전히 새로웠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자신이 다른 사람, 물건, 숫자, 글자 따위의 경계를 파괴하며 그 속으로 이전되는 듯한 느낌을 몇 번인가 경험한 적이 있다고 했다. ... 그리고 그해 정월 초하루 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미지의 존재가 세계의 윤곽을 잘게 부수어 그 끔찍한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했고 이 때문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P115)
나는 릴라가 시키는 대로 했고 그 후 지노는 내 앞에서 사라졌다.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속상하지도 않았다. 릴라와의 대화로 얻은 기쁨이 너무나 커서 시간 여유가 있는 여름방학 동안에는 릴라에게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에 만날 때도 그날 나눈 이야기 같은 대화가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순간만큼은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치는 바람에 머릿속에 있던 온갖 이미지며 단어들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 같았고 그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똑똑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P132)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마을은 마치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과거의 증오나 대립관계, 추악한 면으로 이뤄진 본연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나와 릴라가 공원에서 라틴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주변의 평범한 환경이 변하고 있었다. 분수-수풀-길가에 난 구멍까지도 변하고 있었다. 공기에는 늘상 아스팔트 냄새가 배어 있었고 커다란 압착 롤러가 달린 차가 연기를 내며 느린 속도로 아스팔트 위를 지나다녔다.
주변 환경의 색깔도 변하고 있었다. 카르멜라의 오빠 파스콸레는 기찻길 옆 나무를 베는 작업에 선발되었다. 어찌나 많은 나무를 잘라냈는지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며칠이고 계속됐다. 나무들은 부르르 떨다 신선한 나무 향과 풀 향을 내뿜었고 한숨과도 같은 긴 소리와 함께 공기를 가르면서 땅에 쓰러졌다. 파스콸레와 다른 일꾼들은 톱질을 하고, 도끼로 가지를 쪼개고, 땅속 흙냄새가 진동하는 뿌리를 뽑아냈다. 녹지가 사라지고 누르스름한 평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P139-140)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카라촐로 가 쪽으로 가는데 갈수록 바람은 거세지고 햇살은 강하게 내리쪼였다. 베수비오 화산은 파스텔 톤의 섬세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산등성이에는 도시의 건물들이 희끄무레한 조약돌 무더기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고 오보 성의 흙빛 단층은 그 조약돌 무더기를 가로지르며 뻗어 있었다. 아래로는 바다가 보였다.
아! 그때 바다의 모습이란..... 그날 바다는 심하게 요동쳤고 파도소리가 요란했다. 세찬 바람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옷은 몸에 착 달라붙었으며 머리카락이 흩날려 이마가 드러났다. 아버지와 나는 그 진경을 바라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바다 반대편 길에 자리를 잡았다. 파도가 하얀 계란거품을 이고 있는 시퍼런 금속관처럼 맹렬히 구러 들어와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는 길까지 밀려와서 수천 개의 빛나는 파편으로 부서졌다. 릴라가 없는 것이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거센 돌풍과 굉음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엄청난 광경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도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부분이 미처 손에 쥘 새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는 마치 내가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가서 길을 건너 바다의 빛나는 파편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빛과 소리가 충만했던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상상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나 자신도 새로워져서 말이다.
나는 거칠게 변화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노출되겠지만 분명 승리할 터였다. 나는, 나와 릴라는, 오직 함께 있을 때만 발휘할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색채와 소리와 사물과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취합해 이야기를 만들고 힘을 부여했을 터였다. (P177-178)
솔라라네 주점은 과거부터 고리대금을 하는 마피아 집단과 밀수꾼들의 소굴이었고 왕정복고주의자들의 자금 모집 수단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 돈 아킬레가 나치와 파시스트들의 스파이 노릇을 했고 스테파노는 그 애비가 검은색 가방에 모은 돈으로 식료품점을 키운 것이라고 했다. (P197)
7월의 마지막 열흘간,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훗날 인생을 살아가며 종종 느끼게 될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모든 일이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상을 치우는 일도, 동네에서 산책하는 일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가며 마론티 해변까지 걸어가는 일도, 햇볕 아래 누워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수영하다가 다시 해변으로 나와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아버지도, 동생들도, 어머니도, 매일같이 걷던 고향의 길도, 정원도 그립지 않았다.
유일한 그리움의 대상은 릴라였다. 내 편지에 답장 한 통 없는 릴라. 내가 없는 동안 릴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나는 두려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온, 살면서 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릴라의 삶의 일부분을 놓침으로써 내 삶의 밀도와 중요성까지도 희석될 것 같아 두려웠다.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나의 삶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P277-278)
니노는 릴라처럼 내면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이것은 축복이자 고통이었다. 이들은 만족하는 일이 없고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는 이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매 순간을 밝게 살았다.
그날밤 이후, 니노의 아버지는 가벼운 입맞춤만을 남겨놓고 나를 어둠으로 밀쳐낸 그의 아들에 대한 믿음직스러운 대안이자 내 편지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릴라의 대안이 되었다. 나는 나중에야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릴라와 니노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친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언제나 명확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틀렸다면? (P294)
릴라는 어떻게 해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언제나 무기를 몸에 지녔다. 하지만 실은 그녀도 두려웠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동네의 모든 사악한 기운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는 우울하게 덧붙였다. 선과 악은 혼재되어 있는 것이고 선은 악에 의해서, 악은 선에 의해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라고. 다시 생각해보면 마르첼로와 결혼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하지만 옳은 일은 쓰디쓴 법이고, 잘못된 일은 달콤한 법이다. 참으로 얄궂은 조합이 아닌가. (P302)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내 육체에 남은 그 기분 좋은 느낌 때문에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기억하는 한 그때까지 한 번도 육체적 쾌락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느낌을 알지 못했기에 막상 경험하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 나는 드디어 릴라에게 이야기를 해줄 만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번만은 그녀도 이보다 더 강렬한 체험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 너무나 커서 릴라에게 차마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예기치 않게 끝난 그해의 여름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P309~310)
그해 9월 릴라의 삶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이스키아 섬에서 니노와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버지의 입술과 손에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다. 내면에 남아 있는 달콤함과 끔찍함이 뒤섞인 감정 때문에 밤낮으로 울며 시간을 보낸 줄 알았다. 하지만 미처 내 감정에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전에, 불과 몇 시간만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니노의 목소리와 그의 아버지의 콧수염이 남긴 불쾌한 느낌을 옆에 제쳐두었다. 이스키아 섬은 희미해져서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은밀한 곳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릴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내 모든 마음을 내주었다. (P322)
그렇지만 우리 존재를 확고하게 해주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소중한 사람들의 ‘경계의 해체‘를 막아줄 시멘트 같은 돈의 이미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구체성과 일상적인 행동, 그리고 협상이었다.
사춘기 시절 부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세상에 둘도 없는 신발 같은 어린 시절의 공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귀족처럼 돈을 쓰고 싶어 하는 리노의 광폭한 욕구의 형태로 나타났다. 또 부는 환심을 얻으려고 텔레비전, 파스타, 반지를 사는 마르첼로에 의해서도 나타났고, 온갖 종류의 햄을 팔고 빨간색 오픈카를 가지고 있으며 4만 5천 리라쯤이야 푼돈이라는 듯이 돈을 쓰고 릴라의 그림을 액자에 넣고 치즈 같은 식료품 말고도 신발을 팔기 위해 자재비와 인건비에 투자하고 자신이야말로 동네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도래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스테파노에 의해서도 체현되었다. 부라는 것은 생활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다. 거기에는 영광도 화려함도 없었다. (P330)
“넌 아직도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거니, 레누? 우리는 지금 불타는 공 위를 날아가고 있어. 열기가 가라앉은 부분은 용암 위로 떠오르지. 사람들이 건물을 세우고 다리를 놓고 길을 내는 곳이 바로 그 부분이야. 그러다가는 가끔 베수비오 화산에서 용암이 흘러나오거나 지진이 나서 모든 것을 파괴하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미생물도 있고 전쟁도 있어. 또 모든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빈곤이 있지. 매초, 매 순간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너는 뭘하고 있지? 성령이 무엇인지 공부한느 종교학 수업? 내버려 둬. 세상을 창조한 것은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아닌 악마라고. 자, 이제 스테파노가 내게 선물한 이 진주 목걸이 좀 볼래?”
릴라는 대략 이런 말을 했던 것 같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때부터 종종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 내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성삼위일체에 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릴라는 다급하지만 상냥한 말투로 도저히 같은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없게 대답하고는 약혼 반지며 목걸이, 새 옷, 모자 같은 스테파노의 선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을 좋아했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선생님들에게 인정받았지만 릴라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모든 것이 퇴색되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는 책에서 읽은 내용과 머릿속에 가득 찬 이런저런 생각들을 접어두고 여전히 가난한 구두수선공 페르난도 아저씨의 집과 대비를 이루는 수많은 선물에 찬탄했다. 가끔 릴라의 옷이며 비싼 장신구들을 착용해보기도 했는데 릴라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했다. (P346-347)
우리는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함께 유년기를 보냈고, 함께 열다섯 살이 된 해를 보내고 있지만 갑작스럽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계의 큰 희생을 무릅쓰고 중고 시장에서 구하거나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마련해준 냄새나는 너덜너덜한 책을 구부정한 자세로 읽는 단정치 못하고 꾀죄죄한 안경잡이 소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릴라는 무대의 여주인공처럼 머리를 빗어 넘기고, 영화배우나 공주 같은 옷을 입고 스테파노의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했다.
나는 창문에서 릴라를 바라보면서, 과거의 그녀 모습이 망가져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편지에 쓴 아름다운 문장들과 금이 가고 구겨진 구리 냄비를 생각했다. 그녀와 나의 내면에서 파열음이 날 때마다 항상 그 이미지를 떠올렸다. 나는 그 어떤 형태의 틀도 릴라를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머지않아 그녀가 모든 것을 또다시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아니, 릴라가 그렇게 하길 바랐다. (P352)
느닷없이 릴라가 물었다.
“내가 잘못하는 걸까?”
“뭘?”
“결혼하는 것 말이야.”
“아직도 증인 문제를 생각하는 거야?”
“아니, 올리비에로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어. 왜 나를 집에 들여보내지 않은 걸까?”
“그거야 선생님은 성질이 고약한 노인네니까.”
욕조에서 반짝이는 물을 바라보면서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 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나는 조그맣게 웃어 보인 후 릴라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릴라는 팬티와 브래지어마저도 벗어버리고 말했다.
“자, 이제 나를 도와줘. 까닥하다 식에 늦겠다.”
릴라의 알몸을 처음 본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은 그때의 감정이 릴라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느낀 쾌락에 대한 수치심이었음을 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스테파노가 만지고, 범하고, 망가뜨리고, 임신시킬 수도 갓 열여섯 살이 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면서 흔들린 내 마음에 대한 민망함이었음을 안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감정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느껴지는 극도의 불편한 감정처럼 느껴졌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동요하지 않고서는 그 몸에서 손을 뗄 수 없는데, 막상 손을 떼면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릴라가 알게 될까봐 걱정되어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격렬한 감정을 확실히 정리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내 격렬한 감정적 동요는 그 감정의 원인을 제공한 이의 흔들림 없는 순수함을 해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내 감정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 방에 남아 신랑의 어깨 너머로 릴라의 딱딱해진 젖가슴과 날씬한, 허리, 팽팽한 둔부와 새까만 음모, 길쭉한 다리와 부드러운 무릎, 움푹 들어간 발목과 섬세한 발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그 어둡고 가난한 방 안의 허름한 가구에 둘러싸인 채 타는 듯 뜨거운 피가 흐르는 혈관과 요동치는 가슴을 안고 고르지 않은 물 묻은 바닥 위에 내내 서 있고 싶었다. (P416-417)
“너 천민이 뭔지 아니?”
“네, 선생님.”
천민이 무엇인지 그 순간 깨달았다. 수년 전 선생님이 내게 물었을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우리 모두가 천민이었다. 음식과 와인을 둘러싼 다툼, 더 빨리 음식을 제공받고 더 나은 서비스를 해달라고 벌이는 싸움, 웨이터들이 분주히 오가는 더러운 바닥, 시간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저속한 건배사야말로 비천한 것이었다. 포도주에 취해 금속공예품 상인의 음담패설을 진지하게 듣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아버지와 그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는 어머니도 천민이었다.
모두들 웃고 있었다. 릴라까지도. 그녀는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P440)